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21)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21화(12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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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자 Ⅰ
신노아
1
어느덧 내 썰도 120화를 넘겼다.
내가 직접 숫자를 일일이 세어 본 게 아니라 오독서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나야 잘 모르겠지만 ‘자칭 웹소설 전문가’이신 오독서 씨의 주장으로는 120이라는 숫자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던가.
“알았지, 아저씨? 아무튼 120화 분량이 필요해. 120화까진 차질 없이 나한테 건네줘야 해.”
“그건 또 왜?”
“왜냐하면 120화까지 넉넉하게 쟁여 놓고 플랫폼에다 한꺼번에 풀 예정……. 아, 씨. 설명하면 아저씨가 알아? 아저씨 어차피 공허 도래 이전까진 웹소설 쳐다본 적도 없다매.”
“음.”
“아무튼 120화! 최소한 120화 분량이 필요해. 이거 나한테 다 계획이 있어서 하는 말이니까!”
오독서는 내 편집자라도 된 것처럼 나를 박박 긁어 댔다. 실제로도 편집자의 역할을 수행하긴 했다.
늙고 병든 내가 뭘 어쩌겠는가? 젊은이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다만 글을 쓰는 방법은 내게 달렸다.
나는 전통적인 방법을 선호했다. 공책에다 손글씨로 글을 써서 오독서에게 전달해 준 것이었다. 어떨 때는 조금 더 전통적인 방식으로 회귀했는데, 아예 글이 아니라 입으로 구전문학을 들려주었다.
요즘 세대가 잃어버린 옛 전통을 맛보여 주자 오독서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씨발. 이러면 어떻게 해? 써먹을 수 있는 원고를 줘야 할 거 아냐.”
나는 편집자에게 친절한 작가였다. 고로 오독서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서 답변해 주었다.
“내 알 바임?”
“…….”
“수고하거라.”
본인의 역할은 그저 썰을 풀어서 들려주는 것뿐.
그걸 어떤 특정한 형식에 맞추어서 편집·수정·오타 검수·재단하는 일까지 나한테 시키면 곤란하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회귀자의 삶이 바빠서 그렇다.
만일 내 썰이 어디엔가 공식적으로 풀렸는데 오류가 발견된다면 그건 내 탓이 아니다. 당연히 전적으로 오독서 잘못이다.
[완전 기억 능력]을 보유한 나 장의사가 실수를 범할 리 없잖은가?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행여라도 오타 따위가 관측된다면 ‘아오 오독서시치’라고 탓해 주시면 되겠다. 얘가 중2병 오타쿠이긴 해도 인성은 착하니 부디 마음 넓은 여러분들이 이해해 주시라.
각설하고.
아무튼 120화가 기념비적인 숫자라고 하니, 이참에 여태까지 내 썰에서 등장한 한반도의 도시들을 정리해 봐도 좋을 듯싶다.
아포칼립스 시대에 새로이 제작된 지도라고 할까.
오독서한테 정세를 설명하면서 건네주었던 메모를 그대로 옮겨 놓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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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도관리대의 본부.
김해평야 및 규슈에서 ‘검후’를 통해 생산된 식량은 부산에 저장된다. 국도관리대의 순찰대들은 상단을 겸하며, 식량 및 물자를 부산에서 전국으로 운송한다. 이 때문에 순찰대를 ‘캐러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산 내의 사법 권력과 군사 권력은 삼천세계 길드에서 행사한다. 국도관리대와 삼천세계는 혈맹 관계.
한반도의 마지막 희망. 틈만 나면 단수와 정전이 발생하지만 빗물과 촛불의 낭만이 있다면 문제없음. 그래도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건배.
-주요 인물: 노도하, 당서린, 유지원, 쇼 노인의 시체.
[대전]거대수용도시. 한반도에서 발생한 난민과 유민의 대다수가 이곳에 모인다.
대전 인근에는 공허독(空虛毒)에 의해 변질된 생물들이 다량 서식한다. 이러한 생태계를 이용하여 대전은 자체적으로 식량을 생산한다. 단, 식료품의 안전성은 일절 보장되지 않는다.
사실상 분홍머리에 의해 조종당한다고 봐야 할 대만족회 길드에서 대전을 관리한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부디 이 도시에 방문하여 관광을 즐기자.
-주요 인물: 볼드모트.
[세종]평양과 더불어 한반도 굴지의 신성도시. 천요화의, 천요화에 의한, 천요화를 위한 백작령.
백화여고 출신으로 이루어진 백화 길드에서 도시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본래 백화의 길드원들은 천일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신봉하는 집안들의 자제였으며, 지금도 천요화를 받들어 모신다. 천요화 본인이야 사이비 종교 따위에 질색한다지만 도시가 돌아가는 꼬락서니는 누가 어떻게 봐도 사이비 총본산.
갑자기 아포칼립스에 살아가는 일에 지쳤다면 세종에서 천요화를 욕하자. 추천 문구는 ‘아무리 그대로 교복을 입고 다니는 건 좀 머리 이상한 거 아니야?’로, 자신의 몸 안에 이토록 많은 장기가 있었음을 새삼 깨달아 보는 생물 수업을 이수할 수 있다.
-주요 인물: 천요화.
[서울]최전선. 한강 이남은 초토화됐다. 한반도에서 가장 저렴한 집값을 자랑한다.
북쪽에서 끊임없이 몰려오는 괴이들을 막아 내는 방어 라인이 형성되어 있다. 잠수교와 성수대교를 제외한 모든 다리들은 안보를 위해 폭파되었다.
본래는 내 아지트도 서울에 위치했으나, 이누나키 터널이 개조된 이후부터는 천요화의 백화 길드가 서울을 사수하고 있다.
아직도 한강뷰를 원하는 구세대의 인물이라면 필히 추천. 단, 한강뷰와 더불어 괴이뷰도 딸려온다는 사실에 유의할 것.
-주요 인물: 성녀.
――――――――――
이 밖에도 제주도, 나주, 평양 등등 여러 도시가 있지만 내 썰에선 아직 다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생략하겠다.
“어라? 아저씨.”
일단 이렇게 정리해 놓고 지도를 펼쳐 보면 오독서와 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의외로 해 볼 만하지 않아?”
“음.”
“식량 생산도 차질이 없고, 부산을 중심으로 세력도 잘 굴러가고 있고. 천요화도 아저씨를 엄청 따른다면서. 그럼 세상을 구한다… 까진 무리여도 한반도를 구하는 것까진 쌉가능한 부분 아님?”
“글쎄.”
미안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
당장 지난번 에피소드에서 하룻밤 만에 대전이 증발해 버리는 광경을 여러분은 목격했으리라.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말하겠다.
이 세계는 인간을 증오한다.
2
우선 세상이 멀쩡하던 시절에 제작된 지도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단 사실부터 지적해 둬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우리 인류에게 빅엿을 먹이는 일에 굉장히 진심이기 때문이다.
만약 국도관리대에서 무턱대고 순찰대 캐러밴을 보내놓으면 다음과 같은 사고가 상당히 자주 발생한다.
-아, 이거 큰일이네. 이쯤 되면 대전이 나와야 하는데. 왜 자꾸 뺑뺑이만 도는 거 같냐?
-팀장님. 큰일입니다. 저희 벌써 14일째 여기 근방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SG넷에 게시글을 올려 봐도 댓글이 전혀…….
-14일? 무슨 소리야, 부팀장? 아직 4일밖에 안 됐잖아.
-예?
실종. 증발. 행방불명.
분명히 버스 정거장 2개쯤에 불과한 거리를 건너갈 뿐인데 시간상으로는 보름이 넘게 걸린다든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치채 보니 연못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든지.
강물이 흘러야 할 곳엔 암염 광산이 솟아나고, 산이 있어야 할 장소엔 저 멀리 수평선까지 광활한 호수가 펼쳐진다.
말 그대로 미궁.
공허에 잡아먹힌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미로, 라비린토스나 다름없다.
이런 세상에 내게 주어진 역할은 미궁의 격파. 그리스신화에 비유하자면 미로를 꿰뚫고 미노타우로스로 스테이크를 구워 먹은 테세우스에 해당하겠지.
“장의사 각하.”
“응? 뭐냐?”
“제 지도에서 21번 순찰대가 벌써 3시간째 정지해 있습니다.”
“미동도 안 해?”
“예.”
“전봇대는? 전선은?”
“끊긴 것 같습니다. SG넷에 주기적으로 올라오던 보고서도 180분 이전 시점에서 멈추었습니다.”
“아……. 또 공허에 갇혔구나. 하여간 대전 근처에만 순찰대를 보내면 꼭 문제가 생긴다니까. 성녀님? 보고 계십니까?”
[네.]“21번 순찰대에 성좌 이름으로 메시지 좀 쏴 주십시오. 곧 구조대가 갈 예정이니 당황하지 말고 제자리에서 대기하라고.”
[직접 가 보실 생각인가요?]“예, 전선이 끊어졌으면 수리도 해야 하니까요.”
[알겠어요.]유지원의 ‘미니맵’과 성녀의 ‘텔레파시’.
두 사람의 보조 덕택에 나는 이 험난한 아포칼립스에서도 어떻게든 도시와 도시 사이를 연결했다.
면(面)의 지배야 언감생심 바랄 수 없을지언정 선(線)의 통치까지는 기대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성녀와 유지원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인재들이 국도관리대에 조력하고 있었다.
“하율아.”
“응?”
“전선 또 끊겼댄다. 실 깔러 가자.”
테세우스가 미궁을 걸어가려거든 아리아드네도 있어야 하는 법.
인형사 이하율.
거미처럼 인형실을 뽑아내는 이 아이도 한반도의 국도를 관리하는 데 없어선 안 될 인재였다.
3
하율이를 등에 업고 뛰어가자, 21번 순찰대가 숲 한복판에서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공허에 홀려 버린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지 대원들의 몰골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아……! 장의사님!”
순찰대의 대장(隊長)이 나를 알아보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국도관리대 안에서 내 공식적인 직책은 회차마다 달랐지만 언제든 대원들로부터 깍듯한 대접을 받았다.
“와 주셨습니까!”
“그래. 다들 고생 많았다.”
나는 배낭에서 하율이와 초콜릿을 꺼냈다. 하율이는 자기 멋대로 끼익끼익 걸어갔고, 초콜릿은 내가 대원들한테 나눠 줬다.
“조난당한 지 며칠 지냈나?”
“제 기준에선 오늘로 15일째입니다. 그런데 대원들마다 느끼는 일수가 달라서,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제대로 홀렸군. 태양은?”
“수칙에 적힌 대로 방향을 관측해 봤습니다만 1일째는 남쪽, 2일째는 동쪽, 3일째는 북쪽 등등, 날에 따라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달은?”
“저는 쭉 1개로 관찰했습니다만 대원들 가운데 달이 3개로 보였다는 증언이 딱 1번 있었습니다.”
“혹시 실종된 대원이 있나?”
“없습니다. 전원이 3인으로 조를 편성해서 움직였습니다.”
물론 그럴 리 없었다.
태양과 달까지 오염될 만큼 공허에 깊이 잠식되었는데 전원이 무사히 귀환할 가능성은 정말 희박했다.
확인해 보니 24명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할 순찰대가 21명으로 줄어 있었다. 다만 실종자 3명에 관해 동료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기억하지도 못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러다가 정말 대전 근처엔 따로 길을 뚫어야지, 원.’
그때 하율이가 나를 쳐다봤다. 녀석이 쪼끄만 양손을 바삐 움직였다.
-발견. 망가진 곳.
수어(手語)였다.
원래라면 하율이가 가정부로 데리고 다니는 인형이 있어 그녀 대신 대화를 발음해 주었지만, 이번엔 워낙 급히 움직이다 보니 가정부를 빼놓고 왔다.
그래도 우리 둘끼리는 수화로 잘만 대화했다. 심지어 가끔은 한국 수어 말고 일본 수어로도 떠들었다.
“어디?”
-여기.
스르륵-
하율이가 황금색 오러를 일으켜서 손짓하자 땅속에서 가느다란 인형실이 끌려 나왔다. 실은 중간에 톡 끊어져 있었다.
전선(傳線).
하율이가 뽑아내는 인형실은 길드 아지트의 보안에만 사용되지 않았다. 이렇게, 국도관리대가 쓰는 도로의 지하에는 인형실을 쭉 이어 놓았다.
이하율의 인형실은 오러에 한정해서 거의 상온초전도체에 가까운 성능을 발휘했다. 오러에만 능통하다면 전선을 통해 모스 부호를 보내는 것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전선’은 순찰대 입장에선 정말로 아리아드네의 실과도 같았다.
공허에선 천체현상도 나침반도 쉬이 무력화되었다. 그런 미로 속에서 하율이의 인형실은 ‘유일하게 객관적인 지표’였다.
나와 이하율은 가장 안전한 길에만 인형실을 매장했다.
즉, 순찰대원들이 전선에 오러를 실어 가며 움직여 주기만 한다면, 적어도 위험지대를 피해 갈 수 있었다.
달리 말해 모종의 이유로 인형실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순찰대원들의 생환율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왜 끊어진 거 같니?”
-몰라. 땅속에 서식하는 괴이의 짓으로 추정됨.
“하아……. 여기 근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 진짜로 대전 루트는 포기하고 세종 루트로만 보내야겠다.”
-괜찮아?
“이럴수록 대전이 고립돼서 공허화가 더 심각하게 진행되긴 할 텐데, 뭐. 다른 방법이 없네. 일단 전선부터 다시 설치해 두자. 이번엔 조금 더 지하 깊이 파묻어 보렴.”
-응.
하율이의 손톱 밑에서 실이 흘러내렸다. 인형실은 땅을 마치 케이크처럼 가르며 낙하했다.
쿠웅-
그동안 나는 전봇대를 가져와서 메다꽂았다. 전봇대는 전국 어디에서도 구하기 쉬운 물건이었을뿐더러, ‘여기 지하에 전선이 지나가고 있음’이란 표식으로 사용하기 제격이었다.
보수 작업은 금방 끝났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구조 작업은 이제 시작이었다.
“박 팀장.”
“네, 장의사님.”
“팀원들 데리고 세종으로 올라가 있도록. 내가 이 근처에 잠깐 볼일이 있는데 그거 끝나면 합류하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순찰대 캐러밴이 움직였다.
380회차 이후였다면 뾰족이랑 콩콩이가 마차 노릇을 해 주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205회차에 벌어졌다. 순찰대원들은 손수레를 끌고 멀어졌다.
“좋아. 후딱 처리하고 돌아가자. 하율아, 업혀.”
-응.
하율이가 폴짝 뛰어서 내 등에 나무늘보처럼 붙었다. 나는 회귀자의 남다른 보법으로 주변 일대를 싹 뒤졌다.
이하율이 등 뒤에서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수어를 맺었다.
-웃음. 웃음. 웃음.
“…….”
이 녀석, 내 등에 업혀서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본인 표현에 따르면 꼭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나 뭐라나.
아무튼 한 시간 내내 돌아다녔지만 실종자는 찾지 못했다.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나- 싶었을 무렵, 외딴 공허에서 보여서는 안 될 무언가가 시야에 비추었다.
-오빠. 저기.
“…그래. 나도 보고 있다.”
뚝. 나는 발을 멈췄다.
[DREAM CASINO] [몽유오락장(夢遊娛樂場)]번쩍번쩍.
분홍빛 빨간빛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부산에서도 심심할 때마다 매일같이 정전이 벌어지는 판국에 어디서 저런 전력을 끌어왔는지 모를 판국이었다.
“아니, 웬 카지노야……?”
…아무래도 실종된 관리대원들은 도박꾼으로 전직해 버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