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26)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26화(2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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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Ⅲ
신노아
4
회귀자 커밍아웃이 이루어진 날부터 오독서와 내 관계는 급속하게 발전했다.
나 역시 (재미있긴 했지만) 되도 않는 쿨찐남 연기를 관둬서 편해졌으며, 오독서 또한 24시간 내내 언제 돌아 버릴지 모르는 시한폭탄류 싸이코패스를 경계할 필요가 사라져서 편안해졌다.
“애송아. 가자.”
“응? 갑자기 어딜 가?”
“강남.”
얼마 뒤 오독서와 단둘이 서울로 마실을 나갔다.
본래 한강 이남은 공원이 적어서 산책할 곳이 참 마땅찮은 동네였다. 하지만 시민들이 거주지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긴 이후부터는 굉장히 쾌적해졌다.
-그҉륵҉҉?҉
텅 비어 버린 폐빌딩들 사이에 십족이 멀뚱멀뚱 서 있었다. 주민들이 사라져도 아파트를 지키는 참된 관리소장의 귀감이었다.
-크҉҉르҉르҉҉҉҉르҉!
관리소장의 눈엔 우리가 거동수상자로 보인 모양이었다. 단번에 촉수들을 휘두르며 이쪽을 향해 돌진해 왔다. 시절이 하도 수상하다 보니 좀 과한 반응을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십족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회귀를 수백 번 거듭한 사람과 이 세상을 소설처럼 미리 읽은 사람이 거동수상자가 아니라면 뭐겠는가?
오독서가 “히익!” 하고 비명을 지르며 내 등 뒤로 숨었다.
“아, 아저씨 미쳤어? 저거 십족이잖아! 한국에서 활동하는 각성자들 죄다 긁어 모아야 되는 판에 왜 혼자……!”
“비기, 문어 썰기.”
내가 검을 휘둘렀다.
십족의 토벌이 어려웠던 까닭은 징글징글할 정도로 재생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촉수를 잘라도 금세 살아났으니까. 두 개의 심장을 동시에 파괴해야 한다는 조건도 만만찮고.
달리 말해, 재생력보다 더 신속한 사시미질을 익히게 된 시점부터 십족은 그저 도마 위에 올라온 산낙지에 불과했다.
내 칼질 대여섯 방에 십족 및 십족 주변에 포진해 있던 폐빌딩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십족이 내지른 비명은 건물 무너지는 굉음에 파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빌딩까지 다 쓰러지고 나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어…….”
오독서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끝난 거야? 진짜로 끝?”
“그래. 네가 최종 보스라고 부르던 녀석이 죽었으니 이제 세계는 평화로워졌다. 가서 축배를 들렴.”
“미친……. 아저씨, 진짜 강해졌구나.”
오독서는 존경 섞인 눈빛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런데 이런 힘을 가지고도 세계 멸망을 막지 못해?”
“못 막는다. 십족 쟤는 재생력이 뛰어날 뿐이지 물리력 면역이라거나 마법력 면역이라거나 별 거지 같은 특성들은 안 달고 있잖아. 진짜 최약체라니까?”
“에반데…….”
오독서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안 그래도 내 말을 믿었던 오독서였지만 이날 사건을 계기로 이젠 완전히 나를 신뢰하게 되었다.
오독서는 기껏 열심히 가꾸어 온 자신의 파티를 해산시켰다.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는가 싶었는데 의외로 오독서는 단호했다.
“내가 아무리 세력을 키워 봤자 십족이랑도 못 싸웠을 거야. 그런데 아저씨는 혼자서도 걔를 족쳤잖아. 그럼 내 파티 같은 건 의미가 없어. 안 그래? 최대한 아저씨를 서포트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는 게 맞아.”
오독서의 판단이 옳은가 그른가는 둘째치고 덕분에 고요리와 헤어질 명분이 생겼다.
파티 해산 명령을 들은 고요리는 무척이나 섭섭한 표정(적어도 내 눈에 인식된 표정은 그랬다)을 지었다.
“파티장님이랑 장의사님과 함께하고 싶었는데요……. 정말 이대로 헤어져야 하나요?”
“아. 요리 언니라면 같이 다녀도… 카악!”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려는 오독서의 팔뚝을 내가 콱 꼬집었다. 둘이서 있을 때 고요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누누이 설명했건만. 정작 이별을 선고해야 될 순간이 다가오니까 또 세뇌당해 버린 것이다.
그제야 오독서도 “헛”, 하고 정신을 차렸다.
“미, 미안! 요리 언니! 나 당분간은 아저씨 제자로 들어가기로 얘기가 되어서! 이 아저씨가 제자는 딱 한 명밖에 안 받는다며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언니랑 같이 움직이진 못할 거 같아!”
“흐응.”
오독서가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고개까지 숙였다.
그걸 고요리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새빨간 눈동자에서 언뜻 붉은 살점의 그림자가 엿보였다면 너무 과민반응하는 걸까.
“어쩔 수 없네요. 사제지간은 부모자식의 연만큼이나 중요한 것. 그것에 부외자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걸요.”
라고, 고요리는 내 귀에 너무나도 호감이 가는 내용으로 얘기를 하면서도 쭉 이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 저도 이만 물러날게요.”
“저, 정말……?”
“네에. 이번에 작별해도 왠지 저희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거든요. 분명 언젠가 재회할 날이 올 거예요. 두 분 모두, 이런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부디 행복하시기를.”
고요리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치더니 마치 귀족 영애처럼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단 한마디의 말도 덧붙이지 않고 홀로 언덕길을 내려갔다.
곧 고요리의 뒷모습은 내리막길 아래로 잠겨 사라졌다.
“후와아아-”
긴장의 끈이 탁 풀렸는지 오독서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오독서의 본체에 해당하는 캡모자까지 반쯤 벗겨졌다.
“…아저씨 말이 진짜였구나. 뭐야, 저거? 얘기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었는데 말 붙이고 나니까, 막 갑자기 ‘내가 왜 요리 언니한테 이렇게 쌀쌀맞게 굴지?’ 같은 생각이 들더라.”
“원래 저래. 그래도 사제관계는 중요하니 납득해 준다고 말해 줘서 다행이다.”
“응? 뭐라는 거야. 아무리 사제관계라지만 남녀가 단둘이서만 돌아다니는 건 위험할 수 있으니까 나보고 꼭 조심하라 그랬는데?”
“……?”
“……?”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고요리가 내려갔던 언덕길로. 방금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으니 이제 반대편 언덕으로 올라가는 모습도 보여야만 했다.
매미가 울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요리의 뒷모습은 올라오지 않았다.
5
우리는 망가져 가는 세상을 전전했다.
나는 그 망가짐에 관하여 굳이 자세히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눈치 빠른 독자들은 벌써, 내가 의도적으로 그런 묘사를 피하고 있음을 알아챘을지 모르겠다.
물론 한국은 성녀의 활약 덕분에 비교적 치안이 괜찮았다. 하지만 성녀의 손끝이 닿는 범위는 어디까지나 각성자들뿐. 세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인들은 성녀 또한 제어할 수 없었다.
약탈, 방화, 폭력, 그 폭력을 저지른 사람이 반려를 잃어버린 인간이며 동시에 주인을 잃어버린 애완견을 키우며 텅 빈 자리를 메꿔 가는 것, 정치 세력의 군벌화와 군부대의 정치화, 가난한 약자들의 손끝이라거나, 역대급 전염병의 최초 발병자라거나, 불행은 나열할수록 끝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불행만을 다룬다.
내가 감당치 못한 불행의 무게는 다른 사람의 심장으로 이전되는 법인데, 난 전염병의 숙주가 되고 싶어서 회귀자 노릇을 하는 게 아니다.
“음. 내가 읽은 소설……. 그러니까 아저씨가 주인공인 [전지적 회귀자 시점]은 이제 막 30화까지 연재된 작품이었어.”
어느 날 오독서가 말했다. 얼굴에 튄 핏물 비슷한 것을 대충 닦으면서. 사실 핏물이 아니라 우담바라라고 불리는 붉은색 꽃잎이었는데, 악질 전염병의 기생체였다. 이건 곧 다음 에피소드에서 언급할 기회가 올 것이다.
“30화?”
“응. 난 아무리 재밌어 보이는 소설이어도 분량이 30화보다 적으면 절대 안 읽거든. 언제 작가가 연재를 그만둘지 모르잖아. 서울에서 게이트 터지기 이틀인가 사흘 전? 그쯤부터 슬슬 읽었던 거 같아.”
오독서도 나와 성향이 비슷했다. 우리는 불행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서로의 취미에 대해 곧잘 떠들었다.
“어디서 그 소설을 접한 거냐?”
“그냥? 내가 자주 이용하는 웹소설 플랫폼에 선작……. 음, 선작이란 건 즐겨찾기를 해 두는 거랑 똑같아. 아무튼, 소설앱을 켜 보니까 어느새 선작이 되어 있더라고.”
“…[전지적 회귀자 시점]을 창작하는 작가가 있다는 뜻인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오독서가 껌을 질겅거렸다.
“사실 난 전회시를 선작해 둔 기억이 없거든. 하지만 내 선호작 목록이 200개는 가볍게 넘어가니까 그냥 잊어버린 거구나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작이 되었을지도……. 아.”
온양 시내를 걷고 있다니 주인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이는 대형견이 가까이 다가왔다. 오독서는 개를 안아 주었다.
두 명밖에 없던 파티에 머릿수가 하나 더 늘었다.
“내가 볼 때 그건 너의 능력이야.”
“능력?”
어떤 길드가 점거한 백화점에 몰래 잠입하여 애완견 사료를 쓸어담던 날에 내가 말했다. 다행히 애완동물용 코너는 경비가 헐거웠다.
“서규라는 사람이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창설하고 운영하는 능력이지. 각성자의 능력이란 건 정말 천차만별이어서 너한테 ‘소설을 읽는 형태’로 능력이 발현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아니, 그런데 내 능력은 이미 [보호막 생성]으로 밝혀졌잖아?”
“다중능력자인 거지.”
“어? 헤에? 그거 설정상 엄청 희귀한 거 아냐?”
“희귀한 건 맞다. 그런데 살다 보니 1%의 확률은 생각보다 흔하더군.”
“호오, 과연……. 흐음. 내 능력이 사실 하나 더 있고, 그게 소설을 읽는 형태로 나타났다라…….”
“나는 편의상 네 능력을 [연재 독촉]이라 부르고 있다.”
“연재 독촉…….”
왕, 다크니스(애완견 이름이다)가 울었다. 어두워진 백화점에서 그 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렸다.
오독서가 “쉿!” 하고 조용히 시켰지만 이미 순찰꾼한테 들켜 버린 뒤였다.
“앗, 위험…….”
“튀자.”
백화점을 점거한 길드를 없애 버리는 거야 일도 아니었지만, 이들은 나중에 인류를 위해 싸우는 전선에 합류하여 큰 역할을 담당해 줄 아군 후보였다. 우리는 얼른 도망쳤다. 왕! 왕! 다크니스가 오독서의 품에 안겨 신나 했다.
“그럼 내 능력은 연재 독촉이라기보단 [예언] 아닐까?”
몇 개월 뒤, 길드연합과 회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오독서가 말했다.
“예언?”
“응. 아저씨의 일대기를 아는 것 자체가 사실상 미래를 예언하는 거랑 똑같잖아. 소설 보면 예언자들이 막 미래를 영화 같은 이미지로 관찰한다거나 그러던데, 내 경우엔 가장 익숙한 웹소설의 형태로 예언이 발현된 거지. 어때? 그럴싸하지 않아?”
“흐음.”
확실히 그럴싸했다.
하지만 오독서의 능력이 [예언]이라면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그럼 왜 555회차가 될 때까지 아무런 이상징후가 안 나타났을까?”
“응?”
“독서 너야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 이번 회차는 굉장히 특이해. 네 어법을 빌려 표현하자면, 엑스트라에 불과한 줄 알았던 인물이 별안간 [예언] 능력을 각성한 셈이다.”
“아니, 말투가 좀……. 그치만 이상하긴 하네.”
오독서가 턱을 짚었다.
“그냥 하필 555회차여서 각성한 거 아닐까? 뭔가 특별해 보이는 숫자잖아. 555. 마침 내 이름도 오독서고.”
“회귀가 숫자놀음도 아닌데 설마 그럴 리 있겠냐.”
“흐으음. 뭐지, 진짜? 왜 555회차가 될 때까지 난 아저씨한테 접근을 안 했을까……?”
오독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의 의문이 풀리게 된 것은 멀면서도 가까운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555회차가 실패로 끝나고 556회차가 되었을 때 말이다.
[오독서: 와. 부산역 대합실. 나 이거 소설에서 봤어! 조금 있으면 튜토리얼의 요정이 나타나서 야 이 씨발 새끼야 소리하는 남자 대가리를 날려 버리……. 어? 어어? 뭐야? 갑자기 왜 주인공이 나한테 다가오는 거야?]이번엔 내가 먼저 오독서에게 접근했다. 물론 고요리의 난입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갑작스러운 이벤트에 오독서는 무척 당황했다. 하지만 지난 회차에 그러했듯 십족을 단칼에 해치우는 모습을 보여 주자 빠르게 내 말을 신뢰하였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저씨. 나랑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아?”
“음? 무슨 소리냐?”
“그, 이름이 뭐였더라……. 쇼펜하우어? 아무튼 그 검성인가 뭔가 하는 할아버지랑 합류해야 되는 거 아냐?”
나는 눈이 크게 뜨였다.
“쇼 영감을 알아? 네가?”
“응? 당연하지. 소설에 나오잖아.”
이전 회차에선 오독서가 쇼 노인을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회귀자가 사실 한 명 더 있다는 얘기야 내가 말해 주었지만, ‘4회차’까지 진행된 내용만 소설로 접한 오독서 입장에서 그런 타인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내가 쇼 노인을 처음 만난 건 6회차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오독서가 먼저 쇼 노인에 관해 언급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오독서가 읽은 소설이… 더 연재되었다?’
나는 진지하게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독서야. 네가 읽은 전회시, 몇 화까지 연재된 소설이냐?”
“어? 어어, 아마도……. 32화? 33화? 그 정도 됐을걸.”
“……!”
확실해졌다.
회차가 진행될수록 오독서의 ‘소설’은 연재분이 늘어났다. 지난 회차에선 고작 30화까지만 진행된 소설이 이번엔 최소한 2화나 더 추가된 것이었다.
이 ‘늘어나는 연재분’의 기준은 엿장수 마음대로나 다름없었다.
내가 60회차 동안 살아가는 동안 오독서에겐 기껏해야 1화밖에 추가되지 않는가 하면, 고작 1회차만 살아갔음에도 2화나 추가되기도 했다. 정말 제멋대로였다.
연재분이 늘어나는 기준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선 조금 더 많은 탐구가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분명해진 사실도 한 가지 있었다.
‘이 아이는 내 인생의 레일을 쫓아오고 있다.’
나는 전율했다.
6
조금 느린 걸음으로.
나의 삶보다 약간 늦된 속도로.
그러나 분명한 유속으로 오독서는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아마도 ‘소설’의 연재분이 30화에 도달하기 전까지 오독서는 소설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30화보다 연재분이 적은 작품은 들춰보지도 않는다고 본인 스스로 말했으니까.
그래서 30화가 쌓이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야 오독서는 ‘처음’으로 해당 소설을 독서했다. 그것이 지난번 555회차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독서의 예측이 맞았다. 그녀의 능력은 [예언]이었다.
단지 자신이 능력을 각성한 줄도 모른 채 555회차 동안 능력을 썩혔을 뿐.
‘하지만 완벽한 예언 능력은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의 신이자 예언자에겐 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전해진다.
에피메테우스(Epimetheus).
‘먼저 생각하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형과 달리,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하는 자’. 형제가 각각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어원이 되었다.
오독서는 예언 능력을 깨닫게 된 에피메테우스였다.
그녀의 예언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도 느린 예언자였다. 내가 한참 전에 밟았던 레일을 아주 뒤늦게, 약 5,000년의 시차를 갖고 뒤따라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독서는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내가 555회차를 건너갈 때 그녀는 5회차를 밟았다.
내가 560회차를 건너갈 때 그녀는 11회차를 밟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정말로 아주 먼 훗날, 오독서 스스로 555회차를 밟게 될 날도 다가오지 않을까?’
이 이야기가 결코 가상의 소설이 아니라는 것.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내용이 사실 오독서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의 이야기라는 것.
자신은 주인공인 나와 만나서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고, 군벌을 처리하며, 애완견 한 마리를 입양하리라는 것.
이 모든 사실이 언젠가 오독서의 소설에선 연재될 것이고, 오독서는 그것을 읽게 되리라.
나는 그 미래를 깨닫고 작게 떨었다. 어떻게 해도 멸망을 막을 수 없는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드리운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아저씨, 갑자기 왜 그래?”
내 반응에 오독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문득 오른쪽 팔뚝이 가려워졌다.
그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위로, 당서린의 유언이 겹쳐 흘렀다.
-당신도 나랑 꿈이 비슷하구나.
-이 세상에서 망가져 버린 레일을 하나씩 수리해 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잖아. 십족이 망가트려 놓은 레일. 다른 괴물들이 부숴 버린 폐선(廢線). 그렇게 한 뼘씩 고쳐 나가면 언젠가 기차역에서 기차역으로 선로가 이어질 테고.
-다른 사람들도 그 길을 따라 걸어갈 수 있겠지.
그렇다. 결국은 당서린이 옳았다.
그때 당서린이 중얼거린 것은 단지 희망에 불과했을 것이고, 나 역시 똑같은 소망을 품는 의미에서 그녀의 유언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천 년이 넘게 시간이 흘러 버린 지금, 드디어, 현실이 우리의 소망을 따라잡았다.
‘그렇다면.’
나는 떨림을 심장으로 품어냈다.
‘내가 할 일은 이 아이가 나를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다.’
언제까지? 555회차라는 이름의 기차역에 오독서가 도착할 때까지.
그 회차야말로 판도라 상자와 같았다. 자신이 읽은 ‘소설’이 사실은 현실에 펼쳐진 레일이란 것을 오독서가 깨달았을 때, 분명 이 세계는 결정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무한 회귀자로서의 내 삶에 즐거운 기다림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기다렸다.
556회차가 끝났다.
557회차가 끝났다.
“야! 아저씨! 아저씨가 쇼 노인을 그렇게 버리면 안 되지!”
581회차에 이르렀을 때 오독서가 소리쳤다.
아마 최신 연재분에서 쇼 노인이 무기한 ‘휴가’를 떠나 버린 장면을 읽은 것이겠지.
나는 피식 웃었다.
“버리긴 누구를 버렸다는 말이냐.”
이보다 더 억울한 일도 없었다. 내가 쇼 노인을 버리다니? 쇼 노인이 나를 버린 거였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쇼 노인을 포기하지 않았다.
선후관계와 피의자 및 피해자를 헷갈려서야 곤란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해석하며 코멘트를 다는 것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겠지.
오독서는 최신 연재분이 갱신될수록, 회차가 진행될수록, 그때마다 내게 ‘코멘트’를 달았다.
“와. 우담바라 이 보스몹은 어떻게 공략해?”
“말도 안 돼! 성좌들이 전부 거짓말이었어?”
“커뮤니티 생성 능력? 뭐 이딴 거지 같은 능력이…….”
“심아련 얘는 그냥 미친 어그로꾼이잖아……. 난 이런 사람이랑 진짜 안 맞더라.”
“온라인 게임 괴이? 우와, 세상에. 이따위 기믹도 존재했어? 원작에선 언급된 적 없잖아.”
“……? 고요리 얘 뭔데? 인간 맞아? 몬스터 아냐?”
오독서는 마치 독자가 작가에게 댓글을 달 듯이 비명을 지르거나 하소연을 쏟아냈다.
내가 작가인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너그럽게 오독서의 댓글을 받아주었다. 나이를 오천 살 넘게 먹은 주제에 여전히 어린애 같은 나였지만, 적어도 내 인생의 경계선에 타인이 발을 들이도록 용인할 줄은 알았다.
‘쫓아와라. 독서야.’
어서 와라.
나보다 느릴지언정 너는 누구보다 발걸음이 빠르다.
내가 겪은 실패, 내가 만들어 놓은 공략집, 나의 일대기를 밟고 걸어와라.
내 삶은 본디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너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기다림에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오독서가 52회차, 그러니까 내가 요정들을 데리고 인터내셔널 편의점을 창설한 대목까지 읽었다.
그때부터 나를 바라보는 오독서의 시선이 뭔가 결정적으로 달라졌다.
“아저씨.”
“뭐냐?”
“그거 알아? 아저씨 존나 또라이 같애.”
“…….”
“그리고 SG넷 좀 줄여. 삼국지 얘기도 적당히 하고.”
“독서야. 삼국지 떡밥을 꺼내는 거엔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단다. 삼국지 얘기를 안 하면 어떤 괴이가…….”
“아, 됐고. 존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아저씨 냄새 오지게 나. 아니지. 오히려 나이에 어울리는 행동인가? 아저씨 지금 몇 살이야?”
“…….”
나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어차피 이젠 떨어질 저점밖에 안 남은 이미지를 위해 발버둥 쳐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제일 잘 알았으므로.
그래.
이런 말을 하면 좀 주책맞겠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나를 세상 냉정한 쿨찐 회귀자로 착각하며 덜덜 떨던 오독서가 그리워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못된 것.
너도 어디 나처럼 나이 먹어 봐라, 이것아.
– 예언자. 結.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