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07)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07화(10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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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자 Ⅰ
신노아
1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괴롭혀 온 화두가 하나 있다.
‘아지트를 어떻게 지어야 잘 지었다는 소리를 들을까?’
아지트. 나만의 비밀기지.
모두 알다시피 나에겐 트라우마가 하나 있다.
바로 89회차 때 고요리라는 분홍머리 외계인한테 본거지가 한 큐에 털려 버린 사건이 그것이다.
그때 이후로 내 두개골 한쪽 구석엔 언제나 ‘세뇌최면빔 한 방에 털려 버린 허접♡ 무한 회귀자인 주제에 개털렸어♡ 아지트 허어접♡’이라며 고요리의 ASMR 풀 보이스가 울려 퍼지고 있었나니.
물론 실제로 고요리가 그런 말투를 쓸 리는 만무했다. 만일 당사자가 내 트라우마를 알게 된다면 ‘?’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겠지. 그런 환상에 시달릴 만큼 정신적 외상이 심각하단 뜻이었다.
대책이 절실했다.
고로 오늘의 이야기는 나의 스위트 홈에 관한 에피소드가 되시겠다.
2
여태까지 여러분에게 직접 언급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사실 나는 수많은 회차에 걸쳐 나만의 엘도라도를 탐사했다.
이상향의 종류도 다양했다.
초호화 요트에다 이동형 해상요새를 꾸려 보기도 했으며 아예 무인도에서 살림을 차려 보기도 했다.
고층 빌딩, 지하 벙커, 지하철 선로, 열차포 등,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아지트’의 형태는 죄다 경험해 봤다 보면 되리라.
하지만 어째선지 어떤 아지트도 내 심미안을 100% 충족시켜 주진 못한 것이다.
2%. 맨날 2%가 부족했다.
“오빠의 기준. 너무 높아.”
인형사 이하율이 투덜거렸다.
물론 본인의 입술은 꼭 다물려 있었다. 언제나 데리고 다니는 가정부 마리오네트로 대신 말했을 뿐.
역대급 매국노(전직 부산 시장)를 아버지로 둔 이하율에겐 손톱 아래로 인형실을 뽑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이하율의 인형실은 가히 오러계의 초전도체라 부를 만했는데, 오러를 거의 아무런 손실 없이 흘려보내어 실끝에다 전달할 수 있었다. 이 기적의 초전도체가 아지트 보안에 참 요긴하게 쓰였다.
난공불락의 아지트를 건설하는 데 있어 이하율의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나뿐만 아니라 노도하나 천요화도 본거지의 건물을 개축할 땐 항상 이하율을 고용했다.
그런 전문가조차 건물주인 내 요청사항에 난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말해 줘. 거짓말 없이. 오빠한테, 이상적인 길드 건물이란?”
“우선 당연하지만 외부에서 아무리 물리적인 충격을 가해도 장시간 버틸 수 있어야 한다.”
“지하 벙커처럼?”
이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 길드장이면 다 바라는 부분. 또?”
“물리력 이외의 수단으로 침입한 외부인에 대해서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면 좋겠는걸.”
“가능. 진입 자체가 난해하도록 만들면 돼. 미궁처럼.”
“그렇지만 동시에 길드원들은 재빠르게 출동할 수 있어야 해. 비밀통로가 많아야지.”
“……?”
“그리고 나는 내 길드원들에게 혹독한 생활을 강요할 마음이 없다. 적어도 다른 길드보다는 언제나 풍족스러운 일상을 보낼 수 있어야 해. 가령 한강 변에서 산책하고 싶을 때 바로 산책할 수 있어야 하고, 가능하면 뷰도 멋져야 한다.”
“…….”
이하율이 수첩을 닫았다. 그리고 황금색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
“오빠. 양심, 어디?”
확실히 양심 없는 요구이긴 했다.
고요리라는 외계인의 침략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선 완전무결한 보안이 필요했다.
하지만 보안성과 편의성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서로 양립하기 어려웠다. 핵잠수함에서 5성급 호텔의 룸서비스를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당장 고요리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자니- 아아! 머릿속에서! 내 머릿속에서 분홍의 목소리가! Iä! Iä! 하나가 되어요, 길드장님!
결국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합창급의 메아리에 시달리는 나날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196회차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시름에 잠겨 한강 변에 탁자를 놓고 멍하니 물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처음 보는 남자가 산악자전거를 끌고 왔다. 허리춤에 권총 두 자루. 등에는 배낭과 더불어 소총. 아포칼립스에 유행하는 최신 패션이었다.
“어……? 여기가 아닌가?”
자전거남이 6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춰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상하다. SG넷에선 분명 여기라고 그랬는데…….”
SG넷이란 단어가 내 흥미를 끌었다.
이 당시 나는 아싸리 보안을 포기해 버리고 한강 아래에다 아지트를 지었다. 성녀와 처음으로 만났던 편의점 근처였다.
그리고 근방에는 내 아지트를 제외하면 건물다운 건물이라곤 일절 없었다. 쇼 노인의 와이프와 더불어 한강 이남의 대부분을 통째로 삼켜 버린 강남의 공허, 이른바 ‘서울의 여름’ 사태 때문에.
즉, 자전거남이 찾는 장소는 십중팔구 내 길드 아지트였다. 당사자로서 그 의중을 캐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으악!”
자전거남이 기겁했다. 기척을 슬쩍 숨기고 뒤에서부터 말을 걸었으니까.
남자는 반사적으로 소총을 더듬거렸지만 곧 이쪽을 자극할 뿐이라고 판단했는지 곧바로 손을 놓았다.
“아. 그게, 아뇨, 여기 이 근처에 커피맛이 끝내주는 카페가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소문?”
“예. 저기, SG넷 아시나요? 제가 각성자거든요. SG넷에서 한강을 쭉 따라가다 보면 맛집 카페가 나온다 그랬는데요……. 아무리 봐도 건물다운 건물이 여기밖에 없어서.”
“카페 맛집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중에야 직접 SG넷을 검색해 보고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이 사건을 촉발시킨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당서린과 천요화 등의 인물이었다.
녀석들이 게시판에다 이른바 비틱질을 시전해 버린 탓.
-[백화]고등학교4학년: 호에에 >_<)! 한강 바라보면서 마시는 크림라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거예요 >_<)!!
(인증샷. 자기 얼굴은 없이 왼손으로 크림라떼 커피잔을 쥐고 한강을 향해 건배하는 포즈)
-[삼천]마녀재판장: 이런 시대에, 세계가 아직 망가지기 전보다 더 풍미 있는 커피를 맛일 수 있다는 소중함. 마법의 가을.
(인증샷. 테이블에 마녀모자랑 커피잔만 올려두고 한강 배경으로 찍은 사진)
이따금 당서린이나 천요화가 내 아지트에 놀러 올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바리스타 노릇이 취미인 나는 당연하다는 듯 커피를 대접해 줬다.
이걸 얘네들이 SG넷에 경쟁적으로 인증글을 올리는 바람에 ‘강남에 끝내주게 맛있는 카페가 있다더라!’ 하는 뜬소문이 돌았다.
-고려장: 모닝커피.jpeg
여기에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내 직속 길드원 ‘어그로를 마시는 새’였다.
-고려장: 형은 아침에 일어나서 카페인을 보충해 주지 않으면 영 힘이 없다.
-고려장: 오늘의 카페모카.png
-고려장: 혹시 커피도 못 마실 정도로 쪼들리는 거지 새낀 SG넷에 없겠지? 있으면 너 때문에 게시판의 품격이 낮아지니까 시급히 자살해 주면 좋겠음ㅇㅇ…….
-고려장: 이 형님의 개인 바리스타 실력.jpg
심아련이 매일같이 올려 대는 인증 사진의 구도가 당서린과 천요화의 인증샷과 묘하게 겹치자, SG넷 유저들 사이에선 ‘강남 카페’의 실존에 대한 신빙성이 올랐다.
우리의 자전거남은 여기에 낚여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와 버린 것이었다.
“여기 근처에 카페는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이젠 강남에 제대로 운영되는 가게가 전멸했어요. 저기 사우론의 탑이 있긴 한데 거긴 공허입니다.”
“아……. 역시.”
자전거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제 막 2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커피라면 제가 조금 탈 줄 압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한 잔 드시고 가는 게 어떻습니까?”
“네?”
처음엔 자전거남도 사양했으나 내가 재차 권유하자 기쁨의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받아들였다.
그 결과.
“우와, 진짜로……. 맛있어. 으와아, 사장님. 이게 그 강남 카페보다 훨씬 더 맛있을 거 같은데요……?”
“감사합니다.”
“와, 진짜로 잘 마셨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뭘요. 혹시라도 커피 원두를 구하게 되시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그때도 타 드리겠습니다.”
“으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자전거남은 나한테 총탄이나 비상식량 따위를 보답으로 건네주려 했지만 정중히 돌려보냈다. 사실 내 입장에선 있으나 마나 한 물자였거든.
자전거남은 안절부절못하면서, 자전거에 올라타서도 몇 번이나 나를 향해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떠났다.
드르르-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버린 아스팔트 도로로 자전거가 미끄러졌다.
멀찍이서 자전거남의 등을 지켜보다가 문득, 오늘의 예기치 않은 만남이 의외로 제법 즐거웠음을 자각했다.
“아.”
그 순간 깨달음이 찾아왔다.
내가 원하는 아지트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 왜 여태까지 이리저리 시도해 봤던 아지트들이 항상 불만족스러웠는지.
‘카페. 카페다!’
그렇다.
나는 항상 카페를 운영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회귀자의 심장 속에서 열정이 불타올랐다.
2
“오빠. 그러니까, 길드 아지트 건물에 카페를 겸업한다는 거야?”
“그래. 일명 카페형 아지트지.”
“그게 뭔데, 씹덕아?”
내 아이디어를 이하율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자고로 선각자는 원래 무지몽매한 대중들한테 멸시받는 법.
내가 창조하려고 하는 카페는 지금까지 세계의 역사에 존재한 적 없는 유형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내 손끝에서 디자인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불쾌해. 카페는 가게야. 가게는 접근성이 전부. 동의하지?”
“음.”
“오빠가 원하는 건 물리력. 플러스, 정신세뇌 계열 괴이들한테도 절대 함락당하지 않는 보안. 여기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어. 어떻게? 카페랑 아지트를 동시에? 운영해?”
“저런. 하율아. 너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구나. 괴이와 공허가 횡행하는 요즘 세상에 그런 구시대적인 접근만 고집해선 안 된단다.”
“…비밀 하나 알려 줄게. 가끔 노도하 언니, 술 마실 때 나 불러서 오빠 험담해. 3시간 동안 내내.”
“……?”
“술버릇이 귀찮아……. 하지만, 요즘 들어서 언니 심정이 이해될지도.”
“……?”
말도 안 되는 음해는 무시하고 나는 해결책부터 꺼내 들었다.
“괴이를 이용하면 일타쌍피를 노릴 수 있다.”
“괴이를?”
이하율이 눈을 깜빡거렸다.
“이용해? …어떻게?”
바로 이렇게.
나는 그날 즉시 하율이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 앞바다엔 여전히 한일 해저터널, 요컨대 이누나키 터널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누나키 터널. 이 괴이야말로 카페와 아지트, 접근성과 보안성을 동시에 이룩하게 만들어 줄 마스터키였다.
찰칵. 일단 심령 사진기로 해저터널의 입구부터 찍어 봤다.
-어서 돌아와. 벌써 57번째네?
오랜만에 찍어본 사진이었으나 이누나키 터널은 계속해서 나와의 만남 횟수를 갱신하고 있었다.
원리야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속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판단해도 좋으리라.
그렇다면 소통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나?”
찰칵. 육성으로 질문을 내던진 뒤에 다시 한차례 사진을 찍었다.
-어서 돌아와. 벌써 57번째네?
안타깝게도 심령사진엔 변화가 없었다.
나는 재차 소통을 시도했다.
“이누나키. 만일 내 대화를 이해한다면 터널 입구에 다른 표식을 남기도록. 그쪽에 흥미로운 제안을 하겠다.”
찰칵.
-어서 돌아와. 벌써 57번째네?
“으음.”
일반적인 의사소통은 실패.
제아무리 몇몇 괴이들이 인간처럼 언어를 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말 인간같이 사고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인가? 380회차엔 공허에서 말들을 교배시켜서 공룡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한 무한 회귀자 아니던가.
“…오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볼게. 왜 갑자기 왕만두를 만들어?”
“기다려 봐라. 다 고도로 설계된 작업이야.”
그날부로 이누나키 터널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나섰다.
1일 차. 얘가 마법소녀들을 죽인 방식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사람 대갈통을 비정상적으로 선호하는 듯하여, 마치 제갈공명이 남만에서 그러했듯 만두피에다 고기를 꽉 채워다가 터널 앞에 공양해 봤다.
(반응이 없었다)
3일 차. 혹시 대갈통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저 인간의 신체를 갈가리 찢어 버리는 것이 은밀한 취미인가 싶어서 인체 인형들을 준비해서 건네줬다.
(일부러 터널 깊숙이 갖다 놨더니 다음 날 입구 바깥으로 토해져 있었다. 효과 확인.)
5일 차. 설마 마법소녀가 취향인 것인가, 하고 깨달음에 도달했다. 세기말 이전 마법소녀 피규어들을 수집하여 터널 한복판에 장식해 주기도 했다.
(갈가리 찢어져서 터널 입구로 분출되었다. 소통 성공.)
“봐라! 반응이 오잖냐! 하율아! 괴이에겐 괴이만의 소통법이 있고 그걸 우리 인간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그냥 화난 거 같은데.”
10일 차. ‘마법소녀 피규어 전략’이 먹혀들었기에 이번엔 구시대의 마법소녀 시리즈물 포스터들을 잔뜩 공수해 왔다. 마법소녀협의체에서 적극 협조해 주었다. 터널 벽면에다 포스터들을 도배했다.
(포스터를 붙이자마자 그래피티들이 살아 움직이며 포스터들을 찢어 버렸다. 실시간 소통 성공. 해당 과정을 지켜본 성녀가 나를 만류했다.)
17일 차. 국도관리대에 협조를 요청하여 사형수들을 이용해서 계속 마법소녀 포스터들을 도배했다. 아울러 마법소녀 애니메이션 OST를 녹음한 뒤, 터널 입구, 중간지점, 출구 등, 총 13군데에 라디오를 통해 재생시켰다.
(온 터널의 그래피티들이 꿈틀꿈틀거렸다. 노도하가 싫어했다.)
25일 차. 이전의 작업들을 병행하는 동시에 백화 길드장 천요화한테 협조를 요청. 백귀야행을 터널에다 방류했다.
(해저터널 곳곳에서 침수를 확인. 그래피티들이 꿈틀거리는 걸 넘어서 마치 절규하듯 맹렬하게 움직였다. 천요화가 싫어했다.)
30일 차. 마침내 터널 입구의 돌벽에 새겨진 문구에서 변화가 관측되었다.
-오지 마(来るな).
-돌아가(帰れ).
나는 이 위대한 진보에 흥분했다.
물론 괴이가 언어의 뜻을 의미론적으로 이해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어떤 단어를 발현했을 때 인간들이 무슨 반응을 보이는 정도는 기억할 줄 알았다.
공허에서 제일 많이, 제일 자주 들려오는 소리가 ‘살려 주세요!’ ‘도와줘요!’인 이유도 똑같았다. 그 단어가 인간들을 유혹하는 데 효과적이란 사실을 학습한 것이지.
찰칵. 심령사진에는 ‘오지 마’ ‘돌아가’ 이외에도 수많은 언어들이 구현되어 있었다.
‘나쁜 놈’ ‘소음공해’ ‘어째서?’ ‘죽어’ ‘민폐’ ‘이해 불가’ ‘저주’ ‘그만’ ‘시끄러워’ ‘싫어’ 등등.
이 얼마나 눈부신 발견이란 말인가?
수많은 사람들한테 경멸의 눈빛을 받아 가면서까지 이누나키 터널과의 소통을 추구한 보람이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욱더 소통법을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누나키 터널은 일본 태생의 괴이였다. 그리고 일본어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존댓말이란 문화가 존재했다.
사사로이 벗을 사귐에 있어서도 예(禮), 이 한 글자를 잊지 않는 것이 모름지기 동아시아의 덕목이었다.
60일 차. 터널 벽면에 붙이는 포스터의 숫자를 15배로 늘렸으며 애니송 무한시청도 24시간으로 연장했다.
더 이상 수출해 줄 수 있는 포스터 비축분이 없다면서 마법소녀협의체에서 난색을 표해 왔으나 나는 일본열도의 잠재력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이와미 광산에서 은이 떨어진 이래 일본열도의 주요 수출품은 오타쿠 문화였다.
사형수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죄수까지 모조리 동원하여 터널을 도배시켰다. 아무리 이누나키가 포스터를 갈가리 찢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인간이 포스터를 붙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바야흐로 한일 양국을 이어 주는 해저터널은 코믹마켓 현장이라 봐도 될 정도로 인테리어에서부터 덕력이 물씬 풍겼다.
(이하율, 노도하, 성녀, 천요화가 나란히 찾아와서 이번 작전의 중지를 요청했다.)
70일 차. 터널 곳곳에 배치해 둔 애니송 라디오가 파괴당했다. 마법소녀협의체에 다시금 협력을 요청하여 터널 한복판에서 마법소녀 콘서트를 열었다. 녹음된 음질과는 차원이 다른 라이브 뮤직이 해저에서 웅장하게 메아리쳤다.
(만엽묘와 허수검이 싫어했다.)
77일 차.
입구의 문장이 변경되었다.
-오지 말아 주세요(来ないでください).
-돌아가 주세요(帰ってください).
-뭐든지 할 테니까(何でもするから).
-부탁드립니다(お願いします).
나는 전율했다.
마침내 괴이에게도 동아시아의 예가 각인된 것이었다. 비로소 나는 상대방에게 진지한 교우를 나눌 만한 가치가 있노라 확신했다.
“하율아. 오래 기다렸구나. 드디어 이누나키 터널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완벽한 보안을 갖춘 아지트를 만들 수 있어.”
“미안. 내일 일하면 안 될까? 오늘 노도하 언니랑 저녁에 약속이 잡혔어. 술 약속.”
“그럼, 당연하지. 좋은 시간 보내렴!”
“…….”
다음 회차.
이누나키 터널 입구의 돌벽에는 엉망진창 그래피티 대신 깔끔한 팻말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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