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20)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20화(12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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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뇌자 Ⅱ
신노아
3
그리하여 두 개의 블랙홀이 충돌해 버려 태양계는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라는 결말은 안타깝게도 발생하지 않았다.
세상은 멀쩡했다. 고요리와 유지원의 조우는 거시세계에 어떠한 폭풍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수많은 괴이들한테 식민지 지배를 당하면서도 수십 년 정도는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이 우주는 의외로 튼튼했다.
“……. …….”
“……? ……. …….”
멀리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 청각으로도 닿지 못하는 거리였으므로 대화를 엿들을 순 없었다. 애당초 고요리의 [인식 조작] 때문에 대화 내용부터 왜곡됐을 거다.
고요리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명함인지 편지인지 잘 안 보이는 무언가를 건넸다. 유지원도 그걸 받고 머리를 수그렸다.
잠시 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유지원이 복귀했다.
나는 다급하게 유지원한테 다가갔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냐? 고요리의 인상은 어땠지? 막 호감이 느껴지고 왠지 모르게 저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싶고 그런 느낌을 받았나?”
“예? 아니요?”
유지원은 한국어의 오묘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을 내뱉었다.
“그저 대화만 나누고 왔습니다. 아주 말이 잘 통하더군요.”
“아……!”
나는 한탄했다. 역시 싸이코패스 따위로는 고요리의 권능에 대적하기란 요원했던 것인가.
“…그런가. 고생했다. 그래도 너한테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렴 네가 인간을 상대로 작게나마 호의적 감정을 느껴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 아니겠냐? 언제 이런 경험을 또 해 보겠어.”
“음?”
유지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죄송합니다만, 각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타겟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릴 차례였다.
“무슨 소리야? 방금 말이 아주 잘 통했다면서.”
“예? 네, 그랬습니다만.”
그러더니 유지원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무표정하게 읊조리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 잘 통한다는 점이 어째서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껴야 하는 이유로 성립할 수 있습니까?”
?
“각하. 말이 잘 통하기에 느껴지는 감정은 편안함입니다. 더 정확히 서술하자면,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쓸데없이 많은 대화를 소모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 즉,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입니다. 학교에 가야 하는 데 도보가 아니라 지하철을 이용하면 훨씬 빠르고 간편하지요. 그렇다고 각하께선 지하철 전동차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시진 않을 테지요.”
“…….”
“아. 실례했습니다. 각하. 사람의 취향이란 제각각 다른 법인데 말입니다. 혹시, 전동차에 호감을 느끼십니까?”
당연히 느끼지 않았다. 철도에 기묘한 애착을 품는 사람은 이미 당서린 한 명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유지원의 장광설을 들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어쩌면 통할지도 모른다! 고요리한테! 이 희대의 싸이코패스라면, [인식 조작]에서 벗어난다는 기적이 이루어질지도 몰라!’
턱.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유지원의 어깨를 잡았다.
“지원아.”
“예, 각하.”
“이제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자’와 친해져라. 친구든 뭐든 아무튼 특별한 관계를 수립해.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여 나에게 보고하도록.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각하. 저에게만 맡겨 주십시오. 다만…….”
“아아, 걱정하지 마라. 다음 회차의 너에게는 반드시 네 유언을 전달해 주마.”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각하.”
우리 둘 사이에 이심전심의 눈빛이 오갔다.
그때 묵묵히 사태의 진행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성녀가 중얼거렸다.
[장의사 씨. 줄곧 지적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만, 지금……. 누가 어떻게 봐도, 장의사 씨가 고요리라는 분을 스토킹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일고할 가치조차 없는 지적이었다.
설마 내가 미쳤다고 무급으로 일반인들 상대로 급식소를 운영하며 초록색 삼국지 앞치마를 두른 채 배식에 임하면서 누구한테나 예의 바르게 미소 짓는 사람 따위를 스토킹한단 말인가? 나 장의사가 그럴 인간으로 보이는가? 말도 안 됐다.
나는 그날부터 곧바로 작전명 ‘모순’을 발동했다.
한반도 제일의 방패. 어느 작품에 등장하더라도 [※해당 캐릭터는 서브서브서브 히로인이어서 절대로 공략될 수 없습니다]라는 경고문을 뜨게 만들 암세포를 아예 대전 한복판에다 분양시켜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유지원은 아예 대전에 눌러 지내면서 고요리와 매일같이 접촉했다. 어쨌든 고요리는 아침저녁 급식소로 출근해야 했으며 그때 유지원이 접근하면 막아 낼 방도가 없었다.
2일 차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어디까지나 훈훈한 잡담만을 나눴다.
3일 차에도.
4일 차에도.
마침내 5일 차.
[장의사 씨. 유지원 양 신변에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 같아요.]슬슬 입질이 느껴졌다.
“어떤 이상 현상입니까?”
[…무언가 기묘해요. 잘 설명하기 어렵지만 유지원 씨가 숙소에서 나와 걷기 시작하면, 처음 보는 사람들이 다가와서 대화를 걸어와요.]“흠. 지원이 걔가 얼굴 가죽만큼은 에르메스급으로 뽑혔잖아요. 그냥 사람들이 명품 보고 홀린 거 아닙니까?”
[외모가 뛰어나다는 걸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분은 처음이네요……. 으음, 아니에요. 정말로 기묘해요. 직접 와서 보시는 편이 빠르겠어요.]그래서 봤다.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게 유지원의 뒤를 미행했다.
“아이고, 지원 씨! 이번에 운 좋게 꿀사과를 얻었는데 여기 하나 잡숴 봐. 응? 아휴, 돈은 무슨 돈이야. 그냥 가져다가 먹어! 내가 지원 씨 볼 때마다 이뻐 죽을 거 같아서 그래!”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와아! 지원 누나다! 누나, 누나, 오늘도 같이 놀아요! 저희 놀이터에서 같이 그네 타요!”
“예. 저녁에 시간이 빈다면.”
…성녀의 말대로 그건 기묘한 풍경이었다.
유지원이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가와서 저마다 말을 걸쳤다.
이미 수차례 언급했지만 유지원은 영원한 얼음을 깎아 만든 수정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늘상 표정을 짓지 않아 조각상엔 언제나 영구동토의 서늘함이 깃들었다.
이런 사람에게 섣불리 다가가서 친근한 척 대화 붙이는 일이 과연 쉬울까?
설령 붙인다 쳐도 아무런 높낮이 없는 목소리, 어떠한 감정도 스미지 않은 안경알 너머의 눈빛이 보답으로 되돌아올 뿐.
한마디로 말해 친절하게 대하는 보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주민들은 유지원에게 말을 붙이는 행위가 너무 즐겁다는 듯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성녀님. 텔레파시로 지원이랑 연결 좀 해 주십시오. 얘 멘탈을 체크해 봐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연결되었습니다. 유지원 양의 말을 제가 읊어 드릴 테니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감사합니다. 야, 지원아. 괜찮냐?”
[괜찮습니다.]성녀의 목소리로 재현된 유지원의 대사는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볼 때 대전은 이미 볼드모트의 수중에 떨어졌다. 적어도 너한테 얘기를 거는 사람들은 죄다 볼드모트란 존재에 홀려 버린 게 확실해. 저들은 너에게서 어떻게든 호의를 끌어내기 위해서, 이 도시에 붙잡아 두려고 아양을 떠는 거다.”
[흠. 이상하다는 판단은 저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제 호의를 끌어내려는 수작이라면 심각하게 얄팍하군요.]“뭐?”
[귀찮습니다.]“…….”
[저는 식당에 갔는데 식당 주인이 저를 알아보고 잡담을 걸어오면, 그야 티는 내지 않습니다만 귀찮게 여기는 유형의 인간입니다. 지금 길거리는 그저 거대한 동네 식당처럼 느껴지는군요.]다음 날.
대전이란 도시 자체가 고요해졌다.
“…….”
유지원이 숙소에서 나왔지만 아무도 대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어제 사과를 바가지로 챙겨 주던 아주머니도, 같이 놀자며 조르던 동네 꼬마들도, 하나같이 무표정을 지은 채 유지원을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쳤다.
나는 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조금 편안하군요.]유지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녀석의 감상은, 말하자면, 마침 카페에 들어갔는데 창가 자리가 비어 있어서 운이 좋았다, 정도에 불과했다.
어제까지 자신한테 집착하던 도시 주민들이 갑자기 쌀쌀하게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해하거나 당황하는 기색 따윈 일절 없었다.
하지만 이러면 당연히… 이건 유지원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애당초 대화든 뭐든 교류가 하나도 없으면 사람을 홀릴 수도 없었으니까!
그때부터였다.
저 도시가 본격적으로 난리 부르스를 치며 날뛰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악!”
어떤 주민이 뛰어오다가 유지원이랑 퍽, 부딪혔다. 주민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그 순간, 끼이이익- 콰앙! 코앞에 트럭이 지나치면서 건물에 박아 버렸다. 주민이 벌떡 일어서서 유지원의 손을 잡았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당신이랑 부딪치지 않았다면 트럭에 치여서 죽었을 겁니다!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네. 목숨 관리 잘하시길.”
“…….”
유지원이 빵집에 들어선 순간, 직원들이 좌우에 일렬로 늘어서서 폭죽을 터트렸다.
“축하드려요! 고객님! 당점이 오픈한 이래 고객님이 정확히 10만 번째 손님이세요! 특별 행사로 오늘부터 매일 고객님께 모든 상품을 5개 한정해서 무료로 드리겠습니…….”
“아, 죄송합니다만 저 그런 행사는 선호하지 않습니다. 다음 고객한테 양보하시지요. 바게트 남아 있으면 사 가겠습니다.”
“…….”
유지원이 가는 길마다 ‘우연한 사고’로부터 목숨이 구해졌고 ‘기막힌 확률’로 행운이 찾아왔다.
유지원은 그 모든 만남을 생 깠다.
[왜 무시했느냐고요? 그야, 저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보다 장의사 각하의 지시를 따르는 편이 압도적으로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제 다음 회차를 책임져 줄 것도 아니잖습니까?]유지원은 나한테 공급받은 자금으로 먹고 싶은 걸 먹고 사고 싶은 걸 사면서, 그냥 하루에 2번씩 광장에 가서 고요리랑 잠깐 대화했다.
요컨대 이 세기말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풍족하게 살았다.
정반대로,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점점 더 날이 갈수록 도시 주민들의 얼굴은 수척해져 갔다.
탕! 탕탕, 타아앙!
30일 차에 이르렀을 무렵, 유지원의 숙소 근처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제부터 이어질 장면은 차후에 유지원이 증언해 준 내용에 따라 재구성한 것이다.
총성이 울린 직후, 팔뚝에 총상을 당한 남자가 유지원의 방문을 쿵쿵 두들겼다고 한다.
“도, 도와주십쇼! 제발 문 좀 열어 주십시오! 꼭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방주인이 뭐라 하기도 전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창가에서 라틴어로 된 책을 읽던 유지원은 그저 귀찮다는 듯 눈썹을 까닥거렸다.
“또 무슨 일입니까?”
“아. 나, 나는 이 도시에서 제일가는 길드의 수장이다. 지금 부하 새끼한테 뒤통수를 때려맞았어. 하지만……. 그놈은 기습했는데도 나를 죽이지 못했지. 내 동생들이 달려와서 그놈한테 복수해 줄 거다.”
“하아.”
“네가 문을 열어 주지 않았으면 난 복도에서 죽었겠지. 고맙다. 네가 바란다면 이 도시의 모든 것을 너에게……!”
유지원이 책을 내려놓고 걸어갔다.
참고로 유지원은 국도관리대장의 작전실장이었고, 한참 유성우를 토벌했던 회차에선 총 12조로 구성된 결사대 가운데 당당히 1조 팀장을 떠맡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오러 운용법에 있어서 유지원은 나 다음가는 실력자라는 소리였다.
당연히 팔뚝에 총구멍이 뚫린 군벌 따위는 상대조차 안 되었다. 유지원은 닭을 들어 올리듯 가볍게 길드장을 한 손으로 끌어올렸다.
“어?”
그리고 방문을 열어다가 복도로 내팽개쳤다. 배신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길드원들이 목표물을 찾고 움찔거렸다.
암살자들을 향해 유지원이 말했다.
“뭐 하십니까? 안 죽입니까?”
“…….”
“그럼 저는 들어가서 마저 독서할 테니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쿵. 방문이 닫혔다.
여기까지가 유지원의 기억에 따라 재구성된 장면이었다.
복도에서 총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4
그날 밤.
대전의 어두컴컴한 도시 하늘에 기기묘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오오오……. 오오…….
-이히히, 이히히히! 이히히!
그건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호랑이의 으르렁거림을 닮기도 했으며, 아이들의 무수한 웃음소리 같기도 했다. 모든 소리가 뒤섞여서 동시다발적으로 메아리를 일으켰다.
나조차 처음 겪어 보는 괴현상.
“성녀님, 도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찰하실 수 있겠습니까?”
[죄송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현재 대전에 위치한 각성자들은 전원 수면 상태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 때문인지, 전부 까만색밖에 보이지 않아요.]“……”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고요리 씨를.]“안 됩니다.”
즉답했다.
나에겐 모종의 직감이 느껴졌다.
지금 이 상태는 ‘올바른 공략법’을 통해 이루어진 결말이 아니었다.
게임에 비유하자면 일종의 치트키를 사용해서 엔딩을 개방한 느낌에 가깝다고 할까.
문제는 이것이 결코 해피 엔딩은 아니리란 점에 있었다. 억지로 일깨워진 ‘무언가’는 대단히 격분하고 있으리라.
“고요리는, 혹은 고요리에게 드리운 괴이는, 도시 전체의 주민들을 홀려서 통째로 조종할 수 있다. 이 정보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최고의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접촉은 위험합니다.”
[네. 알겠어요.]“지원이는 어떻습니까?”
[새까매요. 다른 각성자들과 똑같이.]기괴한 곡성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유지원의 행방은 날이 밝은 다음에 드러났다. 아침 7시가 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깨어나 숙소에서 걸어 나온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대전에 진입해서 유지원과 접촉했다. 그리고 어젯밤에 이상한 소리를 듣지 못했냐고 물었다.
“소리 말씀입니까?”
유지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각하.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잠들 때 수면안대와 귀마개를 착용했습니다.”
날이 밝으면서 사라진 것은 비단 곡성만이 아니었다.
도시 주민들도 모조리 실종되었다.
여전히 성녀의 [천리안]으로도 아무것도 관찰되지 않았다. 관찰되는 각성자는 오직 유지원뿐.
즉각 지도를 펼쳐서 유지원의 [미니맵]을 발동해 봤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고요리는 물론이거니와 대전시에 있었던 각성자들은 단 한 사람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한순간에 증발해 버린 것처럼.
그날 이후, 회차가 끝날 때까지 고요리와 대전 시민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참.”
하고 유지원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편지였다.
이번 에피소드의 후일담을 장식해 줄 물건이기도 했다.
“각하. 받아주십시오.”
“이게 뭐냐?”
“고요리 양이 각하께 전달하는 서신입니다.”
“…….”
“더 정확히는, 만일 더 이상 자신이 급식소를 운영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날 일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한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머뭇거리면서 편지를 받았다.
봉투를 열었다. 종이에서 달디단 사과향이 훅 풍겼다.
-謀事在人, 成事在天.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되,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
모사재인. 성사재천.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구절이었다. 진인사대천명과 뜻이 비슷하니 언뜻 아무에게나 건넬 수 있는 격언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필 삼국지의 문장을 따왔다는 사실이 나의 심장을 불온하게 흔들었다.
‘꼭 내가 유지원을 파견한 장본인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 같지 않은가?’
…무엇보다 나는 고요리의 필체를 알고 있었다. 한때 내 길드에 받아들인 사람이기도 했으니 당연했다.
눈앞의 편지에 적혀 있는 필적은 명백히 그 시절 고요리의 필기체와 달랐다.
어쩌면 이 편지에 적힌 문장이야말로 내가 처음으로 목격한 고요리의 진정한 단면일지도 몰랐다.
[인식 조작] 필터에 걸리지 않은 최초의 흔적.편지의 뒷장을 마저 뒤집어 보았다.
-태풍의 나비와 꿈속의 나비는 서로 다른 존재예요.
온몸이 정전기에 걸린 것처럼 쭈뼛거렸다.
괴이 ‘나비효과’의 푸른색 모르포 나비. 그리고 ‘로그아웃 게임’의 마지막에 출현했던 나비.
그 둘의 존재를 암시하는 문구였다.
이 세상에선 오직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메시지였으며… 동시에, 이 당시의 내가 가장 궁금해하던 정보 중 하나였다.
고요리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또한 거울처럼 단순히 내가 보고 싶은 정보를 되비쳐 줄 뿐인가.
어디서부터 나는 홀려 있었는가.
“…지원아. 언제 이 편지를 받았냐?”
“아. 첫날에 만나서 헤어질 때 받았습니다.”
“…….”
“편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만 들어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에게 직접적인 위해는 끼치지 않겠노라 약속하더군요.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었습니다.”
유지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언가 이상한 내용이라도 적혀 있습니까? 각하?”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단지, 사과향 풍기는 편지를 접으며 새삼스럽게 생각한 것이었다.
――역시나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를 싸움 붙이면 무승부라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노라고.
– 세뇌자. 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