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19)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19화(11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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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뇌자 Ⅰ
신노아
1
나는 명언이나 격언 따위를 선호하지 않는다.
명언에 감탄한다는 것. 그건 대체로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마주하기보다는 차라리 풍경 사진을 감상하는 행위에 가깝다.
이미 그 풍경에 여행을 다녀와 본 자들에게야 기념비로서 의미를 지니겠으나, 그러지 않은 사람들에겐 단지 자신의 집에 인테리어 용도로 들여다 놓은 가짜 골동품에 불과하다.
그래도 딱 하나. 니체가 남긴 격언만큼은 실용주의자에게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괴이와 싸우는 자라면 누구든 조심하라. 그 스스로 괴이가 되어 버리지 않도록. 당신이 공허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공허 또한 당신을 들여다보리라.
이야말로 세기말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을 위한 가이드 중 가이드 아니겠는가?
여기서 조금 더 실용성을 확보하고 싶을 때는 후반부만 살짝 개작하면 완벽해진다.
-당신이 고요리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고요리 또한 당신을 들여다보리라.
고요리(高妖理).
퍼스널 컬러는 분홍색.
포켓몬 타입은 에스퍼.
특기는 누구에게나 부드러운 웃음. 그리고 세뇌최면빔이다.
1세대 포켓몬 애니메이션에 윤겔라로 출연했더라면 뭇 아이들에게 컬트적 인기를 자랑했으련만, 하필 현실에 환생해 버린 탓에 내 뒷골이 땡기게 되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이 포켓몬을 봉인하기 위해 나 장의사가 정말 부단히도 노력했다는 것이다.
‘혹시 직접 마주 보지만 않고 사진을 찍으면 어떻게 될까? 그럼 고요리의 진짜 본모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찰칵.
나는 고요리를 몰래 찍어본다는 만행을 저질렀다. 죽음을 불사한 짓이었다.
촬영 자체야 성공했으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평범한 카메라 렌즈와 내 망막은 성능에 있어서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요컨대 사진에선 똑같은 분홍색 머리카락, 똑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미인만 덩그러니 비췄다. 흐음. 어쩐지 사진이 실물보다 못한 것도 같았다.
‘흐음. 어쩐지 사진이 실물보다 못한걸’이라고 느낀 순간 벌써 약한 최면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곧바로 사진을 불태워 버렸다.
실패.
‘다른 사람이 대신 찍어 주면?’
내 입장에선 별로 목숨이 아깝지 않은 유지원을 시켜서 찍어 봤다. 결과물은 똑같았다. 유지원도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실패².
참고로 말하자면 내 테스트들은 결코 동일한 회차에서 시행되지 않았다.
고요리에 관해선 핵폭탄보다도 조심히 다루며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마땅히 모든 테스트는 각각 다른 회차들에 진행되어야 했다.
‘녹음기로 목소리를 녹화해 보면 진짜 생목소리가――.’
실패.
‘…잠깐. 심령 카메라로 찍어 본다면?’
좀 기발한 발상이었다.
이때쯤 나는 이누나키 터널을 토벌해준 대가로 마법소녀협의체로부터 즉석 심령 사진기를 챙겨 온 이후였다.
찰칵.
이번 테스트엔 제법 기대가 컸다. 심령 사진기는 귀물 중의 귀물. 아무렴 고요리의 정체를 드러내는 데 이보다 적합한 아이템이 있으랴?
그때였다.
드르르르르…….
정상적으로 사진을 인화하던 심령 사진기 속에서 기묘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르르! 드륵! 따르르릉! 따르르르,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그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아니, 어쩌면 빨간색 화재발신기 버튼을 눌렀을 때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덜컥! 카메라가 제멋대로 삐거덕거리더니 다음 순간에는 푸슈슈슈슉- 안쪽에서 화재라도 발생한 것처럼 연기를 피워 댔다.
그리고 정지했다.
“…….”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더 소름이 돋는 사실은, 내가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고요리가 다가왔다는 것이다.
코앞까지.
고요리는 고개를 기울이고, 허리를 숙인 채, 밑에서 위로 나를 비스듬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라. 어딘지 낯이 익는데……. 앗, 어라, 어라. 잠깐만요. 혹시 부산역 대합실에 같이 있었던 분 아닌가요? 으음. 성함이 확실히……. 장의사. 장의사 씨, 맞으시지요?”
“…….”
“와아! 세상에! 이런 곳에서 다시 뵙다니 우연이네요! 아앗. 손에 들고 계신 물건에서 자꾸 연기가 새어 나오는데 괜찮으신가요? 무언가.”
고요리가 방긋 웃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좆 됐다.
애당초 이딴 카메라를 신뢰하다니 멍청했다. 마법소녀 코스프레나 하고 다니는 집단의 보물이 강력해 봐야 얼마나 강력하겠는가.
그러나 회귀자는 바로 이런 경우의 수까지 계산하여 대책을 수립해 두는 직업. 나는 곧바로 프로토콜 552-71번을 발동했다.
“뜻밖에 광풍이 우루루루루! 풍성(風聲)이 요란커늘 주유, 급히 장대상에 퉁퉁퉁 내려 깃발을 바라보니!”
“…엣?”
“어허라! 청룡주작 양기각이 백호현무를 응하여 서북으로 퍼얼퍼얼 삽시간에 동남대풍(東南大風)이 일어 기각이 와직끈! 움쭈욱! 기폭판도 떼그르르르르! 아, 천동같이 일어나니 주유가 이 모양을 보고 간담이 떨어지는지라!”
“에. 어라……? 네?”
“하늘이여! 아아아! 어찌 나를 낳고 공명이를 낳았던가! 우우우우! 우-위이!”
“…….”
나는 미친놈처럼 덩실덩실 춤추며 지평선을 향해 달려갔다. 회귀자로서 천 년이 넘도록 쌓아 올린 인격, 품격, 아무튼 격이란 격은 전부 진흙탕에 처박으면서.
프로토콜 552-71번의 본래 이름은 판소리 적벽가 부르기. 혹은 미친 척하기다.
참고로 난 판소리를 잘했다.
미친 척은 조금 더 잘했다.
과연 세상만물에 ‘흥미롭네요’라는 말부터 던지고 보는 관심대마왕 고요리조차 인간 실격을 추적해 오진 않았다. 도비는 자유였으며, 나는 탈출했다.
그리고 해당 회차에서 다시는 고요리에게 반경 30km 이하로 접근하지 않았다.
실패.
――역시 고요리는 위험한 존재였다.
나는 도서관학회의 창시자이자 흑막으로서 [마을급-도시급-대륙급-대양급-소외신급]으로 이어지는 위험도 라인업의 끝에 [고요리급]을 덧붙이고 싶은 욕망을 참기 어려웠다.
내가 이럴 때마다 기꺼이 의지하고 상담하는 비즈니스 파트너, 국도관리대장 노도하는 본부 작전실에서 평범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보기엔 댁이 더 위험한 존재 같습니다만…….”
“흠.”
딱히 노도하의 지적에 수긍하진 않았으나 일단 전략은 수정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자’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위험합니다. 저마다 그 사람에게 이상형을 투영하니, 제아무리 저처럼 감정이 희박한 차도남이어도 당할 수밖에 없지요.”
“씨바알. 대체 태클을 몇 군데 걸어야 할지 감도 안 오는군요……. 일단, 댁, 이상형이 분홍색 머리카락이었습니까……?”
“그런 지엽적인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관리대장. 하지만 우리는 상기의 문제를 짚어 봄으로써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습니다. 혹시, 감정이 희박한 것을 뛰어넘어 아예 감정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자’와 접촉해도 안전하지 않을까요?”
“흐음? 감정 자체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존재한답니까……?”
“더 정확히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 요컨대 상대를 좋아하는 감정이 거세된 사람이면 됩니다. 고요리의 인식 조작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니까요.”
“…….”
“…….”
우리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음?”
사각사각.
그곳에선 국도관리대장 작전통제실 실장 유지원이 조각칼로 나무를 깎고 있었다. [미니맵]에서 체스말로 사용할 기물을 직접 파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왜 저를 보십니까?”
고지능형 사이코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2
유지원(劉地圓).
퍼스널 컬러는 은색.
포켓몬 타입은… 아니, 알 게 뭔가. 아무튼 싸이코패스. 이 녀석을 해설하겠답시고 길게 시간을 투자하는 건 인생을 낭비하는 짓이었다.
고요리와 비교하자면 외모 말고는 이길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현실이라기엔 지나치게 증오스러운 사실이었지만 유지원은 얼굴만큼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이건 그저 객관적인 진실이라 나로서도 어떻게 곡해할 수가 없었다.
한반도의 각성자들 가운데 외모력으로 투톱을 겨루는 라이벌이 하필이면 고요리와 유지원이란 점만 봐도 일목요연하겠다마는, 이 땅에는 그냥 희망이 없었다.
그렇다. 나는 언제나 유지원에게 고요리 감시 임무를 맡겼다.
작전팀에 펼쳐진 한반도 전국지도에는 언제나 ‘고요리’라고 문자가 음각된 검은색 비숍(♝)이 슬금슬금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원아. 네가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자’와 접촉해 줘야겠다. 당연히 내가 보냈다는 사실은 절대 들켜선 안 되고. 무엇보다 네가 세뇌당했다는 징조가 조금이라도 느껴진다면 나는 너를 즉각 격리할 거다.”
“흐음…….”
유지원이 턱을 짚었다. 상대방 면전에서 턱을 짚은 채 흐음, 소리를 내다니. 너무나 명백한 사이코패스의 징후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각하.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다음 회차에 가시면 저 뭐 좀 챙겨 주십시오.”
이게 바로 본투비 광인의 소리였다.
만일 유지원이 평범한 싸이코패스였다면.
‘하아? 다음 회차의 나? 그런 건 지금의 나와 전혀 별개의 인물이잖아? 나는 지금의 행복을 추구하겠어.’
‘이제부터 나를 위해 살겠다.’
라는 사고방식으로 흘렀겠지만, 어림도 없지. 우리의 싸이코패스는 뇌주름의 생김새부터 비범하셨다.
‘흐음. 만일 저 사람(장의사) 때문에 세상이 회귀한다면, 아무리 내가 노력해서 부와 권력을 쌓는다 해도 어차피 회귀 ‘딸깍’ 한 번이면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런 딸깍충 때문에 어찌하여 내 권력과 안위가 사라져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회귀자는 죽일 수 없다.’
‘고로, 회귀자에게 빌붙어야 한다.’
‘즉……. 회귀자와 어찌저찌 협상해서 다음 회차의 나에게 조금 더 많은 권력과 정보를 넘길 수 있도록 만든다. 그다음의 회차엔 더 많이. 그렇게 유산을 계속해서 계승시킨다면…….’
‘최종 승리는 바로 이 몸의 것이 되지 않을까?’
‘이제부터 나는 회귀자 코인에 풀매수를 때려박는다.’
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에 도달한 것이었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아느냐면, 직접 들었거든. 본인한테.
이제부터 왜 내가 이 모발미인을 광인으로 취급하는지에 대해서 어떠한 추가적 설명도 불필요하리라 확신한다. 적어도 난 창작물에서, 무한 회귀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이딴 두뇌 흐름을 보유한 인물을 본 적 없었다.
현실이 언제나 가벼이 창작물에게 승리를 거둔다는 또 다른 예시겠다.
“지원아.”
“예, 각하.”
“내가 너한테 그 말을 듣는 것이 몇 번째인 줄 짐작이라도 하냐?”
“아니요. 하지만 방금 각하의 발언으로 인해 제가 어떤 회차에서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안심이군요.”
“제정신 자리에 뭔가 좀 더 다른 단어를 끼워 맞춰야 말이 될 것 같은데…….”
“흠. 지성? 이성? 판단력?”
“그 모든 단어들의 반대말이면 딱 정확할 것 같구나.”
“……?”
결국 나는 유지원에게 또다시 약속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 새끼는 내 아지트 카페 기준으로 심도가 1,000미터였다.
처음은 100미터였다.
얘가 어떻게 100미터에서 1,000미터까지 기어 왔는지에 대해선 해설할 필요가 없으리라. 다만 내가 약속을 아주 잘 지키는 사람이란 사실만 덧붙여 두겠다.
나는 유지원을 출동시키고 그 뒤를 쫓았다. 물론 수백 미터의 간격을 철두철미 지키면서.
고요리는 대전에서 급식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약간의 노동만 받고서 매일 아침저녁 두 번씩 음식을 배분했다.
나는 망원경으로 해당 광경을 지켜보았다. 고요리가 손수 앞치마를 두른 채 방긋방긋 웃으며 배식하는 모습에, 내 이빨은 달달 떨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앞치마에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삼국지(三國志).
‘무섭구나! 고요리!’
나는 전율했다.
‘이런 순간에까지 내 정신을 농락하여 홀리려 드는가! 내가 그런다고 너에게 호감을 느낄 성싶더냐!’
하물며 근본 없는 푸른색도 빨간색도 아닌, 촉나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초록색 앞치마였다.
실로 가공할 만한 세뇌!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억지로 망원경을 슬쩍 돌리자, 그곳에는 우리 국도관리대의 최종병기인 은발 싸이코패스가 또벅또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
“…….”
두 존재가, 마주쳤다.
절대로 호감을 느끼게 하는 자와 절대로 호감을 느끼지 않는 자.
말하자면… 모순!
접촉 자체만으로 우주의 법칙이 파괴당하고 사회의 윤리가 모욕당할 것만 같은, 그리하여 올바른 역사에서는 결코 서로 마주칠 일 없었던 창과 방패가, 어떤 기이한 인과의 장난(나)으로 인하여 마주 서게 된 것이었다.
절로 가슴이 웅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