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17)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17화(1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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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자 Ⅲ
신노아
5
흔히들 마음은 심장에 비유되고, 심장은 불에 비유된다.
심장이 타오른다거나. 마음의 불씨가 커진다거나.
하지만 내 경우엔 ‘물’이 더 적합한 표현일 때가 더 많았다.
고요리가 불러일으킨 붉은 살점에 의해 89회차가 절단 난 이후 한동안 내 마음속 우물은 메말랐다.
흔히 번아웃이라고 부르는 증상.
회귀자로서 살다 보면 언제고 맞닥뜨리게 되는 슬럼프였다.
“전멸이라니…….”
“삼천이 없어지면 이제 한국에 탑급 길드는 백화밖에 안 남은 거 아니야?”
“아니, 시체박이들은 좀……. 걔넨 일단 길드인지 아닌지부터 의심스러운데.”
“어차피 공허 토벌에는 실패한 거잖아. 어제 밤하늘 올려다봤는데 소름 끼치더라니까.”
당서린의 유해를 수습하여 화장한 뒤 해변에 뿌리고 돌아와 보니, 편의점 바깥 파라솔에서 각성자들이 소곤거리고 있었다.
어째선지 그 소곤거림이 나에겐 마치 간지러운 물소리처럼 들려왔다.
물소리는 하나의 사물로 귀착하고 있었다.
[이 집 커피 맛집이네요. 三千世界, 당서린]와인색 천 원권 지폐.
나는 삼천 길드장의 서명이 적힌 지폐를 아크릴 케이스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편의점 계산대 뒤편, 보통은 담배들이 진열되는 그곳에 지폐 케이스를 장식해 놓았다.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지하 창고에서도 물자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희소해진 자원이 술과 담배였기에 지폐를 전시할 공간은 충분했다.
당연히 손님들도 계산대를 오갈 때마다 전시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검후 노인이 손을 들어 가리켰다.
“점주 양반. 저건 대체 어떤 귀물이오? 심상찮은 공력이 느껴지는구려.”
“아, 저거요? 삼천 길드장이 유성우 때려잡으러 떠나기 전에 남겨 준 서명입니다.”
“흐음…….”
노인이 침음을 흘리면서 편의점에서 나갔다.
다음 날. 검후 노인은 언제나처럼 초록색 막걸리를 한 병 사면서 계산대에다 대뜸 만 원짜리 지폐를 올려놓았다.
“점주. 이것은 본인이 직접 친 난초라오.”
“난초요? 웬 난초입니까?”
“그림을 잘 보시구려.”
보았다.
세종대왕의 듬직한 어깨 너머로 진짜로 난초가 그려져 있었다.
“……?”
솔직히 그림 실력은 형편없었다. 만약 흥선대원군이 보았다면 이건 난이 아니라 파인애플잎이라고 격노했을 터.
그래도 그 나름대로 정성을 들였는지 배춧잎 구석엔 [율도국의 검후]라는 서명이 깨알처럼 박혀 있었다.
검후는 자신의 작품이 퍽 자랑스러웠는지 콧김을 훅 풍겼다. 노인의 외모 가운데 유일하게 봐줄 만한 콧수염이 나풀거렸다.
“부디 점주의 가게에 병풍처럼 걸어 두시오.”
“…….”
뭐, 딱히 상관없겠지.
나는 별생각 없이 검후의 지폐도 전시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게 기점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내 편의점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너도 나도 가리지 않고 자기 서명이 담긴 지폐를 내밀기 시작했다.
“저기, 사장님. 저 이번에 공략팀으로 가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거 좀…….”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그땐 2+1로 할인해 주세요!”
“진짜 진짜로 담배 한 보루 안 돼요? 네? 제발요.”
삼천 길드장의 유품만 있을 땐 조심스러웠지만 검후 노인의 지폐까지 전시되니 갑자기 만만해 보인 것일까.
각성자들이 두고 가는 화폐는 종류도 다양했다.
옛날 오천 원짜리 지폐, 2달러권 지폐, 동독일 마르크(이게 제일 신기했다), 엔화, 유로화, 파운드화, 몽골 투그릭, 홍콩 달러, 베트남 동, 필리핀 페소, 북한 원, 인도 루피와 네팔 루피…….
어느새 내 계산대 뒤편은 화폐들로 가득 찼다.
나는 이따금 시간이 빌 때마다 전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운데가 뻥 뚫린 담배 진열대에 지폐가 벽돌처럼 한 장 한 장 채워질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내 심장 속의 우물도 조금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삶이 결국은 한 장의 사진을 남기기 위한 여정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내 90번째 초상화는 이것이겠지.
“점장 동지…….”
“음?”
264번 요정이 제로음료 박스를 내려놓았다. 새마을 모자 아래로 비춘 표정은 무척 풀 죽어 있었다.
“제로음료도 이 박스로 끝인 거예요. 호에엑…….”
“그런가. 주류는?”
“맥주, 소주, 위스키, 와인, 막걸리, 사케, 종류 안 가리고 전부 긁어모아도 이젠 50병밖에 안 남았어요. 혁명을 위한 자금줄이 말라 버려서 면목이 없다는 거예요…….”
주류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품목의 비축분이 바닥났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란 없는 법.
하지만 뭐 어떠랴. 나무가 언젠가 썩을 것이 두렵다며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 경우를 봤던가.
“자.”
나는 아껴둔 천하장사 소시지를 꺼냈다.
쫑긋! 소시지를 보고 264번이 귀를 세웠다.
이번 회차에서 알아낸 정보인데 왜인지 이유는 몰라도 이 소시지만 보면 요정들이 껌뻑 죽더라.
“아앗! 다 떨어진 줄로만 알았던 소시지가!”
“다른 애들 몰래 먹어라.”
“역시 저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점장 동지밖에 없는 거예요……!”
264번 머리를 토닥거려 주었다.
“사람들 다 불러다가 남은 술 전부 털어버리자.”
“네! 동지!”
나는 손님들을 불러 모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 간단히 각성자들을 초대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사이트에 연결할 수 없습니다.]이미 얼마 전에 서규의 ‘헌터 커뮤니티’는 폐쇄되었다.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서규가 죽어 버린 것이었다.
고요리도 마찬가지로 죽었겠지. 애당초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태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 테니.
요정들이 일일이 발품을 팔아 사람들을 모아 봤더니 그래도 참가자가 백 명 남짓한 파티가 되었다. 아주 만족스럽진 못하겠지만 50병의 술로 그럭저럭 즐길 수 있는 인원.
‘성녀는 안 왔나.’
각성자들이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즐겼다.
그들도 따로 최후까지 쟁여 놓은 물자들이 있었기에 파티가 초라해질 일은 없었다. 놀랍게도 샤토 디캠 1990년산 와인을 11병이나 가져온 각성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일약 인류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분위기는 극에 달아올랐다.
“저희 그럼 여기 모인 인원으로 길드 창설해 볼까요!”
“오오!”
“최후의 길드! 길드 창설 기념으로 오늘 밤 쫑파티 끝나면 유성우 게이트 따러 출격합시다!”
“이건 길드가 아니라 막공인데 말입니다……?”
여태껏 죽지 않고 살아남은 각성자들은 길드에 가입을 안 한 외골수거나 뭔가 문제가 생겨 길드에서 쫓겨난 낙오자들. 대체로 대인관계가 순탄치 못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그들도 합심하여 파티를 꾸렸다. 뭐, 저 단합력엔 샤토 디캠 11병의 위력이 다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겠지만 말이다.
“점장님! 점장님은 같이 가지 않으시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한 손님이 한 분 있어서요. 여러분 가고 나면 저도 좀 있다 가겠습니다.”
“아, 점장님만 있으면 30초는 더 버틸 거 같은데. 아쉽네.”
“3분도 가능하지 않을까?”
“자아, 자! 퍼뜩 가입시다!”
사람들이 낄낄 웃었다.
그날 밤하늘은 유독 천장이 높아서 요란스러웠다.
6
오랜 회귀 생활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이제 정말로 세계 멸망이 닥쳐왔음을 직감했다.
최후의 만찬이 끝난 다음 날, 요정 점원들을 모두 한자리에 호출했다.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은 쪼무래기들이 마흔 명이나 옹기종기 모였다. 나는 그들 앞에서 선언했다.
“오늘은 휴가다.”
“호엑.”
요정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휴가라면 노동이 없는 나날인 거예요?”
“노동은 인간의 가치를 투영하는 것인데 휴일은 자기 가치를 유기해 버리는 행위인 거예요. 지극히 반형명적인 개념이에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건 유급 휴가인지 무급 휴가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닌지?”
나는 피식 웃고 요정들에게 오만 원권을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걱정 마라. 유급 휴가다.”
지폐에는 전부 내 서명이 적혀 있었다.
[제6인터내셔널 서기장 겸 위원장 겸 점장.]요정들이 눈을 반짝였다.
“와! 점장 동지의 친필 사인!”
“대단히 감격!”
“공공기관 사무실마다 액자에 넣어서 걸어 놓는 걸 법제화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 마음대로 해라. 어쨌거나 오늘 하루 가게는 나 혼자서 볼 테니까 잘 쉬고 오렴.”
“네!”
요정들이 붉은 깃발들을 치켜들고 쪼르르 어디론가 행진했다. 그렇게 나는 혼자 남았다.
조용해진 점내에서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을 때였다.
딸랑, 하고 유리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
성녀였다.
내가 마지막까지 기다린 손님이기도 했다.
그녀는 점내를 조용히 둘러보았다. 진열대 군데군데가 마치 이빨이 빠진 것처럼 비어 있었다. 그런 진열대엔 [일시품절 – 재입고를 기다려 주세요]라는 팻말이 부착되어 있었다.
성녀가 중얼거렸다.
“재입고가 많이 늦어지네요.”
“예. 본사에 계속 재촉하곤 있는데 영 힘든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성녀는 내 말에 아무런 반박을 달지 않고 그저 가만히 수긍했다.
코앞까지 몰아닥친 종말.
그런 상황에도 성녀는 죽지 않았다. 이번 회차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반드시’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성녀는 언제나 최후의 날까지 생존했다.
삶에 대한 집착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스스로 삶에 대한 의무를 부과하고 있었다.
“커피 한 잔만 타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원두와 우유, 설탕을 가져와서 최대한 봉다리 커피와 유사하게 커피를 만들었다.
이렇게 점주가 직접 커피를 타 주는 것이 우리 제6인터내셔널에서 단골손님들을 대접하는 방법이었다.
당연히 우리 가게의 첫 번째 단골에게 이만한 서비스는 드릴 수 있었다.
“…….”
“…….”
커피를 마시는 동안 성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단지 새까만 눈으로 계산대 뒤편을, 점내 진열대들을, 유리창 바깥을 바라보았다.
특히 그녀의 시선은 지폐 케이스들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잘 마셨어요. 여기, 계산이요.”
성녀가 내민 것은 오만 원권 지폐였다.
“거스름돈은 안 주셔도 괜찮아요. 다음에 또 올게요.”
지폐 뒷면엔 [당신의 첫 번째 손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편의점에 각성자가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한밤중, 나는 가게 문을 닫고 한강 변에 나왔다.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붉은빛. 초록빛. 보랏빛. 은하수는 마치 길게 찢어진 입술처럼 벌어졌고, 그 속에서 무수한 별들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반짝였다.
실제로도 쏟아져 내렸다.
삼천을 비롯한 길드 연합이 죽음을 불사해서라도 어떻게든 봉합하려 했던 게이트가 이제는 완전히 개문(開門)하여, 별빛으로 이루어진 재앙을 지상에 흘려놓았다.
회귀 7년 차에는 경상남도에서, 12년 차엔 서울에서 반드시 발생하는 이벤트. 일명 메테오 스트라이크였다.
“이번 회차는 메테오 엔딩이로군.”
나는 강변 둔덕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걸 피해서 살려면 살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혼자 생존해 봤자 이번 회차에선 할 일이 없었다.
다음 회차에서 해야 될 일은 무수했다.
‘나쁘지 않은 휴가였어.’
스마트폰을 열었다.
별이 낙하하는 걸 기다리며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슥슥 넘겼다.
본래 나는 사진을 찍는 버릇이 없었다. 더 정확히는 회귀자로 살아가면서 버릇이 없어졌다. 사진이란 추억을 보존하는 물건이었지만 내게서 사진은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으므로.
그러나 어차피 없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사진들은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집 커피 맛집이네요. 三千世界, 당서린] [율도국의 검후] [덕분에 잘 놀다 갑니다. 이주호.]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게 이름이랑 점원 티셔츠가 이상합니다. 점장님은 혹시 赤軍派입니까? 우에하라 시노 올림.] [수학여행 다녀가요! 백화여고♡우리 사랑 천리만리 영원하길 – by 天寥化] [오는 길이 너무 불편합니다. 와인병 들고 오느라 죽는 줄. – NDH] [제6인터내셔널 아자아자 파이팅! – 심아련] [담배 한 보루씩만 팔아 줬으면 GOAT였는데…….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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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첫 번째 손님이.]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어째서 회귀자의 삶을 받아들였는지, 누구를 돕고 싶은 것인지, 어째서 돕고 싶은 것인지 그 이유들의 부피가 전에 없이 뚜렷하게 심장에 차올랐다.
회귀자의 인생에 필요한 식수를 공급하는 데 12년이란 충분한 세월이었나 보다.
물론 이러다 백 년이 지나면 또 휴가를 떠나야겠지만 말이다.
‘가만. 그런데 메테오 엔딩은 좀 올드한 느낌 아닌가?’
온 세상이 별빛으로 가득 물들었다.
회귀의 시간.
이날 나는 12년 차 편의점 점주에서 퇴직하고 다시금 회귀자로 복직했다.
– 국제주의자. 結.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