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352)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 352화(352/353)
“장의사. 지금이라면 아직 물릴 수 있어.”
당서린이 말했다.
이제 황금색 천칭은 당서린의 어깨에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쪽을 돌아본 그녀의 고개는 절반쯤 그림자에 파묻혔다.
“그냥 나랑 같이 웃고, 떠들고…….”
“여행하고?”
“응. 그런 식으로 이번 세계가, 173번째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 함께할 수도 있어.”
“…….”
“그뿐만이 아냐. 여기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적어도 당신이 앞으로 1,000회차까지 실패한다는 정보는 얻어 갈 수 있잖아.”
일리 있었다.
하지만 당서린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논리라는 우물 아래에서 새까만 격류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엇을? 173회차에 와서야 겨우 교차하게 된 마음이 덧없이 사라지는 것.
당연했다. 다음 회차부터 나는 노도하 관리대장이 비명횡사하지 않도록 더욱더 철저히 신경 쓸 것이요, 당서린이 타락하지 않도록 온갖 방지턱을 마련해 주겠지.
이번 삶은 이번뿐.
173회차의 장의사도 나와 비슷한 감상을 느낀 걸까.
당서린의 손을 꾹 잡아 주었다.
“사고방식을 바꿔라. 대마녀.”
“…….”
“나랑 작별하는 게 아니다. 정반대지. 무려 1,000회차의 장의사랑 만날 수 있다니, 오히려 행운 아닌가?”
깜빡.
“뭐?”
“사람은 딱히 영원하지 않다. 성격도 습관도 인간성도 바뀌기 마련이지. 요컨대 이건 기회다. 네가 마음을 건넨 상대가 수천 년 뒤엔 어떤 모습일지 확인할 수 있는 이벤트.”
“…….”
“그러니까 슬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도리어 두근거려야지.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해도 이런 모험에 초대받은 인간이, 아무렴 당서린 너 말고 또 있겠나?”
“하.”
당서린의 입에서 픽, 하고 숨이 새었다.
“로맨스도 뭣도 없는 작별 멘트잖아!”
“그치만 웃었죠?”
“어이없어서 웃은 거야! 진짜 분위기 깨는 덴 뭐 있다니까. 당신 삼국지 타령도 맨날 일부러 하는 거지? 나이 든 흉내 내서 괜히 주변에서 들러붙지 않게.”
“저런. 들켜 버렸군.”
“…바보.”
당서린이 손을 휘저었다.
“얼른 가 버려.”
그러자 장의사의 가슴에서 황금실이 뿜어져 나와 천칭으로 빨려 들어갔다.
173회차의 목숨과 정신, 기억에 대한 권리, 모든 것이 천칭의 저울로 흡수당한 것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넘치던 ‘장의사’의 눈동자가 텅 비었다.
일종의 가사 상태라고 할까.
당서린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
그와 동시에 여태까지 ‘장의사’로부터 유리된 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던 나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급격한 쏠림.
마법의 천칭에서 황금빛이 밤하늘을 온통 밝힐 정도로 강렬하게 반짝였다. 황금빛은 텅 빈 ‘장의사’의 몸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
깊은 물 속에서 단숨에 부상했을 때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음 순간, 나는 당서린을 ‘유령의 시점’이 아니라 정말로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999회차의 내가―― 정말로 173회차의 장의사에게 빙의한 것이었다.
“…….”
“…….”
바벨탑의 테라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참으로 기이한 만남이었다.
한쪽은 대마녀. 여전히 인간처럼 사고하거나 행동하고 있으되, 유토피아라는 도시 자체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는 타락자.
다른 한쪽은 999회차의 회귀자. 관점에 따라선 대마녀보다 더욱 괴이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개체였다.
둘 다, 전력으로 사람을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만은 동일했다.
‘이쪽을 경계하고 있군.’
섭섭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당서린 입장에서 999회차의 나는 미지의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경우에 따라선 자신의 모든 권능을 사용하여 나와 대적해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
그런 묘한 침묵이 흐르는 와중에 내 입술이 홀연히 열렸다.
“이따금 저열한 위빠나 저능한 오빠가.”
“……?”
“선주를 위선자라 욕하곤 한다마는, 참으로 삿된 우행이다. 선주는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완벽하지 않은 인간에 불과했으며, 그럼에도 만인의 도덕을 고민하며 앞으로 나갔다. 끝끝내 최후에는 자신이 잘못했다며 스스로의 과오마저 인정했으니, 하물며 아만 같은 후레자식이랑 비교할 바인가!”
“…….”
“그런 선주를 욕하는 자들은 둘 중 하나다. 아직 인생을 덜 살아서 인간의 불완벽성에 관해 성찰하지 못한 꼬맹이거나, 아무리 살아봤자 인간이 될 가망이 없는 나르시시스트인 것이다!”
“…….”
당서린의 표정이 차례차례 바뀌었다.
경계심. 물음표. 깨달음. 경멸. 한숨.
그리고 안도.
당서린이 빗자루를 슬그머니 내렸다.
“…어서 와, 장의사.”
“음.”
“그런데 나잇살을 자그마치 수만 년이나 처먹어 놓고 계속 그러고 싶니?”
나의 순수가 증명되었다.
9
당서린과 나, 둘은 문제아지만 세계최강인 파트너끼리 손을 잡았으니 173회차의 세상에서 감히 우리를 막을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1,000회차가 아니라 999회차의 당신이 소환된 거야?”
“거기에 관해선 가설이 있다.”
우리는 테라스에서 밤새도록(어차피 우리 모두 수면 따윈 필요하지 않은 생명체였다) 회의를 이어 나갔다.
“가설? 뭔데?”
“아마 내가 소환되고 빙의된 그 순간부터 이번 세계가 나의 1,000번째 회차로 취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
가설이라 표현했을 뿐, 확신에 가까웠다.
“생각해 봐라. 당서린. ‘173회차의 장의사’는 조금 전에 사망했다. 그리고 ‘999회차의 장의사’는 방금까지 있었던 세상을 버리고, 아예 다른 과거의 시간선으로 돌아왔지. 일종의 보너스 스테이지, 천 번째 스테이지라고도 볼 수 있다.”
“헤에. 과연. 말이 되네.”
“시간선이 비틀렸다는 점에서 1,000번째 회차보다는 방금 언급한 보너스 스테이지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군.”
정사(正史)가 아닌 비사(祕史).
본편이 아닌 외전.
다만 여전히 왜 내가 173회차로 끌려오기 직전, 당서린과 단둘이 세상에 남게 되었는진 알 수 없었다.
뭐, 공허에 미스터리가 어디 한둘이던가? 나중에라도 단서가 밝혀지리라.
“그래서? 모처럼 당신 스스로 영혼을 바쳐 가면서까지 미래의 자신을 불러왔는데, 그 대단하신 1,000회차의 장의사께선 어떤 흉계를 획책하고 계실까?”
“말했다시피 이건 보너스 스테이지다.”
나는 까망이를 쓰다듬었다.
참, 까망이는 당서린이 지금 회차에 키우는 고양이였다. 현직 국도관리대장의 애완동물답게 진짜 고양이랑 닮았다.
“1,000회차에선 절대로 쓸 수 없는 전략도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예컨대 오러를 무한대로 써먹는다거나.”
“응? 오러가 왜?”
“사실 유지원이…….”
은발 사이코패스와 오러의 정체를 알게 된 당서린은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마, 말도 안 돼! 지원이가? 우리 작전실장이 세상의 모든 오러를 통괄하는 주인이라고?!”
“정확히는 주인의 대리인이지만. 뭐, 그렇게 됐다.”
“거짓말! 아니, 그러면 대체……. 왜 고작 고양이들 죽이는 현장을 들켜서 황금색 천칭으로 인격 교정을 받은…….”
“의도한 거겠지. 너한테도 나한테도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은 안전한 인간이란 보증을 받은 거다.”
“세상에…….”
냐옹- 하고 내 무릎 위에서 까망이가 울었다. 이미 고양이의 기분 좋은 지점들 따위야 모조리 습득해 놓은 회귀자의 쓰다듬신공에 녀석은 호감도 100을 찍은 지 오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천요화, 음. 그러니까 천요화라는 이름을 똑같이 쓰는 괴이 겸 인간이 있는데.”
당서린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응? 천요화 부대장이야 잘 알지.”
“발음은 똑같은데 한자가 다르다. 아무튼 무간인 동시에 흑막의 무녀라는 속성을 동시에 보유해서…….”
그 순간이었다.
-아, 좀! 들여보내 주세요!
-아니, 아무리 국도관리대원이래도 여기 테라스엔 함부로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국도관리대장 각하한테 급히 보고드려야 하는 내용이 있다니까!
우당탕쾅쾅!
불꽃놀이 축제가 한참 벌어지고 있는 유토피아의 소란스러움이 옮아 온 것인가. 바벨탑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말싸움이 들려왔다.
-그래도 규정이…….
-씨! 내가 오죽하면 축제 도중에 보고해야 한다며 왔겠어! 이거 얼른 보고 안 하면 우리 도시 망해! 망한다고! 보고 늦어져서 망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아, 아니…….
당서린의 하얀 미간이 찡그려졌다.
“뭐니? 오늘 밤이랑 내일 오후까진 아무도 올라오지 말라고 명령해 뒀는데.”
“어…….”
상당히 불쾌해하는 당서린과 달리, 나는 개구리처럼 눈을 끔뻑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 저 계단 아래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대단히, 매우, 저주스러울 만큼 더없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왜’ ‘어떻게’ 지금 그 존재가 등장했느냐는 것.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의문이 가슴속을 가득 메웠다.
“미안하다, 당서린. 아마도 내 지인이다.”
“하아? 지인? 당신의?”
당서린의 표정에 새겨진 근육을 인간의 언어로 해석해 보자면 ‘그럴 리 없음’이었다.
“당신 요즘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라고 해 봤자 고려장 정도밖에 없잖아. SG넷에 아주 둘이서 전세를 냈던데.”
그러고 보니 173회차엔 그랬었지―.
이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거의 전원 당서린의 인성교정 프로그램을 이수받았다.
그리하여 ‘커뮤질 같은 건 인생의 낭비 아닌가? 그럴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교양서적이라도 한 글자 더 읽지’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역시 타락자. 역시 괴이.
왠지 모를 아련함을 느끼면서 말했다.
“일단 들여줘라. 쟤, 정말 긴급하게 알려 줘야 할 사항이 있어서 저러는 걸 거야.”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당서린이 손을 휘릭 젓자, 놀랍도록 간단하게 마법이 발동되었다. 굳게 잠긴 철문이 열리면서 소란의 주인공이 저절로 끌려온 것이었다.
“으왓, 핫?! 히야아아아악!”
대롱대롱.
허공에 둥실 떠오른 채 소환당한 사람은… 단발에 붉은 머리카락을 지녔다. 그리고 묘하게 ‘허접함’이라는 아우라를 전신에 두르고 있었다.
무엇을 숨기랴.
“아, 아저씨!”
우리는 저 허접한 존재를 오독서라 부르기로 합의했다.
오독서는 공중에서 바동바동 날뛰면서도 어떻게든 간절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아저씨 맞지? 응? 아저씨지?! 으헝헣! 아저씨, 나 무서워! 눈떠 보니까 갑자기 막 이상한 곳에 있구……. 부산을 다 돌아봤는데도 바벨탑 빼고는 완전 다 달라졌잖아! 이게 뭐야!”
‘아저씨’라는 호칭을 듣고 당서린의 찡그림이 조금 더 진해졌다.
“넌……. 국도관리대 금서관리부 소속 사서구나.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맞지?”
“아, 으응! 응! 서린 언니, 나야! 나!”
“언니?”
당서린이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지만, 이건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오독서가 회귀동맹의 일원으로 편입된 시점은 555회차 이후.
지금은 173회차였다.
이때 ‘장의사’에게도 ‘당서린’에게도 오독서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소속을 기억해 주는 게 참 당서린답다마는.’
당서린은 원래 삼천세계 길드장 시절에는 길드원들의 이름과 가정사를 전부 외우고 다녔다.
국도관리대장직까지 겸직하게 된 173회차엔 과연 그런 묘기를 뽐내지 못했으나, 간단한 정보까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거의 처음 만난 사이나 마찬가지인데 보자마자 나를 언니라고 부르다니. 담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줄 만하네.”
“아니, 아니. 당서린. 잠깐만.”
“응?”
“저거… 저 꼬맹이. 십중팔구 173회차의 금서관리부 대원이 아니다. 아마 나랑 똑같이 999회차에서 끌려왔을 거야.”
“뭐?”
당서린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아. 그럼, 999회차엔 저 아이랑 내가 언니동생 하는 관계가 된다는 소리야?”
“음. 뭐, 우리 멤버들 중에선 사실상 정신적 막내 역할을 담당하는지라.”
“으아아아앙! 아, 아저씨는 정상이라서, 히끅! 저, 정말 다행이다아. 만약 아저씨까지 이상해졌으면 나는- 나느은- 흑!”
참고로 육체적 막내는 하율이었다.
물론 어떤 회차에서든 이하율이 독서를 언니로 대접해 주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사실 인간 취급을 해 주는지조차 미묘했다.
‘이게 대체 무슨 사달이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과거로 끌려 온 것 자체는 이해했다.
173회차의 장의사가 많은 것을 포기해 가며, 타락해 버린 당서린의 권능을 이용하여, ‘미래 지식’으로서의 나를 잠시 빌려온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독서까지 덩달아서 끌려올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도대체 왜?
“…하아. 아무래도 우리 둘이서만 여유롭게 술을 마실 때가 아닌 것 같네.”
당서린이 한숨을 쉬었다.
“지원이를 비롯해서 국도관리대 부대장들도 부를게. 좀 늦은 밤이긴 해도, 다들 밤잠이 적은 아이들이니까 문제없겠지. 몬스터 웨이브가 쳐들어올 염려도 없고…….”
“음?”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국도관리대 부대장‘들’이라니? 이 회차에서 부대장을 담당한 건 천요화 아니었나?”
“응? 아, 응. 맞아. 천요화지.”
“……?”
“……?”
뭐라고 할까.
서로 똑같은 문장을 주고받았는데 정작 이해한 내용이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재차 지적했다.
“그러니까, 국도관리대 부대장은 천요화 한 사람 아니냐는 거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부대장을 한 명 더 임명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
당서린이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화여고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쪽의 ‘투톱’을 국도관리대에 편입시키자는 건 장의사, 당신의 아이디어였잖아.”
“…….”
두근.
가슴이 뛰었다.
“투톱, 이라니. 백화여고는 학생회장 천요화가 독재하다시피 군림하는 길드였을 텐데.”
“…아까도 그렇고. 천요화네랑 관련해서만 조금 이상한 말을 하네.”
당서린의 입술이.
유독 느릿느릿 열리는 것처럼 비추었다.
“――학생회장인 천요화(千謠話)랑 서기인 천요화(天寥化).”
“…….”
“두 사람이 백화여고를 함께 다스렸던 쌍둥이 자매였고, 지금은 우리 국도관리대에 ‘두 명’ 존재하는 공동 부대장이잖니.”
“…….”
그렇다.
천요화(天寥化)가 흑막을 봉인하면서 스스로 존재를 삭제시킨 시점은 688회차.
이때 시점으로는 아득히 먼 미래.
지금. 아직.
쌍둥이 자매의 언니는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