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25)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25화(2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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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Ⅱ
신노아
2
꿀독서를 뒤따라가는 여정엔 조금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아니, 사실 사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없이 중대한 문제가 터져 버렸다.
나 때문에 발생한 문제는 아니었다.
[오독서: 좋았어! 튜토리얼 클리어!]그리고 꿀독서 본인의 문제 또한 아니었다.
사실 오독서는 그럭저럭 초심자치곤 솜씨가 나쁘지 않았다. 내 소소한 도움이 있었다곤 하지만(물론 내가 겸손할 뿐이요 실제로는 전혀 소소하지 않았다), 꿀독서는 불과 48시간 만에 부산역 게이트를 돌파했다.
참고로 내가 처음으로 부산역을 클리어했던 게 3회차였다.
달리 말해 뭐다? 본인은 1회차와 2회차 동안 부산에서 살다 부산에서 죽었다. 실로 여느 부산 토박이보다도 애향심이 넘치는 사나이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만일 내 고향이 서울만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진정한 부산 사나이 인증마크를 달고 살았을 것이다.
심지어 3회차에 클리어했을 때도 꼬박 일주일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걸 48시간 안에 컷해 버린 오독서는 자질이 훌륭한 게 맞았다.
[오독서: 주인공이 도와주긴 했어도 이걸 이틀로 끝냈다고? 오독서, 너 뭐야? 패션에 힙합에 몬스터 처죽이기에 못 하는 게 대체 뭐냐고. 나란 존재가 좀 무서워지는군…….]혈기 왕성한 젊은이다운 자뻑쯤이야 귀엽게 넘어가 주자.
사실, 이쯤 되니 부산역 대합실은 대체 어떤 장소인가 싶었다.
인재가 넘치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아예 홍수 범람을 일으키지 않는가.
‘정체불명에 세계를 멸망시킬 포텐셜을 가진 고요리, 듣도 보도 못한 커뮤니티 운영 능력자인 서규, 어그로를 마시는 새 심아련, 맥거핀 우에하라 시노, 무한 회귀자인 나 장의사. 여기에 이젠 오독서까지?’
가히 무시무시했다.
그야말로 인재 파밍의 보고.
유방이 백수로 놀고 소하가 공무원 서류를 뒤적거리며 번쾌가 돼지를 잡았다던 초한지의 패현이 부럽지 않았다. 하물며……. 아니, 이 얘기는 그만두자.
어쨌든 꿀독서의 모험 자체는 순조로웠다.
그렇지만 내 문제도 아니고 오독서의 문제도 아니라면, 이 유쾌발랄한 파티에 제3자의 이방인이 끼어들었다는 뜻이었다.
“……?”
그 정체불명의 존재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면서 이따금 내 쪽을 돌아보곤 했다. 그때마다 고개를 기울이면서 방긋- 예쁘게도 웃었다.
하마터면 반할 뻔했다. 만일 저 존재가 세상을 멸망시킬 때도 지금이랑 똑같은 표정으로 빵긋 웃더라는 사실을 학습하지 못했다면, 정말로 상남자답게 고백부터 박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 존재의 이름은 고요리였다.
‘돌겠군.’
붉은 살점을 부리는 주인.
장르를 태그로 분류하자면 #세뇌 #인식개변 #호감도 조작 #크툴루 신화 등등으로 분류될 초 위험 인물.
그렇다. 어쩌다 보니 고요리도 꿀독서의 파티에 합류해 버렸다. 기실 우리 모두 부산역 대합실에서 시작한 원년 멤버에 속했으니 이렇게 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다.
고작 초반부에 결성된 파티 하나에 내 인생을 꿀잼으로 만들어 줄 존재와 내 인생을 쫑내 버릴 존재가 공존한다니 이게 말이야 빙구야? 역시 부산역 대합실. 미친 스타팅 포인트다웠다.
그 순간, 코앞에서 분홍머리가 찰랑거렸다.
“장의사님… 이라고 하셨나요?”
심장이 덜컹거렸다.
참고로 고요리는 지금도 [인식 조작], [호감도 조작], [인상 세뇌]를 현재진행형으로 발동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 주변엔 온갖 인간들이 몰려들어서 아첨과 아부를 떨어 댔다.
그런데 자기 좋다며 들러붙는 간신배들을 다 물리치고 고요리는 은근슬쩍 나한테 다가온 것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일이지?”
한 가지 천만다행인 점은 이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쿨한 회귀자’를 연기하고 있었다는 것.
표정 연기. 표정 연기.
나는 세계가 멸망하던 풍경의 절망감과 쇼 노인이 혼자서 튀어 버렸을 때의 배신감, 당서린을 처음 잃어버렸을 때의 슬픔… 아무튼 마이너스 감정을 떠올리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덕분에 내 표정은 아주 실감이 넘치게 띠꺼워졌다. 띠꺼움 레벨 5.
“앗. 아니요, 딱히 중요한 일은 없지만요.”
고요리한텐 띠껍지 않았나 보다.
“그저 장의사님이 어떤 분일까 궁금했거든요. 왜, 대합실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나 괴물들이 나타났을 때도 침착하셨잖아요.”
얘 나를 훔쳐보고 있었어?
심장에 땀구멍이 있었다면 식은땀이 줄줄 흘렀을 터. 무협에 가면 노인과 아이를 조심하라는 격언이 있듯 내 인생엔 언제나 분홍머리를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조금 더 띠꺼움을 발휘하기로 했다. 띠꺼움 레벨 6.
“난 너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너도 관심을 꺼라.”
“실론티 좋아하시나요? 저도 제일 좋아하는 음료예요.”
“…….”
비겁했다.
이게 [인식 조작]의 힘?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이쪽의 호감도를 올리려 들다니.
하지만 나 장의사, 그렇게 쉬운 인간이 아니었다. 솔직히 살짝 두근거렸다만 나는 이걸 심근경색의 징후로 해석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가만히 내버려 두면 뒈진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띠꺼움 레벨 7!
“귀찮군. 꺼져라.”
“흐응.”
흐응? 흐으응?
방금 얘 눈웃음친 거 맞지?
“지금 저랑 말씀 나누시면서 한 번도 제 쪽을 보지 않으신 거 아세요?”
“시끄럽다. 혹시 꺼지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나? 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전자라면 무식하고 후자라면 무지하군.”
“의사님은 재미있는 분이네요.”
“…….”
“저희 앞으로 잘 지내 봐요. 제 이름은 고요리. 편하게 요리라고 불러주세요.”
그렇게 말한 뒤 고요리는 먼저 걸어갔다. 그녀의 그림자는 뒷짐을 진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역시 내게 흥미를 품어 버린 것 같았다. 내 의도와는 완벽하게 정반대되는 결과였다.
‘…다음에 고요리랑 엮이게 된다면 띠껍게 굴지 말고 무조건, 술과 도박에 미친 새끼처럼 연기해야겠어.’
미리 스포일러를 해 두자면 전략을 변경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술로 시름을 잊고 도박으로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시다니, 풍류가 뭔지 아시는 멋진 분이네요!’라는 미친 대답이 돌아오더라.
고요리를 대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냥 처음부터, 애당초 그녀의 시야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뿐이었다.
무한 회귀자이면서 왜 이렇게 고요리한테 쫄았느냐고 누군가 의문을 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본래 회귀자한테 제일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다. 무지(無知)다.
생각해 봐라. 상대방은 S급 인식조작 능력자. 정신 바이러스 계열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고요리한테 접근해 봤자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그 지식 자체가 이미 세뇌와 조작으로 인해 오염되었을 가능성은?
만에 하나 내가 회귀자란 사실이 발각될 경우 고요리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가령.
-그럼 저도 물어보지요.
-언제부터 제가 세뇌를 쓰지 않았다고 착각하셨지요……?
-우후후. 의사님은 회귀했다는 최면에 빠져 있을 뿐, 실제로는 제 손아귀 안이랍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늘에 서겠어요.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쩌려고?
내가 아는 한 정신력이 제일 강한 각성자는 성녀였다. 그런 성녀조차 고요리한테 당해 버렸다. 나 스스로 인식조작을 물리칠 ‘방패’, 정신의 파이어월을 획득하기 전까진 되도록 고요리랑은 상종하지 않는 편이 현명했다.
하지만 그녀에 관해 무지한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오독서: 흐음. 얜 뭐지? 분홍색 머리?]오독서가 이쪽을 힐끔거렸다. 자기 딴엔 몰래 훔쳐봤다고 생각했겠지만 내 기감에는 다 잡혔다.
[오독서: 전회시에 저런 캐릭터도 있었어? 엑스트라치곤 머리 색깔이 과해서 좀 눈에 띄네. 그런데 인상 되게 좋다. 나보다 언니일 거 같은데. 어떻게 친해질 수 없으려나.]―――오독서도 고요리의 존재를 몰랐다.
3
이 사실은 중대한 힌트를 숨기고 있었다.
여태까지 오독서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아무래도 그녀는 ‘어떤 소설’을 읽은 듯했다.
놀랍게도 소설의 주인공은 나 장의사였다.
사실 이걸 소설이라 불러야 할지도 애매했다. 그냥 내 다큐멘터리, 평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오독서는 많은 걸 알았다.
다만.
‘진짜 옛날 일밖에 모르는구나.’
업데이트가 느려도 한참 느린 소설이라고나 할까.
예를 들자면 이러했다.
[오독서: 오케이, 해운대 영약 컷! 이야아. 부산역 게이트 클리어하자마자 영약을 얻다니. 이거 엄청 진행 빠른 거 아냐? 나 좀 재능 있을지도.] [오독서: 이거면 그 무시무시한 최종 보스……. 십족(十足)을 무찌르는 것도 가능해.]십족은 최종 보스가 아니었다.
사실 중간보스조차 될 수 없었다. 십족이 한반도에서 고독한 미식가를 찍으며 맛집 투어를 다니던 시절은 아무리 널널하게 쳐 줘도 20회차까지. 그 이후부터는 본인 스스로 맛집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오독서: 이제부턴 당서린이랑 어떻게든 합류해야 돼. 개새끼들밖에 없는 길드장들 중에 당서린만큼 믿음직스러운 아군도 없지. 일단 ‘설정상’ 주가영창만 제대로 발동되면 당서린은 최강의 딜러야.]당서린은 최강의 딜러가 아니었다.
진짜 극초반에는 딜러처럼 보일 수 있겠다만 당서린의 진정한 힘은 ‘서포터’ 역할을 도맡을 때 드러난다.
실제로 쇼 노인과 내가 등장하고 회차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강해지자, 당서린은 주저 없이 최전방에서 물러나 우리의 백업을 자처했다.
즉.
[오독서: 그럼 주인공이 십족의 공세를 좀 버텨 줘야 하는데……. 혼자서는 힘들지. 씁. 역시 내가 같이 싸워 줘야 되나?]꿀독서는 쇼 노인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오독서가 읽었다는 소설은 기껏 해 봐야 [4회차까지의 내 인생]만 담고 있다.’
요컨대 미완성된 자서전.
집필이 덜 된 소설. 아직 연재분이 풀리지 않은 작품. 작가의 손이 느린 연재작.
정말로, 무척 독특한 능력이었다.
이 능력에 굳이 이름을 붙여 보자면… [연재 독촉] 정도가 적당하려나.
어쨌든 오독서가 접한 작품이 ‘고작 4회차까지만 진행된 내 인생의 요약본’이라고 가정한다면 모든 의문이 해소됐다.
쟤가 왜 나를 사이코패스처럼 취급했는지도 자연스럽게 납득할 수 있었고.
‘하긴. 쇼 영감이랑 만나지 못했던 시절의 나는 아무래도 좀 예민하게 굴 때가 많았지.’
물론 오독서가 오해하는 것만큼 막 진짜로 싸이코패스였던 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집단 내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싹들은 미리 머리와 몸통을 이산가족으로 만들어 주고, 수틀리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어떤 이벤트에서든 내가 제일 큰 이득을 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고……. 요컨대 평범한 웹소설 회귀자의 인성 수준 정도?
[오독서: 와. 당서린네랑 합류하겠다니까 바로 표정 살벌해지는 거 좀 봐. 저 미친놈, 하여간 자기가 한번 마음을 허락한 사람만 사람이고 나 같은 건 인간으로도 안 보인다 이거지? 진짜 서러워서 살겠나.]음.
아무래도 대화가 필요해 보였다.
나는 4개월가량 조용히 오독서를 관찰했다. 그 결과, 오독서라는 사람의 인성을 제법 신뢰해도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오독서.”
“응? 뭐야, 갑자기? 당신이 먼저 말을 걸다니 의외인데.”
“얘기를 좀 나누고 싶다. 될 수 있으면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파티원들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오독서에게 다가갔다. 두 번, 세 번, 고요리가 없어진 걸 확인했으니 지금은 안전했다.
[오독서: 히에엑! 씨발, 역시 날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리려는 거구나!]오독서에겐 별로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러지 뭐. 파티원의 상담에 응하는 것도 훌륭한 파티장의 자질이니까.”
글쎄. 그건 모르겠지만 최소한 오독서가 표정 관리에 자질이 있음은 분명했다. 마음속으론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서도 겉으론 태연하게 풍선껌을 질겅거렸으니.
우리는 [8월 20일까지 당분간 부득이하게 영업을 쉽니다]라는 팻말이 걸린 동네 카페에 들어갔다. 오늘은 10월 25일이었다.
가게 안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가산을 정리해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주인장을 생각하며 조심히 자리에 앉았다.
“좋아……. 무슨 일이야?”
오독서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러나 결연한 눈빛으로, 동시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나는 잠시간 [독심술]을 껐다. 아무래도 사람 대 사람의 진지한 대화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기술이었다.
“먼저 너무 놀라지 말 것을 권하겠다.”
“하? 대체 어떤 말을 꺼내려고?”
“본론부터 들어가지. 오독서. 네가 이 세계의 원작이라고 여기고 있는 소설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째깍, 째깍.
아직 전지가 닳지 않아 멀쩡히 작동하고 있는 벽시계가 초침을 열심히 돌렸다. 안타깝게도 뻐꾸기가 내장된 벽시계는 아니었다.
오독서가 입을 떡 벌렸다.
“엑?”
“참고로 지금 내가 쓰는 말투는 너의 기준에 어울려 주려고 일부러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너만 괜찮다면 본래의 내 말투로 돌아가고 싶다마는. 이거, 의외로 불편하다.”
“…잠깐, 잠깐잠깐. 잠까안만! 잠깐!”
오독서가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소설? 무슨 소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그야 물론 네가 읽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전지적 회귀자 시점이다. 너는 모르겠지만 내겐 [독심술]이란 능력이 있다. 상대방의 표층의식을 언어로 변환시켜 사용자한테 들려주는 능력이지.”
“하? 거짓말, 그런 능력 원작에선 전혀……. 아.”
오독서가 눈을 깜빡였다.
“…혹시 방금 그거 유도 심문이었어?”
“아니. 정말이다. 네가 마음속으로 나를 반쯤 싸이코패스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안다.”
“나, 나 그런 적 없는데?”
오독서는 목소리를 떨면서도 꿋꿋하게 자기 결백을 주장했다. 정치인의 소질이 엿보이는 뻔뻔함이었다.
10분 후.
우리는 서로의 오해, 더 정확히 말하면 오독서의 일방적인 오해를 풀 수 있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오독서는 실로 다양한 표정 변화를 보여 주었다.
그녀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이런 건 사기잖아.”
“사기?”
“보통 소설에서 회귀자들은 주인공… 아, 여기서 주인공이란 나를 가리키는 거야. 아무튼, 주인공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다고. 근데 이게 뭐야? 부산역에 소환당했을 때부터 발각되다니……. 소설 문법이 아니야!”
“미안한데 세상은 소설이 아니란다.”
“나한텐 조금 전까지 소설이었다고!”
오독서가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게다가 그 말투는 뭔데! 수틀리면 동료든 뭐든 다 죽여 버리는 장의사는 어디로 사라졌어?”
“아니, 솔직히 내 입장에선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서. [5살엔 너도 참 착한 아이였는데]라는 소리를 50살 때 들어본다고 생각해 봐라. 공감이 가겠냐?”
“하? 그 정도야?”
“그 정도다.”
“도대체 당신 입장에서 지금이 몇 회차인데?”
“555회차.”
“오백오십오 회?”
오독서가 벽시계의 뻐꾸기처럼 꽤액 소리 질렀다.
“뭐야, 그게! 그 숫자 뭐야! 55회차도 아니고 555회차? 아니, 아무리 십족이 강해도 555회차가 될 때까지 못 죽였다고? 당신 뭐야? 직무유기 수준이잖아!”
“아, 십족은 최종보스가 아니거든. 그거 사실 최약체야.”
오독서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삼천 길드장 대마녀 당서린을 순살치킨처럼 해치운 십족이 최약체라고?”
“요즘은 내가 닭꼬치로 구워서 먹고 있다.”
“구라지? …어라, 잠깐만. 장의사. 그럼 지금 당신 도대체 몇 살이야?”
음.
나는 살짝 방어적으로 말했다.
“얘야. 회귀자에게 나이는 무의미하단다.”
“아니, 아니, 아니. 절대 무의미하진 않지. 가만 보자. 1회차당 대충 10년으로 계산해도……. 5550살?”
“…….”
묵비권을 행사했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할 말은 있는데, 그 말을 하면 내게 더 불리한 흐름으로 이어질 것 같아서. 예컨대 사실은 1회차당 10년보다 평균값을 더 잡아야 한다거나.
내 표정을 들여다본 오독서가 경악했다.
“뭐야! 완전 늙은 아저씨잖아!”
“…….”
“말도 안 돼. 세상 쿨한 줄 알았던 주인공이 사실 아저씨였다니!”
오독서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아저씨’로 결정된 순간이었다.
조금 우울해졌다.
못된 것.
너도 어디 나처럼 나이 먹어 봐라, 이것아.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