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5)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5화(1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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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자 Ⅰ
신노아
1
사람에게 멘탈만큼 중요한 것도 별로 없다.
쇼 노인의 일화에서 이미 강조했다. 설령 검 한 자루로 하늘을 가를 줄 안다 해도 멘탈이 무너지면 답이 없다는 것을.
나 장의사 역시 멘탈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만의 독특한 관리법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5회~7회 분량의 회차, 그러니까 대략 100년 동안은 열심히 일한다. 세계 멸망을 막아 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다음 1회차 동안엔 삶을 즐긴다.
‘세계 멸망? 내 알 바인가?’ 하고 사고를 유기해 버리는 것.
내가 구할 수 있는 생명에서 눈을 돌린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운명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오직 나의 인생, 나의 평온, 나의 재미만을 우선한다.
약 20년가량의 1회차를 통째로 멘탈을 치유하는 데, 즐거운 휴가를 보내는 데 써 버린다.
본편 루트에서 잠깐 비껴 나간 이벤트 회차, 일종의 외전이라고나 할까.
비겁한 거 아니냐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 나라는 인간의 멘탈엔 한계가 있다.
이런 방법이라도 쓰지 않았다면 1183회차에 이르는 기나긴 회귀자 생활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때마침 90회차는 딱 ‘휴가 회차’에 해당했다.
실로 좋은 타이밍이었다. 고요리에 의해 저 멀리 화성까지 날아가 버린 내 멘탈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휴식은 반드시 필요했으므로.
“그래서 네 의견을 묻고 싶구나. 어떻게 휴식해야 그놈 참 기깔나게 잘도 휴식했다는 칭찬을 들을까?”
“그, 그걸 왜 저한테 여쭈시는 건지요오…….”
내 손에 머리통이 잡힌 채 요정이 바들바들 떨었다.
튜토리얼의 요정이었다.
평범한 회차였다면 서규를 죽이기 전에 슥삭 순살해 버렸을 테지만 이번 90회차는 이른바 안식년. 내 마음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행동해도 상관없었다.
뭐, 바로 지난 89회차 때 요정들을 단체로 감금시킨 뒤 지옥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거하게 찍었던지라 그간 묵은 원한이 좀 씻어지기도 했고……. 아무튼.
나는 튜토리얼 요정을 포획한 뒤 대합실 한편으로 끌고 왔다.
처음엔 요정 녀석도 반항했지만 엘프귀를 두 번 접어 주어 하프엘프귀로 만들어 주니 아주 얌전해졌다.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다. 생각해 보니 너와 진득하게 얘기를 나눈 적이 별로 없어서.”
“호엑. 왜 하필 내 담당 구역에 이런 미친놈이……. 264번 요정은 우주에서 제일 불행한 요정인 거예요…….”
“어허. 다짜고짜 민간인 머리통을 날려 버리려는 놈이 불행하긴 뭐가 불행해.”
“그치만, 그치마안,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한테 각인시키지 못하면 나중에 훨씬 큰 피해와 비극으로 이어지는걸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제 대응은 잘못되지 않았어요!”
“공리주의자였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또한 회귀의 묘미겠지.
“아무튼 내 휴가에 대해 네 의견을 말해 봐라. 너희 요정들은 다 요정군주한테 저당잡힌 목숨들이잖냐? 휴가 좀 떠나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맨날 생각하고 있을 텐데.”
“흐이에엑? 그, 그걸 어떻게!”
손아귀 안에서 요정이 깜딱 놀랐다.
“네 녀석! 설마 선배님들이 그토록 주의하고 경계하라 귀가 떨어지도록 충고한 회빙환인 건가요?”
“회빙환?”
“회귀, 빙의, 환생! 저주받을 주인공들! 여기에 기출 변형으로 예언 능력자까지! 우리 요정들의 가장 무시무시한 적! 네놈들 때문에 문학에서 우리 요정들은 초반몹 취급이나 당한다는 거예요!”
“오. 혹시 요정계에선 그 회빙환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도 존재하냐?”
“아뇨? 그냥 고전 요정문학에 단골로 등장할 뿐인데요?”
역시 쇼 노인과 내가 특별한 거였군.
혹시라도 동료가 더 있을까 기대했던 나는 조금 풀이 죽었다.
“그러냐. 아무튼 딱히 너희 요정군주랑 적대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는 그저 20년짜리 휴가 계획에 조언을 건네주면 될 뿐이야. 시원찮으면 머리를 갈아서 요정주스로 만들어 주마.”
“히에에엑! 끔찍한 워딩! 요정권익위원회에 고소해도 이길 자신이 있는 거예요!”
“지구엔 그딴 거 없다.”
“이 무슨 야만 문명……?”
결국 264번 요정은 백기를 들어 올렸다.
“으음, 으으음. 아무튼 너한테 20년짜리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는 얘기인 거지요? 그리고 해당하는 기간 동안 좀 막 나가고 싶은 기분이고요?”
“그래.”
그러자 요정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264번한테 자유가 주어지고 너만큼 강력한 힘까지 생긴다면 요정군주의 배때기에 혁명의 죽창을 꽂아 넣고 싶은 거예요!”
“…….”
공리주의자에 혁명 투사였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또한 회귀의 묘미… 인지는 잘 모르겠군.
나중에 언급하게 될 날이 오겠지만 사실 요정들은 공화파와 왕당파로 나뉘어 있었다. 뭐, 지금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죽창을 꽂아 넣어? 무슨 수로? 너희 심장에 폭발각인 걸려 있잖냐. 요정군주에 반항하면 곧바로 심장이 터지면서 온몸이 녹아내릴 텐데?”
“어, 어떻게 거기까지……. 으으음. 아뇨, 거기까지 알고 있었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편하겠네요오. 어쨌든! 요정군주는 부르주아지들보다 훨씬 지독한 전제군주예요! 설령 264번의 심장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역사의 진보, 문명의 혁신을 위해서 요정군주는 반드시 토벌되어야 하는 거예요!”
요정이 파닥파닥 팔을 흔들었다.
“인간! 너희 인류는 비록 육체적으론 미개하고 허약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감탄할 만한 선형적 발전을 이룬 거예요! 이미 수백 년 전에 전제군주들의 모가지를 날렸다는 역사책을 접하고 264번, 아니 우리 [요정 혁명 동아리] 일동 전원은 깊은 감명을 받은 거예요!”
그런 동아리가 있었구나.
“안타깝게도 우리 요정 사회는 자력 구원이 요원한 절망적 상황……! 그렇지만 너처럼 강한 인간이 도와준다면 타력 구원은 가능할지도 모를 터! 인간! 우리를 도와서 부디 붉은 깃발이 요정군주의 배꼽에 꽂혀 휘날리는 그날까지 함께해 주라는 거예요!”
만일 이게 게임이었다면 ‘띠링’ 하는 알림음과 함께 ‘새로운 루트가 열렸습니다. 요정들을 도와 혁명을 이룩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떠올랐으리라.
“음.”
흥미가 동했다.
요정군주와 맞서 싸운 회차는 한차례 있었다. 그걸 이번엔 나 혼자서가 아니라 요정들과 연합군을 꾸려서 재현한다라.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하마.”
“뭣……? 어째서인가요, 인간!”
“지금 심신이 좀 지쳐서 전투 계열 루트는 조금. 오히려 서포트 계열이 당기는군.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한 도시 남자의 따뜻한 커피 한 잔이지,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바리케이드를 향해 돌진하는 혁명가의 피눈물이 아니다.”
“이 무슨 쁘띠부르주아적 발상! 지금 이 순간에도 요정들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요정군주의 사악한 명령 아래 인간들을 죽이고 있는 거예요! 너의 동포들을 말이에요! 그들의 피와 땀, 눈물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인가요! 맑스 선생의 호통이 두렵지도 않은 건가요!”
“미안한데 내가 사는 나라는 근본적으로 국민정신에 반공이 박혀 있어서…….”
“자본주의의 개! 인민의 배신자! 저주할 테다!”
“대신 너 한 명 정도는 저주를 해주해서 따로 고용해 줄 수도 있지.”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는 거예요. 주인님.”
물론 210회차 무렵에 가서 나는 정말로 [요정 혁명 동아리]에 객원 동아리원으로 참가해서 혁명의 효시를 쏘아 올리게 되지만 그건 또 다른 회차의 이야기.
나는 튜토리얼의 요정을 고용하는 데 성공했다.
“어, 저기……. 형님?”
아. 참.
참고로 우리 옆에서 서규가 계속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야 요정한테 머리통이 터지려는 걸 내가 구해줬으니까.
서규는 어째선지 미친놈 쳐다보는 눈으로 내 쪽을 봤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당신의 능력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것이고, 그 커뮤니티엔 네트워크가 없어도 각성자라면 누구든 접속할 수 있습니다.”
“네?”
“커뮤니티 이름은 SG넷이 좋을 것 같군요. 수고하십시오.”
“네?”
서규와 헤어졌다.
나는 기념품 가게에서 은방울을 파밍한 다음 요정을 어부바로 업었다. 등 뒤로 요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인간 주인은 나를 고용해서 어디다 써먹으려는 거예요? 세계정복? 혁명? 독재? 얼음송곳 슉슉이에요? 자국의 혁명에 성공한 다음엔 지나치게 큰 공을 세워 버린 이인자는 국제주의 노선이란 미명 아래 타국에다 수출해 버리는 거예요?”
도대체 264번 요정이 지구에 대해 조사할 때 어떤 자료를 읽어 버렸길래 이토록 왜곡된 편견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요정이 말했다시피 나는 자본주의의 개.
현대 소비문화의 최첨단에 발을 담글 생각이었다.
“아니.”
“그럼?”
“우리는 편의점을 열 거란다.”
2
24시간 편의점.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전까진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형 점포였다.
비록 동네 구멍가게만큼이나 향수를 일으키진 않지만, 세계 멸망이 가속화되기 시작하면 편의점 역시 당당하게 ‘추억의 물건’으로 등재된다.
-막내야. 편의점 가서 든힐 좀 사 와라.
-네?
각성자들이 막내를 괴롭힐 때 흔히 써먹는 게 편의점 드립이기도 했다.
내 회귀 경험을 미루어 볼 때, 화폐가치가 붕괴하더라도 지갑을 끝끝내 버리지 않는 각성자들은 의외로 많았다.
오히려 옛날엔 체크카드만 쓰던 사람들이 문명 붕괴 이후로는 지폐를 들고 다니더라.
카드가 먹통이 되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돈이란 일종의 부적과도 같았을 것이다.
아직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아집. 혹은 멸망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염원이 담긴 부적.
제법 이상한 일이지만, 다국적 각성자들끼리 모여 작전을 수행할 때는 서로 자국의 지폐를 교환하는 풍습마저 있었다. 한국인은 원화를, 미국인은 달러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마치 축구선수들이 경기가 끝나고 유니폼을 교환하듯.
그래서 한때 내 지갑에는 30종류 이상의 지폐가 수집되기도 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가.
바로 사람들이 멸망해 가는 세상에서 돈을 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추억’에 어마어마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영업하는 편의점을 만들 거다.”
“호에.”
실로 야심만만한 포부!
나는 서울의 어느 편의점을 강제로 점거한 뒤(어차피 주인은 도망쳤다) 선포하였다. 성녀와 처음 만난 그 추억의 편의점이었다.
가히 세계정복만큼이나 가슴이 웅장해지는 내 계획을 듣고도 264번 요정, 아니 우리 점포 직원 1호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무슨 고체파풀 뜯어 먹는 소리인 거예요?”
“고체파가 뭐냐?”
“지구에서 가장 적합한 대체어를 고르라면 ‘강아지’예요.”
개풀 뜯어 먹는 소리였구나.
하지만 나는 이미 100번 가까이 인생을 살아온 자. 상대방을 설득하는 방법에는 도가 텄다.
“264번. 너의 세계혁명론에는 크나큰 결점이 있다.”
“호엑?”
“세계는 넓고 사람은 많다. 그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혁명의 대의에 동참해 달라 부탁하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
나는 엄숙한 얼굴로 선언했다.
“진정한 고수는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오게끔 만들지.”
“……!”
“우리는 만국의 노동자가 제 발로 찾아오는 편의점을 만들 것이다. 이곳은 제6인터내셔널의 혁명기지! 너는 그 아방가르드의 첫 번째 깃발이요, 우리 편의점의 자랑스러운 점원이다. 자네가 얼마나 성심성의를 다하여 손님들을 접대하느냐에 우리 인터내셔널의 흥망이 달려 있다!”
“점장 동지……!”
요정이 아직 청소가 덜 된 점내 바닥에 엎드려서 닭똥 같은 눈물을 똑똑 흘렸다. 요정의 눈물에선 꽃향기가 나서 점내가 순식간에 달짝찌근해졌다.
방향제값은 아끼겠군.
“내가 그동안 점장 동지에게 큰 오해를 품고 있었던 거예요!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는 거예요!”
“그래. 혁명을 위한 사업인 만큼 부디 365일 무급으로 본점의 손님 대응 업무에 임해 주길 바란다.”
“네! 무급으로!”
요정군주의 노예에서 내 노예로 전직했을 뿐이지만 264번은 행복해 보였다.
행복하면 된 것 아닐까?
나는 근처 사거리에서 정당 현수막을 훔쳐 왔다.
현수막을 거꾸로 뒤집어서 달필이나 다름없는 나의 페인트칠 실력으로 글자를 적었다. 그리고 가게 앞에다 걸어놓았다.
서울 잠수교에 인류 최후의 편의점, ‘제6인터내셔널’이 개점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