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42)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42화(14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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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자 Ⅳ
신노아
6
이미 내가 일본 열도의 터줏대감, 마법소녀협의체로부터 상당히 존중받는단 이야기는 여러 차례 했다.
그건 나 장의사가 마법소녀들을 종종 도와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인간 대 인간의 사귐이란 그렇게 타산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땅에서 ‘진정한 교류’란 시간의 제약. 즉, 언제나 ‘현재’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혈연(血緣). 지연(地緣).
현재에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우리’가 과거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인연을 쌓아 올렸는지, 그럼으로써 인간 종족의 시간적 한계를 어디까지 극복했는지가 훨씬 중요한 것이다.
일본인들 역시 위의 진리를 몸속 깊이 깨우쳤다.
설령 러브 코미디 작품 속에서 아무리 매력이 쟁쟁한 등장인물들이 뛰쳐나오더라도, 결국 본편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주인공과 ‘지연’을 확보해 둔 소꿉친구가 승리한다는 사실에서부터 능히 일본인의 현명함을 엿볼 수 있었다.
어찌 그들을 본받지 않겠는가?
나는 미움받는 약을 구하러 열도에 도착하자마자 오래된 인연부터 찾았다.
“아앗, 장상(さん)!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그래. 너도 잘 지냈냐?”
“하잇! 응, 독서짱도 오랜만이야!”
“아. 응. 언니. 히사시부리.”
아니나 다를까.
상대방은 나를 만나는 자리에서 ‘언더테이커’처럼 흔해 빠진 별명이 아니라 오직 자기만의 ‘전용 호칭’을 시전함으로써, 나와의 친분이 보통이 아님을 주변에 과시했다.
이 또한 소꿉친구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유서 깊은 문법.
장의사라는 이명을 다시금 ‘장상’이라는 호명으로 주물럭거린 그 지엄함에 과연 주변의 다른 마법소녀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우에하라 넌 부산에 있었을 때보다 훨씬 활기차 보이는구나. 역시 고향이 좋지?”
“헤헤. 네! 후쿠오카에 어서 오세요, 장상!”
우에하라 시노.
내 마음속의 별명은 맥거핀. 한국인들이 부르는 이명으로는 연금술사.
기억력 좋은 사람은 이미 떠올렸으리라.
그래. 우에하라 시노는 강제로 부산역 튜토리얼 던전에 소환당한 ‘지고의 399인’ 중 일인. 오독서나 나에겐 원년 멤버나 다름없었다.
요즘 시대의 어법에 따라 표현하자면 똑같은 공연(空緣)을 공유하는 사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
“부산에서는 정말 신세 많이 졌어요. 이번엔 제가 여러분을 안내해 드릴게요!”
부산역에선 항상 주눅들어 있었던 애가 고향에선 오히려 휘하에 다른 마법소녀 견습생들을 끌고 다녔다.
원래 초반부 회차까지 우에하라 시노는 쭉 한반도에만 머물렀다.
일본으로 돌아갈 배편을 구하는 것부터 만만찮았을뿐더러 현지 사정도 열악했다.
열도에선 ‘각성자’라는 용어 대신 무조건 ‘마법소녀’라는 명칭만 사용해야 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 우에하라 시노는 피눈물을 머금고 정치적 망명을 선택했다.
내가 편의점을 운영했던 90회차에도 우에하라는 한반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폐에 이런 문구도 새겨넣었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게 이름이랑 점원 티셔츠가 이상합니다. 점장님은 혹시 赤軍派입니까? 우에하라 시노 올림.]하지만 590회차쯤 되니 여러모로 사정이 호전됐다.
가장 중요했던 터닝 포인트는 역시나 이누나키 터널.
각 지방 사이의 교통 단절을 불러일으켜 일본 열도를 다시금 봉건시대의 60여 쿠니(國)의 나라로 회귀시켰던 그놈이 사라지자, 마법소녀들도 겨우 한숨을 놓았다.
다소 여유가 생긴 마법소녀협의체에선 이제 해외로 유출된 고급 인력들에 눈을 돌렸다.
‘그 언더테이커’와 ‘똑같은 공연 출신’인데다 ‘능력마저 출중한’ 우에하라 시노는 당연히 최우선 영입 대상에 속했다.
-그래도 마법소녀는 좀…….
-아, 대신 팍팍 출세시켜 줄게!
연금술사인 그녀에게 제시된 직위는 약방(藥房)의 헤드.
일본 열도에서 생산되고 발견되는 모든 ‘약재’에 대해 우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지위였다.
고향에 돌아가서 자리를 딱 잡은 옛 친구가 나를 보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제가 장상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단언하건대, 여러 창작물에서 직접 발로 뛰어 아이템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은 회귀자로서 3류였다.
진정한 1류는 자신의 인맥이 알아서 원하는 아이템을 대령하도록 유도한다.
우에하라는 자신이 직접 발로 뛰어 ‘미움받는 약’을 찾아 나섰을 뿐만 아니라, 협의체에도 강하게 협조 요청을 넣었다.
만일 여기서 거부를 때려 버리면 다시 언더테이커의 휘하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암시는 덤이었다.
“냥! 언더테이커의 부탁이라면 나도 한몫 거들겠다냐!”
[그간 신세 진 것을 보은할 차례로군. 맡겨 두시구려.]만엽묘와 허수검도 가세했다. 두 명 모두 마법소녀협의체에선 10석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여기 있어요, 장상!”
결과, 일본에 상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내 눈앞에는 ‘미움받는 약’이 대령되었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인맥의 위대함이었다.
도대체 왜 일부 소설들에선 주인공이 고독한 늑대 플레이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편리한데 왜 동료들과 교류를 쌓아 두지 않지? 이상한 주인공들이야.
지금 도움받은 만큼 나중에 나도 또 도움을 줘야겠지만 원래 우정이란 그런 것 아니겠나.
“아니, 아저씨도 6회차까진 그랬던데.”
“어허. 무슨 새파랗게 어렸던 시절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려 드냐?”
“그 새파랗게 어린 시절이 저보다 나이가 많아요. 아저씨…….”
오독서가 투덜거리며 테이블에 놓인 아이템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미움받는 약이구나.”
“음.”
미움받는 약은 새빨간 환약이었다.
마교에서 제작했는지 빨간색이 아주 피처럼 진했다. 척 봐도 불길해 보였는데, 이걸 먹고 뭔가 탈이 나더라도 그건 자연사로 취급해야 될 정도였다.
하지만 행운총량제에 의해 시시각각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나에겐 천하제일의 영약!
“어떻게 할 거야? 바로 먹게? 솔직히 아저씨가 이거 먹으면 어떻게 될지 좀 궁금하거든. 사실 나 혐관 되게 좋아해.”
“아니. 원래 영약이란 건 함부로 덜컥덜컥 먹었다간 큰일 난다. 약빨을 제대로 달여 내려면 적법한 절차와 방법을 거쳐서 음용해야 하지.”
“어……. 미움받는 약에도 그런 절차가 있었나?”
있었다.
더 정확히는 이제부터 내가 만들어 낼 예정이었다.
7
그날부로 나는 ‘삼국지 얘기’를 끊었다.
SG넷에서 아무리 삼국지 떡밥이 돌아도 일절 끼어들지 않았다. 내 입으로는 더더욱 언급하지 않았다.
이 놀라운 변화에 주변 사람들부터 경악했다.
“서, 선생님이 오늘 삼국지 얘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어?”
천요화.
“형님, 괜찮으십니까! 여기 실론티 남은 거 박박 긁어서 가져왔습니다!”
서규.
[정말로 괜찮으신 것 맞습니까?] [이것은 긴급 상황입니다.] [장의사 씨. 혹시 드디어 장의사 씨께도 타락의 징조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요?]성녀.
“기, 길드장님이……. 망가졌어……. 어떻게, 치유가 안 돼……. 저는 무력해요…….”
심아련.
“각하. 사실 저도 예전부터 삼국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초한지와 수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오래된 콘텐츠 아니겠습니까?”
유싸이지코원패스.
“오빠, 나 요즘 들어서 유비가 좋아진 거 같음. 그러니까 나랑 같이 삼국지 얘기 떠들어도 괜찮음.”
이하율 이 간악한 위빠 진빠 녀석.
“장의사, 미안해. 요즘 내가 너무 신경을 못 써 줬지?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거란다.”
당서린.
그리고.
“…….”
노도하.
다른 동료들이 모두 나를 걱정하는 가운데(그동안 얘네가 대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오직 노도하만은 도리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꼬라 봤다.
“댁…….”
“예?”
“솔직히 자백하십쇼. 또 무슨 개짓거리를 꾸미고 계시는 겁니까……?”
만사에 의심병을 달고 사는 일중독환자다웠다. 쓸데없이 예리하단 뜻이었다.
“거참 이상하시네. 저보고 맨날 삼국지 떡밥 좀 그만 돌리라고 잔소리하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야 요새 들어 댁의 눈깔이 기분 나쁘게 음흉하니까 걱정하는 거지요…….”
“어허. 음해는 자제 부탁드립니다. 관리대장.”
“…….”
‘미움받는 약’을 최고 수준으로 달여 내려면 단순히 삼국지 떡밥을 근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본격적으로, 정말 대놓고, 거의 뻔뻔할 정도로 다른 동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요화야. 백화여고 재학생 중에 권총을 숨기고 다니는 애가 있더구나. 위험할 거 같아서 내가 수거해 뒀단다.”
“엑? 정말요? 흐와아. 고마워요, 선생님! 선생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위험할 뻔했습니다. 성녀님. 아무리 성녀님이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다지만 자신이 인식할 틈도 없이 덮치는 위험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네. 그렇네요. 구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장의사 씨.”
“당서린. 네가 수명을 소모시켜서 대마법을 발동할 수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나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장의사. 당신.”
“검후 어르신. 저희 화산으로 유람 한번 다녀 올까요?”
“오오! 역시 본좌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장의사밖에 없소이다!”
“노도하 공방주. 혼자서 작업하시기 힘들지 않습니까? 가끔은 제가 조수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씨발, 역시 뭔가 일 꾸미고 있는 거 맞잖아, 개새끼야.”
삼국지 떡밥을 끊고, 얼굴에 철판을 깔아 버린 채 사방팔방에다 플러팅을 구사한 지 어언 1년.
아니나 다를까.
바야흐로 ‘그 괴이’가 강림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없는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상상할 수도 없어요!”
“장의사. 생각해 보니 이누나키 터널은 아지트로서 보안은 훌륭하지만 주변 환경이 좋다고 할 순 없잖니? 내 열차로 이사 오는 건 어때?”
“형님! 자유게시판이란 명칭을 삼국지게시판으로 변경했습니다! 형님께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생색조차 내기 민망한 수준이지만 조금이라도 저의 감사한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나는 마음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왔다!’
그렇다.
‘구원자 괴이’가 다시 출현했다.
강의 수질이 개선되면 어김없이 물고기가 번식하듯, ‘장의사가 삼국지 얘기를 안 떠든다’라는 조건이 성립하자마자 구원자 괴이는 얼른 돌아왔다.
“야, 이, 썅, 개새끼야.”
노도하가 내 목을 졸랐다.
“당신, 저거, 퇴치했다면서요. 예? 퇴치하는 방법을 빤히 알았다면서. 그런데 왜, 씨바알, 일부러 또 나타나게 하고 지랄입니까? 네……? 뒈지고 싶습니까? 진짜로 저한테 목 졸려 죽는 게 댁의 새로운 취미로 등극한 겁니까?”
“팩트를 얘기하자면 제가 관리대장한테 목 졸려 죽은 횟수는 3번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의 목에는 호신강기가 둘러쳐져 있기 때문에 오러의 경지가 한없이 허접인 관리대장이 저를 죽이기란 불가능하군요.”
“3번? 씨발, 1번 아니었습니까? 2번은 또 어쩌다……. 아니, 지금 이딴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장 그 좆 같은 삼국지 떡밥을 꺼내십시오…….”
“어허. 부탁하는 사람 태도가.”
“아니, 진짜. 이 씨발놈이…….”
쾅쾅쾅!
구원 좀비들이 노도하의 개인 벙커 철문을 거세게 두들겼다. 이미 예전에 한번 다루었던 장면이니 자세한 묘사는 생략하겠다.
물론 그때와 달라진 점도 있었다.
벙커 안에 오독서가 빼꼼 숨었다거나, 철문을 두들기는 손길 중에 검후의 중후한 내공이 담긴 노크도 포함되었다거나.
하지만 그런 소소한 변화를 제외하고서도 여전히 중대한 차이점이 남아 있었다.
“노도하 관리대장.”
뚜벅.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예전에 말했었죠?”
“뭘요? 당신이랑 같이 일하는 거 참 좆 같다는 거……?”
“아뇨. 제가 원숭이 손한테 소원을 빈 부작용으로 얼마나 참담한 꼴을 겪게 될지, 그날이 오면 꼭 VIP석에서 관람하고 싶으니 미리 대기 타겠다고요.”
“하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쾅! 철문이 우겨졌다.
구원 좀비들이 최후의 바리케이드를 넘어서서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선생님……. -장의사 씨. -형님! -장대인! -길드장님……. -오빠. -장의사.
그리고. 바로 이 타이밍에.
나는 품속에서 빨간색 환약을 꺼냈다.
내 손은 나루토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수인을 맺었다.
괴이들이 지배하는 세기말 아포칼립스엔 지켜야 할 형식미란 게 존재하는 법이었다.
“잘 지켜보십시오. 노도하 관리대장. 살짝- 난폭한 짓을 해 볼까 하니.”
“…….”
“술식순전「구원자」. 술식반전 「미움받는 약」.”
“…….”
“허식, 「호감도 반전」.”
아그작.
나는 붉은 단약을 씹어먹었다.
“아저씨!”
뒤에서 오독서가 소리쳤다.
중증 오타쿠인 오독서의 목소리에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의 떨림이 깃들어 있었다.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 보자면 ‘저 인간을 입덕시킨 장본인이 바로 나야, 나!’라는 뿌듯함 정도 아니려나.
“아저씨, 행운총량제 같은 밥버러지 기생충 괴이한테… 지는 거예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오독서. 저 아이 역시 괴이들을 무찌르기 위해선 형식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인재였다.
“이겨.”
회귀자, 승리 선언!
열광의 도가니 속에서 오직 노도하만은 냉담하고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 천하의 개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