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31)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31화(13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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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자 Ⅲ
신노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길드장님.”
고요리가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마치 내 쪽을 걱정스러워하는 것처럼.
“아시다시피 이곳은 길드장님을 통해 내려온 꿈의 우물이에요. 저 역시 몽중몽의 배역에 지나지 않지요. 현실의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예요.”
“…단순한 환영이라고?”
“네. 으음. 굳이 표현하자면 길드장님의 두려움과 기피증이 발현한 것 아닐까요? 물론 길드장님의 무의식적 공포가 하필이면 제 모습으로 구현되었다는 게 무척 슬프지만요…….”
고요리가 서글픈 듯 눈꼬리를 내렸지만 나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고질라가 자기 좀 쓰다듬어 달라며 꼬리를 흔든다고 상상해 봐라. ‘쓰다듬→상대방 함락’이라는 내부 프로토콜을 장착한 라노벨 주인공조차 자신의 손바닥에 담긴 마력을 다소 의심해 보지 않겠는가.
“오히려 제가 환영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되어요. 아무리 길드장님 입장에서 제가 수수께끼의 존재여도 구름 위에 앉는다거나, 600미터 땅속에 있다거나, 그런 황당무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잖아요?”
“…….”
“전부 길드장님의 두려움이 만들어 낸 환상이랍니다. 당장 제가 길드장님을 ‘길드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기이해요. 왜냐면, 저는…….”
“…나를 길드장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기 때문이지. 그 호칭이 성립하는 장소는 오직 나의 기억 속뿐이고.”
“네! 바로 그거예요.”
어떻게 해야 좋았을까.
일단 고요리를 신뢰한다는 건 터무니없었다. 차라리 동해에 떨어졌던 UFO가 사실 외계문명의 우호증진용 친선대사였다 믿고 말지.
하지만 여기서 도주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
튜토리얼의 요정들이 나를 구조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나 스스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까진 좋으나 싫으나 고요리가 나를 바짝 쫓아올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여기서 저는 길드장님의 가이드가 되어 드릴 수 있는걸요.”
“가이드? 그거 굉장히 반가운 소리로군. 내가 고용한 가이드는 방금 누군가에 의해서 암살당했다만.”
“아하하. 죄송해요. 하지만 그런 외부인보다야 현지인 가이드가 더 믿음직스럽지 않을까요?”
고요리가 뒷짐을 지고 얼굴을 내밀었다.
“몽마는 결국 꿈과 현실을 이어 주는 가교에 불과해요. 으음. ‘완전한 이쪽의 종족’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할까요? 그치만 길드장님의 무의식이 형상화된 저는, 여기서만 쭉 존재해 왔어요.”
“…….”
“전 이곳에서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거의 다 알고 있어요. 길드장님. 악몽을 탐색하려고 오신 것이지요? 일개 몽마보다 제가 훨씬 더 잘 안내해 드릴 자신이 있답니다.”
잠시간의 침묵.
“…조건이 있다.”
“네.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쓸데없이 내 호감을 사려고 하지 마라.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도 말고. 그리고 아까 전처럼 아무런 징조도 없이 몽마를 죽이지도 마. 이 조건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난 언제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출할 것이다.”
꿈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어떻게 될까.
해 봐야 알 일이었지만 내가 잘 모르는 사망 방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고요리가 어딘지 모르게 착잡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길드장님. 저도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하지만…….”
“하지만?”
“으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긴 위험한 곳이니까 어서 빠져나가야 해요.”
고요리가 등을 돌렸다. 또벅. 로퍼 구두의 경쾌한 발소리가 대합실에 울렸다.
“저를 따라와 주세요. 악몽‘들’을 보여 드릴게요.”
4
부산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공허였다.
이참에 여러분에게 공허의 무서움에 관해 상기시켜 드릴까 한다.
우리의 현실, 그러니까 세기말이 도래하기 이전의 시대에는 ‘시공간’이 항상 정돈되어 있었다. 왼쪽을 보면 왼쪽이 보였고, 오른쪽을 디디면 오른쪽으로 향했다.
공허는 그렇지 않다.
그곳에서 통상적인 시공간 및 물리법칙 따윈 의미가 없었다.
특히 심도 깊은 대공허(大空虛)라면.
“……!”
부산역 바깥에 발을 딛자마자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저 멀리 200미터 떨어진 곳에 노란색 신호등이 세워져 있었다. 그게 유독 신경이 쓰였는데, 바로 그 순간 신호등이 ‘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깜빡깜빡깜빡-
신호등의 노란 불빛이 눈앞에서 맹렬하게 번쩍였다. 잠깐 눈꺼풀을 감고 떠 보면, 다시금 신호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
으에에에에엥!
어디선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면 단순한 풀밭이었다. 풀밭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으에엥, 에에엥, 아기의 발성기관을 빌려 울어 댔다.
“옳지, 옳지.”
똑. 어떤 노파가 화단에 쪼그려 앉아 철쭉 꽃봉오리를 땄다. 으에에에엥! 붉은 핏물이 와락 터지면서 울음도 터졌다. 노파는 마치 갓난아기를 달래듯 철쭉 꽃잎을 쓰다듬었는데, 노파의 손톱은 새빨간 꽃물로 물들었다.
“…….”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신호등의 깜빡거림, 꽃아기의 울음소리, 노파의 쓰다듬이 영원토록 울려 퍼지는 의식 한가운데서, 똑바로 내가 걷는 길에만 집중했다.
옆에서 고요리가 눈을 깜빡거렸다.
“화아. 대단하시네요. 정말로 계속해서 자의식을 유지하고 계시어요. 어떻게 그러시는 건가요?”
“…나만의 노하우 덕택이지. 그보다 악몽은 어디에 있나?”
“아. 바로 저기예요.”
고요리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멈칫.
자연스럽게 시선이 돌아간 나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저건……?”
그곳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게 익숙한 부분은 우선 건축물이었다. 국도관리대 본부. 부산의 랜드마크나 다름없는 그 건물이 바벨탑처럼 우뚝 서 있었다.
부산이 ‘유토피아’로 전락했던 회차 때, 나는 저 꼭대기 테라스에서 당서린과 함께 불꽃놀이를 구경했었다.
“아――아――아―――.”
지금 꿈속에서도 당서린은 저곳에 있었다.
단, 테라스가 아니라 첨탑에 매달린 채.
마치 십자가형에 당한 것처럼 당서린의 손목과 발등에 대못이 박혀 있었다. 마녀를 자칭하는 그녀에게 정말로 가혹한 마녀재판이 가해진 양. 당서린은 사지에서 피를 흘리며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내 사지에서도 핏기가 새하얘졌다.
하지만 끔찍한 광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아――.”
당서린의 바로 아래에, 또 다른 사람이 십자가형으로 못 박혀 있었다.
심아련이었다.
당서린에게서 배운 가창법으로, 라틴어 노래로, 심아련은 스승을 뒤따라 후렴구를 외었다.
두 사람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마녀와 성녀가 수놓은 이중의 아카펠라는 끝없이 도시의 밤하늘을, 온 우주를 진동시켰다.
“저건, 대체…….”
“사실 알고 계시잖아요?”
고요리가 말했다.
“영구 동력기관이에요. ‘대마녀’ 씨는 자신의 수명을 불태워 가며 노래해요. 언젠가 끝이 도래할 수밖에 없는 능력이지만, ‘북녘의 성녀’ 씨가 합세해 준다면 얘기가 달라져요.”
“…….”
“대마녀 씨의 수명이 다하더라도 북녘의 성녀 씨가 수명을 다시 채워 주면 되어요. 그럼 영원히 바닥나지 않는 꿈의 연료가 만들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
“대마녀 씨는 입을 움직일 때마다 죽어가면서, 다시 살아나면서, 또 죽어가면서, 계속해서 단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래하겠지요. 저건, 그런 악몽이랍니다.”
나는 즉시 검을 휘둘렀다.
바벨탑이 무너졌다. 당서린과 심아련의 노래도 탑이 무너지는 소리에 휘말려 사그라들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당서린과 심아련이 나를 바라보며 ‘아’ 하고 짧은 단말마를 흘린 것만 같았다. 그 단말마조차 먼지구름에 잠겨 사라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꿈을 죽일 순 없어요. 길드장님.”
고요리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의 악몽들은 길드장님의 공포를 형상화했을 뿐이에요. 길드장님은 현명한 분이니까, 한 번쯤 상상해 보셨을 것 아닌가요? 저 두 사람이 동시에 타락하여 능력이 얽힌다면, 어쩌면 영원토록 평화로운 유토피아가 건설될지 모른다――라는 상상 말이에요.”
“…취미 한번 고약하군. 나는 절대로 그런 선택지를 고르지 않는다.”
“네. 그리고 여기는 말하자면 길드장님께서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의 쓰레기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답니다.”
“…….”
“배드 엔딩 이후의 세계들. 혹은 평행세계들의 말로. 혹은 가능세계들의 파편. 혹은 단순한 악몽. 악취미.”
또벅. 고요리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주변의 풍경이 일변했다.
세종시는 새하얀 모래사막으로 바뀌었으며 그 한복판에 천요화와 이하율이 나란히 마주 앉아 있었다.
한없이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두 아이가 나누는 대화가 어째선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가끔 뜬금없이 초한지랑 수호지 비유를 꺼내시잖아. 역시 ‘선생님’에겐 그거 관련 지식도 삽입해야 하는 것 아닐까?”
“부정. 있는 그대로의 오빠보다 완벽한 오빠를 추구하는 것이 좋음.”
“으와아……. 하율이 너랑은 진짜 취미가 맞는 거 같으면서도 안 맞는다니까.”
“동의. 왜 리얼리즘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사조를 추종하는지 모르겠음.”
“뭐래, 인형 오타쿠가.”
도란도란.
두 사람이 떠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흐뭇해야 할 모습이었는데 내 입안은 도리어 바싹 말랐다.
삐그덕-
천요화와 이하율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 ‘나’였다.
장의사처럼 생긴 인형이, 장의사의 시체가, 두 사람 사이에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으음- 그럼 초한지랑 수호지는 빼고 삼국지 지식만 주입하자. 그거까지 빼면 정말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어려워!”
“동의.”
삐그덕. 삐그덕.
천요화는 나의 시체에 정보를 입력하고 있었다. 마치 좀비를 AI 판사로 만들 때처럼.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의사’의 몸에는, 팔다리 및 모든 근육에는, 이하율의 인형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장의사’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정말이지, 인간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누누이 말했지. 요화야. 너는 조금 더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봐 줄 필요가 있단다.
“와! 선생님 같아!”
-그리고 하율아. 웬만해선 살아 있는 사람들을 가지고 인형놀이는 하지 말라고 말했잖니. 아니, 죽은 사람 가지고도 하면 안 되고.
“만족.”
두 사람은 화기애애했다.
하얀 사막으로 전락해 버린 세상 속에서 오로지 두 사람만이 언제까지나 인형극을 벌이고 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나 멀어 보였다.
“저것도 배드 엔딩의 하나예요.”
소곤. 고요리가 내 옆에서 말했다.
“무간이 해방되어서 세상을 모조리 공허로 뒤덮었는데 천요화 씨와 인형사 씨에게만은 작은 오아시스가 허락된 것이지요.”
“…….”
“참, 만에 하나라도 저기 다가가진 말아 주세요? 평범해 보여도 저곳의 천요화 씨와 인형사 씨는 이미 타락이 극도로 진행된 상태거든요. 단신으로도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괴이…….길드장님?”
나는 고요리의 말을 무시했다.
버석. 모래사막에 내 발자국이 파였다.
그저 한 발자국 내디뎠을 뿐인데 천요화와 이하율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 쪽으로 집중되었다.
“…….”
“…….”
지그시. 빤히.
내 제자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그렇지만 결코 느리지 않은 발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러는 동안 천요화와 이하율은 언제 사이좋게 떠들었냐는 듯 완전한 무표정이 되었다.
나는 두 사람 앞에 섰다.
그리고 두 사람을 안아 주었다.
되도록 강하게. 부서지지 않도록 소중하게.
“요화야.”
“…….”
“하율아.”
“…….”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된다. 얘들아. 집으로 돌아가자. 집으로…….”
“…….”
“…….”
스르륵-
품 안에서 요화와 하율이의 윤곽이 허물어졌다. 하얀 모래가, 모래바람이 되어 내 품 안에서 흩날렸다.
사막 그 자체도 바람에 휘말려 실종되었다. 나는 바닥이 쩍쩍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 한복판에 주저앉아 있었다.
“굉장하네요…….”
고요리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어떻게 그렇게 자아를 꿋꿋하게 유지하실 수 있는 걸까요? 여기선 길드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욕구를 푸셔도 되어요. 아니, 풀어질 수밖에 없는 장소예요.”
“…대단할 것도 없다. 나도 가끔은 전부 내려놓고 휴가를 떠나.”
“그 휴가란 것도 어차피 현실에 복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잖아요? 어째서, 왜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으시는 거지요? 한 번쯤이라도. 그렇게 놓아버린다 한들 아무도 길드장님을 공격하지 못할 텐데.”
그만큼 나라는 존재의 정신이 강하기 때문에― 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면 조금쯤은 기분이 좋아졌을까.
하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사람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나 자신만의 이유로는 부족했고, 타인의 존재가 필요했다.
내가 강하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앗.”
그건 역설적으로 ‘나보다 먼저 무너져 내린 타인’이 항상 존재했기 때문이다.
“큰일 났어요, 길드장님. 저 ‘엔딩’은 정말로 위험해요.”
“…….”
“여기 종말세계에서도 가장 위험천만한 두 존재 중 하나예요. 어서 피하시는 편을 권해 드릴게요. 아마도, 천요화 씨나 인형사 씨처럼 쉽게 장의를 치러드리기란 불가능할 거예요.”
고요리가 경고하기 전에도 나 역시 무언가 오싹한 기운을 감지했다.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 두피가 쭈뼛쭈뼛 섰다. 언제나 오감보다 앞서서 내게 위협을 감지해 주는 뒷덜미에서도 맹렬하게 살이 돋아났다.
오러로 안력을 강화했다. 무너진 빌딩들의 아스팔트 숲 건너편에서 그것은 걸어오고 있었다.
“하.”
상대방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차마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만일 이곳이 나의 악몽이고 인류의 무의식이라면, 고요리 말마따나 ‘최악의 배드 엔딩들’이 모인 장소라면, 당연히 저런 말로도 있어야겠지.
“진짜 인생에 도움이라곤 하나도 안 되는 빌어먹을 영감탱이…….”
에미트 쇼펜하우어.
나의 오래된 전우.
각성자. 이명, 검성(劍星).
타락자. 이명, 검귀(劍鬼).
지상 최강의 무재를 타고난 천무지체의 검사가 명백히 ‘현실에 있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기운을 흘리며, 나한테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