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37)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37화(3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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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Ⅱ
신노아
3
한반도의 지리를 나만큼 꿰뚫고 있는 사람도 없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도 내 앞에선 한 수 접어줘야 할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걔 전국 다 안 밟았잖아. 난 우담바라 잡으러 온양에 있는 폐업 여관까지 가 봤다니까?
국도관리대가 창설된 54회차 이후로 내 머릿속의 내비게이션 어플은 더욱더 정교하게 업데이트되었다.
노도하가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전국의 도로를 전부 관리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럴 인력도 재원도 부족했다.
도시에서 도시로 향하는 도로는 딱 1개로 한정되어야 했으며, 그것도 오직 1차선으로만 복구해야 했다.
특히 ‘터널’이 위험했다.
이미 붕괴했거나 향후 붕괴될 위험이 커서 위험했으며, 만일 붕괴하지 않은 채 멀쩡하다면 더욱더 위험했다. 왜냐하면 어둡고 컴컴한 터널은… 괴이들이 특히나 좋아해서 환장하는 지형이었으니까.
국토 전역의 70%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만큼 터널을 선호했던 한반도엔 치명적인 부분이다.
아, 물론 일본만큼은 아니다. 걔네들 ‘터널’은 진짜로 심각하지. 거기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다룰 때가 올 거다.
여하간. 국도관리대에선 모든 터널을 우회하여 도시-도시를 잇는 길들을 물색해야만 했다. 정 어려우면 아예 산을 깎아서라도 새 길을 터야 했고.
일명 ‘도로 솎아내기’ 작전.
거의 국책 사업급의 난이도를 가진 프로젝트였다.
“장의사 각성자님이 수고해 주십쇼…….”
당연하지만 이 계획은 전적으로 나한테 일임되었다.
“알겠습니다.”
나도 딱히 노도하한테 불평하지 않았다.
이 사업, 애초부터 내가 맡을 작정이었거든.
예컨대 부산에서 대구로 올라가야 한다고 가정했을 때 어떤 길을 1차선으로 내어야 가장 효과적인가?
여기서 ‘효과적’이란 말은 단순히 시간이 적게 걸림을 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은 비교적 후순위에 고려할 요소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건: 괴물들의 소굴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사주경계는 확실히 보장되는가? 특히 휴식 포인트들, ‘순찰대가 안전하게 야영할 수 있는 중간 역참들’을 얼마나 많이 확보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욕심을 조금만 더 부려 보자면 되도록 식수원과도 가까운 편이 좋았다. 그런데 댐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기에 괜히 ‘을지문덕’ 당하기 싫다면 또 댐이랑은 멀리 떨어져야만 했다. 다리야 말할 필요조차 없었고.
즉?
‘신경 써야 될 부분이 너무 많은 프로젝트지.’
그렇다. 이런 일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머리 좋은 사람이 책상에 앉아서 그럴싸한 도로망을 그려 본들 쓸모가 없었다. 책상에 펼쳐진 지도 자체가 너무 낡았는 걸 어쩌겠는가?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지도는 죄다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이전에 만들어진 골동품이었다.
결국 내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는 것 외엔 별수가 없었다. 위성 사진이야 몇 장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아주 디테일한 부분들까지 고려해야 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망해 버린 세상에서 전국 유람이나 다닐 만큼 한가한 존재가 달리 있겠는가? 무한 회귀자밖에 없지.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녀님.”
[네. 서포트 해 드릴게요.]나는 54회차에서 56회차까지 그야말로 발바닥에 땀띠가 나도록 전국팔도 방방곡곡을 탐색하며 로드무비를 찍었다.
순찰대와 함께 이동할 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나 혼자 돌아다녔다. 뭐, 언제든 성녀와 [텔레파시]를 통해 잡담을 떠들 수 있었기에 그닥 심심하진 않았다.
요 3회차 분량의 기행문만 따로 외전으로 엮어다가 출판한다면 제목은 대략 [멸망해 버린 세상의 무한 회귀자입니다만 성녀님의 목소리와 단둘이서 여유롭게 여행하겠습니다] 정도 아닐까.
아무래도 거대한 사건들이 별로 없어서 스토리적으로는 심심하겠다만, 나 개인적으로는 이 3번의 회차를 상당히 좋아한다. 오랜만에 각성자가 아니라 일반인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거든. 이때 맺은 인연이 참 많다.
“어, 이 길이……. 여기가 아닌가?”
김시은.
어느 전직 프로 축구선수의 아들이었던 사람과의 첫 만남도 54회차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실례합니다.”
“우왓? 까, 깜짝이야!”
여행복 차림을 한 청년이 깜짝 놀라서 튀어올랐다.
이걸 청년이라고 불러야 할지 소년이라 칭해야 할지, 그 사이의 언저리에 걸쳐 있는 나이대의 남자였다. 유독 키가 작아서 그런 인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뒤에서 말을 걸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창원터널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수십, 수백 번을 펼쳤다가 접어서 잔뜩 낡아 버린 지도를 펼친 채 자기 얼굴보다 한참 커다란 지도에 얼굴을 거의 박고 있었다. 특히 쪼매한 체구에 좀 버겁겠다 싶을 정도로 사이즈가 큰 가방이 인상적이었다.
요컨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형적인 배낭여행객의 모습.
“누구야?”
다만 지팡이 대신 창을 들고 다닌다는 점이 조금 색달랐다.
상대방은 내 쪽을 향해 창을 꼬나쥐었다. 그런데 창이 좀 허접했다. 자기가 직접 지팡이 끝에다가 단검을 청테이프로 꽉꽉 감아서 만든 100% 홈메이드 수제 창인 게 분명했거든.
사실 저게 요즘 시대의 배낭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패션이긴 했다. ‘뭐, 창도 없이 여행한다고? 혹시 네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가 괴물 뱃속이니?’라는 잔소리를 듣기 싫다면 무조건 최신 트렌드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놀래켜서 죄송합니다. 저는 삼천세계 길드 소속의 길드원으로 십족 토벌전에 참가했던 각성자입니다.”
“각성자……?”
청년의 눈빛에선 경계심이 가득했지만 약간 ‘어디 얘기라도 들어볼까?’ 하는 기색이 풍기기 시작했다.
어느 회차에서든 십족 토벌전이 이루어진 이후부터는 일반인들이 각성자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유순해졌다. 꼭 2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돌아온 참전 용사들을 대하는 미국인과 비슷하달까.
특히 서울 근교에서 살았던 주민들은 각성자에게 꽤나 잘 대해 줬다. 청년도 그쪽 출신이었는지 최소한 말투에서 공손함을 갖추려고 시도했다.
“저.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놀라서…….”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건 제 잘못이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보다 여기 터널은 무너져서 건너가지 않는 편이 좋아요.”
청년의 안색에 낭패감이 섞였다.
“네? 왜, 왜요?”
“딱 봐도 입구가 무너져 있지 않습니까.”
나는 창원터널을 가리켰다.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아 터널 주변엔 수풀과 잡목이 마구잡이로 우거져 있었다. 피부병처럼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와 터널 입구만이 ‘여기가 그래도 왕년엔 우리 영역이었음’ 하고 간신히 주장할 뿐.
청년의 목소리가 쪼그매졌다.
“그래도 한 사람 정도는 어떻게 낑겨서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별로 추천 드리진 않습니다.”
“네? 왜요?”
“괴이들…… 그러니까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을 확률이 엄청 높거든요.”
“아.”
이 험한 세상에서 지팡이 한 자루와 배낭 하나로 여행을 다니는 청년에게도 ‘몬스터’란 단어는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럼 저, 각성자님은 왜 여기에……?”
“이 근방에서 실종신고가 들어왔거든요. 지금 계신 분처럼 한 사람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서 지나가다 변을 당한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막아 버릴 작정입니다.”
“세상에.”
“위험하니까 뒤로 물러나시죠.”
나는 청년이 보는 앞에서 터널을 무너트렸다. 터널 저 안쪽에서 귀신과 비슷한 곡성이 울려 퍼졌지만 딱히 개의치 않았다. 슬라임들이 터지면서 내는 소음이었겠지.
“진짜 각성자셨구나……!”
내가 각성자 호소인이 아님을 목격하게 된 청년은 이제야 경계심을 풀었다.
참고로 말해 두자면 딱히 각성자의 선함을 믿었기에 경계심을 내려놓은 건 아니었을 거다. 어차피 칼질 한 방에 터널을 부숴 버릴 만큼 강력한 각성자라면, 자기가 아무리 경계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한 것에 가까웠다.
망가진 세계에서 괜히 스트레스받지 않고 살려면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제법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은 이 세계에 잘 적응한 편에 속했다.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아, 전 원래 아산에서 살았어요.”
“아니. 아산에서 여기까지 걸어오신 겁니까? 혼자서?”
“하하. 네.”
청년이 머쓱한 듯 뒤통수를 쓸었다.
“저희 어머니 고향이 창원 대산면이거든요. 대산면 아세요? 창원에 있는데. 아무튼 거기 들렀다가 부산 내려가려고 했어요. 여기 터널 이용하는 길이 제일 빠를 줄 알았는데 설마 슬라임 던전이었을 줄이야……”
“어머니께선 고향에 계십니까?”
“앗. 아뇨. 7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익숙한 효과음이 또리링 울려 퍼졌다. 바로 눈앞의 청년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가는 소리였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나 장의사, 딱히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효(孝) 한 글자엔 눈물을 주르륵 흘릴 줄 아는 남자였다. 효 대신 가족애를 삽입해도 똑같았다. 회귀자의 약점은 언제나 사랑인 것이다.
“혹시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서 여행을 결심하신 겁니까? ”
“네!”
“정말 장하시군요. 빤히 고생할 게 보이는 여행이었을 텐데요.”
“에이. 어머니가 저 키우시는 데 했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호감도 플러스 200점!
이미 이 시점에서 나는 눈앞의 청년을 반드시 부산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겠노라고 결심했다. 어차피 나도 노도하 얼굴 보러 부산에 들러야 했다. 일행이 한 명 늘어나봤자 아무런 부담이 안 되었다.
“저도 이 터널만 부수고 나면 부산에 내려갈 생각이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정말요?”
내 제안에 청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예. 제 이름은 장의사입니다. 본명은 아니고 이명이고요. 짧은 여행이 되겠지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시은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편하게 놔주세요.”
“그래. 잘 부탁한다, 시은아.”
“네! 형님!”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다. 키 차이가 좀 많이 나서 나는 티 안 나게 허리를 살짝 숙여야 했다.
솔직히 고백하겠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눈앞의 김시은이 그 ‘김시은’인 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여기엔 피치 못할 사정이 숨어 있었다. 무척이나 길고도 장황한 변명을 딱 한 줄로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사실 그동안 김시은이란 이름을 까먹고 살았다.
물론 이번 에피소드에선 마치 내가 축구선수 김주철의 유언을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누차 강조하다시피, 그런 일관성은 어디까지나 내가 텍스트를 편집한 결과물에 불과했다.
김주철을 만난 게 4회차였고 김시은을 만난 것이 54회차였다. 두 시점 사이엔 자그마치 500년보다 더 긴 세월이 놓여 있었다. [완전 기억 능력]을 터득하지도 않았던 시절의 과거를 내가 어떻게 재깍재깍 떠올리겠는가.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니?”
“예? 아버지요?”
내가 본격적으로 묘한 느낌이랄까, 모종의 위화감을 감지한 것은 그날 김시은과 함께 야영을 준비할 때였다.
나의 질문을 받은 김시은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치 환상의 동물 현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말이다.
“어…….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왜? 어릴 때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요, 그런 이유는 아니고요……. 으음. 그냥 기억이 안 나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침낭을 펴다가 돌연 눈이 확 뜨였다.
방금 김시은이 말하면서 보인 태도. 약간 말끝을 늘어놓는 저 어조는,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종류의 반응이었다.
“잠깐만. 되게 실례되는 질문인데 어차피 형도 고아니까 탁 터놓고 물어보마. 혹시 아버지에 대해 생각이 아예 안 나냐?”
“네? 아, 예…….”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네가 어머니한테 아버지에 관해 물어본 적도 없고?”
“…넵. 그런데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지?”
김시은이 다람쥐처럼 똥글똥글한 눈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그 얼굴엔 한 점의 의혹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걸 신경 쓰는 내가 이상하다는 듯한 기색마저 서려 있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니까.
“네. 맞아요.”
“…….”
나는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야영지 위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의 인연이란 이다지도 질기고 무서운 것이었다.
“시은아.”
“넵?”
“너 부산 가서 형이랑 같이 잠깐 어디 좀 들르자.”
4
김시은이 나와 만난 것은 한마디로 말해 기적이었다.
뭐, 대단히 거창한 의미에서 기적이란 단어를 남발한 건 아니었다. 모든 기적이 그러하듯 이 만남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무(無)에서 유(有)가 튀어나오듯 갑작스럽게 터진 사건이 아니라, 기존의 여러 조건들이 절묘하게 맞물려서 발생하였다.
그 조건들의 내막은, 김시은 본인이 스스로 밝힌 신상 정보에서 충분히 추리할 수 있었다.
“게이트 터지기 전엔 아산에서 일했다고?”
“네. 친척분이 아산에서 마트를 진짜 크게 운영하고 계셨거든요. 전 거기서 아르바이트나 좀 했죠!”
여기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다름 아니라 ‘아산’이란 지역 그 자체였다.
한국 지리에 빠삭한 독자라면 나와 똑같이 아산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미 뒷목이 싸해졌을지 모르겠다.
잠깐 설명하자면, 행정구역으로 따졌을 때 충청남도 아산에는 온양이라는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 온양. 세계수 ‘우담바라’가 최초로 붉게 피어난 그 폐업 여관이 자리했던 지역이 바로 온양이었다.
만일 나에 의해 우담바라가 토벌되지 않는다면 아산시의 주민들은 무조건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진원지와 너무 가까우니 어쩔 수 없다. 따로 계산해 본 적은 없지만 세계수가 완전히 개화했을 때는 아산 출신의 민간인들은 99% 궤멸했을 거다.
――그 사망자 목록엔 김시은도 당연히 포함됐을 터.
어떻게 기적적으로 바이러스를 피했다고 해도 상황은 결코 호전되지 않는다. 한국에는 한반도의 유일무이한 미슐랭 가이드 심사위원 십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불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영생을 보장해 준다 해도 십족한테 대가리가 따이고 뇌가 파괴되면 답이 없다. 길드 연합군이 십족을 토벌하기 전까지 한반도 내 모든 인간들은 그저 십족의 밥상 위에 올라간 오마카세 메뉴에 불과했다.
요컨대 김시은이 무사히 살아남아서, 홈메이드 창 한 자루를 꼬나쥔 채 아산-창원-부산으로 여행을 오기 위해선 여러 조건이 필요했다. 해당 조건을 RPG 퀘스트창처럼 깔끔하게 표시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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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은 생존 루트 해방 조건]1. ‘십족’을 토벌하십시오. 십족이 토벌되지 않아 서울에서 남하할 시 김시은은 사망합니다.
2. 세계수 ‘우담바라’를 토벌하십시오. 김시은은 바이러스 초창기에 감염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회귀 이후 즉시 우담바라를 토벌하지 않을 시, 김시은의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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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회귀자인 내가 없었더라면 클리어 따윈 꿈도 꾸지 못했을 난이도.
어디 이런 사람이 한반도에 김시은밖에 없으랴?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당장 나한테 틈만 나면 마녀친구 하자고 꼬드기는 당서린만 봐도, 사실 십족을 없애야만 비로소 생존이 보장되는 인물이었다.
보스급 몬스터들을 토벌한다는 것은 기존엔 ‘잠금’ 처리되어 있던 지역들을 새롭게 하나씩 개방하는 일과 비슷했다. 김시은은 십족과 우담바라를 죽인 루트에서만 해금되는 NPC와 같았다.
물론 이 모든 설명은 게임으로 비유했을 뿐, 실제 세계는 게임이 아니었다. 실제 인간도 NPC가 아니었다.
따라서 인간에게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임이란 것도 엄연히 존재했다.
“…어, 그러니까.”
내 설명을 전부 듣고 난 다음 김시은이 미간을 좁혔다.
“저한테 사실 김주철이란 이름의 아버지가 있었다는 말씀이죠? 장의사 형님이 제 아버지를 봉인시키는 바람에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몽땅 잃었고요.”
“그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너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기억으로부터 삭제된 거다.”
“아니, 뭐 그런 능력이 다 있어요?”
김시은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얘가 일반인이라서 이렇게 반응하는 거지 사실 [시간 봉인] 정도면 제법 상식적인 능력에 속했다. 이 세상엔 인터넷에서 어그로를 끌수록 치유 능력이 강해지는 능력까지 존재했으니까.
일반인들은 대체로 각성자가 무조건 RPG 캐릭터 같은 능력을 가졌을 거라고 오판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별의별 괴상망측한 능력들이 더 많았다.
“아무튼 착각일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선 네가 김주철 씨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아 보여.”
“으으음. 글쎄요, 저는 전혀 실감이…….”
“살면서 축구에 관심을 가져 본 적 없냐?”
김시은이 멈칫했다.
“…없는데요?”
“김주철 씨는 전직 축구선수였어. 네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전부 잃어버렸다면 아마 축구에 대한 기억도 상당 부분 날아갔을 거다.”
“그치만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래. 하지만 아예 기억이 없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살면서 월드컵을 시청해 본 적도 없나? 단 한 번도? 해외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에 대한 동영상이나 기사를 접한 경험은?”
김시은이 입을 다물었다.
“김주철 씨는 부산에 있는 스타디움에 봉인되어 있어. 만약 이게 전부 내 착각이고 오해였다면 미리 미안하다는 말을 해 두마.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너도 한 번쯤 나를 따라와서 진상을 확인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