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362
92 여기서 또 뵙네요 (2)
“안녕하십니까, 예, 안녕하십니까.”
김명철은 고개를 숙이며 인파 사이를 갈랐다. 그에게 향하는 시선에 김명철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엄청 지각했구만.’
오늘따라 이상한 일이 많이도 일어났다. 멀쩡하던 차는 타이어가 모두 펑크 나 있었고, 평소에 그를 도와주던 매니저는 갑자기 사고가 나서 못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급하게 다른 사람을 수소문해 차를 구해 가려는데, 신호가 어찌나 턱턱 걸리는지.
건널목을 건널 때마다 죄다 빨간 불에 걸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거기에 길은 어찌나 막히는지. 알고 보니 교통사고가 있었다나. 건축자재를 잔뜩 싣고 가던 트럭이 엎어져 도로가 아예 막혀버렸단다.
완전히 마비가 된 도로를 타고 약속 장소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김명철은 혀를 차고 차 밖으로 나왔다.
다른 약속이었더라면 포기했을 수도 있었지만, 이번 행사에는 빠질 수 없었다. 미리내당의 그 사람을 꼭 만나야 했으니.
“한 번만 도와주라.”
김명철의 전화에 ‘사적인 일에 길드원을 부려먹는다’라고 투덜거리면서도, 길드원은 금세 튀어왔다.
“막 게이트 공략을 끝내고 쉴까 했는데…….”
“미안, 미안.”
바람을 다루는 녀석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김명철은 이 행사장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3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장장 3시간이나 걸려서 겨우 도착했다.
덕분에 완전히 지각,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느긋하게 의원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계획은 틀어진 지 오래였다.
‘이렇게 된 거 행사가 끝난 다음을 노려야겠군.’
김명철은 대충 사방을 훑어보았다. 늘 그의 옆에서 저건 누구다, 이건 누구다 읊어 주던 사람이 없으니 영 모르는 세상에 홀로 던져진 아이처럼 불안해졌다.
“꼴이 왜 그래요요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김명철은 고개를 쓱 돌렸다.
언제나처럼 다 낡아빠진 후드티를 뒤집어쓴 진연화가 자신을 보며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연화가 자신의 꼴을 지적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김명철의 시선에서 그의 속마음을 읽은 듯, 진연화가 눈을 굴렸다.
“그야, 그쪽은 언제나 옷매무새에 신경을 썼으니 그렇지요오.”
확실히 진연화의 말대로 김명철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추레하게는 다니지 않았는데, 지금은 추레하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응, 그래보여요오.”
진연화는 역시 진연화였다. 이런 파티에서도 저 낡아빠진 후드티를 고집하다니, 정말이지 대단하다고나 할까. 김명철은 그녀의 옆에 섰다.
“왜 여기로 와요?”
“어차피 혼자 있던데, 같이 좀 있읍시다. 내가 사정상 혼자 와서 영 외롭거든.”
“참나.”
진연화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김명철더러 썩 꺼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물었다.
“여기에는 왜 온 거예요?”
“저번에 말했잖습니까. 이 세상을 바꿀 생각이라고.”
“흐응, 그래서 ‘악법’을 만든 사람들부터 깨부수겠다?”
“아무래도 이 방법이 제일 빠른 것 같아서 말이죠.”
“이 사람들이 그런 법을 만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잖아요오. 당신이 말한다고 들을까나? 차라리 다른 쪽에 가는 게 더 가능성이 크지 않았을까요?”
진연화의 말에 김명철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리우스라는 길드를 운영하고 있지만, 진연화는 각성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각성자 협회에는 힘이 없어요. 각성자 인권을 챙긴다는 사람들도 그렇지. 그 사람들한테 가봤자 바뀌는 건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무시한다?”
“무시한다기보다는, 괜한 짐을 얹어주고 싶지가 않은 거지. 애초에 그 사람들이 만든 법도 아니잖습니까.”
눈을 굴린 김명철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은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어요. 왜냐, 법이 그 사람들더러 위험하댔으니까. 화를 내면 낼수록 그 사람들에게는 낙인이 찍힐 겁니다. 위험분자라는 낙인이요.”
그리고 그 낙인이 찍히는 순간, 끝이다.
“뉴스를 봤습니까? 각성자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어떻게 보도하는지는 알아요? 나는 몰랐어요. 관심이 없었지. 왜냐, 나는 평생 범죄를 저지를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헌터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빴으니까. 그래서 몰랐어요. 그러다가 저번부터 열심히 봤어요. 계속해서 봤더니, 문제가 보이더라고. 그 문제가 뭐였는지 알아요?”
김명철의 말에 진연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김명철이 말을 이었다.
“그 누구도 그 범죄가 일어난 원인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범죄를 저지른 개인이 나빴다. 아, 또 사이코패스 각성자가 나타났대. 그걸로 끝이에요.”
그 누구도 이게 사회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각성자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스템이 아닌 개인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 사람이 어째서 범죄를 저질러야만 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냥 개인적인 일로 치부를 하는 거지. 그냥 저 사람이 특이하고 이상한 거다. 문제를 일으킨 개인에게 문제가 있는 거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뉴스들을 전부 훑고 나니 그런 결론이 나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각성자들의 범죄가 보도될 때마다, 각성자들은 위험하다 떠들어대기 바쁜 시사프로그램에서는 단 한 번도 그들이 왜 범죄를 저질러야만 했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각성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만 반복적으로 떠들어댈 뿐.
하지만 김명철은 안다.
그 사람들을 벼랑 끝에 내몬 것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샴페인을 들이키고 있는 눈앞의 인간들이라는 걸.
“범죄는 나쁘지. 범죄를 저지른 놈들도. 그래도 이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단 말입니다. 깔때기로 개미를 몰아넣고, 깔때기 끝으로 왜 개미가 나오냐고 화를 낼 순 없는 거라고.”
“그래서 그 깔때기를 만든 사람들한테 따질 생각이에요? 왜 거지 같은 깔때기를 만들었냐고?”
“뭐어.”
김명철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쪽이 조금 더 확실하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들이박는 게 내 성격상 잘 맞는 일이기도 하고요.”
김명철은 ‘붉은개’다. 머리 복잡하게 이런저런 수를 쓸 생각은 없다. 일단 한 번 들이박아 보는 거다.
“그러니까 오늘 설록진 의원, 그 사람을 만나서 한 번 얘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워낙 바빠서 그동안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김명철의 옆을 지나가던 웨이터 한 명이 그와 부딪쳤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이 와르르 김명철에게로 쏟아졌다.
요란하게 떨어지는 와인잔과 쟁반의 쨍그랑거리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김명철 쪽으로 쏠렸다. 웨이터는 그 즉시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큽!”
와인을 뒤집어쓴 김명철을 본 진연화는 웃음을 겨우 참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김명철은 이마에서부터 뚝뚝 흐르는 와인을 손등으로 훔치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한참 멋진 연설을 하고 있는데 이런 난리라니. 주머니를 뒤적거린 진연화가 김명철을 보며 말했다.
“아, 미안. 손수건이라도 주고 싶은데 안경 닦이만 들고 다녀서요오.”
“기대도 안 했네요.”
김명철은 아직도 제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웨이터를 잡아 일으켰다.
“난 괜찮으니까, 그쪽도 일 봐요. 하아.”
어깨를 으쓱인 김명철은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진연화는 여전히 웃음을 참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 들어와 얼굴에 묻은 와인을 닦아내던 김명철이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잠깐.’
능력을 각성한 뒤로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부딪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명철의 재능은 그 누구의 접근도 허투루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감각’을 속인 게 그동안 몇이나 있지?
“아.”
조금 전 그 웨이터, 정체가 뭐지?
* * *
“잘했어, 재호야.”
[이걸로 돼? 배라도 쑤셨어야 하는 거 아니야?]“……아니야.”
미워 죽겠어도 일단은 ‘우리 편’이라는 걸 잊지 말자고.
하지만 정말이지, 망할 놈의 아저씨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여기에 와버리다니 말이다.
하아, 속으로 한숨을 내뱉은 내가 한서현에게 물었다.
“설록진은?”
[거의 다 도착했어요.]고민할 시간도 얼마없다.
어떤 개지랄로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모든 걸 눈치채지 못한 김명철과 달리 그쪽은 중간부터 내 방해를 알아챈 것 같았는데도, 이곳까지 왔다. 아니, 오히려 내 방해를 알아챘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일 수도.
나를 이토록 막는 이유가 뭔지, 정말이지 궁금한데? 설록진이라면 그런 말을 하면서 괴상한 미소를 짓고 있겠지.
‘정말이지…….’
나는 다리를 달달 떨었다.
정말이지, 이 방법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좋아, 어쩔 수 없지.
“간다, B안으로.”
[그냥 그걸 A안으로 하자니까요.]“어, 어쨌거나! 하자고. 그거.”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게 다 내 업보다, 업보.
* * *
진연화는 슬쩍 제 옆에 선 보디 가드를 바라보았다.
“흐응.”
이혜원이 아닌 사람들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를 잃었다는 생각에 가끔 심장이 아릿해지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진연화는 상념을 애써 털어냈다. 그녀의 목표는 겨우 그런 감정에 흐려질 수 없었으니까.
시리우스를 최고의 자리에 올릴 거다.
그리고 그 순간, 아버지의 복수를 할 거다.
그녀의 목표는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래도 제법…….’
김명철의 반짝이던 눈빛을 떠올린 진연화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영 현실성은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서 좋았다.
꼭 그녀의 아버지가 생각나는 말이었으니까.
냉정하고 제 이득에만 신경을 썼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그녀의 아버지였던 진강훈은 제법 이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나는 있잖아,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
본인조차 진용석의 과한 기대에 제대로 숨도 못 쉬었으면서, 진강훈은 늘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
‘아버지께서는 최고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하셨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최고보다 멋진 건 최선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넌 늘 최선을 다하렴, 연화야.’
진강훈은 그렇게 말하며 진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의 아버지의 손에서 느껴졌던 온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 말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사람을 돕지는 않더라도, 그 사람을 지켜볼 생각이 든 것은.
“왜 이렇게 안 나와. 간 김에 속이라도 비우고 오나.”
진연화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사탕을 아그작 씹었다.
“부길드장님!”
보디가드가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은 것과 사방의 유리가 터져나간 것은 불과 진연화가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
흩날리는 유리 조각을 보며 진연화가 눈을 감았다.
제36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