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356
90 누군가의 잿불 (4)
김명철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길드장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다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라는 얼굴로 김명철을 바라봤으니까. 어색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가라앉았다.
“하하하!”
그 침묵은 진연화의 경박스러운 웃음에 깨졌다. 테이블까지 퍽퍽 쳐 가며 웃은 진연화가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거 진심이에요오?”
그렇게 말하는 진연화의 얼굴에는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한심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김명철이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진연화가 잔뜩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소위 말해서 자알 나가는 길드인 우리가아아, 정부 쪽에 압박을 넣자아, 각성자를 더는 차별하지 못하도록?”
“맞습니다만…….”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요오?”
진연화의 말에 김명철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대로 가다가는…….”
“이대로 가다가는 정부가 우리까지 공격할지 모른다? 왜냐며느은, 우리도 각성자니까아. 알겠어요, 알겠는데에.”
피식 웃음을 흘린 진연화가 턱을 괸 채로 말했다.
“그거 조금 확대 해석 아닐까나?”
“확대 해석이 아닙니다. 실제로 정부는 계속해서 반 각성자 노선을 걷고 있고, 각성자와 비각성자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고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으응, 이제 못된 짓 멈춰! 이러면 정부가 들을 거라는 희망은 있고요오?”
진연화의 눈이 가라앉았다.
“우리 모두가 함께 힘을 합친다면, 정부에서도 우리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 그렇다고 쳐요. 그럼 그 일로 우리는 무얼 얻을 수 있는데요오?”
“예? 무얼 얻는다뇨. 당연히 각성자들을 지금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 취급하는 일도 줄어들 거고, 그로 인한 각성자들의 범죄도 줄겠죠. 조금 더 안전한 사회가 될 테고, 국민들 또한 각성자를 지금처럼 괴물로 취급하지 않겠죠.”
김명철의 말에 진연화가 물었다.
“응, 좋은 일 맞아요오. 하지마안 내 말은 그렇게 해서 길드에게 좋을 게 있냐는 거였어요오? 어차피 우리 길드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느은, 그런 ‘불합리’한 일, 생기지도 않는데에. 자꾸 ‘우리’라고 엮지만, 진짜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구요, 그거어.”
진연화는 콕 집어 말했다. 김명철이 말하는 ‘각성자’에 자신과 길드의 사람들은 포함이 되지 않는다고.
턱을 괸 진연화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아, 말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우리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거잖아요오? 만약 그 일이 잘 안 풀린다면, 타격을 입는 건 우리 길드가 될 텐데에.”
가만히 둘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화의 박연수 길드장도 입을 열었다.
“제 생각도 진연화 부길드장님과 동일합니다. 저희가 나설 일은 아닌 것 같네요.”
“하지만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나선단 말입니까? 힘이 있는 우리가 말해야…….”
“힘이요? 현재 정부의 방침에 불만이 있다, 그걸 말하는 순간 정부의 눈 밖에 날 겁니다. 김명철 길드장님도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만, 이 대한민국에서 나타나는 게이트의 공략권은 모두 정부의 소유예요. 함부로 정부의 일에 입을 나불거렸다가 공략권 분배에 불이익이라도 받는다면 길드 자체가 흔들려요.”
박연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연화가 말했다.
“응응, 맞지이이. 그렇게 되면 누가 책임질 건데요오?”
그녀의 시선이 김명철의 얼굴에 닿았다. 슬쩍 미소를 지은 진연화가 말했다.
“우리의 정의로운 김명철 길드장님이 어떻게든 해 주시려나아?”
“그건!”
자신을 대놓고 비꼬고 있음에도 김명철은 쉬이 그녀의 말에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확실히 정부에서 게이트 공략 건으로 불이익을 준다면, 길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거다.
“힘을 합친대도 그래, 대체 뭘 하고 싶으신 건데요. 압박이라니, 도대체 정부를 어떻게 우리가 압박할 수 있다고요?”
하오로비의 제니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김명철이 말했다.
“일단은 대화를 시도해 보는 거죠. 극단적이긴 하다만, 각성자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지 않으면 게이트를 공략하지 않겠다는 파업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우리 모두가 파업한다면, 그쪽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까요.”
김명철의 말에 뭇별의 최세도 길드장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기적적으로 저희 모두가 김명철 길드장의 말대로 의견을 모은다고 쳐도 그쪽에서 시간을 끈다면 답이 없습니다. ‘그래, 너희 파업해라. 하지만 너희가 안 하겠다고 한 거다?’ 정부가 그렇게 나온다면 저희도 답이 없습니다. 만약 그 상황에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져서 희생자라도 발생한다면 국민들은 누구의 편을 들까요?”
“설마 국민들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짓까지…….”
“할 겁니다. 김명철 길드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급 각성자들을 가차 없이 짓밟는 그런 정부니까.”
최세도의 말을 박연수가 받았다.
“우리 기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그런 짓을 하겠죠. 쿠데타라도 일으킬 생각이 아니라면, 이 나라에서 정부를 거스를 순 없어요.”
“으응, 뜻은 좋다만 길드 하나를 망쳐 버리기에는 충분하죠.”
이어지는 말들에 김명철의 어깨는 추욱 늘어졌다. 아무리 이들을 설득하려고 해도, 이들의 논리 자체를 깨부술 수가 없었다.
결국 김명철이 바라는 일은 ‘길드’에게는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우리가 침묵한다면, 상황은 점점 나빠질 겁니다. 결국 우리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될 거예요. 누군가는 지금 저들이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해 주어야만 한다고요.”
김명철은 마지막으로 간절히 그렇게 말해 보았지만, 반응은 여전히 뜨뜻미지근했다.
“음, 그렇다고 해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나서고 싶지는 않네요.”
“길드로서는 아무래도 길드의 이익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기도 하고…….”
“총알받이는 사양할게요.”
김명철의 말에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길드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정부의 반각성자 정책이 그들에게 손해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탄압하는 쪽은, 오로지 헌터가 되지 못한 각성자들뿐이었다. 그로 인해 헌터의 입지가 올라가고, 오히려 선망받는 직업이 됐다. 헌터가 되고 싶지 않았던 각성자도 그 탄압을 피해 어떻게든 헌터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장점도 있었고 말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거다.
‘내 일도 아닌데 나서기 싫다.’
이들을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자신의 일도 아닌데 막대한 희생을 각오하고 뛰어들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시도는 좋았지만, 김명철은 그 누구도 설득해 내지 못했다. 김명철을 지나치며 사람들은 저마다 김명철에게 응원의 말을 건넸다.
“이렇게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응원하겠습니다.”
“으응,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이 모두 나가고 진연화만이 남았다. 홀로 남은 진연화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김명철에게 말했다.
“그거, 하지 마세요.”
평상시의 우스꽝스러운 말투도 모두 사라진 다음이었다. 쉬이 들을 수 없는 진연화의 진지한 충고에 김명철은 웃으며 말했다.
“할 겁니다, 그래도.”
울 듯이 일그러진 그 미소에 진연화는 한숨을 푹 쉬었다. 김명철을 스쳐 지나가며 진연화가 말했다.
“나는 말렸어요오.”
* * *
나는 완성된 제어장치를 장지현에게 건넸다.
개조한 장치는 팔찌의 형태였다. 옷 안에 감출 수 있을 정도로 얇은 데다가 각종 기능이 내장되어 있었다. 혹시 장지현을 납치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 기본적으로 GPS 기능과 긴급 연락 기능을 넣어 놨달까.
이런 장치를 양산할 수만 있다면, 효과적으로 재능을 제어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가격이다.
이걸 만드는 데에 얼마가 들어갔는지. 가뜩이나 요즘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이걸 건네려니,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티팩트를 차고 나서야 장지현은 근 열흘 만에 최선용과 마주할 수 있었다. 두 모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엄마아아.”
“평생 너를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아니, 아니야.”
두 사람의 감동적인 재회의 뒤에, 나는 최선용에게 그동안 준비한 내용을 말해 두었다.
“미국에 도착하면 공항으로 사람이 마중 나와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이 소개해 주는 투자 관련 업체를 만나 일을 진행하시면 돼요. 음, 제법 믿음직한 사람일 겁니다.”
‘그’ 테이카, 아니, 그 오승우가 알아봐 준 데일 테니까 아마도 확실하겠지. 아무리 나라도 제약 회사 하나를 만드는 데에 자금을 모두 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외부의 투자를 조금 받기로 했다. 테이카와 오승우 쪽에서 일부, 그리고 민간 투자도 일부.
“민간 투자 업체는 제가 따로 선정해 두지 않았습니다. 직접 만나서 결정하시면 될 겁니다. 정 괜찮은 곳이 없다고 하시면 따로 알아봐 드릴 테지만…….”
“그 정도는 제가 해 볼게요.”
“예.”
그래도 남편의 사후 한 회사를 직접 이끌었던 여자다. 사람 보는 눈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
“무슨 일이 생기면 제 쪽으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
“네.”
내 말에 최선용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해 주고 나니, 이제 정말 끝이었다. 이제부터는 최선용이 직접 헤쳐 나가야만 했다.
미국에 회사를 세우는 것도, 그리고 약을 개발해 내는 것도 모두 그녀의 몫이다.
“오늘을 끝으로 저와 마주하는 일은 웬만해서는 없을 겁니다. 사실 다시는 만나지 않는 편이 좋죠. 그건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니까.”
내 말에 최선용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내가 급히 그녀를 미국으로 보내야 하는 이유도. 그러니 이해하고 있겠지.
이대로 나와 다시는 마주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걸. 내 말대로 나는 웬만해서는 최선용을 직접 만나러 가지 않을 생각이다.
웬만해서는 대리인을 보내는 선에서 일이 해결될 테니까.
내 말에 최선용이 말했다.
“그러니 별일이 없다면 오늘이 내가 당신을 보는 마지막이라는 뜻이네요.”
“예.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요.”
내 말에 최선용은 장지현에게 눈짓했다.
“뭔데, 나 빼고 해야 하는 말이?”
“지현아.”
“알았어.”
최선용의 채근에 입을 삐죽인 장지현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최선용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던 말, 빈말이었는데. 정말로 내게 해 줄 말이 있었던가. 숨을 크게 들이쉰 최선용이 내게 말했다.
“나 있잖아요, 사실 그 약을 좋은 일에 쓸 생각 없었어요. 사장님 생각만큼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요. 그냥 정부에 약물을 적당한 가격에 팔고,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데에나 그 약을 쓰라고 할 생각이었어요. 애초에 그런 생각으로 개발하려고 한 거고.”
최선용의 고백에 나는 놀랐다. 왜냐, 최선용이 지금 말한 약의 쓰임새는 정확히 설록진이 바라던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최선용의 말이 이어졌다.
“각성자들의 삶을 위해서도 그 약을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 전혀 안 했다는 거예요. 내 딸이 각성자가 되기 전까지는.”
내 얼굴을 보며 최선용이 민망하다는 듯 짧게 웃었다.
“그냥 말해 두고 싶었어요. 내 선의를 믿고 투자해 준 것 같아서, 그런데 그 선의라는 건 없었다고. 말해 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릴 것 같아서.”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사장님한테 투자한 이유, 사장님의 선의 때문이 맞아요.”
지금 이 세계, 이 시간대에 있는 선의가 아니라서 그렇지.
“지금 내가 한 말 들은 거예요? 그 선의가, 선의가 아니었다니까.”
“네. 들었고요, 생각했고요. 그래서 나온 결론이에요.”
나는 최선용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기 일이 아니라면,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아요. 그걸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문제죠. 내 일이 아닌데, 어떻게 내 일처럼 나섭니까.”
그게 이상한 게 아니다. 누구든 그럴 수 있다. 당장 나조차도 나 혼자 살기 바빴을 땐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내가 신경도 쓰지 않았던, 그 일이 내 일이 되었을 때.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일이 되었을 때. 그때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사람은 나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요?”
“내 일이니, 딱 내 일까지만 신경 쓰는 사람과 나 같은 사람들 전부를 신경 쓰는 사람이요. 사장님은 분명 후자예요. 지현 양뿐만 아니라, 지현 양과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 전부를 신경 쓰겠죠. 그것 또한 선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어…….”
최선용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몰랐잖아요, 제가 어떻게 행동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랬을 겁니다, 당신은요.”
제35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