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35)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35화(135/151)
──────
종말론자 Ⅶ
신노아
9
나는 그동안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지켰다. 그들의 죽음을 지켜 주었으며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이 또한 내게 장의사라는 이름이 주어진 이유 중 하나 아닐까.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건대 의외로 검성(劍星)―― 에미트 쇼펜하우어의 죽음은 언제나 너무 순식간에, 또 너무 쉽게 지나가 버렸다.
-영감님! 거기 촉수!
-으잉?
쇼 노인은 딜러답게 최전선에서 싸웠다. 고로 서포터인 나에 비해 일찍 전사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누군가가 내게 <쇼 노인의 죽음>이란 주제로 그림을 그려 보라 리퀘스트를 넣는다면, 나는 둘 중 하나의 장면을 화폭에 담을 것이다.
십족의 촉수질에 의해 앞다리뒷다리몸통가슴살 부위별 KFC 치킨으로 요리된 장면. 아니면 옛 백제병원 카페에서 모가지만 잃어버린 듀라한이 되어 쓰러진 광경.
어느 쪽이든 죽음이 지나치게 신속하게 시작되어 다급하게 끝나 버렸다.
쇼 노인의 최후는 한 번도 내게 유언을 읊조릴 만큼 느긋하지 못했다.
이따금 상호합의 아래 회차를 끝낼 적에도 마찬가지. 그때의 죽음은 ‘게임 종료’가 아니라 ‘컨티뉴’ 버튼에 불과했으므로 굳이 유언을 남길 까닭이 없었다.
따라서.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으로 목격한 내 친구의 종말이었다.
“……아…… 델, 레…….”
철벅. 찰박.
에미트 쇼펜하우어는 기어 갔다. 고요리를 향해. 부서진 손톱들 틈새로 새까만 연탄색의 핏물을 쏟아내면서.
“…….”
오래된 전우가 영락해 버린 모습에 내 검손잡이는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당장 목을 내리쳐서 마지막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는가? 아니면 환상 속에서라도 쇼 노인이 아델레 여사의 얼굴을 보며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는가.
철컥, 찰칵. 도하가 발도와 납도의 중간 어드메쯤에선가 뒤뚱거렸다.
그 짤막한 보폭의 양단에 현실에서의 품위와 꿈속에서의 행복이 각각 걸려 있었다.
“쉿.”
고요리의 소곤거림이 내 검보다 조금 더 빨랐다.
“저에게 맡겨 주세요. 길드장님.”
“…….”
고요리는 한쪽 눈을 감고서 검지로 입술을 지그시 가리고 있었다. 입가는 싱긋 웃은 채였다.
한때 저 미소를 정말로 좋아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나는 고요리를 신뢰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때의 나는 검에서 손을 놓았다.
일주일 동안 고요리와 함께하면서 또 알게 모르게 세뇌당한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한 명의 장의사로서, 지금 쇼 노인에게 올바른 장례를 치러 줄 수 있는 인물은 내가 아니라 고요리라고 본능적으로 느낀 것일까.
내 침묵 어린 시선 속에서 쇼 노인은 비척비척 기어 갔다.
“아, 델레……. 아델…… 레…….”
마침내 난장판이 된 손톱이 고요리의 발을 건드렸다.
왈칵. 쇼 노인이 흘린 검은색 핏물이 잉크처럼 고요리의 구두에 묻었다. 찐득한 점성의 피가 로퍼 구두에 흘러내렸다.
“네.”
고요리가 허리를 수그렸다. 하얀 손장갑을 낀 양손으로, 연탄 색깔로 범벅이 되어 버린 쇼 노인의 다 헐어 빠진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에미트.”
“…….”
쇼 노인이 표정 없는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고요리는 작게 웃고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에미트.”
“…….”
“세상에나. 너무 지쳐 보이네요. 어디서 이렇게 뛰어다니다가 오신 건가요?”
“……, …….”
“네. 당신은 가끔 정말로 이상한 일에 꽂혀서 다른 사람 말을 절대 듣지 않으니까. 항상 걱정이에요.”
“……….”
“괜찮은가요? 너무 무리하시면 안 돼요. 언제나 당신 건강을 생각해야지요.”
쇼 노인의 입에선 ‘어-’ ‘흐-’ 하는 숨소리만이 메아리쳤다.
생각해 보면, 저 회귀자만큼 가여운 운명을 지닌 존재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학자였다.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초청받았다. 쇼 노인은 아내를 따라 이역만리의 낯선 땅에 여행을 왔다.
쇼 노인은 애당초 이곳에 별 관심이 없었다. 노인의 머릿속에서 한반도란 평소에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회색지대에 불과했다.
단지 ‘아내와 같이 가볍게 해외여행을 즐길 곳’으로서만 색채를 지니는 장소.
이제 그 아내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에미트 쇼펜하우어에게 이 땅은 대체 무슨 의미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타향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슬픔에 대하여 나는 상상하기 어렵다.
에미트 쇼펜하우어에게 주어진 도정이란, 다만 사랑하는 아내를 찾아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재회는 오직 두 가지 방식으로만 이루어졌다. 수십 초 남짓의 짧은 통화. 이 무의식의 공허에서 이루어진 꿈속의 환상.
“……. …….”
“네. 당신.”
고요리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쇼 노인을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저도 사랑해요.”
“…….”
아, 하는 숨소리와 함께 쇼 노인의 몸이 허물어졌다.
살결이 검은 진액이 되어 흘렀고, 진액은 곧 연탄재가 되어 흩날렸다. 한참 오랫동안. 쇼 노인의 몸뚱어리엔 가루가 될 것이 많고도 많았나 보다.
새까만 잿가루들이 저 멀리 도시의 폐허에 뿌려졌다.
그때까지 고요리는 무릎을 꿇은 채 잿가루를 포옹해 주고 있었다.
저것이 고요리가 인간을 장례해 주는 방법이었으리라.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영감탱이 말이다.”
“네.”
“마지막엔 웃고 있었나?”
읏차, 하고 고요리가 일어섰다. 그녀는 온몸에 묻은 잿가루를 가벼이 털어 냈다.
사방에 가루가 튀면서 ‘콜록콜록’ ‘엣츄’ 하는 기침이 울렸다. 고요리가 멋쩍은 듯 웃었다.
“글쎄요. 어쩌면 행복한 꿈이라도 꾸셨을지도 모르지요. 길드장님은 어느 쪽이길 바라시나요?”
“어느 쪽이라니?”
“제 품 안에서 그분이 웃었기를 원하시나요? 아니면, 이런 건 결국 거짓된 안락이라면서 최후의 최후에 정신을 차리셨기를 원하시나요?”
“…….”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고요리가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길게 휘어진 눈웃음은, 내 얼굴이 아니라 심장 박동을 관찰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두근거림이 들리지 않았길 소망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충분히 기대해 볼 법한 일이었다.
콰르르르르…….
마침 그때, 도시의 폐허가 굉음을 일으키며 주변의 모든 소리와 울림을 집어삼켰다.
고요리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 이곳의 배드 엔딩도 끝났네요.”
고요리가 뒷짐을 졌다.
“정말로, 이제야 조금 숨을 쉴 수 있겠어요. 감사드려요. 길드장님. 덕분에 조금은 편해졌어요.”
“…무슨 뜻이지?”
“아하하. 요즘 들어서 여기에 너무 강력한 악몽들이 많아졌거든요. 지난번에 길드장님께서 토벌해 주신 천요화 씨나 인형사 씨만 해도 저로선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을걸요?”
“그건 이상하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요화나 하율이 눈엔 네가 아마도 내 모습으로 비쳤을 텐데. 그럼 오히려 정신적으로 장악하기 쉽지 않나?”
“이 세상에 길드장님이 두 명일 수 없다면서, 인형은 내버려 둔 채 저를 죽이려 들던데요?”
“…….”
“자아.”
짝. 고요리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우리는 어느새 부산역 대합실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주도권이 고요리에게 넘어갔다는 증거였다.
“이제 언제든 떠나실 수 있어요. 예전엔 제 힘이 부족해서 길드장님을 도와드릴 수 없었지만요. 여기서 잠을 주무시고 눈을 뜨면 그곳이 현실일 거예요.”
“…….”
“여기 누우세요. 길드장님.”
톡톡.
고요리가 벤치에 앉아 장난스럽게 허벅지를 두들겼다. 아마 또다시 무릎베개 클리셰를 시전하려는 듯했다.
“음.”
이제 현실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
‘몽중몽’ ‘배드 엔딩 이후의 세계’ ‘평행세계’라 불릴 만한 이 대공허를 어느 정도 토벌했다는 것은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고요리의 말엔 어폐가 많았다.
만일 고요리가 처음부터 순순히 내게 협력할 목적이었다면 어째서 264번 튜토리얼의 요정을 없애 버렸는가?
내가 고요리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해, 그리하여 내 손을 빌려 ‘배드 엔딩’들을 청소하기 위해, 몽마라는 변수를 미리 제거한 것 아닐까.
무엇보다.
“너. 단순한 환상이 아니로군.”
“네?”
“일주일 전. 자기 자신에 대해 소개할 적에 너는 나의 두려움과 기피증이 무의식중에 형상화된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현실의 고요리와는 마치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주장했다.”
그렇다.
고요리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길드장님의 두려움과 기피증이 발현한 것 아닐까요?
-물론 길드장님의 무의식적 공포가 하필이면 제 모습으로 구현되었다는 게 무척 슬프지만요.
하지만 방금 고요리는 자백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요화랑 하율이한테 접근하려다가 죽을 뻔했다는 거지? 내가 이곳에 발을 들이기 전까진 나의 공포도 구체화되지 않았을 것이고, 너라는 존재도 생겨나지 못했을 텐데.”
“…….”
고요리의 입술에서 ‘음’, ‘으음-’ 하는 소리가 흘렀다.
한참 후에 입술이 휘어졌다.
“이상하네요.”
그녀는 난감하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드장님……. ‘기억’이, 굉장히, 정말로 굉장히 단단하시군요?”
“…….”
“그저 평범하게 기억력이 좋으신 게 아니네요? 아. 하긴. 그러면 많은 부분이 설명된다고 생각해요.”
“너는.”
“저는 언제나 이곳에 있어요. 길드장님. 수천 년 동안, 그리고 수천 년 뒤에도.”
또벅.
고요리가 걸어왔다.
“저를 도와주셨으니 저도 길드장님을 도와드릴게요. 길드장님께서 너무 열심히 살아오신 탓에 이곳엔 너무 많은 퇴적물이 쌓였어요.”
“퇴적물.”
“네. 생각해 보세요. 본래라면 길드장님이 ‘로그아웃 게임’을 목격하고 최후를 맞이하는 일도 없었을 일이잖아요?”
“…….”
“하지만 길드장님께선 기어이 목격하시고 말았지요. 기껏해야 십족의 선에서 끝났어야 할 인류의 악몽이, 길드장님의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계속해서 많아지고 있어요. 정말 무수한 형태의 종말들이 쌓인 거예요. 아.”
물론, 하고 고요리가 말했다.
“저는 길드장님을 탓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길드장님께서 목격하신 악몽들이 다른 곳은 몰라도 길드장님의 무의식 저변에는 계속계속 쌓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랍니다.”
“…….”
“당신이 공허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공허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길드장님이 좋아하는 문구이지요? 맞아요. 길드장님은 심장 속에 이런 공허를 키우고 계셨어요.”
또벅.
고요리가 가까워졌다.
“그러니- 가끔 이곳에도 내려오셔서 주기적으로 청소하시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청소.”
“네에. 집을 청소하는 것처럼요. 길드장님이 돌아오시면 저도 가끔 이렇게 마중을 나와드릴게요.”
“…네가 나의 협력자라는 소리냐?”
“물론이에요. 길드장님. 애당초 저는 길드장님의 길드원이잖아요.”
“그렇다면 내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겠구나.”
나는 말했다.
“요리야. 내 꿈속에서 사라져 주렴. 그편이 내 정신건강에 훨씬 더 도움이 될 거란다.”
“아하하.”
스윽-
고요리가 손을 뻗었다. 그 손바닥이 내 눈가를 부드럽게 뒤덮었다.
따뜻한 체온의 어둠.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되어요. 길드장님.”
사과향의 입김이 코앞에서 소곤거렸다.
“왜냐하면, 저희는 이미 하나인걸요?”
암전.
10
후일담들이 있다.
먼저 첫 번째 후일담.
이후, 나는 고요리의 약속대로 무사히 현실에 복귀했다.
그러나 내 침대를 둘러싸고 있어야 할 튜토리얼의 요정들이 안 보였다. 어째선지 카지노에서 멀쩡히 업무를 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실로 당혹스러웠다. 너희는 나를 무의식 세계에 진입시키기 위해 한창 의식을 벌이는 중 아니었느냐고 묻자.
“호에?”
꿈속에서 틀림없이 머리통이 날아갔을 264번 요정이 멀쩡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인가요, 서기장 동지? 저희들은 인간이 원하는 꿈을 보여 줄 순 있어도 그런 무시무시한 곳까지 데려다드릴 능력은 없다예요.”
“…….”
“꿈은 즐기라고 있는 곳이지 탐구하라고 있는 유적지가 아닌 거예요! 저희는 서기장 동지의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받았다 해도 완수하기란 불가능한 거예요!”
요정이 힉힉힉 웃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어디선가 사과향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11
두 번째 후일담.
요정들의 이야기는 둘째치더라도 어쨌든 내가 ‘몽중몽’ ‘배드 엔딩’ ‘평행세계’를 그럭저럭 토벌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곧바로 다음 날부터 내 토벌의 효력이 발휘하기 시작되었다.
먼저 SG넷에 증언들이 이어졌다.
-익명: 오늘 아침 존나 개꿀잠 자서 기분 좋으면 개추ㅋㅋㅋ
└익명: 너도?? 나 저번에 공허 다녀온 뒤로 맨날 악몽만 꿨는데 오늘은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완전 푹 잠.
└문학소녀: ? 나도 그런데 신기하네.
-[율도국]검후: 고된 수련에 있어서 건강한 수면은 필수인 법. 오늘도 본좌는 저 드높은 무의 경지를 엿보기 위해 바른 자세로 수면을 맞이했다오.
-[國道]사관: 깨어 있는 동안의 습관이 수면의 습관으로도 이어집니다. 불면증을 호소하는 분들은 우선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보면서 하나하나 고쳐 나갈 부분이 없는지 확인해 봅시다.
-익명: ㅅㅂ 딴 건 모르겠고 그냥 맨날 오늘처럼 잠이라도 제대로 푹 자면 소원이 없겠다.
아마 외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겠지.
항상 강조하지만 인간에게 멘탈이란 몹시 중요하며, 건강한 멘탈은 건강한 수면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장의사는 인류 전체의 멘탈을 조금이라도 챙겨 주는 데 성공했다고 자축해도 되지 않을까?
“좋은 아침입니다, 관리대장.”
“좋은 아침은 개뿔. 좆 같은 아침이죠. 누구 때문에 세 시간 쪽잠밖에 못 자서 미칠 거 같습니다. 그런데 댁은 아주 행복해 보여서 참 보기 좋군요……?”
“아.”
…생각해보니 가장 수면 건강이 필요한 사람의 배드 엔딩을 미처 토벌하지 못하고 와 버렸다.
다음번엔 무의식 세계에서 노도하의 모습부터 찾아야겠다.
12
세 번째 후일담.
이 마지막 후일담은, 사실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저 나 장의사가 꿈속에서 본 풍경에 불과하다.
하지만 왜, 그런 꿈 있지 않은가?
너무나도 현실감이 넘쳐서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게 정말로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몽상.
그 꿈속에서 나는 쇼 노인의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이 흔히 그러듯 시점이 불분명했다.
때로는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쇼 노인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때로는 나 자신이 잠깐 쇼 노인에게 빙의하여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즐기기도 했다.
그리고 나 에미트 쇼펜하우어의 곁에는 아델레가 있었다.
-…….
-…….
우리는 하루 종일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아델레는 산책하는 걸 좋아했고, 나는 산책하는 아델레와 함께 걷는 걸 좋아했다.
-내가 좋은 산책로를 알아.
-정말로? 어떻게?
-글쎄, 따라와 보면 안다니까.
한국의 지리를 하나도 모르는 아델레에게 나는 숨겨 둔 산책 코스를 개방했다.
이럴 때를 위해서 회귀하는 내내 틈틈이 산책길을 알아 두기도 했다. 서울에서, 세종에서, 부산에서, 내가 눈여겨본 길들을 아내에게 소개했다.
아델레는 깜짝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당신한테 이런 센스가 있다니!
그 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과연 시간을 들여 조사해 온 보람이 있었다.
그러다 하루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아델레와 함께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문득, 저 멀리서, 푸른 수국과 측백나무 건너편에서,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 것 아니겠는가.
내 친구. 장의사가 나무를 등지고 서 있었다.
‘아.’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노을에 잠긴 풍경은 꿈이라고.
‘그래. 나. 죽기 전에 아내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더랬지.’
당신과 함께 늙고 싶었다.
당신과 함께 살고 싶었다.
당신과 함께 죽고 싶었다, 죽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에미트?
-…….
나는 그녀의 손을 꾹 잡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나는 아델레에게 중얼거렸다.
-저기. 나, 오늘 힘들었어.
-응?
-당신이랑 헤어지고 나서 정말 괴로운 일이 있었어.
그러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랬냐고,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그런 아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되도록 오래. 되도록 깊이.
-그래. 하지만 괜찮아.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열심히 살아남아서 다행이었다. 살아남았다기보단 도피에 가까웠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영영 사라지지 않기를 잘했다.
왜냐하면 덕분에 지금 이 순간이 있을 수 있었다.
-당신이랑 같이 있으니까, 전부 괜찮아졌어.
나는 말했다.
-사랑해.
그리고 거기서 나의 꿈은 끝났다.
한낱 꿈에 불과할 것이건만 나는 한동안 침대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꿈은 내 머릿속에서 전적으로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언젠가 쇼 노인이 정말로 꿈꿨던 장면에, 무의식 세계에 통로가 뚫려 버린 내가 잠깐 접촉해 버린 것일까.
혹은……. 어쩌면, 고요리가 ‘검귀’를 안아 주면서 마지막으로 보여 주었던 환상이 바로 저 꿈결은 아니었을까?
‘길드장님은 어느 쪽이길 바라시나요?’
문득 고요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품 안에서 그분이 웃었기를 원하시나요?’
‘아니면, 이런 건 결국 거짓된 안락이라면서 최후의 최후에 정신을 차리셨기를 원하시나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비록 쇼 노인이 괴이로 타락해 버린 말로라 하더라도 그 최후만큼은 안온하기를 바랐다.
만일 정말로 저 꿈이 고요리가 보여 준 광경이라면―― 결국 이것 하나만큼은 흔쾌히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인류가 맞이할 수 있는 그 어떤 종말보다, 고요리의 품속에서 맞이하는 종말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할 것이라고.
-종말론자. 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