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363
92 여기서 또 뵙네요 (3)
행사장 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스며든 검은 모래가 사람들을 덮쳤다.
“이게 무슨…….”
멍하니 중얼거리는 진연화를 보디가드가 잡아끌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합니다.”
그 말에 진연화는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얼굴에 서렸던 공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디가드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진연화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누가 이런 짓을…….’
옥션 때와는 달리 이 행사에는 나쁜 놈들이 노릴 만한 물건이 없었다. 오로지 미리내당의 사람들을 공격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이 행사를 굳이 망칠 이유가 없다는 거다.
‘누구지?’
보디가드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진연화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조직이 없었다. 어렴풋이 이런 짓을 저지를 만한 놈들이 하나 떠오르긴 했지만, ‘그놈’들은 현재 중국에 있다.
아마도.
혹여 한국에 돌아왔다고 한들, 갑자기 이곳을 습격할 만큼 정신이 나간 것 같지는…….
‘아니, 나갔으려나.’
타이밍 좋게 건물의 불마저 나가버렸다.
“꺄아악!”
차단된 시야는 한층 더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아갔다.
한낮이었지만, 건물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갑작스럽게 빛이 사라지자 한순간에 암흑이 내려앉았다. 진연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깨진 유리창 틈으로 내려앉은 빛 때문에, 시야가 전부 차단되지는 않았다.
“누, 누구야!”
“밀지 마!”
“아,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광원이 전부 날아간 것도 아니니, 조금만 기다리면 눈이 어둠에 적응해 다시 앞을 보게 될 수 있을 텐데도 사람들은 완전히 패닉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유야 간단하다.
쓰윽, 자신의 발밑을 스쳐 지나가는 모래에 진연화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당장, 행사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이 모래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그러리란 보장이 없었다.
이러다가 한순간에 모두를 덮쳐 죽일 계획일지도.
웬만한 일에는 거칠게 뛰지 않는 그녀의 심장 또한 미친 듯이 뛰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랴.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겠다고 서로를 밀치고, 눈에 보이는 문을 향해 달려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고상함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저러다가 큰 사고가 날 텐데.’
좁은 공간에 한 번에 몰린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이쪽입니다!”
이 혼란 속 누군가 외쳤다. 깨끗하고 힘 있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테이블 위에 올라선 웨이터가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이쪽으로 오시죠!”
그가 가리킨 곳에는 출구가 있었다.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출구에 사람들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불빛에 이끌리는 날파리들처럼, 모두가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연화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그곳으로 뛰쳐나가듯이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는 뛰고, 누군가는 다른 이를 밀치면서까지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오직 저 빛나는 출구만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도 되는 듯이.
모두가 출구를 향해 빠져나가는 도중에도 진연화는 어둑어둑한 안쪽으로 눈을 돌렸다.
김명철. 그 사람은 아직 저 안에 있다. 웨이터가 쏟은 와인을 씻겠다며 들어간 그 바보 같은 남자는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나 알까.
대단한 헌터니, 여기서 어떻게 되진 않겠지만…….
“나가셔야 합니다.”
자신의 귀를 울리는 그 말에도 진연화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았다.
‘제발.’
제발 나와, 거기에서.
그 기도가 통한 것일까. 화장실에서 바보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하아.”
진연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여기에서 죽을 만큼 변변찮은 인간은 아니지.’
그제야 안심이 된 진연화는 보디가드의 지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바깥은 밝았다. 진연화는 눈을 찌르는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사람들은 이 지긋지긋한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듯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검은 모래에 둘러싸인 건물은 척 보기에도 상당히 불안정해 보였다. 안전한 곳까지 걸음을 옮긴 진연화는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응, 이쪽으로 사람 좀 보내줘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으니까.”
그렇게 통화를 하는 그녀의 곁으로 누군가 스쳐 지나갔다. 건물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방향에 진연화의 눈길이 쏠렸다.
설록진 의원?
그의 모습은 다른 이들 사이에서 유난히 도드라졌다. 단순히 다른 이들이 뛰쳐나온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의 태도에는 다른 이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다.
여유.
그는 느긋했다.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듯이. 아니, 오히려 그는 이 일을 반기는 것 같았다.
‘웃었어?’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보디가드가 그녀를 재빨리 주차되어 있던 차로 잡아끌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잠깐만.”
진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설록진 의원님!”
그녀의 부름에 설록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진연화의 세상이, 이곳에 있던 이들의 세상이 멎어버렸다.
* * *
“미친.”
나는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 입을 벌렸다.
“미친 자식.”
설록진은 모두를 멈춰버렸다. 문자 그대로다. 설록진의 시야에 닿는 모두가 마치 누군가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멈춰져 있었다. 설록진은 그 사이를 지나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곳으로 온다.
이건, 위험하다.
머릿속에 빨간색 불이 켜졌다.
머릿속에 세워두었던 많은 계획은 설록진의 돌발행동 하나에 모두 휴짓조각이 되어버렸다. 설마하니 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제 능력을 드러낼 줄이야.
미친, 미친!
반대쪽 건물 옥상에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던 나는 재빨리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 외쳤다.
“나가.”
[예?]“최대한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보스!]나는 귓가를 울리는 한서현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 발 사이에 있는 검은 그림자.
“김재호, 너도 나와.”
그림자는 조용했지만, 나는 안다. 나는 그림자를 향해 발을 굴렀다.
“여기에 있어도 위험하다니까. 어서 나와.”
그림자에서 슬쩍 고개를 내민 김재호가 입을 툭 내밀고 말했다.
“싫은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내 으름장에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김재호는 축 어깨를 늘어트렸다. 나는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툭, 내 등을 친 김재호가 다시 어디론가 녹아들어 사라졌다.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설마 저기로 들어가려는 건 아니죠?]“가야지, 저기에서 설록진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보스!]적어도 김명철만은 구해야 한다. 진연화도. 미리내당의 의원들이야 알 바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두 사람은 내 계획에도 필요했다.
나는 미리 설치해둔 케이블을 타고 재빨리 건물을 가로질렀다. 바람에 내 코트가 펄럭거렸다.
“설록진도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거야.”
저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의 수는 몇백은 되었다. 제아무리 설록진이 대단한 정신계 각성자라고 해도, 그들 모두를 ‘멈춰’놓는 것은 꽤나 부담이 되는 일이다.
[저 사람들을 전부 죽일 생각이라면요?]“그랬다면 이미 죽였겠지. 저렇게 멈춰두는 게 아니라.”
죽일 생각이었다면, 굳이 멈춰놓을 필요도 없이 바로 죽였을 거다. 왜냐, 그편이 편하니까.
“저렇게 멈춰놨다는 건, 적어도 당장은 저 사람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뜻이야.”
저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설록진에게는 필요한 ‘말’들이다. 진연화까지도. 언젠가 시리우스를 박살 낼 생각이긴 해도, 제 세뇌로 진연화를 죽일 생각은 없을 거다.
그건 너무 시시하니까.
설록진에게는 나름의 계획이 있겠지. 그 계획이 틀어지는 걸 막기 위해 저들을 멈춰놓은 거다.
그때, 검은 모래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설록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현아.”
[모래는 제가 아니니까 상관없잖아요. 제가 막는 동안 빨리 그 인간을 두들겨 패든, 설득하든.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빠져나가요.]설록진은 제 앞을 가로막은 모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사이 나는 깨진 유리창을 통해 안으로 진입했다. 건물 안에는 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김명철은 그들을 다독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제 길드원들이 오는 중입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여러분만큼은 제가 지켜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그래도 길드의 길드장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저놈의 자신감은 감탄이 나올 만했지만, 지금만큼은 얄미웠다. 설록진을 피해 숨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여기에 바로 나 있소’하고 광고하고 있는 꼴이라니.
나는 재빨리 그를 불렀다.
“김명철 길드장.”
그 순간, 한서현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이런, 빌어먹을…….]설록진의 욕설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보스, 미안, 미안해요.]“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냐고 말하려 할 때였다. 내 시야에 황금빛 모래가 반짝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모래, ‘지배력’으로 움직이는 거였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황금빛 모래가 온 사방에 가득했다. 마치 새하얀 도화지가 물감에 물드는 것처럼, 그림자 사이에 숨어 있던 검은 모래들은 순식간에 황금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한서현이 모래를 역소환하려고 했지만, 이미 설록진에게 빼앗겨 버린 모래들은 이곳에 남았다.
설록진의 앞을 가로막았던 모래는, 설록진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주었다. 마치 레드카펫처럼 그의 앞에 깔린 황금빛 모랫길을 따라 설록진이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빛을 등진 설록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또 뵙네요.”
그렇게 말을 던진 설록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우리 반말하기로 했지.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게 맞겠네. 여기서 또 보네, 이신아.”
그 말에 등 뒤로 소름이 쫙 올라왔다.
“어떻게…….”
순간 나는 내 얼굴을 더듬었다. 내 얼굴 위로 만져지는 가면에 안도감이 드는 것도 잠시, 설록진은 분명 내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
“너무 뻔하지, 나를 막으려 이런 짓을 벌이는 사람은 너밖에 없거든.”
나는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이번 일은 조금 의외긴 해. 나는 이곳에서 아무 짓도 안 할 ‘계획’이었거든.”
나는 설록진에게 검을 던졌다. 하지만 모래가 내 검을 튕겨냈다. 설록진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네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해야겠는데.”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여기에는 왜 왔어? 뭘 위해서?”
설록진의 질문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이 상황에 김명철을 향해 달려가는 건, 김명철에게 과녁을 그려주는 것과 똑같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김명철을 두고 나가는 건? 그것 또한 설록진에게 김명철을 던져 주는 셈이나 다름없다.
내 망설임 사이로 설록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네가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나도 알고 있거든. 모를 수가 없지. 요즘 나를 굉장히 거슬리게 하던 문제라서 말이야.”
설록진의 말에 나는 뒤로 시선을 돌렸다.
김명철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미 늦었다. 설록진이 이 건물 안으로 들어선 순간, 이미 내 계획은 틀어져 버렸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아,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이렇게 된 거 작전 C로 갈 수밖에.”
━C라는 작전도 있었나?
레이의 말에 내가 말했다.
“C이이이이발!!”
━그, 그건 그냥 욕이잖냐?
제36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