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48
18 인간임을 포기한 (2)
‘어쩔 수 없잖습니까! 여기에 맡길 수 있는 나이 제한이 12살이었다고요!’
나도 한서현을 아이로 속이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안으로 잠입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내 재능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도 하지 않았을 거다.
다행히 나에게는 그 어떤 거짓도 진실로 속이게 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정말 열두 살이라는 말입니까?”
남자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예에, 진짜라니까요. 아무래도 각성자라서 그런지 훅훅 큰 것 같습니다.”
나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천천히 내 마력을 남자의 몸에 스며들게 했다.
설득이나, 대화도 필요 없이 끝내 버리는 설록진의 세뇌와는 다르다. 내 거짓말은 제법 섬세함이 필요했다. 특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걸 믿게 해야 할 땐 더더욱.
다행히 이 남자의 자물쇠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적당히 남자의 눈을 흐리고 조작된 서류를 내밀자 남자는 금세 내 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납득했다.
몸을 최대한 구부리고 있는 한서현이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깨를 접는 것도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만 더 참으라는 뜻으로 한서현의 종아리를 툭툭 건드렸다.
━방금 저 아이가 영 불손한 눈으로 널 본 것 같다만.
‘예, 시간을 더 끌었다간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니 빨리 끝내야겠습니다.’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영 안 된다고 하시면 다른 보육원을 알아보겠습니다. 제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이곳에는 늘 아이들이 부족하다. 의심스럽든, 어쨌든. ‘아이’의 문제라면 이렇게 튕길 일이 없었다. 문제는 내 쪽이다. 보호자의 존재가 껄끄러운 거다. 그럼 그 껄끄러운 존재를 없애 주면 그만이지.
“제가 곧 북부 쪽으로 발령을 가거든요.”
“아, 군인이셨습니까?”
북부 발령은 군인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5년간은 돌아오지 못할 임무니까.
내 말에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지막으로 걸리던 부분까지 완벽하게 치워 주었다. 이제 네놈이 할 말은 하나뿐이지.
“아이고, 나라를 위해 애를 써 주시는 분인데. 그럼 아이를 맡아 드려야 하고말고요.”
역시 그럼 그렇지.
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을 애써 억누르며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나는 남자가 건넨 서류를 보고 지체 없이 사인했다. 무슨 조항이 있는지는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남자도 나도 이 서류를 다시 보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아이가 지낼 곳을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남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시지요.”
━허어, 조금의 저어함도 없구나.
‘당연하죠. 그렇게 허술하게 해 놓았을 리 없잖습니까.’
이 아래에서 인체 개조는 물론, 인신매매가 이뤄지고 있다는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을 거다.
적어도 사람들이 오가는 이 봄날 교육원에서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이곳을 살피려는 건, 레이의 눈으로 봤을 때 걸리는 아티팩트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흐음, 저쪽에 사람들의 출입을 감시하는 용도의 아티팩트가 있구나. 저쪽에도.
과연 레이의 눈에는 모든 게 다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레이가 일러 주는 아티팩트의 위치를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했다.
보육원에는 아파 보이는 아이들 서넛이 힘없이 앉아 있었다.
━이거 이상하군. 병에 걸린 아이들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확실히 이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은 수도 너무 적고, 건강 상태도 지나칠 정도로 나빴다.
‘그야 여긴 연막이니까.’
적당히 좋은 시설, 적당히 불쌍해 보이는 아이들을 내세우고 진정으로 아이들을 아끼는 보육 시설이네 뭐네 면피를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니까.
입이 썼다.
이곳을 치면 저 아이들은 갈 데가 없어질 테니. 하지만 이곳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시설을 살핀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네, 그럼요.”
남자는 우리를 배려하는 척 자리를 비워 주었다.
“저 사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어떻게 날 보고 열두 살이라고 할 수가 있어?”
한서현은 어이가 없단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12살로 속이느라 입힌 멜빵바지를 불만스럽게 노려본 한서현이 나에게 말했다.
“진짜 짜증 나는데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이 또 되니까 더 짜증 나요.”
“며칠만 버텨라.”
“젠장, 내가 열두 살 때도 이딴 옷은 안 입었는데.”
“욕은 그만하고.”
한서현은 내 말에 불만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며칠 동안은 열두 살로 살아야 했으니. 나는 한서현에게 말했다.
“위험하면 언제든지 날 불러, 알겠지? 억지로 버티려고는 하지 말고.”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한서현의 안전이었다. 만약 한서현이 위험에 처한다면 나는 모든 작전을 폐기하고 한서현을 빼낼 거다. 내 의지가 전해졌는지 한서현 또한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육원 관계자를 따라가는 한서현의 모습을 보며 레이가 말했다.
━정말 저걸 열두 살로 믿는다니. 어이가 없군.
크흠. 나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 * *
한서현을 안으로 잠입시킨 지 사흘째. 한서현이 보낸 쥐돌이의 다리에는 편지가 매어져 있었다. 전서구(傳書鳩)가 아니라 전서서(傳書鼠)라고 해야 하나. 영 어감이 구리군. 어쨌거나 감시자들 몰래 편지를 전해 준 쥐돌이의 활약 덕분에 우리는 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첫째 날, 한서현이 전한 보육원 안의 풍경은 평범했다. 아이들이 전부 기운이 없어 보이고 침울하다는 점만 빼면. 근데 원래 보육원에서 다들 힘차게 지내는 것도 어렵긴 하다. 보육원 안에 들어간 한서현은 아이들에게 말을 건네 보았지만, 덩치가 큰 한서현을 다들 피했다고 한다. 진짜 열두 살이냐는 소리만 서른 번째 들었다며, 나를 죽여 버리고 싶다고 썼다. 흠. 기운차 보이니 다행이었다.
둘째 날, 한서현은 여전히 아이들과 말을 섞으려 했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애가 없다고 했다. 결국 한서현은 아이들과 소통하는 걸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이 보육원을 조사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한서현은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셋째 날, 오늘. 한서현은 추가로 정보를 더 얻어 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지하에는 쥐돌이가 들어갈 만한 통로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보통 지하에 건물을 세울 때 으레 만들기 마련인 환풍구조차 없다고. 더는 조사가 무의미할 것 같다는 말을 보내왔다.
좋아, 우리가 직접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나.
“침입은 오늘 밤. 그렇게 전해.”
내 말을 들은 쥐돌이는 알았다는 듯이 찍찍거렸다.
* * *
그날 밤, 감시자들이 모두 사라졌을 무렵. 나는 야심한 밤을 틈타 담을 넘었다. 김재호 또한 훌쩍 내 뒤를 따라왔다.
따로 훈련한 적은 없지만, 애초에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사기인 놈이다. 그 신체 능력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겪었을지를 생각하면 전혀 부럽지 않지만.
김재호의 몸은 보기만 해도 눈이 찌푸려지는 얼룩덜룩한 흉터로 덮여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가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수술 자국이었다. 마치 심장이라도 이식한 모양새였다.
과거에도 그 수술 자국이 뭔지 궁금해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 김재호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거나, 아니면 말하기 싫은 거겠지. 이번 생에서도 나는 그 상처에 대해 굳이 묻지는 않을 생각이다.
내가 알기로 김재호는 이곳에서 탄생한 0.5세대다.
0세대는 성공작 없이 모두가 실패, 폐기되었다고 들었고, 0.5세대는 극히 일부만이 성공작으로 남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0.5세대도 영 다루기 어려운 것들이 많아 불량품이라고 불렸다지. 김재호도 원래는 불량품으로 삶을 마감할 예정이었다. 설록진이 저놈이 거두기 전까지는 말이지.
어쨌거나 0.5세대의 실패를 딛고 1세대부터는 정신 개조에도 신경을 썼다고 들었다. 주인의 말을 확실하게 알아듣도록 말이다.
지금 시장에 풀리는 건 0.5세대. 그러니 저 안에는 1세대 아이들이 있겠지.
김재호의 친구들이 죽어 가며 만들어 준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개조 인간들 말이다.
그곳에 들어가기 전, 나는 김재호에게 반지를 건넸다.
“이게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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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의 반지 / A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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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세서리ㆍ보조
흡혈왕의 강렬한 의지를 담은 반지.
주변의 혈액을 흡수하여 착용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마력과 체력의 회복을 돕는다.
“그 반지는 아무래도 너한테 잘 맞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내가 쓸까도 생각해 봤는데, 나에게는 마력, 체력 회복 수단이 따로 있으니까. 당장은 김재호가 쓰는 게 맞았다.
내가 준 반지를 김재호는 조심스럽게 왼손 중지에 꼈다. 하필이면 중지냐.
담을 넘은 우리는 조심스레 안쪽으로 침입했다. 아티팩트를 무력화하는 건 내 몫이었다.
무려 B급의 아티팩트를 창조해 낸 나에게 이 정도 아티팩트는 껌……까지는 아니고, 레이의 도움을 받아 겨우 무력화할 수 있었다. 주변에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따고 들어간 곳에서 우리는 한서현을 만났다. 한서현은 잔뜩 지쳐 보였다.
“왜 이렇게 늦어요!”
“눈에 힘 풀어.”
“젠장,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느라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미안하다, 이런 걸 맡겨서.”
나는 시선을 돌려 한서현의 뒤에 누워 있는 아이들을 살폈다.
여기에 있는 아이의 수는 총 넷. 척 보고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있는 아이들은 실험에도 쓸 수 없는 쭉정이다. 아무런 재능도 없고, 아무런 잠재력도 없는 아이들. 거기에 체력도 약하고 몸에는 병을 몇 개는 달고 있는 녀석들.
보육원은 이런 아이들을 면피로 세웠을 것이다.
“모두 저녁을 먹고 잠들었어요.”
덩치가 큰 데다가 각성자인 한서현에게는 약이 통하지 않았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아니었다. 아이들은 마치 혼절한 것처럼 흔들어도 말을 걸어 봐도 깨어나지 않았다.
“얘네는 제가 챙길게요.”
한서현은 한숨을 쉬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 녀석은 아직 마음이 여리다.
“그래. 꼭 찾아 줄 테니까 기다려.”
“마음 같아서는 나도 가고 싶은데.”
“약속했잖아.”
내 말에 한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책장을 밀면 그 안에 계단이 나와요.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는 거기예요.”
“고맙다.”
“지하에는 뭐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환풍구도 없어서 제대로 확인 못 했으니까…….”
고개를 숙인 한서현이 내게 말했다.
“조심해요, 알겠죠?”
“우리 걱정은 말고 여기에 있는 애들이나 잘 챙겨서 차에 가 있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서현은 바닥에 누워 있던 아이들을 등에 업었다. 한서현이 이곳을 빠져나가는 걸 본 나는 김재호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우리는 이 안으로 들어가 볼까.”
“…….”
김재호는 말없이 책장을 밀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 김재호의 몸에서는 위험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 김재호가 말했다.
“여기 기억나.”
“넌 여기에 있었으니까.”
김재호가 말했다.
“여기에 있는 건 다 죽여도 된다고 했지?”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리고 나 또한 여기에 있는 인간임을 포기한 작자들을 살려 두고 싶지 않았다.
━정보를 얻으려면 그래도 몇 명쯤은 살려 두는 게 좋지 않겠냐?
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여기에서 얻어 낼 정보는 이미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곳을 직접 디자인하고 운영한 쓰레기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일하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얻어 낼 정보는 없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발을 옮겼다.
인간임을 포기한 쓰레기들을 치워 버리기 위해서.
제4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