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285)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 285화(285/287)
7
-뭐, 처음엔 그냥 의혹이었습니다…….
-유 팀장. 그 사람이 워낙에 신출귀몰하지 않습니까. 재빠르고. 뒤처리도 확실하고. 뭣보다 [미니맵]으로 각성자들의 경로를 항상 파악할 수 있으니.
-이만큼 꼬리 잡기가 난감한 사람이 따로 없지요…….
“…….”
나는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완전기억능력에 의거하여, 어제 노도하가 말해 준 내용이 고스란히 어두컴컴한 천장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현실과 거의 구별하기 어려운 해상도의 상상 속에서 노도하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키웠습니다…….
키우다니요, 라고 나는 되물었다.
-각성자가 아니라 일반인 부대.
노도하의 눈이 반개했다.
-뭐어. 각성 능력이 없더래도 은신술이랑 추적술은 익힐 수 있으니…….
-흐, 뭘 그리 놀라십니까? 댁도 알고 있을 텐데요. 국도관리대에 들어와서 인류를 위해 봉사하며 괴이들을 처죽이겠다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야 일반인들 중에도 널려 있습니다…….
-2년 정도 현장에서 굴려 보니 적당히 유능해지더군요. 거르고 걸러서 유 팀장한테 추적을 붙였지요. 일부러 그 인간이 모르는 일반인들을 요원으로 뽑았으니, [미니맵]에도 전혀 표시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어라아?
-유 팀장이 만만한 양민을 잡아다가 이누나키 터널 입구 쪽으로 몰래, 야심한 밤에 끌고 가는 모습이 관측되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증거가.
-여기, 사진입니다…….
노도하의 흰색 의사 가운이 낙낙하게 흐늘거렸다.
-저번에 제가 심령 카메라 빌려달라 그랬지요? 이거 찍으려고 대여한 겁니다. 화질이 꾸리긴 한데에, 뭐.
-댁이 더없이 신뢰하는 귀물이니. 댁을 설득하는 방법으로는 이게 제일 빠르다고 생각했거든요…….
…….
-그래서.
노도하가 손깍지를 끼고 거기에 턱을 올렸다.
심각한 사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음에도 노도하의 눈가에선 즐거움이 감도는 것 같았다.
-댁은 알고 있었습니까……?
우물처럼 새까만 눈동자.
더는 물이 흐르지 않아 단지 함정 구덩이로써만 유의미한, 그 공허한 눈동자가 이쪽을 탐닉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든 이쪽을 거꾸러트려 자신의 밑바닥에 떨어트리려는 목적을 숨기지도 않은 채.
-아하, 모르는 눈치로군요…….
-하긴 댁이라고 모든 것을 알고 예측할 순 없겠지요. 몇 년 전인가. 댁이 말했다시피 회귀는 가능성을 국한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을 만개시키는 방법론일 테니까요…….
-당신의 무지(無知)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근처에 둔 동료에 대해서조차. 이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오늘은 보람이 있었습니다…….
노도하가 일어섰다.
테이블 위엔 그녀가 모처럼 타 달라고 부탁했던 커피가 놓여 있었건만, 노도하는 커피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제멋대로 식어 버린 김만이 피어올랐다.
수증기는 반쯤 존재했고, 반쯤 부재했다.
“각하?”
환상이 깨졌다.
고개를 내리자, 어느새 유지원이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생각이 깊어 보이셔서 커피를 타 왔습니다. 각하의 바리스타 실력에 비할 바는 못 되겠습니다만, 심려의 무게를 덜어 드릴 정도는 된다고 자부합니다.”
“…고맙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유지원이 타 준 커피를 머금었다.
맛있었다.
내 취향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맛있구나.”
“감사합니다.”
나는 카페오레를 혀로 감으면서 유지원을 힐끗 바라보았다.
본래부터 커피에 취향이 깊은 아이였다.
내가 바리스타에 진심이란 사실을 알고 난 뒤로는 자신의 역할을 감상자에서 창작자로 전환했다.
기본적으로 유지원은 유능했다.
정치인이 되었어도, 예술가가 되었어도, 사업가가 되었어도, NGO 사회운동가가 되었어도, 주식 트레이더가 되었어도, 신문기자가 되었어도, 칵테일 바텐더가 되었어도, 셰프가 되었어도―.
유지원은 능히, 언제나 상위 0.1%에 들 수 있었겠지.
다른 사람들이 좌충우돌하며 실패를 경험으로 치환하여 성공이란 결과를 향해 더듬더듬 나아갈 때.
유지원은 항상 최적의 루트를 계산하고, 사귀어야 할 인간과 버려야 할 인간을 구분하여, 전력을 다해 관계망을 형성한 다음 진심을 다해 권력을 손에 넣는다.
“하지만 아직 모자랍니다. 저야 카페오레를 타는 재주를 다소나마 익혔을 뿐, 각하처럼 다양한 커피를 자유자재로 구현할 순 없습니다. 각하의 훈육이 필요하겠습니다.”
“…….”
보아라.
그녀는 누구보다 악(惡)에 기울어질 성향을 가졌음에도 결국 장의사라는 회귀자의 동료로 편입되는 데 성공했다.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하지만.
만일 내가 회귀의 주인공이 아니었더라면, 다른 누구보다 유지원이야말로 주인공에 어울릴 만한 인물이었다.
“어제.”
“음?”
“노도하 관리대장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고민이 깊어 보이시는데, 대화에서 무언가 심각한 주제라도 나왔습니까?”
내 동선을 간파하고 있었다.
하긴 당연했다. 내가 유지원이었어도 ‘회귀자의 경로’는 항상 최우선으로 감시했을 터.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여상한 표정을 지었다.
“몇 가지 주제가 나왔지. 그중엔 지원이 네 얘기도 있었다.”
“저 말씀입니까?”
“그래. 요즘 네가 국도관리대 작전팀장인지 아니면 내 전속 비서인지 헷갈린다더구나. 언제까지 잡아놓고 돌려주지 않을 작정이냐고 물어왔다.”
“아.”
유지원이 눈을 깜빡였다.
“부팀장한테 인수인계는 거의 다 해놓았습니다. 특별한 작전이 있을 때는 저의 [미니맵]으로 보조해야 합니다만, 그 이외의 업무에 관해선 평상시의 60% 수준으로 행정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노도하 관리대장이 60%로 만족할 위인으로 보이냐?”
“그렇진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장의사 각하의 근처에서 일하는 편이 더 효율적입니다.”
“오. 아예 이직하시려고?”
“각하께서만 허락해 주신다면, 기꺼이.”
“…….”
“지금은 이곳이야말로 인류의 최종방위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 단언한 유지원의 옷차림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
이누나키 터널에 입주한 지 4년 차에 접어들 무렵이었던가.
그간 오로지 국도관리대 제복만 고집했던 유지원의 옷차림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망토까지 다 차려입은 제복 차림에서 망토는 벗어 두고 다니는 차림으로.
제복에서 정장으로. 정장에서 캐주얼 정장으로. 캐주얼 정장에서 운동복으로.
어느덧, 개인 공간에서 지낼 적에는 잠옷 차림에 가까워졌다.
지금 내게 커피를 타다 준 유지원의 행색도 잠옷이랑 거의 구별하기 어려웠다.
널널한 추리닝 바지에 헐렁헐렁 품이 넓은 긴팔티.
‘내가 편해진 것일까.’
여태껏 유지원이란 인간이 겪어 본 적 없는 ‘편안한 관계’라는 것이 새로이 존재하게 된 것인가.
아니면, 그저 ‘편안하게 지내라’라는 나의 명령을 나의 취향으로 곡해하여서 자기 자신을 이루는 요소들을 재차 깎아내어, 부재하게 된 결과물인가?
유지원에게 둘 사이에 차이가 있을까.
“잘 마셨다.”
“영광입니다.”
“지원아.”
“예, 각하.”
“왜 사람들을 납치한 것이냐?”
“…….”
유지원 입장에선 기습과 같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면전에서 기습을 당한 사람이 보이는 태도에는 이른바 전형적인 클리셰들이 있었다.
부정. 격앙. 반문. 증거요구.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유지원의 반응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14살 중학생 여름, 가족을 토막살인하여 서울 도봉산 미나리꽝에 유기했을 때부터 유지원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이 발각될 경우’를 상정해 두었다.
예상해 두고 대비해 둔 상황에 대해 유지원은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유지원에겐 이미 모든 정보가 주어져 있었다.
♙ 어제 노도하와 장의사가 만났다.
♟ 장의사는 노도하로부터 ‘납치’에 관한 정보를 전해 들었을 확률이 높다.
♙ 노도하는 장의사를 설득할 때, 단순한 감정론이나 심증이 아니라 확실한 물증으로 승부를 보았을 성격이다.
♟ 장의사는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 따라서 장의사의 의혹을 부정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다.
체스판에서 기물을 이리저리 움직이듯.
유지원은 그저 내 기습을 하나의 체스말로 받아들였다. 이에 응수하는 자신의 태도도 똑같이 수싸움의 일환이었다.
“필요하다니? 뭐에?”
“백문이 불여일견이겠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수사관이었다면 여기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 용의자를 놓쳐 준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판단했겠지.
“그래.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마.”
“감사합니다. 각하.”
하지만 유지원과 나의 관계는 범인과 경찰이 아니었다. 심리상담의 피상담인과 상담자 또한 아니었다.
그녀가 연쇄살인마에 사이코패스이며 인간적인 감정의 교류를 일절 모르는 결함품이란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몇 번이나 사선(死線)을 함께 넘었고, 함께 걸려 넘어졌다.
그뿐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커피잔이 다 비워질 때까지 천천히 시간을 녹이고 있자니, 잠깐 로비를 떠났던 유지원이 돌아왔다.
국도관리대 제복.
지난 몇 년 동안 이곳 아지트에선 보지 못했던 옷을, 유지원은 차려입고 있었다.
흑색과 백색의 제복. 공허에 낸 길을 상징하는 조합.
언제든 다시 착용할 수 있도록 항상 관리해 온 티가 났다.
“지금부터 각하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디로?”
“제가 납치한 실종자들이 투옥되어 있는 곳입니다.”
8
우리는 카페 아지트에서 비상구를 열었다. 그러자 그곳엔 본래의 이누나키 터널이 어두컴컴하게 이어져 있었다.
비록 나에 의해 ‘수중터널’로 개조되었다지만, 이누나키 터널은 한때 일본열도를 단절시킨 공허이자 괴이.
이렇게 한꺼풀만 벗기면 괴이 본연의 모습이 도사리고 있었다.
“벌써 오래전 일이군요. 저는 각하께서 이누나키 터널을 조련하여 뜻대로 개변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지켜보았습니다.”
또벅-.
유지원의 발소리가 터널에 깊이 울렸다.
흙탕물이 튀었지만, 어째선지 유지원의 구두나 하의를 더럽히진 못했다.
전쟁터에서도 유지원은 이러했다.
제아무리 오탁이 난무해도 항상 단정하고 깨끗한 제복 차림을 유지했다.
그 때문에 ‘전쟁터가 아니라 패션쇼에 나온 줄 안다’라며 비아냥대는 각성자도 있었지만, 그들조차 내심 유지원의 경이로운 오러 운용을 두려워했다.
“괴이나 공허는 인간의 의도대로 변경할 수 있다. 아니, 적어도 이누나키 터널은 변환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하께서도 수많은 괴이들 가운데 유독 이누나키 터널을 거점으로 선택하신 것이겠지요.”
“…….”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또벅.
“각하께서 가능하신 일이라면, 저 또한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터널에 갈림길이 나왔다.
거기서 유지원은 어느 쪽으로도 향하지 않았다. 대신, 벽면을 더듬더니 특정 부분을 똑똑 두들겼다.
그러자 다음 순간, 눈 깜짝할 사이, 아무런 소리도 징후도 없이 ‘계단’이 나타났다.
“물론 감히 저의 능력과 각하의 능력을 동일선상에 놓은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가능성의 문제지요.”
또벅.
유지원은 당연하다는 듯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장의사 각하께서 조련해 두신 덕분에, 저는 아주 약간의 DLC만 추가하면 그만이었으니까요.”
비상계단은 어두웠다.
빛 한 점이 없었음에도 유지원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계단을 밟아 나갔다.
익숙하다는 듯이.
“알고 계십니까? 각하. 본래 수중터널을 지을 때는 항상 침수를 대비하여 아래에 비상 공간을 뚫어 놓습니다.”
“…알고 있다.”
“역시 각하십니다. 예. 각하께서 이누나키 터널에 ‘수중터널’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 순간, 이미 ‘비상공간’을 삽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 것입니다.”
단, 하고 유지원이 덧붙였다.
“저의 의도에 따라 공간을 인테리어하는 것만이 제법 어려웠습니다. 새삼 수중터널을 카페로 디자인한 각하의 역량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저는 그 정도의 기예까진 부릴 수 없었습니다만, 약 1년에 걸쳐 간신히 합격점을 내릴 만한 공간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벅.
유지원이 계단에서 내려섰다.
이 지하의 밑바닥, 수중의 밀폐된 해저에선 더없이 흐릿하게 조명이 켜져 있었다.
“부끄럽지만 소개하겠습니다.”
노란빛에 비치어진 그 광경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감옥.
철창마다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아니, 이런 표현으로는 사실대로 묘사하는 데 부족함이 많았다.
철창 안쪽에 진열된 온갖 ‘고문기구’들에 사람들이 묶여 있었다.
“이곳은 일반인을 인위적으로 각성자로 만들기 위한 실험실.”
여기저기서 반죽음의 신음이 흐르는 가운데, 유지원은 무표정하게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는 편의상 ‘불행공작소’라 부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