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34)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34화(13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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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자 Ⅵ
신노아
“후어! 으허어어어억!”
검귀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내 모가지를 한 큐에 썰어 버렸을 때와 비교하면 움직임이 굼벵이 할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안 좋은 의미에서 보법이 달라졌다. 내가 도시 곳곳에 매설해 둔 지뢰(조각상)를 피하기 위해 검귀는 비효율적인 동선을 강요당했다.
물론 타락자로 전락해 버린 쇼 노인에게 생전과 같이 투철한 정치적 이념이 탑재되어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사실 내가 가장 많이 만든 조각상은 아델레. 즉, 쇼 노인의 사모님 되시는 분의 두상이었다.
당장 마르크스와 룩셈부르크의 조각상 뒤에도 부인의 조각상들이 빼꼼 숨어 있었다.
검귀가 성상 파괴 운동을 망설인 이유의 90%쯤은 부인상 때문이리라.
‘그럼 딱히 빨갱이들 조각상은 필요 없지 않았나?’라는 의문이 들 수 있겠다만, 그런 질문 자체가 한반도의 반공 이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내가 왜 합법적으로 저 노망난 영감탱이를 능욕하고 능멸할 기회를 마다한단 말인가? 심지어 수천 년 만에 찾아온 꿀잼 이벤트인데?
자고로 회귀자란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하는 법.
부인 조각상 중 몇몇 개는 두상이 아니라 반신상으로 만들었다. 오른쪽 팔까지 달아서 ‘빡-큐’의 포즈를 구현해야만 했거든.
수백 개의 중지가 쇼 노인을 향해 당당히 치켜세워졌다.
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도시의 폐허에 그래도 익스테리어 소품들이 늘어나니 그제야 조금 구경할 맛이 생겼다. 이게 환경 미화고 이게 도시 미관이지.
“……! ……!”
내 준비성 철저한 선물 공세에 검귀가 다시금 울부짖었다. 옛 전우의 정성에 감격한 게 분명했다.
괴이가 말하는 언어는 잘 알아듣지 못하겠어도 아마 독일어로 번역하면 ‘당케’ 정도 되지 않았을까?
내 뒤쪽에서 고요리가 중얼거렸다.
“흥미롭네요…….”
즐겜러 관전자를 뒤에 내버려 두고 우리 두 사람의 검, 더 정확히는 지팡이검과 쇠파이프의 교환이 맹렬하게 이루어졌다.
아무리 상대가 포텐셜 만렙을 찍은 쇼 노인이라 해도 동선 자체가 강제되니 싸워 볼 만했다.
“그르르르륵!”
검귀가 답답하다는 듯 허공을 밟아 날아올랐다.
아예 조각상을 밟을 여지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심산!
그러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수작이었다. 아무래도 저 영감탱이는 너무 오래 휴가를 떠나 버린 바람에 나 장의사가 어떤 인물인지 감을 잃어버린 듯했다.
“나를- 봐- 라-!”
촤아아악!
나는 일말의 주저 없이 웃옷을 찢었다. 난데없이 벌어진 상의 탈의에 뒤쪽에서 고요리가 “어라어라” 하고 웃었다.
하지만 내 상탈은 단순한 팬 서비스를 위함이 아니었다. 어떤 성기사 탱커처럼 적군을 도발하기 위한 퍼포먼스 또한 아니었다.
오직 내 속옷에 그려진 초상화를 쇼 노인에게 구경시켜 주고 싶은 미술적 욕망 때문이었다.
도화지처럼 하얀 내의.
그곳엔 아델레 여사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
쇼 노인이 덜컥, 허공에서 자동차와 부딪친 것처럼 멈추어 섰다.
쇠파이프를 붙잡은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멍청하게 벌어진 주둥이에선 ‘으어- 으어?’ 하는 괴이 사운드만 재생되었다.
영감탱이 입장에선 세기의 명화를 기습적으로 목격한 셈이었으니 당연히 숭배할 수밖에.
하물며 옷뿐만 아니라 팔뚝과 손등, 발에까지 아델레 여사의 타투를 새겨 넣은바……!
[프렌드 실드]의 완전한 상위 호환 업그레이드 버전, [와이프 실드]가 이곳에 강림했다.“공격해 보십시오. 영감님. 공격해 보라니까? 어디 공격할래? 목? 여기 내 모가지에 새겨진 ADELE 보입니까?”
“우, 어어어……. 어어, 허억……?”
“자를 테면 잘라 보라고! 썩을 영감아!”
검귀는 오도 가도 못하고 버벅거렸다. 우정 따윈 개나 줘 버리고 나 몰라라 도망친 쇼 노인조차 ‘사랑’ 앞에서는 꼼짝 못 했다.
기억하시라. 이게 바로 괴이들을 상대하는 정석이다.
괜히 서번트가 진명을 꽁꽁 숨기려 드는 게 아니다. 정체를 아는 순간 약점이 발각되며, 일단 약점만 쥐어 잡으면 괴이의 빳빳한 모가지는 닭 모가지로 변한다.
이제부턴 쭉 나의 턴이었다.
나는 온몸에 대(對)-노쇼전용-AT필드를 철갑처럼 두른 채 돌격했다.
“천 년 전부터 댁에게 꼭 죽빵을 날리고 싶었다우!”
“으어어어어!”
일격. 일격. 그리고 일격.
내가 지팡이검 도하를 휘두를 때마다 검귀는 피하기 급급했다.
그 와중에도 쇼 노인의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내 피부를 훑었다. 아델레 여사의 초상화와 문신을 피해 어디 찔러넣을 틈새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나는 아기를 무적으로 만들겠다면서 발목만 청정구역으로 남겨 둔 여신의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아기장수 우투리>를 읽으며 피폐물을 조기교육으로 학습해 온 한국인이라면 더더욱 그런 억까는 피하려는 법이었다.
“흐어어어억……!”
결국 쇼 노인은 내 몸에서 어떤 약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검귀는 허공답보를 유지하지 못하고 추락했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라곤 단 하나, 내게 처맞는 일이었다.
그 처맞음의 대상은 육체와 정신을 가리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데카르트처럼 물질과 멘탈을 따로 취급하는 심신이원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미트, 당신, 무슨 일이야?”
“……?!”
“나 지금 학회에 있어! 맙소사. 술 마셨어? 어린애처럼 왜 그래? 응? 잠깐만, 에미트. 하늘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내 입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대사.
그것은 일찍이 쇼 노인이 부인과 나눈 30초짜리 통화 내용을 고스란히 복사-붙여넣기 한 것이었다.
고도로 발달된 표절은 원본과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통화 내용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모방했다. 음파가 지닌 진동을 오러로 변환시켜서 ‘아델레 여사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략은 107회차 때 성녀의 타락 버전, 집행자와 벌어진 전투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타락자가 만들어낸 전법을 또 다른 타락자에게 써먹는 짓이었으니 이야말로 인류의 지성이 이루어 낸 업적이라 할 만했다.
“내 동생의 이름은 막시밀리안이야! 신이시여! 에미트,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치겠네. 잠깐, 기다려 봐. 우리 이 얘기는 나중에 직접 만나서 해!”
“으어, 으어, 으허어……?”
내 ‘보이스 피싱’ 전법에 쇼 노인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한국인의 K-사기 공격에 독일인의 멘탈은 실시간으로 깎여 나갔다.
“어라, 어라…….”
우리의 싸움을 지켜보는 고요리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온 얼굴에 황홀한 화색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지하철역 베이커리에서 풍기는 향기 깡패 빵을 사 먹었더니 실제로도 정말 맛있었을 때 짓는 표정과도 같았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포식한 기분인 듯했다.
전투는 하루, 이틀, 사흘, 나흘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혈투에서 내가 그저 쇼 노인에게 묵은 수천 년짜리 스트레스를 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전투 목적의 85%에 불과했다.
나머지 15%의 이유는 고요리에게 말했듯 ‘답안지’를 눈으로 보고 학습하는 것이었다.
‘눈앞의 괴이는 아무튼 쇼 노인이 개화했을지도 모를 재능의 현실판이다.’
후으-
나는 상대방의 오러를 흘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검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석보다는 편법. 정파보다는 사파. 세이버보다는 버서커.
정순한 기운보다는 사특한 마기를 통해 쌓아 올린 경지에 가깝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귀는 ‘에미트 쇼펜하우어’라는 무인의 가능성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내 시선이 예리해졌다.
‘최대한 기억해 두어야 한다.’
검 손잡이를 쥔 파지법.
휘두르는 방향. 공격에 허초를 섞어 대는 비율과 방법. 검으로 무게를 싣는 각도와 능숙하게 흘리는 속도. 검술에 오러를 활용하는 방도.
만일 쇼 노인이 23회차부터 게임에서 탈주하지 않았더라면 장차 스스로 터득했을 검법.
‘그걸 봐서, 기억해서, 전달한다.’
언젠가 돌아올 쇼 노인을 위해서.
그렇기에 나는 조금 더 빠르게 끝낼 수도 있었을 전투를 최대한 길게 연장했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도입했다. 왼쪽에서 공격하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
검으로 베려는 척하면서 무형의 오러를 기습적으로 발사하면 어떻게 방어하는가?
이렇게 대응하면? 이럴 때는? 어허, 이래도?
무수한 물음표를 내 적에게 던졌고.
“으어어어어어!”
무수한 느낌표를 내 전우가 대답했다.
수없이 굽은 의문부호를 두들겨서 자신만의 감탄부호로 제련해 낸다면 그것이 곧 그 무인이 걸어간 길이었다.
인간이 설령 괴이로 타락했다 한들 그 칼날마저 굽진 않았다.
‘어떤 묘리가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군.’
솔직히 인정하겠다. 쇼 노인 말마따나 내 무재(武才)는 영 글러먹었다.
혹시나 싶어 기대해 봤지만, 지금 눈앞에서 현란하게 펼쳐지는 검술과 보법의 향연에도 내 오감은 딱히 드라마틱하게 감동하지 않았다.
무협에서 흔히 찾아오는 깨달음의 순간이라거나, 경지의 돌파라거나, 그런 기연은 아무래도 나와 인연이 없었다.
무인으로서는 범재 이하.
‘그래도 뭐, 겉모습만이라도 정확히 따라 해서 시연해 주면 영감탱이가 알아서 숨은 뜻을 찾아내겠지.’
하지만 서포터로서는 극상의 재능.
지금만큼 [완전 기억 능력]이 고마웠던 순간도 얼마 없었다.
나는 본래 이 세계에서 나란 회귀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다른 전우들을 도왔다. 보조했다. 서로 맺어 주었다.
필멸자인 인간들에게 절대적으로 주어진 단절, 시간과 죽음이라는 암벽을 나는 징검다리로 삼아 일선(一線)처럼 이었다.
“영감. 영감님은 지금 저와 싸우고 있는 것도, 저를 물리치려고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묵빛의 오러와 밤하늘색의 오러가 교차했다.
“우어어어! 흐어, 후으어어어!”
“지금의 영감님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미래의 영감님과 싸우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꽤나 공교로운 일입니다. 본래 모든 싸움이란 자기 자신과의 결투 아니겠습니까?”
“……!”
“제가 예언 하나 하겠습니다. 언젠가 영감님은 자기 자신의 칼날 아래에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나흘간 밤새도록 이어진 싸움도 서서히 종막을 고했다.
나는 그것을 작금의 쇼 노인이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사람들은 먼 거리에서 바둑을 두기 위해 편지에다 기보를 적어다가 교환했다던가.
그렇다면 두 무인이 조금 먼 시간을 건너뛰어 무공서를 건네받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 으, 어…….”
검귀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졌다.
오로지 ‘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원리 하나만으로 작동하던 살육 기계에게도 한계란 존재했다.
인간의 육신을 바탕으로 설계되었다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검귀의 근육은 끝없는 잔상처에 시름했으며, 검귀의 심장은 끊임없는 피로에 신음했다.
오러 또한 무한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내 쪽에 유리하도록 조작된 전장의 환경에서 먼저 엔진의 열이 식어 버린 건 쇼 노인이었다.
팟, 파밧- 팟-
더 이상 대낮을 밤하늘로 물들일 만큼 장대했던 검귀의 오러는 온데간데없이 볼품이 없어졌다.
마치 고장 난 TV가 이따금 노이즈 화면을 틀어대듯, 쇼 노인의 어깨 주변으로 밤하늘 색깔이 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저 괴이가 쇼 노인의 타락이라면.
저 모습은 그 괴이의 몰락이었다.
그래. 회귀자인 내가 이런 말을 하기엔 적잖이 역설적이겠으나, 수많은 사건들엔 끝이 존재한다.
내 머릿속에다 자그마한 타임캡슐을 묻어 두는 일도 이제 마무리 지을 때가 다가왔다.
“으어, 어어……. 어허어…….”
내가 뒷걸음질 치자 검귀가 반사적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휘청-
그 일격은 초라하여서 허공만을 휘저었다.
검귀는 나를 뒤쫓으려 했다. 하지만 걸음이 무너지고 넘어졌다. 그의 발목은 서투른 나무꾼이 벌목하는 데 실패해 버린 나무 밑동처럼 수십 줄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검귀는 손을 써서라도 기어 오려 했다.
하지만 섬세하지 못한 오러의 운용으로 인해 손톱이 전부 부서져 있었다.
왈칵! 검귀가 버적거릴 때마다 열 개의 부서진 손톱 사이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검귀의 피는 새까매서 연탄의 냄새가 났다.
잿가루가 길게 이어졌다.
“…….”
나는 도하를 들어 올렸다.
쇼 노인을, 쇼 노인의 잔해를, 그의 배드 엔딩에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고 마음먹었다.
만일 쇼 노인이 죽는다면 그의 장례를 치러 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참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나는 검을 내리치는 일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발이 아니라면 팔로, 팔이 아니라면 손으로, 손이 아니라면 손가락으로, 손가락이 아니라면 손톱으로라도 기어가는 쇼 노인의 목적지는, 여태껏 나흘 동안 사투를 벌인 내가 아니었다.
“……아…….”
조금 더 뒤에 있었다.
“……, 델……레……. 아…….”
그는 고요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