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20)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20화(2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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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자 Ⅲ
신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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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서린의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있다.
아니, 사실 나의 모든 이야기는 후일담에 속한다. 적어도 1183회차에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당서린의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아주 많았고 그중 몇 가지만 언급하겠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으리라.
“어라. 장의사, 깼어?”
십족 토벌 기념 뒤풀이가 끝난 다음 날.
모두가 만취해서 뻗었다. 술을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만큼 취했고, 못하는 사람도 못하는 만큼 취했다. 십족의 모가지는 그만한 안줏거리였으니까.
새벽이 밤의 여운을 잊지 못해 푸름으로 야윌 적에 당서린은 백송(白松) 아래 서 있었다. 혼자서. 그녀의 그림자는 해를 기다리기보단 이미 지나간 밤을 배웅하고 있었다.
“예. 깼습니다.”
“머리 안 아파? 검성이랑 같이 엄청나게 마시던데.”
“빨리 취하고 빨리 깨는 체질입니다. 원래 아침잠이 적기도 하고요. 그러는 맹주님도 컨디션 괜찮습니까?”
“그럼. 나야 늘 괜찮지.”
정작 그렇게 말하는 당서린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쉬어 있었다. 그야 어제 전쟁터에서 41분 내내 마법을 영창한데다 뒤풀이에선 노래까지 열창했으니까. 성대가 강철로 이루어진 가수라도 목이 나가지 않곤 못 배겼을 거다.
“이제 당신한테 맹주 소리 듣는 것도 슬슬 마지막이겠네. 조오금 아쉬운걸.”
“뭐, 십족은 죽었다지만 아직 어떤 괴물들이 튀어나올지 모르잖습니까. 그때 가서 또 길드 연합이 꾸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 가면 다시 맹주 하셔야죠.”
“그러게.”
당서린은 조용히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게.”
나 또한 머리에서 아직 알콜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서, 파란 하늘이 술기운을 소독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멍하게 나란히 구경꾼 대열에 합류했다.
하늘에 그런 소독 기능이 있을까 싶다마는 아무렴 어떠랴.
낮하늘이 사람의 땀을 받아내고 밤하늘이 사람의 꿈을 받아낼 때, 그러고도 미처 향하지 못한 상념은 새벽이 받아주는 몫이었다.
“저기.”
내 옆에서 바람이 입을 열었다.
“내 꿈이 뭔지 들어볼래?”
“알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맛집을 제패하는 거죠.”
“아, 그것도 맞지. 그치. 그건 포기할 수 없지.”
당서린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지금 얘기하는 건 다른 꿈이야.”
다른 꿈?
나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꿈이 또 있었나? 4회차에서 6회차까지 당서린을 길드장으로 보필했지만 또 다른 꿈은 들어본 적 없었다.
“아. 혹시 진짜로 삼천 명의 정예 길드원을 키워서 삼천세계의 이름값을 하겠다는 포부 말하는 겁니까?”
“오. 그것도 있었지. 뭐야, 장의사?”
당서린이 새삼스럽다는 듯 내 얼굴을 쳐다봤다.
“맨날 다른 사람한테 아무 관심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하고선 의외로 나에 대해선 잘 아네? 혹시 당서린 오타쿠야? 근데 팬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거 말고 딴 꿈이야.”
“그럼 진짜 모르겠군요. 뭡니까?”
“철도 여행.”
당서린이 새벽을 향해 살짝 발꿈치를 들고 손을 뻗었다.
다섯 개로 이루어진 손가락이 하늘을 가파르게 쥐었다.
“이렇게 되어 버린 세계를 기차로 여행하고 싶어.”
“…기차로요?”
“응. 굳이 거창한 기차는 필요 없어. 고물 기차. 딱 단칸짜리로 내가 직접 커스터마이징한 기차.”
그녀가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허구한 날 고장나서 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바퀴도 안 굴러가는 물건인데, 거기서 먹고 자고 이동할 수도 있고 빨래까지 널 수 있는 거야. 캠핑카나 요트처럼.”
“철도가 제대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군요. 당장 삼천 길드에서 임시 숙소로 쓰는 KTX 열차들도 운행을 못 하지 않습니까? 1차선 도로 정도야 부산 공방에서 관리하고 있지만요.”
“그건 뭐. 어떻게든 신비로운 마법의 힘으로.”
당서린이 얍얍 소리를 내며 권투를 흉내 냈다.
“이 세상에서 망가져 버린 철도를 내가 하나씩 고쳐 가며 계속해서 나아가는 거야. 역사에서 역사로, 영원히. 내가 지나친 곳 뒤로는 언제나 예쁜 레일이 깔리는 거지.”
“음.”
“그렇게 가고, 가고, 또 가고……. 가다가. 더 이상 가지 못해서 어느 해변의 허름한 기차역에 도착하면. 전봇대 하나가 외로운 역무원처럼 서 있는 역에 도착해 버린다면.”
“…….”
당서린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당서린의 얼굴을 쳐다봤다.
기묘한 말이지만 그녀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느껴졌다.
“맹주?”
“흐음.”
당서린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항상 들고 다니는 빗자루(그녀가 주장하길 마녀의 필수품인)에 몸을 기대었다.
평소와 똑같은 안색이었다.
“장의사. 역시 내 길드에 들어와서 부길드장이 되어 주지 않을래? 당신도 알겠지만 우리 길드 잘나간단다. 이런 기회가 또 없어요.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을걸?”
“…뭔가 했더니 또 그 이야기입니까. 고깔모자 안 받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당서린이 걸어갔다.
등 뒤로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바이바이- 난 조금 산책이나 하다가 돌아갈게. 혼자 운치를 즐길 거니까 따라오진 말고.”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
“글쎄. 대충 한 시간 정도?”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이 지나도 당서린은 돌아오지 않았다.
길드 연합에서 수색대가 급파되었다.
실종 세 시간 후, 숲길에 쓰러져 있는 당서린이 발견되었다.
그날 이후 당서린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7
“삼천 길드장님의 차후는 좀 어떻습니까?”
“그게……. 기이합니다.”
치료진의 안색은 어두웠다.
“전체적으로 신체의 기능이 저하되었습니다. 저주 계열인가 싶어 확인했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기이하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이런 말씀을 전해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언제 눈을 감으셔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병실에 들어갔다. 아직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병원의 독실이었다.
창가에 있는 당서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도 좋아했던 기차가 아니라 휠체어 바퀴에 자신의 몸무게를 맡긴 채로.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30초 정도 지났을까. 당서린이 탁, 하고 소설책을 덮고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수명이야.”
2주 만에 얼굴을 본 사람의 첫마디였다.
“수명이요?”
“그래. 어차피 본론은 그거잖아? 나 이런 분위기 싫어. 얼른 말해 버리고 딴 얘기나 하자.”
당서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표정과 몸짓은 평소의 당서린과 하등 다를 바 없어, 휠체어만 안 보였더라면 그녀에게 이상이 생겼다고는 도무지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휠체어뿐만이 아니었다. 고깔모자는 병실 옷걸이에 걸려 있었고, 빗자루는 마녀의 필수품이 아니라 그저 낡은 청소용품처럼 벽에 기대어 있었다.
나는 이 병실이 당서린이라는 사람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졌다.
“내 마법은 남은 수명을 불태울수록 강력해져. 마법 말고도 내가 각성한 능력이야. 멋지게 [등가교환]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뭐, 아주 낯선 능력은 아니지?”
“그럼…….”
“그래. 와아, 십족 걔 진짜 끔찍하게 질기더라. 어떻게 된 괴물이길래 제10선율을 영창할 때까지 버티니? 난 그 자리에서 즉사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았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나 병 걸린 거 아니란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상대방을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얕지 않은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었다.’
당서린이 다중능력 각성자였다는 것.
마법 계열 능력 이외에도, 자신의 수명을 불태워 일시적으로 화력을 얻어내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
삼천 길드의 2인자로서 그녀를 지척에서 수행할 때조차 당서린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무기를 밝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십족을 토벌하는 싸움에서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습니까?”
“응.”
당서린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적이었어. 그렇잖아? 당신도, 검성도, 전투에 참여한 각성자들도, 백업을 도와준 군인들과 민간봉사자들도. 전부.”
그 말은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당장 나 역시 7번의 목숨을 버리지 않았던가.
문득 그동안의 회차들에서 당서린이 했던 얘기들이 떠올랐다. 십족 토벌을 눈앞에 두고 그녀가 읊조린 말들.
-30분. 어떻게든 30분만 버텨 줘. 내가 대마법을 구축해서 십족의 머리를 날려 버리겠어.
-장의사. 검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25분……. 아니, 30분만 버텨 줘.
그때 당서린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겠지.
그러므로 그녀는 사실 이렇게 부탁했던 셈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30분만 버텨 줘.
하지만 십족 토벌에는 41분이 소요되었다.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수명의 소모였으리라.
“…….”
나는 술렁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내게 있어 회귀란 타인들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도구이기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회차가 달라지면 행동도 결과도 달라졌다. 하지만 아무리 회귀를 반복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마음의 강함과 신념의 굳건함.
여태까지 당서린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십족의 토벌을 논했으며 30분을 입에 담았다.
어느 회차에서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류의 적을 궤멸한다’라는 그녀의 행동 원리는 바뀌지 않은 것이었다.
“수명을 소모한다지만 구체적으로는 등가교환이 어떤 식으로 작동합니까?”
“아. 그거 능력을 각성하니까 내 신체의 본래 수명이 85세라고 뜨더라. 그럼 이제 마음속으로 ‘남은 수명 60년에서 몇 년을 써 버리겠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저절로 화력이 강화돼.”
“그럼 십족 토벌전에서 60년을 넘게 소모한 겁니까?”
“어, 으으음…….”
당서린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참 이상하단 말이지.”
“예?”
“당신한테 말했었나? 나, 사실 주가영창을 부르면서도 30분 넘게 버틸 줄은 예상 못 했어. 내 계산이 옳다면 제6선율까지 부르는 것도 간당간당했거든.”
당서린이 턱을 짚었다.
“원래 이 주가영창 마법이란 게, 선율이 겹치면 겹칠수록 거기에 소모되는 마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진짜 기하급수야. 아무리 60년의 수명을 소모했어도 이론상 제10선율까지 도달하는 건 불가능해.”
“잘만 부르시던데요.”
“그러게. 신기하지? 나 너희들 뒤에서 영창하면서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이게 왜 됨? 왜 이게 되는 거임? 하고 엄청 물음표 띄우고 있었다니까.”
“…….”
“어휴, 식은땀이 다 나더라.”
그때였다.
어떤 이상스러운 예감, 불안함이나 불길함과는 색채가 전혀 다르지만 그 파동은 한없이 비슷한 감각이 등에서부터 번져 올랐다.
“맹주님. 그럼 십족 토벌전에서 맹주님이 소모한 수명이 정확히 몇 년 정도입니까?”
“응? 그때 워낙 정신이 없었어서 일일이 세진 않았어. 음, 어디 보자…….”
“…혹시 대략 250년 정도 됩니까?”
“오.”
당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확하진 않지만 200년보단 많고 300년보단 확실히 적었을걸. 대충 250년이야. 어떻게 알았어?”
내 몸속에서 전류가, 어떤 깨달음이 치달았다.
예를 들어. 그러니까 정말로 가령, 이렇게 가정해 보자.
――만일 당서린이 소모하지 않은 수명이 ‘다음 회차’로 계승되는 것이라면?
1회차에서 3회차까지 당서린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그때도 십족과 맞서 싸웠겠지.
하지만 쇼 노인과 내가 없이는 설령 토벌전에 돌입하더라도 고작 5분 만에 결사대는 궤멸해 버린다.
당서린은 주가영창을 부를 틈도 없이 죽었을 것이다.
당서린의 본래 수명은 85세.
여기서 그녀의 현재 나이를 제외하고, 십족 토벌전을 제외하고도 여기저기서 가불하여 쓴 수명까지 삭감한다면, 대략 45년의 수명이 남는다.
즉.
십족 토벌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1회차에서 5회차까지 당서린은 고스란히 회차당 40년~45년의 수명을 남겨 버린 셈이다.
쇼 노인이 합류한 6회차부터는 십족 토벌전에 속력이 붙었다. 그만큼 당서린은 여유롭게 자신의 수명을 불태웠다.
10년 더, 15년 더, 20년 더.
당서린의 수명들은 점점 조금씩 ‘적립’되었다.
그리하여 10회차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명이란 이름의 계좌에 250년어치의 시간이 저축된 것이었다.
‘만일 이 추론이 사실이라면.’
지난 회차 동안 당서린이 적립해 온 수명들은 안타깝게도 이번 10회차에서 전부 써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내 회귀는 10회차에서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쭉 이어지겠지.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당서린은 계속해서 수명을 저축할 수 있을지 몰랐다.
‘250년을 넘어 500년까지 저축된다면? 1000년, 2000년이 저축된다면?’
나는 떨림을 참지 못했다.
“길드장님.”
“응?”
나도 모르게 당서린을 예전처럼 길드장이라고 불렀다. 당서린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평소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8
내가 회귀자라는 것.
어쩌면 당신의 수명이 회차를 거듭할 때마다 적립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굉장하잖아!”
내 추론을 듣는 내내 당서린은 흥미로워했고, 놀랐으며, 두 눈을 반짝거렸다.
“장의사 당신이 사실 내 꼬붕이었다고?”
“놀라는 포인트가 그쪽입니까……?”
“당연하지! 그럼 거기에 놀라지 어디에 놀라니. 이야아, 다른 회차의 나도 대단했구나.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당신의 옷걸이엔 고깔모자가 어울린다구. 저기저기, 장의사. 우리 같이 마녀친구 하지 않을래?”
마녀친구란 대체 뭐란 말인가.
“제 말이 거짓말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습니까?”
“응? 그런 가능성을 왜 생각해? 우린 전우잖아. 당신이 회귀자라면 정말로 그런 거겠지.”
당서린이 기침을 쓸어내면서 작게 웃었다.
콜록, 거리는 진동이 그녀의 남은 수명을 가느다랗게 공기에 흘렸다.
“어쨌든 당신도 나랑 꿈이 비슷하구나.”
“예?”
“이 세상에서 망가져 버린 레일을 하나씩 수리해 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잖아. 십족이 망가트려 놓은 레일. 다른 괴물들이 부숴 버린 폐선(廢線). 그렇게 한 뼘씩 고쳐 나가면 언젠가 기차역에서 기차역으로 선로가 이어질 테고, 다른 사람들도 그 길을 따라 걸어갈 수 있겠지.”
“…….”
“나쁘지 않은걸.”
아마 내게 [완전 기억 능력]이 없었더라도 이날 이 순간 들었던 말은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았겠지.
당서린은 씩 웃었다.
“그리고 공교로워. 당신이 가는 레일을 내가 함께 걸어가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수명만큼은 당신이 걷는 보폭과 똑같은 보폭으로 뒤따라갈 거야. 살아서 같이 갈 수는 없어도 죽어서는 동행하는 사이네, 우리.”
당서린은 끝까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손을 뻗었다.
무릎에 올려져 있던 소설책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촤르륵. 날개가 되지 못한 채 정장에 묶여 버린 하얀 페이지들이 바닥에서 펼쳐지다 말았다.
당서린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다섯 손가락이 내 팔뚝을 꾸욱 쥐었다. 부모와 동생들을 모조리 괴물에게 빼앗긴 자, 그래서 마녀와 철도를 좋아할 뿐인 조금 이상한 사람으로 멈출 수 없었던 자가 나의 팔을 잡고 있었다.
강하게.
“내 수명을 허투루 낭비하지 말고 잘 써 줘. 장의사.”
“…….”
“제10선율까지 가야 십족을 무찌를 수 있었어. 이건 낭비가 너무 커. 당신은 조금 더 강해져야 돼.”
그렇게 되었다.
“내가 주가영창으로 내 수명을 지나치게 소모하면 안 돼. 이건 내 예감에 불과하지만 왠지 모르게 십족이 끝이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어. 그 녀석들은 더 강할지도 몰라. 250년이 아니라 500년, 1000년이 필요할지 모르지. 내 수명이 되도록 많이 적립되어 있어야 십족 다음에 나타날 괴물들에게 대비할 수 있어.”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다음 회차의 나한테 당신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마. 나는 욕심쟁이에 지름신 신도라서. 절대 ‘다음 회차를 위해서 이번 회차는 버린다’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없어. 내게 수명이 수백 년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지금의 회차를 위해 써 버릴 거야. 진짜 최후. 정말 정말로 최후의 위기가 도래하기 전까진 내 수명이 적립되도록 유도해.”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회차들에서도 언제나 나의 부길드장이 되도록.”
그건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당서린이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내 시간의 동행자.”
그날 밤에 당서린은 죽었다.
당서린의 유해는 해변에 뿌려졌다.
그녀의 유언을 지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강해졌고 더 이상 십족은 내게 고전을 강요하지 못하게 되었다. 당서린이 십족 토벌전에서 제10선율까지 영창해야 될 일도 사라졌다.
하지만 십족이 사라져도 계속해서 강적들은 출현했고, 그때마다 당서린은 최전선에 섰다.
그녀는 항상 최전선에 서 있었다. 망가져 버린 선로의 끄트머리야말로 언제나 그녀가 향하는 자리였다.
툭하면 자기 수명을 써 버리려는 그녀를 알게 모르게 백업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중간에 한 번 수명들이 모조리 리셋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한 번의 실수에 불과했다.
1000회차가 넘은 지금, 내가 계산하기로 당서린의 수명은 자그마치 수만 년이 쌓였다.
아무리 못해도 30,000년이 넘는 수명.
‘만일 지금 노래를 부르면 어디까지 부를 수 있으려나?’
가끔씩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상상에 잠기고는 한다.
어느 전장에 서서 당서린이 노래하는 풍경을.
제1선율, 제2선율, 제3선율……. 아무리 이어지고 겹쳐져도 그녀의 노래는 끝나지 않아, 결국에 지평선 너머, 이 세상의 선로들이 이어지는 모든 해변에까지 울려 퍼진다.
그때 비로소 당서린은 자신이 바라온 어느 해안에 도착하게 되리라. 고깔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품에 안은 채 단칸짜리 기차에 탄 모습으로.
나는 언젠가 그 노래를 듣고 싶다 바라면서도, 내심 영원히 들을 날이 다가오지 않기를 소망하기도 하는 것이다.
요즘 회차에서도 당서린은 어쩌다 나와 인연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묻는다. 4회차,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똑같이.
“장의사. 혹시 내 길드에 들어올 생각 없어? 부길드장 자리까진 줄 수 있는데.”
그럼 나는 작게 웃으면서 대답한다.
“가입 안 한다.”
어쩔 수 없다.
고깔모자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길드장님?
– 동행자. 結.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