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287)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 287화(287/287)
12
쇼 노인의 조상, 그러니까 ‘쇼펜하우어’라는 이름을 들으면 흔히들 떠올리는 철학자가 이런 비유를 남긴 적 있다.
사람이란 한 명 한 명이 각자 서로 다른 종(種)이나 마찬가지다― 라고.
강아지와 고양이는 종족이 다르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
그리고 엇비슷한 레벨에서, 예컨대, 성녀라는 개인과 유지원이라는 개인은 거의 종족적으로 다른 것이다.
예시를 들어 보자.
-안녕하세요, 장의사 씨. 좋은 아침이에요.
단순한 인사말.
그런데 똑같은 문장이라 할지라도 성녀와 나 사이에서 저 대사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다.
―장의사 씨는 잠이 없어요―
―그리고 저도 시간을 멈춰 놓고 잠을 잤다가 1초 만에 다시 일어나지요―
―우리들의 하루에서 사실 ‘아침’은 별다른 의미가 없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아침이란 시작을 의미하지만, 우리에겐 그저 중단 없이 지속되는 연속의 일부에 불과해요―
―그래도 햇빛이 하늘에 비쳤을 적에, 저는 아침 인사를 드릴 거예요―
―왜냐하면 그날 하루의 시작을,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공유하고 싶으니까요―
겹겹이 쌓인 의미.
문장 뒤에 숨겨진 소원과 기대감.
문맥의 지층(地層).
그러한 뜻을 담아서.
-안녕하세요, 장의사 씨. 좋은 아침이에요.
몇 겹의 지층을 디딘 채 비로소 우리는 똑같은 지상에 서게 된다.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그저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많은 속내를 주고받듯이.
성녀와 나는 지구상에서 단둘이 가장 기나긴 시간을 공유해 왔으며, 따라서 우리들 사이엔 그리 많은 단어가 필요치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성녀와 나는 독특한 종족값을 지녔으리라.
그야,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라는 단순한 언어로 이러한 의미를 교신하는 인간이 달리 없을 테니.
-안녕하십니까, 각하. 좋은 아침입니다.
유지원 또한 하나의 종족이었다.
은발의 국도관리대 작전팀장에게 아침 인사란 전혀 다른 의미로 울렸다.
―간밤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저희의 세력을 위협하는 어떠한 징후도, 오늘 아침 기준으로는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국도관리대 내부에서도 유의미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으나, 만에 하나라도 저에게 어떠한 징후가 느껴지면 곧장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저 또한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명령하신다면 언제든 작전에 돌입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저의 준비 태세는 지금 완벽하게 옷차림을 정돈했다는 것, 목소리에 걸림이 없다는 것,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경례 자세를 취했다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그러한 뜻을 담아서.
-안녕하십니까, 각하. 좋은 아침입니다.
고로 유지원이라는 이름의 종족을 대할 때, 나는 평소의 언어를 내버려 두고 오직 그녀에게만 통용되는 유지원어(語)를 사용해야만 했다.
-저를 사용하십시오, 각하.
-그리고 저를 버리시면 됩니다.
-저는 틀림없이 이 역할을 맡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수년 동안 나와 노도하의 눈을 피해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불행공작소에 수감하여, 온갖 고문을 가해 인위적으로 각성자들을 양산해 내며, 무표정하게 선언했다.
이런 유지원에 대한 나의 응답은―.
“지원아.”
“예, 각하.”
“일단 좀 맞자.”
자고로 주먹은 고대의 인류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장 훌륭한 공용어였다.
13
나는 뒷발을 딛고 유지원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음.”
유지원은 당황하지 않았다.
반항하지도 않았다. 갑작스러운 기습 따윈 언제든 상정해 두었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내게 팔뚝을 건네주었다.
나는 유지원을 번쩍 들어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쿠우우우웅!
수중터널이 뒤흔들렸다. 여전히 고문 기구에 속박되어 비명과 신음을 흐리던 수감자들의 목소리도 함께 흔들렸다.
움푹 파인 구덩이.
먼지가 걷히자, 그 밑바닥에 얌전히 뻗은 유지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빤히 올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뭐가 죄송하냐?”
“제 신체를 방어할 목적으로 오러를 동원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오러까지 해제하여 각하의 폭력을 감내하는 것이 옳은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쪽이 올바릅니까?”
“오러 풀어라.”
“알겠습니다.”
스르륵.
살짝 푸른색이 감도는, 탁한 회색의 오러가 가라앉았다. 우연히도 유지원의 오러 컬러는 내 묵색(墨色)이랑 다소 비슷했다.
“다만 방금과 같은 일격을 오러로 방비하지 않은 채 직격당할 경우, 저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심아련 씨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외투를 벗었다.
항상 지니고 다니는 지팡이검, 도하도 외투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목 관절을 풀었다.
“나도 오러를 안 쓸 작정이거든.”
“…….”
유지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각하, 혹시 화나셨습니까?”
“그럼 안 났겠냐?”
“음.”
약간의 침음.
“곤란하군요.”
“오러에만 의지하고 평소 단련을 게을리하진 않았으리라 믿는다. 전력으로 덤벼라, 유지원 작전팀장. 지옥과 같은 고통을 느끼기 싫다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는 재차 유지원을 향해 쇄도했다.
오러를 썼을 때와 비교하면 확연히 떨어진 스피드. 그러나 조건이 동등해진 이상, 내게 맞서 오는 유지원의 속도 역시 형편없어지긴 마찬가지였다.
복부에 어퍼컷――을 날리는 척하며, 퍼어억! 왼쪽 어깨를 두들겨 팼다.
“큽.”
짧은 신음.
그런 신음으로 끝낸 것이 가히 기적적이었다. 내 주먹의 끄트머리에 분명히 뼈가 살짝 바스러지는 감촉이 걸렸거든.
유지원이 한 발짝 물러나며 주먹을 날렸다. 가볍게 고개를 틀어 피해 주었다.
“무슨, 펀치력이――.”
“전력으로 덤비지 않으면 순식간에 끝난다, 작전팀장.”
내 마지막 경고가 끝나자마자 유지원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도끼였다.
녀석은 한 손으로 손도끼를 날렸고, 또 다른 한 손으로 손도끼를 휘둘렀다.
까아아앙!
나는 날아드는 도끼날의 손잡이를 정확하게 잡아다가 유지원의 공격을 받아쳤다.
좀처럼 커지지 않는 유지원의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세상에.”
“전력으로 덤비라 했다고 진짜 무기를 쓰나? 여전히 스포츠 정신이라곤 눈곱만치도 없구나.”
“방금 어떻게――. 오러로 안력을 강화하지도 않았는데, 날아가는 도끼를――?”
“다리가 비었다.”
손도끼를 찍어 눌러 자세를 무너트린 다음, 다리를 채찍처럼 휘둘러서 유지원의 정강이를 후려 깠다.
우직!
이번엔 확실히 뼈가 부러졌다. 유지원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명백한 고통의 신음을 뱉었다.
“하체 운동 좀 해야겠어. 우리 작전팀장.”
“큭, 후웁. 흑, 후으읍……!”
그런 와중에도 유지원은 암기를 썼다. 전자담배처럼 생긴 도구에 훕, 숨을 불어넣으니 뾰족한 송곳이 내 팔뚝에 박혔다.
“허.”
나로서도 예측하지 못한 무기였기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회피하지 않았다면 목 정중앙에 박혔을 터.
“당문의 암기도 아니고. 뭐냐?”
“총을 들고, 흡. 다닐 수는 없으니. 저의 비밀, 무기입니다.”
“비밀은 무슨. 노도하 관리대장한테 부탁해서 만들었겠지. 그 사람, 의외로 무기를 만드는 데에도 관심이 있으니까.”
팔뚝에 박힌 대못을 빼냈다.
아릿한 고통에 섞여 핏물이 흘렀다.
나는 손가락으로 송곳을 쥐고 이리저리 장난치듯 흔들었다.
“노도하 관리대장이 내가 모르는 종류의 독극물을 여기다 발라 두었기를 비마.”
“…….”
“참고로 내가 만독불침에 가까운 경지를 얻은 지 대략 팔백 년이 지났단다.”
“괴물.”
퉤, 유지원이 침을 뱉고 입가를 닦았다.
팔뼈와 다리뼈가 부러져서 까마득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유지원의 목소리에선 흥분이 느껴졌다.
기쁨에 가까운.
“역시 각하께선 인간병기, 이십니다.”
“방금 발음이 묘하게 씹혀서 ‘인간변기’라고 한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말도 안 되는 음해입니다, 각하. 나이가 드셨는지 귀가 다소 어두워지셨군요.”
그 순간이었다.
딸각. 유지원이 바닥의 타일 일부분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자, 내 머리 위에서 천장이 붕괴되어 돌덩어리가 떨어졌다.
“……!”
“죄송하지만 이곳은 저의 영지입니다.”
바위는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그사이에 유지원은 더 멀어졌다.
딸각. 딸각. 딸각.
유지원은 돌바닥과 벽, 기묘하게 튀어나온 레버 따위를 당기며 달아났다.
다리가 한쪽 부러진 탓에 자세가 엉성했지만, 그렇기에 몸짓이 거미처럼 더욱더 기괴해졌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승률이 올라가는 쪽은 당연히 제 쪽, 입니다.”
“한판 붙자니까 도망치다니!”
“이것이 저의 전력, 이므로.”
쿠르르르르르!
수중터널의 구조가 비틀리면서 갖가지 함정이 튀어나왔다.
벽면에선 화살 세례가 퍼부어졌다.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격벽이 구역을 차단하여 정체불명의 뿌연색 가스를 뿌려 댔다.
그야말로 고전적 함정의 총집합.
‘생각해 보면 이 자식, 일부러 수감자들을 독방에서 풀어 줬다가 다시 함정들로 인도해서 절망을 안겨주었겠군!’
유지원다운 악취미였다.
화르르륵!
겨우 함정들을 피했나 싶었더니 옆 벽에서 화염이 방출되었다. 얼른 몸을 굴려서 다시 피했지만, 팔뚝이 웰던 스테이크로 구워진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크윽! 이런 장난질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유지원!”
“저도 그리 긍정적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발버둥 쳐 보라고 명령하신 쪽은 각하였습니다. 명령을 철회하신다면 저도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하겠냐!”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뚜벅.
뿌연 가스가 걷히자, 저 너머에서 유지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챙겨 왔는지 벌써 목발까지 짚고 있었다.
나는 일순 말을 잃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당연하다는 듯 목발이?
‘생각해 보면 이 자식, 수감자들의 팔다리를 부러뜨린 다음에 보장구들이나 던져 주었겠지!’
역시 유지원다운 준비성이었다.
“저도 이러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유지원의 준비성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후읍- 프으읍-.
그녀의 얼굴엔 어느새 방독면이 씌워져 있었다. 아포칼립스의 필수 패션. 호흡 소리를 50%쯤 다스베이더로 만들어 주는 레어 아이템이었다.
“함정들에도 당해 주시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군요. 각하의 바람에 어울려 드리기 위해서 최종 수단까지 동원할까 싶습니다.”
“최종 수단?”
“각하께서 간파하셨듯, 저의 암기엔 독이 묻어 있었습니다. 일반인이라면 40초 안에 온몸이 마비될 텐데 각하께선 멀쩡하시군요. 그러니 극약을 동원하겠습니다.”
톡, 톡. 꾸욱.
유지원이 목발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러자 갑작스레 천장에 뚫린 환기 구멍들에서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츠지이이이익-.
방금 전에도 뿌연색 가스가 출현했지만 이번엔 때깔부터 달랐다. 갈색과 분홍빛이 뒤섞인, 누가 봐도 건강에 좋지 않을 가스가 힘차게 뿜어져 나왔다.
“이건 또 무슨.”
“각종 흥분제. 마약성 물질. 미약의 칵테일입니다. 사실 이런 표현도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방독면에 한 차례 필터링된 유지원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울렸다.
“지구상에 일찍이 존재했던 물질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일본 열도의 우에하라 시노 씨에게 협력받아 새로이 개발해 낸 약물이지요.”
“아니…….”
“엄밀히 규정하자면 [인간의 욕망과 본성을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약]이라고 말해야 올바르겠습니다.”
시야가 막혔다. 터널이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흡.”
가스를 들이마시자, 달짝지근한 감촉이 입천장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머리 한쪽이 멍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에하라 시노 씨한테 개인적으로 접촉했던 것이 패착이었습니다.”
이 틈에 유지원은 아예 마이크까지 동원했는지, 목소리가 한쪽 방향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노도하 관리대장도 그때부터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듯합니다. 그래도 이리 준비해둔 보람이 있군요, 각하.”
“…….”
“수감자들에게도 실험해 봤습니다. 평균적으로 가스를 맡은 지 15초 만에 신경이 어지러워졌으며, 1분부터 욕망에 집어삼켜진 짐승처럼 변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반인들의 기준을 존경해 마지않는 분께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지요.”
유지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20분 뒤에 뵙겠습니다, 각하. 그동안 저는 조금 깨끗한 옷으로 환복하고 오겠습니다.”
저 개자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