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56
21 적사회의 괴물 (1)
맑고 높은 가을 아래. 아름다운 가로수길을 따라 걷다 보면 파란 차양이 나온다. 젤라또를 팔고 있는 가게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탈리아 간식이었다. 그 간식 가게 앞에 머리를 뒤로 땋아서 넘긴 소녀 한 명이 멈추어 섰다.
“딸기 맛으로 하나 주세요.”
“저도 같은 것으로 하나 부탁드립니다.”
여자, 쑤어하오주는 옆에 등장한 남자를 슬쩍 바라보았다.
제법 잘생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남상인 남자였지만, 가로로 길게 뻗은 눈이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남자였다.
남자는 쑤어하오주를 향해 슬쩍 미소를 날렸다. 그 미소를 본 쑤어하오주는 생각했다.
‘여우같이 생겼군.’
시원스럽게 뻗은 눈이 슬쩍 접히자 꼭 여우 같아 보였다.
관심도 잠시. 쑤어하오주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뗐다. 중요한 건 젤라또였으니까.
“원래 바닐라 맛을 가장 좋아하지 않아요?”
남자의 말에 쑤어하오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바닐라에 견과류 부숴서 먹는 걸 제일 좋아했던 것 같은데.”
그 말이 그저 던지는 말이라면, 거짓이었더라면 쑤어하오주는 남자를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진실이었기에, 쑤어하오주는 남자를 향해 눈을 돌렸다.
“너 나 알아?”
“그럼요, 아주 잘 알죠.”
무어라 말하려던 사이 젤라또가 나왔다. 그녀는 딸기 맛 젤라또를 받아 들고 아까의 그 수상한 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과 똑같은 젤라또를 손에 든 놈은 태연히 젤라또를 할짝거렸다.
“너…….”
“어차피 오늘은 노는 날이죠? 나랑 같이 노는 건 어때요? 아주 재밌게 놀 건데.”
쑤어하오주는 잠시 고민했다.
“날 납치하는 거야?”
고민 끝에 나온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남자가 말했다.
“납치해 봤자 소용없는 거 알아요. 그쪽이 훨씬 강하니까.”
맞는 말이었다.
쑤어하오주는 언제든 눈앞의 남자를 벌레처럼 짓이겨 죽일 수 있었다.
오늘은 노는 날이고, 그래. 시간이 남으니까.
“좋아.”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쑤어하오주와 함께 걸으며 나는 몇 번이나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세상 끔찍한 대사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통하는군.
‘자신이 있으니까요. 무슨 상황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자신.’
내 가슴팍에도 닿지 않을 만큼 왜소한 체구를 가진 이 소녀, 쑤어하오주는, 순식간에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릴 수 있는 괴물이다.
그것도 순수한 물리력으로 말이지.
그러니 나 같은 걸 두려워할 리가.
“나랑 어디에 가고 싶은데?”
“일단은 주변의 게임 센터일까요? 아니면 영화 볼래요?”
━완전 TV에서나 본 데이트 코스인데.
‘은근히 이런 취향이거든요, 저쪽.’
“그게 뭔데.”
하지만 아직 이 쑤어하오주는 그 재미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쑤어하오주를 데리고 주변 게임장으로 향했다.
내가 쑤어하오주를 데리고 향한 첫 번째 오락실 기계는 인형 뽑기였다.
첫 번째 시도. 쑤어하오주는 인형을 뽑지는 못했다. 인형이 갖고 싶은 건지 기계와 자신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부수지 마요. 그렇게 가지는 게 아니에요.”
“그래?”
“기다려 봐요.”
나는 쑤어하오주를 세워 두고 인형 기계 앞에 앉았다. 쑤어하오주의 등쌀에 밀려 몇 시간이나 해 봤던 적이 있는 만큼, 나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인형을 하나 뽑을 수 있었다.
“선물이에요.”
“선물?”
“네.”
유명 브랜드의 짝퉁인 게 분명한 토끼 인형을 들고 쑤어하오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다음으로 들른 곳은 코인 노래방 기계.
아쉽게도 쑤어하오주는 아는 노래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그녀 취향이던 노래를 몇 개 불러 주자 퍽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노래를 잘 부르는데.
‘회식 자리의 신이었거든요, 저.’
그다음으로는 농구공 좀 던지다가, 아케이드 게임 몇 개를 함께했다. 영 흥미 없어 보이는 얼굴로도 쑤어하오주는 제법 잘 따라왔다.
“재밌네.”
게임장을 나온 나는 중간에 들른 노점상에서 크레페를 사서 쑤어하오주에게 건넸다.
슬슬 당이 떨어질 때가 됐다.
적당할 때에 먹을 걸 넣어 둬야 짜증을 내지 않는다.
크레페를 우물거리던 쑤어하오주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왜 데리고 온 거야? 나는 왜 찾아온 거고?”
이런 질문을 할 때가 되긴 했지. 나는 크레페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개인적으로 당신한테 궁금한 게 있었거든요.”
“뭔데?”
“은월회를 언제 습격할 건지 해서요.”
그 말에 쑤어하오주의 기세가 변했다. 주변 공기조차 다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공기에 살갗이 다 따가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제 친구들도 거기에서 일해서요. 으음, 웬만하면 그 친구들을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어렵겠죠?”
“너…….”
그 말에 쑤어하오주의 눈이 사나워졌다.
“내가 누군지 알아?”
“누군지는 아까부터 알고 있었어요. 알잖아요. 내가 그쪽 취향 다 맞춘 거. 당연히 당신이 누군지 알죠.”
“누군지 아는데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한번 부탁이나 해 보러 온 거예요.”
“날 알면 날 무서워해야지. 도망가야지.”
“아, 그래야 하나요? 그럴 마음이 안 들어서.”
훅, 내 앞으로 주먹을 뻗었다. 풍압에 실핏줄이 터졌다. 피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능력을 끌어 올렸다. 내 주력 ‘거짓말’이다.
대상은 눈앞에 있는 쑤어하오주.
내용은 ‘나는 당신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근거는 내가 여태까지 쑤어하오주와 보냈던 몇 시간 동안의 내 태도.
먹히지 않으면 죽는다. 나는 부디 기도했다. 이 거짓말이 통하길.
그리고 마침내…….
“그러네.”
통했다.
덜덜 떠는 내 몸을, 내 두려움을 쑤어하오주는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자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과거 내가 쑤어하오주의 선택을 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쑤어하오주를 만났을 때의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기만을 원하고 있었을 때다.
그래서 쑤어하오주는 나를 좋아했다.
설록진에게 대놓고 나를 달라고 한 적도 있을 정도다. 물론 설록진은 거절했지만, 쑤어하오주와 거래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그녀에게 빌려주었지.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쑤어하오주의 양아버지가 선천적으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그녀를 처음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금의 나는 내 삶이 무척이나 소중하고, 그래서 죽는 것이 두렵지만 그래도 쑤어하오주가 원하는 사람을 거짓으로 꾸며 내는 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나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를 전혀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넌 누구야?”
몇 시간 만에 쑤어하오주가 내 이름을 물었다.
그 말에 장난기가 돋았다.
“그냥 알려 주는 것도 재미없으니 몇 번 더 만난 다음에 알려 주도록 할까요?”
내 말에 쑤어하오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얼마나 더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요.”
“알겠어.”
대충 고개를 끄덕인 쑤어하오주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나에 대해?”
“우리는 전에 만난 적이 있거든요.”
“나를?”
“예.”
쑤어하오주는 내 생각을 읽고 싶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내 주변을 거닐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퍽 귀여웠지만, 그녀의 실체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났다. 거짓말인 게 들키면 여기에서 내 몸은 산산조각이 나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재능을 쓸 필요도 없다. 그녀와 내가 과거에 만났다는 건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니까.
“언제?”
“정말 기억 안 나요?”
내 말에 쑤어하오주는 미간을 좁혔다.
“몰라, 가끔 난 기억을 잊어버리거든.”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쑤어하오주는 기억을 날려 버렸다. 자신의 강함을 위해서.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우리 만난 적이 있어?”
“네. 그렇지 않고서는 제가 어떻게 당신에 대해 알았겠어요. 좀 서운하네요.”
“서운…….”
내 말에 쑤어하오주는 눈을 깜빡였다. 늘 혼자 다니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
나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린 꽤 재밌게 놀았어요. 아까처럼요.”
“너랑 내가?”
“네. 저번에는 바둑원에서 만났는데. 바둑 좋아하잖아요. 나는 못하지만. 그래서 내가 ‘알까기’를 가르쳐 줬는데.”
한국말로 ‘알까기’라는 단어를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게 제법 귀여웠다.
“잘했어요, 그 ‘알까기’.”
“‘알까기’라.”
“오늘처럼 논 게 더 좋아요, 아니면 ‘알까기’가 더 좋아요?”
“모르겠는데. 너랑 바둑원에 간 게 기억이 안 나서.”
“그럼, 다음에는 바둑원에 가야겠네. 잊어버렸으니까 내가 다시 가르쳐 줄게요.”
“다음?”
쑤어하오주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로 나를 뻔히 바라보았다. 기억을 대가로 하고 있다는 건, 오늘 밤 그녀가 나와 보낸 이 하루를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다음을 물어보았다.
“우리 내일도 만날 수 있죠?”
나는 쑤어하오주에게 물었다.
언젠가 이 질문을 나는 미래의 그녀에게 했던 적이 있었다.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였다. 그때의 그녀는 무척이나 무료하고 지루해 보여서, 정말이지 이 세상을 사는 게 지긋지긋해 보였으므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쑤어하오주는 그때보다는 훨씬 생기가 있었다.
하지만 텅 빈 듯한 눈동자는 비슷했다.
그녀가 지금 이렇게 강해진 건 자신의 거의 모든 걸 포기해서다.
자신의 기억마저 포기하고 그 대가로 강함을 얻었기 때문에.
나는 쑤어하오주의 ‘미래’를 안다.
감정을, 기억을 계속해서 대가로 바쳐 능력을 얻은 쑤어하오주는 어느 날 자신의 손으로 그토록 사랑하던 양부를 죽인다. 하필이면 그날, 양부를 더는 기억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폭주하고, 그날 상하이가 중국의 지도에서 지워진다.
그녀는 중국 살생부에 오르고 이리저리 세상을 떠돌게 된다. 미래에도 그녀는 여전히 적사회의 보스였고,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각성자였지만.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녀의 미래는 분명 비참했다.
그날 내가 그녀에게서 들은 대답은 ‘글쎄’였고, 그다음 날 쑤어하오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다.
나는 두 번 다시 그 꼴을 보고 싶지 않다. 어쩌면 내가 중국에 온 것은 그런 미래를 막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대답해 줘요, 내일도 나랑 만나서 재밌게 놀겠다고. ‘알까기’도 배우겠다고.”
내 말에 쑤어하오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재미없어졌어, 갈래.”
“응, 좋아요. 내일도 아까 거기에서 봐요.”
그 말에도 대답은 없었다. 나를 지나쳐 가는 쑤어하오주를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무리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 또한 그녀의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작은 중얼거림이 귀를 스쳤다.
“오늘 극장 옆에 있는 창고 근처에 있지 마.”
그 충고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제5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