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51)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51화(15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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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 Ⅲ
신노아
3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다.
게임처럼 시나리오를 진행하면 저절로 중간보스, 최종 보스, 흑막 보스가 차례차례 친절하게 등장해 주는 일 따윈 없다.
괴이들은 조선의 전쟁 천재 선조한테서 크나큰 영감을 받은 게 분명하다.
고전 RPG의 나라 일본에서 태어난 다이묘들이 ‘요시! 보스 스테이지 한양 클리어!’ ‘캬, 탄금대 노히트 클리어 기가 막혔쥬?’ ‘임진왜란 스피드런 성공!’ 하고 자화자찬하였을 때, 선조는 그들에게 세상은 JRPG가 아님을 냉엄하게 알려 주었다.
도주. 잠복. 대기.
그렇다. 왜 멍청하게 굳이 적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끝까지 숨어만 있는다면 패배할 가능성마저 삭제해 버릴 수 있다.
괴이들 역시 쓸데없이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특히나 소외신이라면 미천한 인간들 앞에 용안을 비추는 일이 극도로 드물어진다.
당장 무간(無間)만 봐도 그렇다.
무간은 백화여고의 지하 4층에 똬리를 뜬 채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결계를 펴 놓고는, ‘튜토리얼의 요정’이라는 식민지 군대만 파견하여 세상을 지배하려 들었다.
심지어 무간은 소외신 중 최약체에 불과했다. [만상유희의 운영자]는 한술 더 떴다.
“이 녀석은 기본적으로 잠복형 중에서도 잠복형이다.”
나는 오독서에게 말했다.
“스테이터스창, 경험치 시스템, 대미지 표시기, 레벨업, 게임 커뮤니티. 이런 온갖 장치들이 지구를 완벽히 전염시킨 다음에야, 그러고도 수백 년이 지난 이후에나 ‘서버 종료’의 순간에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지.”
“진짜로 빡세구나…….”
한밤중. 스피드런 실황을 잠깐 멈추고 태세를 정비하는 휴식 시간이었다.
[…….]아. 참고로 오독서와 내가 대화하는 동안 성녀는 여전히 근처에 숨어 있었다.
우리들 사이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당연했다. 서로 미움받는 약을 섭취해 버린 이상 나는 오독서에게 비호감을, 오독서는 내게 비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나마 오독서는 아주 미미한 감정만 느끼고 있겠지. 애당초 나에 대한 호감을 쌓을 이벤트가 드물었으니까.
반면 나는 달랐다.
‘…살의가 느껴지는군.’
죽이고 싶었다. 사지를 파열시키고 싶었다. 존재를 파멸시키고 싶었다.
내 손이 움찔거렸다.
오독서가 하품하면서 길게 뻗은 목을 바라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지팡이검을 뽑아다가 일도양단해 버리고 싶었다.
내 머릿속에선 굳이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오독서라는 자칭 책 빙의자를 불구로 만드는 방법이 수십 가지 떠올랐다.
그동안 내가 오독서에게 가져온 호의가 순식간에 반전되어 버린 영향이었다.
‘이게 590회차 때 당서린이나 요화가 나한테 느꼈던 감정인가.’
새삼 미안한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버틸 수 있었다. 미움받는 약이 제아무리 내 감정을 조작한들 어찌 내 기억까지 왜곡하랴.
나는 오독서가 어떤 아이인지 똑똑히 기억했다. 수백 년의 기억이 내 안에서 성채처럼 버티고 있었다.
고로, 독서에 대한 끝없는 살의를 나의 기억으로 뒤덮었다.
“…장의사 아저씨?”
“음.”
“괘, 괜찮아? 뭔가 힘들어 보이는데.”
흠칫흠칫.
내가 애써 감정을 갈무리했음에도 살의의 파편은 아주 살짝 삐쳐 나와 도망친 모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오독서는 기가 잔뜩 죽어서 내 눈치를 살폈다.
“걱정하지 마라. 어쨌든, 우리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으면 상태창 괴이가 5년 차에서 6년 차 사이에 등장한다.”
“응? 잠깐, 아저씨. 5년 차면 명색이 스피드런인데 너무 늦는 거 아냐?”
“그래. 우리가 직접 로그아웃 게임을 수면 위로 끌어낼 필요가 있지. 그래서 너를 데리고 일본에 온 거란다.”
“……?”
다음 날, 우리는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스피드런 방송을 재개했다.
[소외신급 괴이들은 모두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중 ‘만상유희의 운영자’는 게임뿐만 아니라 창작물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건 ‘만상유희의 운영자’ 아래에 속한 괴이들만 봐도 명확합니다. 용사 증후군, 구원서사 증후군, 환생트럭, 체호프의 총. 모두 창작물들과 연관된 괴이들이지요.]“헤에.”
오독서가 신발끈을 매며 중얼거렸다.
“스피드런 방송이란 형식을 취한 것도 그거 때문이구나? ‘방송’도 아무튼 창작의 일종이니까.”
[정확합니다.]여느 때처럼 성녀는 내 말을 옮겨 오독서에게 속삭여 주었다.
[우리가 창작물의 일원이 되어 갈수록, 우리의 힘이 커질수록, ‘만상유희의 운영자’ 역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날 가능성이 커집니다.]“아아- 오케이, 오케이. 이해했어.”
[이해했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부터 마법소녀로 전직해 봅시다.]“……?”
나는 오독서를 일본의 노토반도 쪽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마법소녀협의체의 본산이 위치해 있었다.
자연스럽게 내비게이션을 따라 움직이려던 오독서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엑, 잠깐! 잠깐! 마법소녀? 갑자기 웬 마법소녀? 왜 내가 마법소녀가 되어야 한단 건데? 걔들 전부 미쳤다며!”
[왜냐하면 마법소녀, 요컨대 일본의 각성자들은 ‘창작물’로부터 힘을 공급받는 아주 전형적인 직군이기 때문입니다.]그렇다.
반쯤은 우연에 불과했겠으나, 일본열도의 각성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전원 [만상유희의 운영자]를 모시는 신도나 다름없었다.
마법소녀는 언제나 악에 맞서 싸우는 정의. 몇몇 사악한 작품을 제외하면 마법소녀는 항상 승리한다.
이러한 마법소녀물의 ‘클리셰’에 의존하여, 일본열도의 각성자들은 세계를 좀먹는 괴이들에게 대항하였다.
나는 만엽묘와 같은 동지들을 아꼈다.
하지만 593회차의 시점에서 조금 냉정하게 평가해 보자면―― 그들은 괴이와 맞서기 위해, 그들 스스로 ‘마법소녀’라는 이름의 ‘괴이’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전형적인 타락 현상이었다.
[하지만 타락이라고 해서 전부 나쁜 것은 아닙니다.]스피드런에선 뭐든지 써먹어야만 했다.
[마법소녀들은 본연의 힘이 강력해질수록 소외신과 긴밀히 연결됩니다. 즉, 경우에 따라선 ‘만상유희의 운영자’가 출현하는 날짜를 크게 앞당길 수도 있습니다.]“아…….”
[오독서. 당신은 이미 <하멜 표류기>라는 창작물을 이용했으며, <미움받는 약>이라는 클리셰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물며 <스피드런 방송>이라는 창작 형식에 따라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모든 존재가 창작물로 물들고 있습니다. 당신만큼 만상유희의 운영자에 적합한 무녀는 없습니다. 협의체의 명예회원이 되어 마법소녀로 거듭난다면 더욱더.]물론, 마법소녀협의체는 외부인에게 극도로 배타적인 집단이었다.
오독서 역시 다른 모든 인간들한테 첫인상부터 비호감을 사게 되어 버린 작금엔 협의체 가입이 더 어려워졌겠지.
그러나 이미 몇 차례 공개되었다시피, 협의체에 등록하는 공략법은 정해져 있었다.
사흘 뒤.
“…고마워. 설마 한국에서 온 각성자가 이누나키 터널을 토벌할 줄이야. 협의체의 대표로서 감사를 표하겠어.”
꾸벅.
마법소녀협의체의 의장인 대무녀가 예의 바르게도 고개를 숙였다.
오독서는 중증 오타쿠인 주제에 일본어 회화가 영 별로였다. 그래서 성녀가 중간에서 실시간으로 번역기를 돌려줘야만 했다.
“그런데…….”
대무녀가 머리를 슬쩍 들었다.
“왜 그렇게 온몸에 새똥을 맞은 건지 물어봐도 될까?”
그야 ‘행운총량제’가 우리한테 소소한 불행들을 안겨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독서뿐만 아니라 나와 성녀까지 새똥 세례를 퍼 맞았다.
오독서가 죽상을 지었다.
“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으음, 그래.”
대무녀가 부채를 펼쳤다.
“하지만, 우리 협의체에 가입하고 싶다는 얘기는 정말 의외인걸. 우리는 발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규모 조직이야. 왜 타향의 외국인이 우리한테 눈독을 들이는 건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아, 음. 왜냐하면……. 당신들에게 가능성을 느꼈다고나 할까. 프렌드! 도모다치! 어려운 시절부터 함께해야 우정은 깊어지는 법이잖아요!”
“…….”
“으…….”
대무녀는 부채 너머에서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첫인상부터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상대방. 심지어 아무리 세기말이라지만 새똥을 맞은 채 손님방에 들어왔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솟았을 터.
하지만 오독서는 내 지시에 따라 이누나키 터널을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
오독서를 마법소녀협의체에 받아들인다면 그 공훈을 자기 조직의 업적으로 치장할 수 있었다.
“으음. 아직 우리는 외국인의 가입을 허용할 준비가 안 되어 있어. 그럴싸한 자리를 마련해 주기는 여러모로 곤란한데…….”
“아! 상관없어요! 그냥 명예회원으로도 충분. 저에게 마법소녀 자격이 있다고 인정만 해 주시면 됩니다!”
“어라, 그래? 그럼 간단하지.”
탁. 대무녀가 부채를 접었다.
“당신이 계약할 신을 찾아줘. 우리 마법소녀들은 저마다의 신과 파트너가 되어서 싸우거든.”
편의상 신이라고 불렀지만 마법소녀는 뭐든지 파트너로 삼을 수 있었다.
인간이어도 애완동물이어도 심지어 괴이여도, 마법소녀가 원한다면 자신의 신으로 모실 수 있었다.
“나중에 신과 함께 내 앞에 다시 찾아오면 당신한테도 마법소녀 자격을 수여할게. 참, 혹시라도 모실 신이 마땅치 않다면 내 쪽에서 소개해 줄 수도…….”
“아. 그건 괜찮아요.”
오독서가 멋쩍게 웃었다.
“저, 이미 있거든요. 모시고 있는 신.”
“응? 어떤 신이니?”
“장의사(葬儀師).”
멀리 숨어서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나는 멈칫했다.
왜냐면 우리는 이곳에 들르기 직전 ‘구국의 성녀’를 신으로 모시기로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성녀는 여러 성좌들을 거느렸다. 이것만으로도 ‘성좌물’이라는 창작물의 클리셰와 깊이 연관되었다 말할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성녀를 신의 위치에 옮겨 놓으면, 그녀가 속삭여 주는 텔레파시는 일종의 ‘계시’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여러 이유에서 나보다는 성녀가 파트너의 자리에 적합했다.
그런데 오독서는 자신의 의지로 합의를 깨트리고 내 이명을 꺼낸 것이었다.
대무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장의사? 처음 들어보는 신인데.”
“네. 저만의 신이라서.”
“미리 말해 두지만 사실은 없는 신을 있다고 꾸며 내어도 계약이 성립하는 건 아니야. 이 자리에 반드시 존재해야 돼.”
“문제없어요. 틀림없이 존재해요. 언제나 지켜보고 지금도 이곳에 있어요. 당신 눈에 안 보일 뿐.”
“…어머나, 그래? 꽤 격이 높은 신격인 모양이구나.”
대무녀가 피식거렸다.
“그럼, 이 자리에서 계약을 채결해 줄게. 단, 만약 계약이 불발하면 가입 얘기는 없던 걸로 하겠어.”
“아무쪼록.”
차락. 대무녀는 부채를 펼쳤다.
“타마모노마에(玉藻前)의 이름으로 고하나니, 신이시여. 장의사라는 발음으로 불리는 신이시여. 눈앞의 인간에게 보살핌과 수호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약간, 몸이 붕 뜨는 감각.
그것과 동시에 오독서와 나 사이에 무언가 투명하면서도 가느다란 실이 연결되는 게 느껴졌다.
“…정말로 있었네? 게다가 강해.”
대무녀가 놀랐다.
“아니, 강하다고 해야 할지. 이건……. 계약에 응해 준 것 자체가 말이……. 장의사? 장의사. 정말로 처음 들어보는 신격인데, 어떻게…….”
“뭔가 문제 있어요?”
“…문제는 없어. 하지만 무척 위험한 신격을 모시고 있구나. 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너도 강해지겠지만, 신의 힘을 빌려 쓴다는 건 결코 아무런 이자 없는 대출이 아니야.”
대무녀가 부채를 오므렸다.
“신에게 의존할수록 무녀는 한낱 신의 도구로 전락하게 돼. 결국 신의 장난감이 되어, 신 본인이 지상에 강림하기 위한 통로로 변질되어 버리지. 조심하렴.”
“걱정, 감사합니다.”
오독서가 어눌한 일본어 발음으로 말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아마도.”
이후로도 오독서는 대무녀에게 이런저런 가이드라인을 배운 뒤(주로 마법소녀로 변신할 때는 반드시 ‘변신!’이라고 외쳐야 한다든지, 그런 쓰잘데기 없는 내용이었다) 기지에서 나왔다.
그날 밤.
방송을 끝마치고 휴식 시간이 되자, 나는 오독서한테 다가가서 물었다.
“왜 성녀님이 아니라 나를 신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던 거냐?”
“으음…….”
오독서가 볼을 긁적였다.
한참이나 침묵하고 나서 오독서는 툭 말했다.
“그게 더 맞다고 생각했어. 아저씨, 마법소녀들이 사실은 전부 창작물의 클리셰에 중독되어 가는 존재들……. 그래서 [만상유희의 운영자]란 소외신한테 잠식되는 신도들이라고 말했었지?”
“그래.”
“그럼, 이 세상을 <전지적 회귀 시점>이라는 소설을 통해 미리 읽었던 나는 어떤 존재야?”
“…….”
주변에서 찌르레기 울음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나는 애당초 이 세상을 반쯤은 창작물 속의 이야기로 보고 있었어. 부산역에 갑자기 소환당했을 때부터 말이야. 그야, 아저씨가 주인공이었던 소설을 분명히 얼마 전에 읽었는걸.”
“…….”
“그래서 아저씨한테 물어보는 건데, 혹시…….”
오독서가 캡모자를 고쳐 쓰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처음부터 소외신한테 잠식된 인간이었던 거야?”
그렇다.
이것이 오독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만상유희의 운영자]를 토벌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이유.
천요화가 무간의 사도이자 무녀였듯이.
[만상유희의 운영자]의 무녀는―― 자칭 책 빙의자, 이 세상을 하나의 창작물로 바라보도록 운명이 예정된 존재.오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