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29)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29화(12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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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자 Ⅰ
신노아
1
혹시 여러분, 악몽을 자주 꾸시는가?
나는 자주 꾼다.
가령 어느 날 꿈속에선 고려장 빌런이 서규를 완전히 자신의 부하로 복속시켰다. 그리하여 SG넷의 폭군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고려장: 이, 이제부터 SG넷에선 삼국지 같은 틀딱 떡밥은 24시간 내내 금지하겠습니다…….
-ZERO_SUGAR: 그게 무슨 소리니, 아련아?
-고려장: 아앗, 이 원망과 원한. 역시 길드장님의 어그로가 제일 맛있어요. 너무 맛있어요. 길드장님은 극상의 맛집이에요……!
-고려장: 이제부터, 제가 하늘에 서겠어요…….
그러자 모든 SG넷 회원들이 새로운 운영자의 용단에 감탄하며 박수를 치는 것 아니겠는가.
심지어 맨날 익명으로 접속하는 성녀도, 좀처럼 커뮤니티 활동을 안 하는 노도하마저 이 순간만은 본명으로 가입하여 고려장 빌런을 찬양하였다.
이 무슨 끔찍한 악몽.
천하가 용서하더라도 나 장의사가 용서하지 못할 참극이었다. 이 꿈을 꾸자마자 나는 다음 날 심아련의 카페모카에 에스프레소를 몰래 한 샷 더 넣었다(아련이가 커피맛의 변화에 의아해했다).
이보다는 덜 끔찍하지만 그래도 리얼리티가 조금 더 가미된 악몽들도 있다.
-선생님? 선생… 님?
그 악몽 속에서 나. 즉, ‘장의사’는 이미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완전 기억 능력]을 체득한 나조차 꿈의 광경만큼은 떠올리긴 어려웠다. 튜토리얼 요정들에게 1,000억 원짜리 자각몽을 구매해서 꿈꾼다면 또 모를까.
어쩌다 죽었을까.
누군가에게 배신당하여 등이 찔렸던가? 웬만해선 항상 호신강기를 두르고 다니는 내가 무심코 마음을 놓을 정도로 신뢰하던 사람한테 살해당한 것인가. 아니면 오러가 별로 유효하지 않은 어떤 괴이에게 죽었을까.
내 사인(死因)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천 가지가 넘었으므로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일어나세요, 선생님. 네? 눈떠 주세요…….
다만 내가 죽은 모습을 꿈속에서 천요화가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바라본다’라는 표현은 올바르지 못했다. 천요화의 붉은색 눈동자는 마치 빗길의 자동차 앞유리처럼 젖어 거의 아무것도 안 보였다.
더듬. 천요화는 내 시체 앞에 무릎을 꿇고, 시각 대신 촉각으로 내 윤곽을 한 뼘씩 더듬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꿈속이라 그런지 나는 유체이탈이라도 겪은 것인 양 세상을 3인칭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상의 장르는 고어물이었다. 내 시체엔 온전한 부위가 없었다.
-…….
천요화도 곧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죽어.
그리고 되씹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버려.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
그리고 꿈속 풍경은 급변했다.
천요화의 주변으로 무언가, 오래된 텔레비전의 노이즈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백색과 흑색이 번갈아서 튀겨 대는 노이즈가 급속도로 펼쳐진 것이었다.
‘아.’
천요화를 중심으로 해일처럼 번져 나간 노이즈의 파도는 삽시간에 도시 하나를, 한반도를, 세계 전체를 집어삼켰다.
노이즈가 확장될 때마다 세계가 비명을 질렀다. 지지직- 비명과 비명 사이에선 연거푸 핏물이 터졌다.
자작나무와 피안화.
노이즈의 색깔과 핏물의 색채는 한때 백화여고에서 피어났던 그것과 꼭 닮았다.
신역(神域).
소외신의 영역. 자신을 봉인한 주인이자 무녀인 천요화가 세계의 멸망을 소원했을 때, 무간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세상을 흑백색과 적색으로 물들여 주었다.
‘요화야. 안 된다, 요화야. 그러지 마라.’
백화(百話)의 괴이를 모조리 수감시킨 천요화의 타락은 가공스러운 위력을 내보였다.
애당초, 바로 이런 사태야말로 내가 상정해 두었던 [배드 엔딩] 시나리오였다.
소외신은 위험했다. 그런 소외신을 봉인하게 된 천요화는 언제나 더 처절한 재앙이 되어 강림할 위험을 간직했다.
하지만 천요화는 결코 약한 아이가 아니었다. 강했다. 117회차 이후,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천요화의 멘탈이 붕괴되는 모습을 좀처럼 목격한 적 없었다.
그래.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만일 내가 죽는다면?
그것도 천요화보다 먼저 죽는다면, 심지어 천요화가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모욕스러운 방식으로 죽어 버린다면.
내가 손수 졸업장을 건네주었던 제자는 과연 어떻게 될까?
까 하 하 하 하 까 까 까 까-
유리 감옥에서 풀려나온 무간이 소리 높여 광소했다.
지구는 모조리 흑백의 노이즈 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회귀자에 의해 불의의 암살을 당해 버린 소외신이 마침내 귀환하여 최종 승리를 선언했다.
비록 한낱 꿈에 불과했으나, 그저 소외신의 정신승리로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불길한 웃음소리가 우주를 수놓았다.
세계가 종말하면서 내는 장송곡은 비웃음이었다.
-어라?
그때였다. 천요화(千謠話)를 역으로 집어삼킨 천요화(天寥化)가 웃음소리를 멈추었다.
지그시-
그것이 나를 쳐다보았다. 흑백의 노이즈가, 지구가, 우주가, 세계를 소외시킨 신이, 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안 죽었네? 아직?
거기서 나의 꿈은 끊어졌다.
2
비슷한 악몽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비단 천요화만 내 악몽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꿈을 꿀 때마다 주인공이 바뀌었다. 당서린, 성녀, 이하율, 심아련…….
물론 꿈은 꿈에 불과했다. 그냥 ‘기분 나쁜 개꿈이로군’ 하고 넘겨 버리는 일은 간단했다. 실제로도 그렇게 무시해 왔고.
“호에? 악몽인가요?”
하지만 205회차에 튜토리얼의 요정이 사실 몽마(夢魔)였다는 정보를 손에 넣은 다음부터는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내 악몽을 조금 더 진지하게 다룰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 아무래도 꿈은 너희들의 전문 영역이잖냐. 혹시 ‘꿈에 기생하는 괴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있는 거냐?”
“호에에. 물론이다예요!”
264번 요정이 엉덩이를 씰룩였다.
“우리들 요정뿐만 아니라 꿈엔 이런저런 괴이가 잔뜩 있는 거예요!”
“잔뜩?”
“호에. 인간들은 옛날부터 꿈을 또 다른 차원으로 여기는 습관이 대단히 오래되었다는 것이에요! 서기장 동지께서 직접 개발하신 용어사전에 입각하여 사태를 묘사해 보자면, 꿈이란 ‘이 세계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가 들어갈 수 있는, 혹은 들어가게 되어 버리는 이세계’에 해당해요!”
“…공허로군.”
“힉힉힉. 정답이다예요! 한 번도 공허에 들어가 본 적 없는 인간은 있을 수 있어도 한 번도 꿈을 꿔 보지 못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꿈이라는 공허를 겪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종족인 거예요! 그리고 그런 ‘첫 번째 공허’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본 요정들……! 실로 근본이 넘치는 종족! 우리의 정당한 레벤스라움인 꿈의 영역을 노리는 반동분자가 있다면 떼찌떼찌인 거예요!”
“음.”
꿈도 하나의 공허일 수 있다. 아니, 공허다.
해당 영역의 전문가인 요정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니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난 의문이 생겼을 때 혼자서 끙끙 앓는 성격이 아니었다.
곧바로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상담사를 찾아가서 ‘악몽’에 관해 털어 놓았다.
“그 상담사가 왜 하필 저입니까……?”
“왜냐면 악몽에서 단 한 번도 당신이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아…….”
노도하 관리대장이 안경알을 닦았다. 딱히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얼마나 오래 안 빨았는지 안경수건 자체가 더러웠거든.
탁, 나는 손가락을 튕겨 오러를 일으켰다. 그리고 노도하의 외안경에 낀 땟자국을 섬세하게 청소해 주었다.
“그거 수건이 아니라 물로 닦으라니까요.”
“한가하게 그럴 시간 없습니다. 존나게 바빠서요. 흐. 누구누구가 심리상담이 필요하답시고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지만 않았더라면 저에게도 여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지원이가 그랬단 말씀입니까? 제가 나중에 단단히 혼내 두겠습니다.”
“이 새낀 진짜 양심이 없나……?”
“아무튼 저랑 같이 생각 좀 해 주십시오. 만약 이 ‘악몽’이 괴이라면, 왜 저에게 자꾸 이런 꿈을 보여 주려 드는 것일까요?”
“흐으음…….”
노도하가 펜 끝을 이빨로 오물거렸다.
“…일단 이 모든 게 당신의 기분 나쁜 무의식이 만들어 낸 개꿈이란 가능성은 차치해 두자면.”
“진짜 대체 저를 어떤 인간으로 보는 겁니까?”
“당신의 멘탈을 뒤흔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군요. 뭐, 괴이에겐 지성과 이성이 없습니다만. 괴이를 인간과 같은 지성체로 대입해서 생각해 볼 때, 솔직히 장의사 당신이 불가사의한 눈엣가시일 겁니다…….”
“눈엣가시?”
“예에.”
노도하가 히죽였다.
“언제 어떤 괴이들이 출현할지 전부 파악하고 있는데다, 심지어 온갖 기기묘묘한 수단을 동원하여 괴이들을 격파하고 있지요……. 이게 불가사의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런 당신을 물리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압도적인 물량 혹은 정신적인 공격…….”
“…….”
“압도적인 물량. 이쪽이 몬스터 웨이브에 해당하겠는데에……. 당신 말에 따르면 이것도, 그 뭐냐아, 독을 마시는 새 어쩌고 덕분에 아무튼 8년가량은 버틸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예.”
“그럼 이제 별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의 정신을 야금야금 흔들어 보는 수밖에. 예전부터 지적하려고 했는데……. 장의사 각성자. 당신은 괴이들을 조금 너무 압도적인 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야 압도적인 적이니까요?”
“뭐어, 실제로도 대양급 소외신급 정도 되면 우리 인간들 따위야 벌레처럼 여겨도 되겠죠. 도시급에 불과한 십족도 당신 성장하기 전까진 절망적이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역으로 괴이들 입장에서 보면, 당신도 충분히 무시무시한 존재 아닐련지……?”
“음.”
“그러니 제가 괴이라면 당신의 정신을 무너트려 보겠습니다.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망가지는 광경을 차례차례 보여 준다라……. 나쁘지 않은 전법 같습니다만, 어떻습니까……?”
확실히.
노도하의 분석에는 일리가 있었다.
물론 그녀 스스로도 강조했다시피 괴이에겐 인간과 같은 지성이 없었다.
괴이가 ‘나’를 무너트리는 ‘목적’을 가졌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내게 위협이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보는 편이 합당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내 정신붕괴를 초래하려는 괴이’가 존재한단 사실만큼은 똑같았다.
“관리대장이랑 얘기를 하니까 좀 정리되는 기분이군요. 하지만 역시, 그래 봤자 꿈 아니겠습니까? 당장은 우리의 현실엔 별다른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같으니 내버려 둡시다.”
“흐. 좋으실 대로. 괴이들에 관해선 장의사 각성자에게 맡겨 두겠습니다. 그나저나 그 음습한 악몽에 제가 등장한 적 없다는 것만은 나쁘지 않군요…….”
하지만 몇 번의 회차가 넘어가고 나자 우리의 판단이 지나치게 안이했음이 밝혀졌다.
“선생님!”
탓, 탓, 탓.
전직 농구부 에이스였던 천요화가 달려들었다. 아지트 카페 심도 1,200미터. 굳이 달리지 않아도 될 만큼 아담한 심처였음에도 천요화는 급히 나한테 다가왔다.
마치 내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처럼.
천요화는 내 코앞까지 와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으으, 선생님이 멀쩡해. 다행이다아…….”
“무슨 일이니?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저, 죄송해요. 어젯밤에 너무 기분 나쁜 꿈을 꿔서요.”
“기분 나쁜 꿈?”
오래된 회귀자 생활은 내 뒷덜미에 고도로 발달한 촉감기관을 형성했다. ‘안 좋은 꿈’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뒷덜미가 전력을 다해 닭살을 피워 냈다.
“네에. 꿈속에서, 선생님이 안 좋은 일을 겪으셨는데. 그게 너무 잔인한 거예요. 선생님은 사람들을 도우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아무도 안 알아주고, 잘 기억나진 않지만, 배신도 하고…….”
아니나 다를까.
내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진짜, 진짜 너무 화가 나서.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인간 같지도 않게 느껴지고, 인간이 아니라면 딱히 위해 줄 필요도 없으니까……. 그래서.”
“무간의 봉인을 깨트렸구나.”
“아……. 맞아요. 음, 무간이 세상을 전부 뒤덮어서 인류가 멸종했는데도 딱히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거예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렇다.
내가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 그리고 노도하 관리대장도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만일 ‘악몽’이 정말로 괴이라면 오직 나 한 사람만이 겪을 리 만무했다. 모든 인간들이 악몽을 꿀 때마다 똑같은 괴이에 홀리고 있었다.
내가 [완전 기억 능력]을 소유한 각성자였기에 그나마 이 악몽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했을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악몽을 꾸고 나서 그만 잊어버린 것이었다.
나 혼자의 멘탈이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래 봬도 정신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마련해 뒀으므로.
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문제가 된다면?
이야기가 상당히 달라졌다.
알다시피 당서린, 성녀, 천요화, 심아련 등등, 모두가 여차하면 ‘타락’하여 세계멸망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그 본인들이 잘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정신을 갉아먹는 괴이는, 충분히 위험등급을 높여서 취급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곧장 카지노로 이동했다.
“264번 요정.”
“호엣. 무슨 일인 건가요, 서기장 동지?”
“현재 가용할 수 있는 몽마들을 최대한 많이 집합시켜라. 자각몽을 꿈꿀 준비도 해 두고. 다시금 붉은 깃발을 치켜 들 때가 왔다.”
“호엑……. 대략 90명까진 모일 수 있는 거예요. 그치만, 어떤 혁명의 적이 출현했길래 전원소집령까지 내려지는 거예요?”
나는 말했다.
“인류의 꿈에 기생하는 괴이를 처부숴 버려야겠다.”
“호에에? 역시 서기장 동지……!”
덥썩. 264번 요정이 양손 악수로 내 손을 잡았다.
“꿈이라면 마땅히 저희들의 정당한 영토……! 감히 고토를 멋대로 차지한 반동분자를 조져 버리는 일이라면 저희 요정혁명동아리도 전적으로 협력해 드리겠다는 거예요!”
요정이 꽃향기 눈물을 좔좔 흘렸다.
사상 최초로 인류(나)-괴이(요정) 연합군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