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13)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13화(11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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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아닌 자 Ⅰ
신노아
1
미리 말해 두겠지만 오늘 썰에서는 깔끔한 엔딩을 기대해선 안 된다.
이번에야말로 명실상부한 배드 엔딩.
현실이란 이름의 똥망겜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2
무간.
그 소외신을 토벌한 이래 세상에선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중에 가서야 깨닫게 되었는데, 사실 소외신들은 저마다 일종의 영역을 보유하고 있었다.
신역(神域)이라고나 할까.
신역이란 낱말이 낯설다면 신전이라 표현해도 좋았다. 무간에게는 ‘튜토리얼 던전’이 대표적인 신역이고 신전이었다. 백화여고는 그중에서도 총본산에 해당하겠지.
자고로 한 종교의 교세가 기울면 그 자리에 또 다른 종교들이 파고드는 법.
괴이들은 본능에 따라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지구를 종교전쟁의 부루마블 보드판으로 선포했다.
신성한 십자군 전쟁 와중에 인간들이 죽어 나가든 말든 솔직히 괴이의 입장에선 알 바 아니었다. 원래 신앙이 다르면 민간인 취급도 안 해 주는 풍습이야 이 지구에서 오래된 전통이었다.
중요한 건 무간이 토벌되는 순간, 그동안 카드 타워처럼 절묘하게 맞추어졌던 세력 간의 균형이 삽시간에 깨져 버렸다는 사실.
무간 토벌을 기점으로 기존에는 억눌려 있었던 괴이들이 조금씩 날뛰기 시작했다.
“어라? 여기는……?”
“나는 안양의 김준영이 아니야! 나는 남궁세가의 일대제자, 남궁문청이다!”
“제발 나를 다시 그 세계로 다시… 어라, 어째서 눈물이?”
대표적인 예가 ‘용사증후군’이었다.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내가 용사증후군을 최초로 목격한 시점은 118회차. 그리고 무간 토벌이 이루어진 게 117회차였다.
새삼 여러분의 기억력 테스트를 해 보려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나도 [완전 기억 능력]을 갖춘 덕분에 이렇게 상세히 거론할 수 있을 뿐.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타이밍이 참 공교롭지 않냐는 거다.
마치 무간이 토벌되기만을 기다린 것 같지 않은가?
재차 복기해 보겠다. 이 시기 한반도에 새로이 가챠 픽업 확률을 높인 괴이는 비단 용사증후군뿐만이 아니었다.
-빠아아아아앙!
-빵! 빠앙! 빠아아앙!
-빠아아앙! 빠아앙!
모든 작가와 독자의 주적, ‘환생트럭’이 최초로 자태를 드러낸 것도 119회차였다.
시야를 더 넓혀 보자면 다른 괴이들도 수두룩했다. 126회차에는 ‘구원서사 신드롬’. 141회차에는 가상의 건축물인 ‘한일 해저터널’이 등장했다.
용사증후군, 환생트럭, 구원서사 신드롬, 공상의 건물……. 무언가 모종의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나?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어떤 거대한 흐름의 암시이자 징조였다.
모든 오븐 요리엔 예열이 필요한 법.
오늘은 저 질문에 곧바로 정답을 제출하기 전에 먼저, 가장 어이없었으며 동시에 가장 인상 깊었던 어느 징조에 관해 얘기해 볼까 싶다.
가상현실 MMORPG.
이른바 ‘온라인 게임’이 이번 에피소드의 주인공 되시겠다.
3
이따금 SG넷에 올라오는 꾸준글이라고 할까, 주기적으로 언급되는 떡밥이 있었다.
-익명: 상태창! 상태창! 상태창!
-익명: 오늘도 눈 뜨자마자 스테이터스 오픈 외쳤다 상태창 떴냐? (31일 차)
-익명: 님들 지금 나만 상태창 보임??
-익명: 상태창 외치니까 진짜로 뜸ㄹㅇ
-문학소녀: 솔직히 세상 이 꼬라지 나고 다른 사람들 몰래 상태창 외쳐 본 적 있으면 개추ㅋㅋㅋ
바로 상태창 떡밥.
당연하지만 나는 성숙한 일반인으로서, 단 한 번도 혼자서 상태창을 중얼거려 본 적 없었다.
1회차나 2회차 때 외쳐 봤을 거라고? 어차피 내 기억은 5회차부터 시작했으므로 그 이전의 과거는 고대시대에 해당했다.
고대에 벌어진 범죄를 가지고 현대 국가에 따지는 몰상식은 없었다. 그리스가 트로이 전쟁 일으켰다고 튀르키예한테 전범국 취급받던가?
아무튼 이 세계엔 ‘능력 수치’와 ‘스킬 설명’이 친절하게 줄줄이 적힌 스테이터스 화면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각성자들은 한 땀 한 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자기 능력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예컨대 심아련도 SG넷이 없었을 때는 자신의 치료 능력이 [원기옥]이라는 것. 즉, 어그로를 끌수록 강력해진다는 비밀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이건 회차 초반부일수록 ‘단순한 능력’을 가진 각성자들이 유리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백이 지닌 [사자후]처럼 그냥 목소리가 커질 뿐인 능력은, 단순한 만큼 능력의 유무를 깨닫기도 쉬웠으니까.
한없이 각성자들에게 불친절한 세상.
그리고 바로 이 불친절함이야말로 나 장의사가 각성자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인망과 신망을 이끌어 낸 비결이었다.
“서규야. 네 능력은 [유비쿼터스]인데 스마트폰만 있으면 무조건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창조할 수 있단다. 접속 인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네 능력도 발달하고, 게시판에 추가할 수 있는 시스템도 다양해진다.”
“예?”
“아련아. 네 능력은 [원기옥]이란다. 여기 서규가 SG넷을 창조하면 거기서부터 너는 원년 멤버이자 가장 유명한 빌런이 되어서 모든 인간의 어그로를 마시고 자라나렴.”
“네헷?”
정보의 독점.
각성자들 스스로도 모르는 능력의 정체, 장단점,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떻게 하면 능력을 더 발달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육성법’까지.
나는 이 모든 정보를 손아귀에 틀어쥔 채 언제든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만큼만 풀 수 있었다.
아니, 굳이 내가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구국의 성녀’가 당신에게 능력을 하사합니다.]약간의 ‘왜곡’만 가해지면 그 능력이 마치 성좌들에 의해 각성되고 발달하는 것처럼 꾸며 댈 수 있었다.
[‘구국의 성녀’가 당신에게 ‘하급 치유’ 능력을 선사합니다.] [‘알프스의 정복자’가 당신에게 ‘망치 숙련’ 능력을 선사합니다.] [‘붉은 망토의 재상’이 당신에게 ‘새끼발가락을 찧어도 아프지 않은 정도의 통각 조절’ 능력을 선사합니다.]성좌톡 성능 확실하고.
각성자들 입장에선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능력이 대뜸 성좌들에 의해 기연처럼 주어진 셈이었다.
[‘붉은 망토의 재상’이 의도적으로 책상다리, 문턱 모서리에 발가락을 999번 찧으면 ‘통각 조절’ 능력이 향상된다는 사실을 귀띔해 줍니다.]때로는 내가 직접. 때로는 성녀가 성좌를 위장해서.
회귀자는 앞뒤로 모략을 펼쳐 냈다.
나에 의해서 능력을 각성하게 된(알게 된) 사람들은 나라는 개인을 추종했고, 성좌에 의해서 그리된 사람들은 성좌를 숭배했다. 어느 쪽이든 내 손바닥 안이었다.
단순히 2년 뒤, 6년 뒤, 10년 뒤에 각성자들이 직접 자각할 수도 있었을 정보를 우리가 조금 더 일찍 공개함으로써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한반도의 군벌급 길드들이 다른 동네에 비해 잠잠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었다. 군사부일체. 걔들이 다 나한테 은혜를 입은 제자들이나 다름없거든. 당서린만 봐도 나 덕분에 ‘등가교환’ 마법을 재빨리 습득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익명: 오늘도 눈 뜨자마자 스테이터스 오픈 외쳤다 상태창 떴냐? (191일 차)
-익명: 떴으니까 올리지ㅋㅋㅋㅋ (191일 차)
133회차에 돌연 올라온 어느 게시글은 나의 지위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 게시글을 보고도 뻘글이라 생각해서 무심코 지나쳤다.
하지만 약 30분 뒤, 내 생각이 지나치게 안온했다는 게 드러났다.
[장의사 씨. 큰일입니다.]“예? 무슨 일입니까?”
[한반도의 각성자들 눈앞으로 차례차례 ‘상태창’이 출현하고 있습니다.]“네?”
당장 SG넷에 접속해 보았다.
-익명: 아니, 뭐임? 진짜로 스테이터스 화면이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뜨는데?
-문학소녀: 본인 상태창 평가 좀.
-익명: 이 새끼들 이젠 하다 하다 단체로 낚시질을 처하네. SG넷 망했냐? 노잼 떡밥 차단 좀.
-익명: 무력 수치 S급 떴냐??
-익명: 님들 님들 저 상태창에 매력 수치 A급이라고 뜨는데 이거 좋은 건가요?
커뮤니티에 난리통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게 뭔…….”
“길드장니이이이임!”
콰앙! 누군가가 내 방문을 박차고 굴러 들어왔다.
방금 발화된 명제는 두 가지 지점에서 특기할 만했다.
첫 번째, 내 사적인 개인실의 방문을 아무런 예고 없이 열어젖혔다는 점에서 상대방에겐 예의란 관념이 없었다.
두 번째, ‘걸어온 것’도 아니고 ‘달려온 것’도 아니고 ‘굴러 들어온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상대방에겐 어쩌면 이족보행의 능력조차 부재했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도 호모 사피엔스라 인정해 주기엔 자격 미달인 생물이란 것이었다. 이 미확인된 크립티드 생명체의 식별명은 심아련이었다.
“길드장니히이임! 저, 저, 저, 떴어요오오! 떴어요!”
“…….”
“스스스끕 떴따아아아아아……!”
대화문을 보면 알겠지만 난 딱히 심아련한테 ‘뭐가?’ ‘떴다니 무슨 소리니?’라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스끕이 대체 뭐냐고도 안 물어봤다.
하지만 크립티드에겐 인류의 대화방식이 통하지 않는 법. 눈앞의 존재가 제멋대로 스케치북을 펼치더니 사인펜을 화라라락! 갈겨 쓰지 뭔가.
“보, 보, 보세요!”
보기 싫었다.
그러나 회귀자의 단련된 오감은 나에게 수많은 장점과 하나의 단점을 안겨 주었다.
하나의 단점이란 바로 심아련이 펼친 스케치북을 휙- 스쳐 훑는 것만으로도 모는 문자 및 내용이 파악되어 버린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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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터스]이름: 심아련(沈娥漣)
칭호: ‘독을 마시는 새’
직업: 치유사, 약사, 화가, 성녀(잠재), 소설가(잠재)
[체력: E급] [근력: E급] [직관: S-급] [민첩: E급] [지능: B급] [매력: F급]성격 특징: [일편단심] [대인공포] [방심] [오만]
전용 스킬: [독을 마시는 새(SSS)]
*독을 마시는 새(SSS): 이 세계에 흘러넘치는 독을 약으로 전환시키는 능력.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원망과 저주를 받을수록 더욱더 강력한 치유 능력을 발현합니다. 더 많은 사람의 원망, 더 깊이 파고드는 저주일수록 치유도 강력해집니다.
악을 선으로. 원한을 기회로. 당신은 이 땅의 구원자, 성녀가 될 운명을 안고 태어난 자입니다.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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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보셨죠? 봤죠? 길드장니임… 으히이. 으헤에, 저어, 스스스끕 능력자였어요……!”
“…….”
“독마새… 흐히, 독마새래요……. 게다가 구, 구원자에 성녀……!”
그제야 나는 ‘스스스끕’이란 게 ‘SSS급’의 발음임을 깨달았다.
왜 심아련이 ‘에스에스에스급’을 그렇게 말하는지에 관하여 나는 내 무지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무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웹소설, 더 나아가 장르소설 전반에 취미를 붙인 건 555회차부터였다. 따라서 나는 눈앞의 크립티트 생명체가 독마새를 자칭하는 꼬라지, 이 세계의 모욕, 이 우주의 오욕에 분노할 수도 없었으며 규탄할 수도 없었다.
단지 침묵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시피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 침묵을 지켜야 했으므로.
“기, 길드장님도 얼른 외쳐 보세요오.”
“뭐?”
“상태창이요. 스, 스테이터스- 오픈, 이라고 외쳐도 떠요……. 외치지 않고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만 해도 뜨는데, 처, 처음은 반드시 말해야 돼요. 아! 말할 때 반드시 내 능력치를 보고 싶단 마음을, 의념을, 꾹꾹꾹 눌러 담아서 외쳐 보세요……!”
그럼 벙어리들은 어쩌고? 이 상태창 뭐시기 괴이는, 그야 물론 이딴 짓거리를 시전하는 것은 괴이밖에 없으므로 이미 이것의 정체는 괴이로 확정 났는데, 아무튼 이놈은 언어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괴이 새끼(우연히도 빠르게 발음하면 개새끼가 된다)란 뜻인가?
“자, 자아! 길드장님! 어서!”
“…아련아. 이런 괴이한테 섣불리 자기 영역을 내어주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단다.”
“네에?”
“너도 이제 우리 길드에 들어와서 괴이들에 대해 알 만큼 알았잖니. 신호등엔 ‘빨간색이면 건너지 않는다’라는 게 약속이듯, 이 상태창이란 괴이한테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약속이 발동하는 조건’일 거다. 그걸 함부로 부르면 못 써.”
“…아.”
그때 심아련이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 길드장님……. 저보다 능력치 후달리실까 봐, 외치기 싫으시구나…….”
“…….”
“그, 죄송해요. 길드장님도 아시지만, 제가, 조금 배려가 부족할 때가 많아서……. 헤헤. 앞으로는 길드장님 앞에서 능력치 자랑하지 않을게요오.”
심아련은 ‘아, 서규한테 자랑하러 가야지’ 하고 내 방문을 나섰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방을 나가고 나서 다시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앗, 저기……! 저는, 설령 길드장님한테 스스스끕 능력이 없다거나……. 스급따리라거나! 에이끕따리여도! 절대로, 길드장님을 무시하지 않을 거니까요오……!”
“…….”
“사실 이, 이런 능력 가지고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네? 헤헤. 그러니까……. 기, 길드장님! 화이팅……!”
쾅.
크립티드가 문을 닫고 나갔다.
방 안이 고요해졌다.
침묵이 흘렀다.
“성녀님.”
[네.]“이 괴이 새끼 정보를 싸그리 모아 주십시오. 되도록 빨리.”
[…예.]성녀의 어투에서 떨떠름함이 느껴졌지만 내 마음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사실 후대의 입장에서 서술해 보자면, 이것은 장르소설의 문법 개혁과도 맥이 닿아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바야흐로 나는 ‘상태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