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44)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44화(14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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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자 Ⅵ
신노아
9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사이판의 경치는 낙원처럼 아름다웠다.
투명한 옥빛의 바다. 발바닥에 부드럽게 감겨 오는 해변의 모래알.
노도하가 중얼거렸다.
“햇빛이 너무 강한데…….”
“그러게요. 조금 지나치게 아름답습니다.”
이게 우리 둘의 첫 소감이었다.
참고로 나는 카페 바리스타 옷차림. 노도하는 대충 티셔츠에 백의를 걸친 패션. 하얀 의사 가운이 바닷바람에 나풀거렸다.
한마디로 말해 이곳이 세계적 휴양지임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패션.
사이판도 될 수 있으면 우리 같은 관광객은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불행을 사골국물까지 우려 내야 할 저 장의사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입니다.”
“댁이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또 불안해지는데에…….”
더.
더욱더 불행해져야만 했다.
고로 나는 몸소 섬의 풍광을 개조하기로 결심했다.
잠깐 딴 얘기로 새어 보자면, 공허로 얼룩진 세기말에선 ‘형식미’란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승전결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라. 눈을 뜬 다음 ‘낯선 천장이로군’이라고 중얼거리는 클리셰.
저런 것이 일종의 형식. 문법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떤 문법, 어떤 세계관을 취하느냐에 따라 괴이들도 저마다 다르게 반응한다.
즉, 휴양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와! 여름이다! 해변이다! 바다다-!’
라고 소리치며 겉옷을 훌러덩 벗어 재낀 다음 파도를 향해 돌격할 경우, 여러분은 상당히 높은 확률로 ‘일본식 만화’를 기반으로 삼은 괴이들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중고생들이 밤에 불 끄고 분신사바- 분신사바- 하고 중얼거리는 주문과 똑같지.
세기말에는 사람의 행동거지 하나, 말 한마디가 온갖 괴이들을 불러들이는 효과를 지니는 것이다.
“노도하 공방주. 지금부터 저는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의 <만년(晩年)>이란 소설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읽겠습니다.”
“하아……?”
“<인간실격>이란 소설 들어보셨죠? 그거 쓴 작가입니다.”
나는 노도하를 업어다가 해안 절벽으로 데려갔다.
탓, 노도하는 절벽 끄트머리에 내린 다음 양손을 백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흠. 굳이 사이판에 도착하자마자 싸구려 낭독회를 벌이겠다는 이유는 또 무엇이신지……?”
“공무원 출신이면서 세계사 공부를 제대로 안 했군요. 노도하 공방주. 이곳 사이판은 원래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미군한테 패망한 지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민간인들도 전쟁에 휘말려 사망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지요.”
“하? 어쩌라고요?”
“지금 저희가 서 있는 해안 절벽이 바로 일본제국군의 장기자랑이 벌어진 곳입니다.”
“장기자랑……?”
구(舊) 일본제국군의 특기를 두 개만 뽑으라면 물론 선전포고와 집단자살이었다.
그중 두 번째 장기가 이곳 사이판섬의 최북단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졌다.
“절벽 이름부터 죽여줍니다. 반자이 절벽이거든요. 일설에 따르면 자그마치 1만 명에 이르는 군인들이 반자이를 외치며 절벽 아래를 향해 기열찬 입수를 보여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니. 그래서, 진짜 어쩌라고요……?”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투신 자살자를 꼽으라면 다자이 오사무를 빼놓을 수 없는 법.”
나는 빈 노트를 꺼내 들었다.
“지켜보십시오, 공방주. 이것이 바로 괴이를 불러들이는 주문의 정석입니다.”
난데없이 절벽 위에서 펼쳐진 낭송회의 낭랑한 목소리는 파도를 타고 울려 퍼졌다.
“아아. 보름달 저녁. 반짝거리다가 무너져 내리고, 넘실대다가 부서져 내리고, 용솟음치며 발작하는 파도 속에서,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붙잡은 손을 견디다 못하여 내가 의도적으로 뿌리쳤을 때, 여자는 순식간에 파도에 휘말리고는 드높이 누군가의 이름을 소리쳤다. 내 이름은 아니었다―.”
촤아아아.
파도가 쳤다.
그 순간.
-덴노 헤이카 반자이!
첨벙!
어떤 그림자 인간이 우리 옆을 지나쳐서는 곧장 절벽으로 다이빙했다.
멋진 솜씨였다. 하필 직업이 올림픽 선수가 아니라 군인이었기에 살아생전 일신의 재주를 뽐내지 못했던 게 안타까울 정도.
“아니, 씨발……?”
노도하가 깜짝 놀라서 튀어 올랐다.
그야 당연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림자들이 갑자기 우리 뒤편에서 나타났으니까.
-덴노 헤이카 반자이!
-다이닛폰데이코쿠 반자이!
-반자아아아아이!
첨-벙, 첨-벙!
다행히 올림픽은 아니어도 마라톤은 있었다. 수천 명의 그림자 인간들이 일제히 스타트를 끊고 저 수평선을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그림자 인간에겐 실체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 어깨를 통과해서, 때로는 아예 몸통을 지나쳐서 속속 달려 나갔다.
신기하게도 물리적 실체는 없는 주제에 어째선지 ‘파도에 빠지는 효과’만은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첨벙첨벙. 자연이 일으키는 파도보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발생시키는 파도가 실시간으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그렇다. 일본제국군의 주적은 사실 언제나 미군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였다.
자연에는 밀림이나 바다와 같은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도 포함되었다. 제국군은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리하고 있었다.
“썅. 이게 대체, 뭔……?”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괴이를 불러들이는 것 또한 천지인(天地人)의 묘리라.”
나는 검후처럼 허허 웃었다.
“집단자살에 대한 일본인의 관념이 천(天), 일본제국군이 단체로 자살한 이 땅이 지(地), 여기에 투신자살의 아이콘인 다자이 오사무가 인(人). 오호통재라. 세 가지 조건이 이리도 절묘하게 맞추어졌거늘 어찌 괴이라고 주문에 순응하지 않으리오?”
“…진짜 진지하게 묻는 겁니다만, 장의사 각성자, 이미 댁이 괴이 대빵인 거 아닙니까? 예? 세상에 어느 인간이 이렇게 괴이를 숨풍숨풍 소환하고 앉았답니까……?”
“어허. 특급 주술사라 불러주시게나.”
“지랄 염병하고 자빠졌네…….”
사실 다자이 오사무는 반제국주의 학생연맹에 가입한 전적까지 보유한 좌익 출신이었지만 무슨 상관이랴.
튜토리얼 요정이 아닌 이상에야 괴이들은 인간의 정치적 성향에 별 관심이 없었다.
아, 물론 서울 남산에 거주하는 ‘중앙정보부’라는 공허에선 인간들의 이념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으나 거기에 대해선 다음 에피소드 때 얘기하자.
“정 의심스러우면 다음엔 노도하 공방주가 낭독해 보십시오.”
“다음……?”
“예. 여기 반자이 절벽 말고도 자살 절벽이라고, 또 집단자살을 조장한 곳이 있거든요.”
“아니, 씨발, 이 동네 그냥 휴양지 아니었습니까……? 야. 당신 이 지랄 벌이려고 일부러 여기 왔지? 어? 진짜 죽을래요?”
다음 지점에선 내가 알려 준 내용대로 노도하가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어김없이 ‘그림자 인간’들이 출몰하였다.
당서린처럼 자신만 쓸 줄 아는 전용 마법이란 하수였다.
진정한 대마법사란 누구나 ‘파이어볼’만 외치면 섭씨 800도짜리 화염구가 생성되도록 마법 시스템을 고안해 내는 법.
나의 마탑에 갓 입학 절차를 밟은 노도하가 생전 처음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를 시전해 본 학생처럼 망연히 중얼거렸다.
“이게 된다고요……?”
“천지인의 조건을 맞추면 대체로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게 공략법이고요. 괜히 제가 괴이 전문가를 자칭하겠습니까.”
“장의사 각성자. 저 그림자들은 대체 뭡니까? 인간의 영혼……?”
“아, 그건 아마도 아닙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조잡한 기억과 환상으로 이루어진 존재에 불과할 겁니다. 말 그대로 그림자이지요. 저기에 더 완전한 실체를 덧붙이려면 정말로 태평양 전쟁을 겪은 사람의 주문이 필요할 겁니다.”
“…….”
“반자이를 외치며 단체로 달려가는 모습을 잘 보십시오. 디테일이 없습니다. 진짜였다면 누군가에게 떠밀려 버린 사람도, 아예 할복을 시도하는 사람도, 억지로 희생당한 사람도, 다 각양각색의 얼굴과 포즈를 지니고 있었겠지요.”
그날 하루, 나는 노도하와 돌아다니면서 이 일대 전체에 ‘불행한 기억’을 재림시켰다.
콰아아아앙!
해변에선 함포 소리가 뒤흔들렸다. 소리만 있었다. 해상에는 전함은커녕 어선 한 척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선 전투기들이 쏘다니는 엔진음이 기이하게 울려 퍼졌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울음소리에는 국적이 부재했다.
‘사이판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그림자의 숫자도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실체 없는 그림자들은 영겁한 지옥 속에서 죽고 죽였다.
공허란 본래 그런 것이었다.
“…….”
노도하는 내 보장구를 제작해 주는 틈틈이 절벽 쪽을 쳐다보았다.
저번에 언급했던 대로 나는 부산에서 탈출극을 찍는 도중 왼다리 하나가 날아갔다.
노도하는 주변에서 대충 구해 온 나무로 보장구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 공방주. 거기는 조금 더 못을 강하게 조이십시오. 그편이 저에게 더 어울리더군요.”
“…….”
590회차 동안 노도하가 나의 사지를 만들어 준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시의적절하게 공방주를 보조했다.
평소였다면 ‘그럼 댁이 직접 만들던가요’라고 쏘아붙였을 텐데, 어째선지 이번 작업 동안 노도하는 조용했다.
마치 깊은 화두에 잠긴 듯이.
“참 기이한 세상이군요…….”
노도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게 왼발 보장구를 끼워 주면서, 그제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인간은 엉성하게 망각하려 들고, 괴이는 어설프게 기억하려 들다니.”
노도하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천천히.
“그리고 당신도 기묘한 인간입니다…….”
10
기이하고 기묘한 ‘휴양’이 이어졌다.
이제 나는 사랑하는 동료들로부터 경멸과 증오를 한몸에 받았으며, 매일 새벽 비명 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다.
‘이 정도면 제법 불행해졌다고 판단해도 좋겠지?’
적어도 나에겐 ‘검후의 반로환동’이나 ‘외계인들의 만리장성’ 등이 안겨 준 행운보다 작금의 불행이 더 묵직했다.
저런 것들이야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식의 행운 아니겠는가.
굳이 검후나 외계인들이 없었어도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전선을 유지할 줄 알았다.
-우끼긱!
원숭이 손도 그렇게 판단한 듯했다.
세상에 인싸가 있다면 아싸도 있는 것처럼, 누군가는 균형을 맞추려 드는 법.
행운과 불행의 천칭을 주관하는 원숭이 손은 위기감을 느낀 듯했다. 녀석은 더 노골적으로 행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장의사 각성자. 혹시 여기에 검후도 데려왔습니까……?”
“예? 아니요.”
“오늘 아침에 나가 보니까 집 앞에 바나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데…….”
가만히 있어도 식량이 알아서 튀어나왔다.
일단 날씨부터 끝내주었다. 바다는 에메랄드 빛깔을 품었으며, 나무들이 드리운 그늘은 사파이어 색깔로 윤이 났다.
저절로 수영복 입고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지는 환경.
-콰아아아앙!
그런 환경 속에서 함포 소리는 여전히 웅장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그림자들 또한 건재했다. 날씨가 지나치게 화창한 나머지 이젠 정말로 다이빙 선수들처럼 보였다.
노도하가 평했다.
“존나게 초현실적인 풍경이군요…….”
실로 그러했다.
내가 만들어 낸 불행과 원숭이 손이 생성하는 행운이 본격적으로 싸워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슴이 웅장해졌다. 행운의 나루토와 불운의 사스케 간에 벌어지는 경쟁은 나날이 격렬해졌다.
어느 날, 내가 해변을 산책하다가 모래사장에 털푸덕 쓰러져 있는 천요화를 발견했을 때 저 경쟁은 치열함의 정점을 찍고야 말았으니.
“…어. 요화야?”
“선… 생, 님…….”
덥썩.
천요화가 내 손을 잡았다.
“죄, 송해요. 얼마 전에 저, 제정신이 돌아왔어요. 그런데 제가……. 으으읏! 도대체, 선생님한테 무슨 짓을……!”
천요화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주황색 머리카락이 해풍에 쓸렸고 뺨에는 모래 자갈이 묻었다.
“선생님한테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무작정 저 혼자서라도 선생님을 찾으려고……. 배가 뒤집혔을 땐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살아서. 살아서, 선생님을 볼 수 있어서 다행……, 세상에. 다리, 다리는 왜 그렇게 되신 거예요? 아. 역시 저희들 때문에……? 읏. 죄송, 해요.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나는 전율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인가, 원숭이 손!’
익히 알다시피 나는 미움받는 약을 통해서 강제로 불행한 피폐물을 개봉시켰다.
이게 내가 던진 ‘장군’.
그러자 원숭이 손이 ‘멍군’을 외쳤다.
자고로 피폐물에서 가장 맛있는 부분이 어디였던가?
두말할 필요조차 없겠지. 그동안 주인공을 혐오하고 증오했던 주변 인물들이, 사실은 주인공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는 진실을 깨닫고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는 장면……!
[내가 주인공을 오해했어] [내 잘못이야] [나는 윤리적으로 그릇되었고 주인공이 올발랐어] [그러니까 나는 주인공에게 사과하고 보답해야만 해]라는, 실로 음습한 자아실현……!그래. 원숭이 손은 피폐물의 문법에 따라 내게 ‘사이다’를 맥이려 들고 있었다.
“요화야.”
“네……?”
“괜찮단다.”
원숭이 손이 이렇게 나왔다면 나의 대응법 역시 정해졌다.
나는 한없이 자애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용서하마.”
“……!”
그렇다.
원숭이 손이 바라는 사이다 전개란, 여기서 주인공이 다른 인물의 손을 뿌리치며 [이미 늦었어] [너희들에겐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전부 걷어찼지]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라고 읊조리는 것일 테지.
그리하여 주인공은 행복해지며 다른 이들은 불행해진다. 피폐물의 클리셰였다.
하지만.
“아니, 애당초 너에겐 용서받아야 할 일도 없단다. 선생님은 단 한 번도 너에게 실망한 적이 없어.”
“선생니임……!”
내가 선택한 전략은 바로 ‘용서하는’ 주인공!
주변 사람들이 설령 내 다리를 잘랐든 말았든 상관없이 무조건 용서해 준다. 장의사뒷담넷(SG넷에서 개명)에서 제아무리 나를 저주하는 글들을 남겼더라도 전부 받아준다.
단 한 방울의 사이다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
이야말로 원숭이 손의 수작에 대응하는 신의 한 수였다.
-우끼기긱, 힉, 끼기기기긱.
애당초 원숭이 손이 뭔 수작을 부려도 무의미했다.
눈앞의 천요화처럼 내 동료들이 ‘원숭이 손이라는 괴이에 지배당했는데 그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현상’ 자체가 내겐 뼈아픈 불행이었으므로.
‘아무튼 원숭이 손을 시험하다가 동료들을 위험에 빠트린 장본인은 나 아니던가.’
전부 나 스스로 자초한 재앙이거늘 어찌 다른 이를 탓하랴.
나중에라도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도리어 내 쪽이었다.
나는 천요화를 한반도까지 데려다주는 김에 부산의 각성자들한테 오른쪽 다리까지 적선하고 돌아왔다.
이번엔 일부러 당서린한테 당했다.
내 오른발을 자른 뒤 “칫, 심장을 노렸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내 다리를 던져 버리는 장면이 백미였지.
-끼기기기힉, 우끽, 우기끼기긱!
나의 엄선된 ‘고구마’ 전개에 원숭이 손이 발작했다.
기마대로 삼기 딱 좋게 생긴 공룡들이 나타나 내게 재롱을 피운다든지, 이누나키 터널이 개조되어서 한반도의 모든 도시가 연결된다든지, 놈은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내게 행운과 행복을 안겨 주려 애썼다.
그래서 다음번엔 성녀한테 왼팔을, 이하율한테 오른팔을 기부했다.
장의사 다루마 인형 완성.
-끼기기기기기기긱이힉힉!
허공에서 원숭이 손이 게거품을 무는 게 느껴졌다. 고구마에 기도가 막혀 졸도한 것이었다.
노도하도 거품을 물었다.
“진짜 댁은… 아니. 아니다. 그래. 댁이니까 뭐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아니, 그게 뭔지는 굳이 까발리지 않아도 됩니다. 모가지만 남기고 돌아오면 사지는 어떻게든 만들어 드릴 테니, 그냥 닥치고 있으십쇼……. 어쭈?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왼발. 오른발. 왼팔. 오른팔.
돌연 사지절단물로 장르가 뒤바뀐 나의 신체에는 노도하의 특제 보장구가 덕지덕지 붙었다.
어떻게든 행운을 선물하려는 원숭이 손과 어떻게든 불행을 선사하려는 나의 싸움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졌으나, 모든 싸움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제한 시간이 걸려 있었다.
10년 차.
‘드디어 왔군.’
590회차의 종막이 성큼 다가왔다.
마침내 내가 원숭이 손한테 내걸었던 시간제한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바로 그날.
우선 가볍게 일본 열도부터 멸망했다.
11
해변의 오두막에서 눈을 떴을 때 노도하와 나는 창밖을 내다보고는 일본열도가 망해 버렸음을 즉시 알 수 있었다.
“…장의사 각성자. 저거.”
“예. 저도 보고 있습니다.”
한국인이 주인공으로 발탁된 소설에서 일본 열도의 운명이란 항상 참담하다.
물론 나에겐 국적도 인종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
수명이 네 자릿수를 넘어가는 순간부터 사람의 가치관은 여러모로 달라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마저도.
만엽묘, 허수검, 우에하라 시노.
아직 언급하지 않았으며 가능하다면 영원토록 거론하고 싶지 않은, 마법소녀협의체의 의장 겸 제1석인 ‘대무녀’.
그들 모두 내 소중한 전우였다.
나는 그들이 어떤 인생을 걸어왔으며 또 어디로 향하고자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국가가 멸망하고 정부가 붕괴한 이 시대, 맨땅에서부터 주변 사람들을 구하고자 일어선 의용병들.
-이 땅을 희망이 넘치는 마법소녀물의 클리셰 구역으로 선포해 주겠어!
-악마를 죽이는 건 장엄한 비탄이 아니라 가벼운 웃음이야! 우리한테 비극은 어울리지 않아! 다들, 웃어 줘!
라는 목적 아래 조직된 마법소녀협의체.
그러나 마법소녀물엔 두 종류가 있었다.
어쨌든 동료들과 함께 정의가 승리하는 스토리. 정파(政派).
마법소녀들이 절망과 비탄에 빠져 갈갈이 찢어지는 모습을 관람하는 고문극. 마교(魔敎).
일본 열도에선 매일매일 정마대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마법소녀들에겐 안타까운 소식이 되겠지만, 이 세상의 장르는 원래부터 항상 사악했다.
“저건, 대체 뭡니까……?”
붉은 살점.
아침 햇살을 탐욕스럽게 마시는 수평선에 문득, 하나의 거대한 탑처럼 붉은 살점이 솟구쳐 있었다.
사이판에서 북쪽. 일본 열도가 위치한 방향이었다.
여기서부터 도쿄까지의 거리는 자그마치 약 2,400km에 달했다.
그만한 거리를 뛰어넘어 수평선 너머에까지 ‘붉은 살점’의 거탑은 본연의 위엄을 드러냈다.
나는 중얼거렸다.
“고요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