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71
25 모래 폭풍을 잠재우는 법 (2)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이 나와 놀라기는 했지만, 애초에 라미레스라는 인물이 사실은 제법 잘나가는 헌터일 거라는 예상은 해 두지 않았나.
그게 전 세계 단위로 잘나가는 인간일 줄은 몰라서 그렇지, 그래도 아주 놀라 자빠질 정도는…….
자빠질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 자빠질 정도다.
4년만 있어도 미국 최고의 헌터로 꼽히게 되는 테이카 쿠퍼가 여기에 있다니. 골치가 아팠다.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냐?
‘당장 저 인간이 사라진 걸 알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공식 성명을 발표하고 국가적으로 난리를 칠 정돕니다. 만약 사라진 이유가 납치 때문이라면, 미국은 핵 카드도 꺼내 들었을 거라고요.’
테이카 쿠퍼쯤 되는 헌터는 개인이라고 볼 수 없다. 일종의 국가적 전력이라고 해도 옳다. 미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인간이, 아니, 잘나가게 될 인간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왜 여기에 왔냐……는 질문은 사실 맞지 않겠군요. 예브리카를 잡으러 왔다고 했죠?]
[네.]
문득 어제 라미레스, 아니, 테이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게 화가 나서 여기까지 온 겁니까? 당연히 주변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했겠군요.]
테이카는 국가 전력이라고 말했던 건 거짓말이 아니다. 테이카를 이곳에 ‘파견’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협의가 필요하다. 당연히 호주로서는 미국에서 테이카를 공식적으로 파견받을 사정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 온 건 테이카의 독단이다.
호주의 헌터 입국 절차 자체가 말도 안 되게 간소하다는 점을 파고들어 그냥 무턱대고 와 버린 거다.
여러모로 미국에나 나에게는 재난과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눈앞의 테이카 쿠퍼를 바라봤다. 저 인간이 나랑 동갑이랬나. 지금은 스물하나겠군. 정말 어린애의 혈기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군. 뒷일은 조금도 생각 안 하고 일단 저질러 놓고 보다니.
대단하다, 대단해.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와 버린 건 아니겠죠?]
[어, 일단 친구네 집에서 논다고 했는데…….]
[그게 먹혔을까요?]
[음, 아뇨. 지금쯤이면 다 알았을걸요. 제 에이전시가 좀 유난이라.]
테이카 쿠퍼가 유명한 데에는 에이전시의 유난스러운 케어도 한몫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그 에이전시라는 사람이 한국계 미국인이거든. 한국이 키운 미국 최고의 헌터! 이런 식으로 국뽕 영상도 많이 만들어졌지.
어쨌거나 요는, 테이카가 여기에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거다.
[후…….]
여러모로 골이 아프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이런 식으로 와야 했습니까?]
[하지만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고요. 만약 예브리카가 장벽을 넘어 움직인다면, 호주라는 나라는 끝장이니까!]
으음, 확실히 예브리카를 그냥 뒀다면 호주는 망했을 거다. 실제로 몇 년 후에 쫄딱 망했던 것도 같고.
그렇다고 미국에서부터 여기까지 날아오다니. 얘도 정상은 아니다.
[정찰을 통해 예브리카의 위치를 알 수 있다면서요. 그것만 알려 주면 전 떠나겠습니다. 더는 폐를 끼치지 않을게요.]
문제는 그거다.
[혼자서 예브리카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물론 테이카는 여기에서 죽진 않는다. 과거에도, 지금도 죽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예브리카 토벌에 성공할까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도 그럴 게 눈앞에 있는 테이카 쿠퍼의 주 재능은 ‘중력’.
필시 엄청나게 강력하고 파괴적인 재능이지만, 이 모래 폭풍을 뚫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능력이다.
[우리가 방향을 가르쳐 줘도 중간에 방향을 잃으면 끝장 아닙니까?]
내 말에 테이카가 멋쩍게 웃었다.
[그야, 그런데…….]
그런 식으로 헤매서야 마력이 다 하기 전에 예브리카를 찾지도 못할 거다.
실제로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아무런 대비 없이 나섰다가 실패했겠지.
평생 실패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았을 사람이니, 이렇게 대책이 없는 건가 싶었다.
[쿠퍼 씨 혼자서는 무립니다.]
[그, 그럼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지…….]
테이카는 그렇게 말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도와야 하나.
이 세계의 멸망을 막는 게 내 목표긴 해도, 무리한 짓을 하다가 죽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모래 폭풍을 부를 수 있는 몬스터다.
추정 최상급. 물론 위험도 최상이라는 등급이 붙은 건 주변에 끼치는 영향이 엄청나기 때문이니까, 실제로는 그보다 약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보통 상대가 아니다.
거기에 내 머릿속엔 예브리카라는 개체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실제로 만났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X 된다.
목숨은 하나뿐이다.
게다가 이놈을 도와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얼마 없다. 어쨌거나 내 진짜 신분은 대한민국의 악당, 빌런, 흑막 어쩌고다.
그 흑막이 미국의 최고 헌터와 친분을 맺어서 뭐 어쩔 건데.
여러모로 영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는 테이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혹자는 그렇게 말한다.
재능에 따라 천차만별인 헌터들의 순위를 매기는 건 의미가 없는 짓이지만, 인류 최강의 파괴력을 가진 헌터를 따지라면 그건 테이카 쿠퍼일 거라고.
[도와드리죠,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한번 써먹어 보고 싶어졌다.
후에 9성급에 올라 인류 최강이라고 불리게 될 남자를.
* * *
전투가 들어가면 내 지시에만 따라 줬으면 한다는 다소 강압적인 조건을 달았음에도 테이카는 내 조건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게다가 전리품도 모두 우리 몫이란다. 애초에 돈이라면 넘치게 벌고 있을 사람이니 이해가 가면서도, 최상급 몬스터의 전리품을 흔쾌히 포기하겠다는 배포에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긴 저런 인간이니 여기까지 무보수로 몬스터를 토벌하겠다고 온 거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본격적인 예브리카 토벌을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물론 이 소식을 들은 한서현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미국 최강의 헌터라고요?”
내 설명에 한서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테이카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뜨거운 시선을 느꼈는지, 테이카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를 향해 손가락 인사를 날리는 게 어이가 없을 정도다.
“저런 사람이랑 같이 다녀 봤자 좋을 거 하나 없는 거 아니에요?”
“우리 정체에 대해 모르니 괜찮아. 게다가 여기에 혼자 두기도 애매하고.”
“그냥 버리고 가면 안 돼요? 강하다면서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 같은데.”
“혹여나 잘못되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위태로워져. 게다가 저 사람을 보면 알겠지만, 일단은 선한 사람이거든. 살려 두면 살려 둘수록 이 세계에 도움이 되는 쪽이라는 거지.”
게다가 우리에게 아무런 소득도 없는 게 아니었다.
정체도 들켰겠다, 테이카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재능이라는 게 대단했다.
우리를 보고 다가온 대머리수리를 닮은 몬스터, 벌처는 채 두 걸음도 걷기 전에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핏물이 튀고 깃털이 흩뿌려진 잔재만이 조금 전 이곳에 몬스터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모든 몬스터가 그런 식이었다.
테이카가 나선 순간부터 우리가 할 일은 없었다.
[아, 보기에 그리 좋은 광경은 아니네요! 아직 섬세한 구동은 조금 어려워서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순박해서 더 무서웠다. 악의는 전혀 없을 테지만, 테이카의 재능은 확실히 위험했다.
범위 자체에 중력을 적용하는 방식 때문에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우리가 아예 접근할 수 없게 몬스터를 보자마자 능력을 써 대고 있었지만, ‘합공’이 필요할 때는 참으로 곤란했다.
하긴 아직은 ‘중심점’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인가.
확실히 헌터로서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는 공간을 분리하고 그 공간에 중력을 과하게 적용하는 방법밖에 몰라, 다른 이들과 전혀 합공할 수 없다고 들었다.
흐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팁을 조금 알려 줘도 되겠는데.
마침 점심을 먹어야 할 때다. 나는 한서현에게 점심을 맡기고 테이카를 손짓으로 불러냈다.
[지금 능력을 쓸 때 어떤 느낌으로 쓰고 있습니까?]
[네에?]
내 말에 테이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21살이라는 나이가 맞지 않게 천진난만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정체를 들키기 전에는 그래도 진중한 헌터를 잘도 흉내 내더니 긴장을 풀어선지 한층 애교가 많아졌다.
━눈이 어찌나 귀여운지 확 찔러 버리고 싶군.
슬프게도 그 애교에 대한 우리 측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벗은 테이카의 눈은 쓸데없이 예뻐서 부담스러웠다. 사파이어색의 홍채에, 노랗게 빛나는 동공까지. 왜 태양의 신인 아폴론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알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쨌거나 본론으로 들어가서 나는 테이카가 힘을 쓰는 방식을 바꿔 두고자 했다.
[어떻게 쓰냐니. 그냥 눈앞에 보이는 공간을 콰앙 하고 짓누른다는 느낌으로 씁니다만.]
[그거참 직관적인 설명이네요.]
테이카가 재능을 발현하는 건 거의 본능에 의지해서일 거다. 확실히 처음 재능을 각성하고 나면 딱 그런 느낌이다. 새로운 팔이 돋아난 느낌. 일단은 그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뭔가 대단한 걸 해낸 것 같겠지.
하지만 그 정도에 만족해서는 절대 자신의 재능의 전부를 이끌어 낼 수 없다. 그 팔에 달린 손으로 젓가락질도 하고 글씨도 쓸 정도는 돼야 한다는 거다.
테이카의 문제점은 바로 보였다.
[섬세함이 전혀 없네요.]
[으읏!]
정곡을 찔렸나. 하지만 결코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 운용법이었다.
[대충 범위를 정한 다음에 그곳에 무턱대고 마력을 쏟아붓고 있잖아요.]
그랬다. 이 인간은 그냥 힘으로 공간을 짓누르기만 하고 있는 거다! 그건 내가 아는 중력의 진정한 활용법이 아니다.
[단순히 짓누르는 건 일차원적인 활용입니다.]
[나도 알지만……. 중력은 그런 거 아닌가? 무게를 멋대로 조절할 수 있는 거.]
확실히 아직까지 테이카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력의 포인트는 ‘중심점’이다.
나는 손에 모래를 쥐었다. 그리고 그 모래를 바람을 이용해서 띄웠다. 바람은 늘 흐르는 것, 이런 식으로 물체를 띄우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운용이었지만, 어쨌든 해냈다.
단순히 내 마력 운용을 자랑하려고 띄운 건 아니고, 일종의 예시다.
[이 지구에 중력이 밑으로 작용하는 건, 중심점이 지구의 한가운데 있어섭니다.]
내 말에 따라 모래의 구 한가운데에 중심점이 생겼다. 나는 다시 모래를 사각형으로 만들었다.
[중력이 작용하려면 중심점이 있어야 합니다. 중력이라는 건 중심점으로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이니까요. 지금 쿠퍼 씨가 쓰는 방식은 그 중심점을 땅 아래로 가정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접근하던 몬스터가 땅바닥에 처박힌 거다.
[이 지구의 중심점은 바꿀 수 없죠. 하지만 쿠퍼 씨의 재능으로 발휘되는 중력은 다릅니다. 중심점을 그 어디에나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겁니다.]
내 말에 테이카가 두 눈을 깜빡였다.
[오.]
보통 중력은 한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지구 위에 있는 우리에게 그 말은 진리처럼 느껴진다. 위에서 아래로 물건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테이카처럼 중심점을 제멋대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중력을 다른 방향으로 작용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 생각은 못 해 봤는데요.]
[중심점을 제대로 설정하는 방법만 깨친다면 중력을 마음대로 건드릴 수 있겠죠.]
[으음!]
[그리고 애초에 왜 중력인지는 생각해 봤습니까?]
[으응?]
[중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입니다. 지구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이유도 지구의 질량이 우리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커서죠. 그러니까 다시 묻죠. 왜 쿠퍼 씨의 재능은 염동력이 아니라 중력일까요?]
제7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