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286)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 286화(286/287)
9
―사이코패스에게도 사랑이 가능할까?
정정하겠다.
지나치게 광범위하여 그저 도발적일 뿐인 질문을 조금 더 좁혀서 의역해 보자.
―사이코패스에게도, 자기 자신만큼이나, 정확히 동등하게 소중한 무엇인가가 생기는 것이 가능할까?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
그야, 자신만큼 소중한 존재를 허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애당초 사이코패스라 불릴 이유가 없으므로.
우리는 바로 그런 이들을 정신적으로 ‘건강’한 정상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이코패스란 처음부터 건강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진 인간 아니었던가.
―삶의 균형과 사회의 도덕을 무너뜨릴 만큼 권력을 병적으로 요구하는 자.
―일상이 파괴되는 것을 감수하고서 자신의 특정한 욕구를 병적으로 추구하는 자.
―본래의 궤도에서 벗어나, 광신도라 불릴 만큼 어떤 신앙을 병적으로 갈구하는 자.
세상에 맞추어서 자신의 윤곽을 정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테두리에 맞게끔 세상을 재단해 버리는 자.
“각하께선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따라서 이러한 IF 시나리오도 가능했다.
“일반인과 각성자의 경계선은 생각보다 모호합니다. 어째서 얼마 전까지 일반인이었던 사람이 갑작스레 대오각성하여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되는가. 원인은 무엇인가? 원리는 무엇인가.”
만일 사이코패스가 선(善)을 알게 되었다면.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바로 그만큼, 똑같은 레벨로 ‘세계의 구원’을 추구하게 되었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저는 그것이 궁금했고,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큼은 해명했다고 판단합니다.”
그 답이 눈앞에 있었다.
“불행. 상처. 트라우마.”
정답(正答)도 해답(解答)도 아니었고, 오히려 오답과 오류에 가까웠으되, 틀림없이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703회차의 유지원은 존재했다.
“이러한 감정 및 사건으로부터 일반인들은 각성합니다. 달리 말해, 자연적인 불행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불행 또한 똑같은 결과를 도출합니다.”
“…….”
“각하. 제가 만들어 낸 이곳 불행공작소야말로 ‘각성자 생산공장’. 최종적으로 인류의 위기를 돌파하고 극복할 최전선입니다.”
그렇다.
불행교단의 한국 지부장, 내 파티의 원년멤버, 정소희 따위가 3회차에 이미 깨달은 정보를――.
설령 회귀자인 내가 제아무리 애써서 은폐해 왔다 하더라도, 유지원이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던 것이다.
10
과거 회상.
아직 성녀가 살아 있었을 때 나눈 대화.
다른 회차들에서도 성녀와 만나 ‘이번 회차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 논의할 적에 항상 공유했던 정보.
“성녀님께선 성좌들을 연기하며 각성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정보를 공유해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역할도 필요해요.”
“정반대라 말씀하심은?”
“정보의 왜곡. 은폐 또한 필수입니다.”
물고기 그림자가 떠도는 수족관의 신전에서 우리는 작당하고 모의했다.
“정소희라는 인물을 가만히 내버려둘 경우 한반도에는 불행교단이란 사이비가 광범위하게 퍼집니다. 문제는 불행교단의 교리에 일부 진실도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력한 불행이 강대한 각성능력을 일깨운다는 비밀.
해당 정보를 공유받은 성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위험한 정보네요.”
“예. 불행교단에 심취한 사람들은 무작위로 사람들을 납치하거나, 심할 경우 아예 공장에서 찍어 내듯 영유아를 만들어서 자기들의 제단에 바칩니다.”
“…말이 제단이지, 사실상 고문실이겠네요.”
“정확합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통 사람은 불행에 익숙해집니다. 그런데 이따금 도저히 익숙해지지 못한 불행도 있지요. 피부에, 뼈에, 심장에 박힌 것 같은 상처입니다. 우리가 손을 놓을 경우, 이 악의 씨앗을 농사 지어서 수확하려 드는 권력자나 광신도가 반드시 등장합니다.”
“…….”
성녀가 조용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무표정한 시선 사이로 물그림자가 비껴갔다.
“이해했어요. 그런데 장의사 씨가 그 방법론을 채택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나요? 각성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인류의 편이 늘어날 텐데요.”
“과연 인류의 편일까요?”
“네?”
“일부러 각성자들을 양산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온갖 고통을 안겨 준다. 고통에 익숙해지면 또 안 되기 때문에, 쉼 없이, 익숙해지지 못할 방식으로 매 순간 불행을 안겨 준다……. 이런 방식으로 길러진 각성자들이, 과연 인류를 위하겠습니까?”
“…….”
“자승자박. 자충수입니다.”
웃기는 표현이 되겠지만, 여기서 ‘자연산’ 각성자와 ‘양식장’ 각성자의 결적적인 차이가 비롯했다.
증오의 대상이 괴이인가?
아니면 인류를 증오하는가?
“물론 자연적으로 발생한 각성자들 중에서도 인간을 경멸하는 사람이야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괴이를 더 증오합니다.”
“…저희들은 괴이에 의해 일상이 무너졌고, 문명과 이성이 모욕당했으며,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렸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성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괴이들에 의해 입은 상처가 깊을수록 그놈들에 대한 증오도 깊습니다. 당서린이나 천요화처럼 성격적으로, 본능적으로 안 맞는 사람들도 괴이를 토벌하자는 목적 아래에선 물 샐 틈 없이 단결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발적으로 불행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다면……. 그렇게 각성자가 생산되어 봤자, 인류의 편이 되어 주긴커녕 세계멸망에 앞장서겠네요.”
나는 말없이 턱을 끄덕였다.
엔젤피쉬가 어항의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일주할 정도의 시간 동안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공허를 들여다보는 자, 스스로 공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결국 우리는 괴이랑 다를 바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순간.”
“과연……. 어렵네요.”
성녀가 중얼거렸다.
“문명이 멀쩡하던 시절에조차 인간성을 뚜렷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적었어요. 하물며, 공허의 독으로 물들어 버린 세계에서 인간성을 다듬으라니…….”
“그러니 성녀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성좌들을 연기해서라도,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의식을 심어 줘서라도, 사람들의 탈선을 방지해야 합니다.”
“어깨에 올라간 짐이 막중한걸요.”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아무런 차이점도 못 느낄 무표정으로, 그러나 누구보다 내 말에 깊이 공감한 눈으로, 성녀가 말했다.
“하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이고,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 할 수 있어요.”
그것이 성녀와 나의 약속.
하지만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이때 나에겐, 성녀한테 마지막까지 숨겨 둔 비밀이 하나 있었다.
11
“장의사 각하의 염려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숙지하고 있습니다.”
유지원이 말했다.
-으아, 아아아. 으, 어…….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 혼자 편해서, 저 혼자 아프지 않아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무도 안 계십니까! 저, 저는 김해에서 태어나서 부산 연산동에 가는 김재구라고 합니다! 제발, 저희 가족들한테 제가 잘 살아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아아아아아아아악!
이누나키 터널의 지하에 조성된 불행공작소는 철두철미 독방들로 이루어진 감옥이었으며, 수감자의 신체뿐만 아니라 소음마저 가둬 놓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들렸다.
나만큼은 아닐지언정 한반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오러 숙련자인 유지원의 청각에도 잘 들렸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각성자들을 양산해 본들, 인류에 대의가 있다는 식으로 세뇌할 순 없다. 그 점을 염려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유지원은 당연하다는 듯 나의 심리를 쫓아왔다.
우리 둘은 서로의 로직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었다.
특히 유지원 입장에서 나란 회귀자는 세계 전체의 흥망을 거머쥔 열쇠였기에, 물리학자가 물리법칙을 탐구하듯 나를 샅샅이 탐구해 두었다.
“첫 번째. 백화여고 학생회장의 [NPC 작성]을 이용한다면, 이들을 괴이에 대한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군단으로 세뇌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요화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
“예.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각하께서 바라시지도 요구하시지도 않는 일을, 그 주황머리 학생회장은 절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하든 저란 인간이 학생회장의 마음속에서 각하와 동등한 무게를 지니기란 불가능하지요.”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지원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어조로 탄식했다.
“그렇기에 두 번째 방법입니다. 무엇인지 짐작하시겠습니까, 각하?”
“…역할의 분리.”
“역시.”
유지원이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과연 각하이십니다. 맞습니다. 굳이 양산된 각성자들이 ‘인류 전체를 사랑’할 필요까진 없습니다.”
단 한 사람.
“자기 자신을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지옥으로부터 구원해 준 누군가.”
“…….”
“실로 간단한 이치입니다. 굿캅 배드캅의 변용이라고 할까요. 배드캅 A는 사람들을 가두어 불행과 고통을 주입시킵니다. 반대로, 굿캅 B는 사악한 B를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합니다.”
나는 한탄했다.
“…그래. 네 말대로, 누군가가 불행을 담당해 주고 다른 누군가가 구원을 담당한다면, 구태여 천요화의 세뇌술을 끌어다 쓸 필요조차 없이, 양산된 각성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하지.”
이것이 성녀한테 말하지 않았던 정보.
아마도 성녀도 은연중에 깨달았겠으나, 나도 그녀도 결단코 혀에 올리진 않은 루트.
“예.”
하지만 유지원은 달랐다.
은발의 사이코패스는 이 가능성을 스스로 떠올렸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본격적으로, 자발적으로 구현해 냈다.
“제가 배드캅의 역할을 자처하겠습니다. 각하. 부디 각하께서 구원자가 되어 주십시오.”
“…….”
“저만큼 배드캅의 역할에 적합한 인물도 따로 없습니다.”
뚜벅.
유지원이 나를 향해 한 걸음 걸어왔다.
“성녀는 지나치게 유순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지요. 당서린, 심아련, 이하율, 서규, 오독서도 제각각의 이유로 부적합합니다.”
“…….”
“그나마 천요화와 노도하 관리대장이 적합하겠습니다마는. 각하께서는 이 두 사람을 대단히 아끼십니다. 배드캅으로 썼다가 버리는 패로 숙청하실 수 없겠지요.”
반면에, 하고 유지원이 제 가슴을 짚었다.
“저는 그들과 다릅니다.”
“…….”
“저는 저들만큼 혹은 저들보다 유능합니다.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은 채 불행공작소를 건설한 시점부터 저의 유능함은 이미 증명되었을 것입니다.”
유능함에서 결코 뒤처지지 않을 노도하도 유지원의 ‘납치’를 목격했을 따름이지 이런 대규모 감옥이 만들어졌음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저는 각하께서 버림패로 사용하셨다 한들 어떠한 악감정도, 아니. 기타 잡다한 감정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
“천요화 회장? 기쁘게 각하의 의도에 따라 주겠습니다만, 그만큼 각하에게 단 한 명뿐인 존재임을 확인하려 들겠지요.”
뚜벅.
이제 유지원은 내 지척까지 가까워졌다.
“노도하 관리대장? 마찬가지로 각하의 계획에 발을 맞추겠으나, 그쪽도 어떤 의미로는 천요화 회장과 동일합니다. 결국 각하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부피를 늘리려는 수작입니다.”
뚜벅.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다릅니다.”
희미한 조명 아래서 은색의 머리카락이 어두운 윤기를 머금었다.
“저는 사이코패스입니다. 저는 각하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애정과 관심도 필요 없고, 증오와 무관심조차 필요 없습니다.”
“…….”
“저를 살려 두시고 중용하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제가 각하의 마음속에서 차지하고자 목표했던 용량은 달성되었습니다. 각하. 사이코패스에게도 쓰임새란 게 있는 것입니다.”
또벅.
유지원이 멈추었다.
코앞이었다.
심도 1,200미터보다 더 깊은 수중의 지하. 어디선가 갓 수돗물에 씻은 딸기의 잡초스러운 향이 흘렀다.
“각하께서 저를 한낱 버림패로 소모하신다 한들 저는 아무런 유감이 없습니다. 제가 유감이 없음을, 각하께서도 이해하고 계실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우리의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라 해도 좋습니다. 각하께선 사이코패스인 저를 선으로 이끄셨습니다. 저는 각하의 선을 위해, 다른 동료들은 수행하지 못할 역할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물끄러미.
유지원은 9cm 아래의 눈높이에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저를 사용하십시오. 각하.”
“…….”
“이들을 구하십시오. 저라는 인간을 증오하게 된 각성자들을, 각하께서 보듬으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인류의 편이 되도록 유도하십시오.”
“…….”
“그리고 저를 버리시면 됩니다.”
유지원(劉地圓).
퍼스널 컬러는 은색.
내 최초의 측근이었고 비서였던 자.
그녀가 말했다.
“저는 틀림없이 이 역할을 맡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