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38)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38화(38/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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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Ⅲ
신노아
5
“이쪽으로 따라와라.”
“네, 네엡…….”
부산에 위치한 어느 축구 스타디움.
괴물에게 반파되어 경기장의 외벽은 거의 무너져내렸다. 온갖 철재 골조들이 잔해처럼 널브러진 이 장소에 나는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방문하였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누군가의 아버지 되는 사람과 왔다. 두 번째 방문에선 그의 아들과 함께했다.
“우와.”
김시은은 이런 대형 경기장에 와 본 게 처음이었는지 두루미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되게 크네요. 경기 같은 거 열리는 날엔 저 관중석이 꽉 차요?”
“꽉 차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지. 그래도 평균적으로 1만 명 정도는 직관했던 걸로 알고 있다.”
500년을 훌쩍 넘는 세월 만에 재방문한 장소였으나, 목적지는 의외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관중석 한편. 그곳에 마치 깊은 동굴 속에서나 발견할 법한 수정이 돋아나 있었다. 내 키만큼이나 거대한 수정이었다.
오직 내 눈에만 비추는 표식.
나는 개인적으로 저 수정을 ‘비석’ 혹은 ‘묘비’라고 불렀다. 어차피 나 말고는 아예 인식조차 할 수 없어서 그냥 ‘저거’라고 불러도 상관없었다.
당장 내 옆에 있는 김시은도 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수정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자, 내 손을 잡아라.”
“앗, 넵.”
“나는 내가 봉인한 상대방의 꿈속으로 언제든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너는 아니야. 내 손을 잡은 동안에만 넌 꿈에 접속할 수 있어.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내 손을 놓으면 안 돼. 알았지?”
“알겠어요. 형님.”
김시은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쥐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눈 감고. 마음의 준비를 해라.”
“…….”
“간다.”
나는 수정의 표면에 왼쪽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물컹, 하고 손이 수정을 통과했다. 거울처럼 투명하게 반들거렸던 수정의 표면은 마치 물로 이루어진 수명이었다는 양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몸을 받아들였다.
그 상태로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더, 도합 여섯 걸음쯤을 내딛자 사방이 급속도로 새까맣게 물들었다. 어떤 장난기 많은 어린애가 검은색 물감을 마구잡이로 펴 바른 것 같기도 했고, 아주 깊은 심해에 들어온 것 같기도 했다.
“…….”
나에겐 익숙한 감각이었으나 김시은에겐 아니었겠지. 두려움에 움찔거리는 기색이 손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잠시 후.
-와아아아아아아아!
돌연,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함성이 우리 곁에서 터졌다.
“힉!”
김시은이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그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함성을 접했을 때보다 조금 더 눈을 크게 치켜떴다.
“어, 어어? 뭐야?”
함성은 서포터들의 응원이었다.
우리를 제외하곤 사람 하나 없어 을씨년스러웠던 경기장은 어느새 홈팬들과 원정팬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폐허의 잔해들이 있던 자리엔 대신 축구 클럽들의 깃발, 슬로건, 풍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들어찼다.
“공격해! 공격! 빨리, 빨리!”
코치로 보이는 누군가가 필드 언저리에서 소리쳤다.
초록으로 물든 필드에선 선수들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들이 드리블을 칠 때마다, 기가 막힌 패스를 찔러넣을 때마다, 코너킥을 준비할 때마다 관중석에선 하늘을 뒤흔들 법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오! 우리의 클럽! 영원한 고향!
세상이 이렇게 망가져 버리기 이전.
다른 사람들 기준으론 5년 전에, 그리고 내 기준에선 500년도 더 된 옛날에나 맛볼 수 있었던 응원의 열기.
-나의 사랑! 나의 고향!
-우리는 오늘도 승리하리라!
축구 클럽의 팬들은 스마트폰을 흔들고 제자리에서 뛰었다. 관중석의 최선두에선 거대한 깃발들이 쉴 새 없이 나부꼈다.
마치 저녁의 파도처럼 붉게 너울거리는 깃발들 아래에서 김시은은 잔뜩 굳어 있었다.
“…….”
“저길 봐라. 시은아.”
나는 필드를 가리켰다. 내 손가락을 뒤따라서 김시은의 시선이 움직였다.
툭, 하고 축구공이 잔디밭에서 튀어 올랐다. 한 선수가 공을 가슴팍으로 받아내어 능숙하게 치달았다.
김주철.
-오오!
관중들이 탄성을 흘렸다.
내 기억 속에서 세월의 안개에 파묻혔던 김주철의 모습이 조금 더 젊고, 조금 더 튼튼한 모습으로 필드에서 뛰고 있었다.
무엇보다 김주철의 왼발이 자유롭게 축구공을 툭, 툭, 차며 앞으로 질주했다.
-가! 빨리 가! 역습해!
-아무도 없잖아!
-김주처어얼!
김주철은 수비수였음에도 거침없이 하프 라인을 넘어섰다. 아군도 적군도 그를 뒤쫓기 위해 필사적으로 따라붙었다.
김주철이 왼발로 차서 올린 공에, 같은 편의 공격수가 어렵사리 머리를 갖다 대었다. 머리에 맞고 나온 축구공이 골망을 뒤흔들었다.
-와아아아아아!
김주철이 어시스트를 적립했다.
그의 활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잠시 뒤 이어진 코너킥 상황에서 김주철은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번엔 아예 자신의 머리로 직접 축구공을 골망에 밀어 넣었다.
전광판의 숫자가 1:1에서 2:1로 바뀌었다. 역전골.
수비수가 1도움 1골을 순식간에 만들어 낸 것이었다.
-고오오오올! 골! 골!
-김주철! 김주철! 김주철!
바로 그 순간에.
김주철은 스케이트 선수처럼 가볍게 미끄러져 관중석을 향해 달려왔다. 카메라가 그를 비추었다. 김주철은 광고판도 가볍게 뛰어넘어, 어떤 여자 관중에게 다가가서 키스를 선사했다.
여자 관중은 품에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다. 김주철은 아이의 정수리에도 입술을 맞추었다. 경기장 전광판 화면에 그 광경이 고스란히 잡혔다.
-뭐야? 누구야?
-김주철 선수 와이프래!
-오오오! 김주철! 김주철!
과도한 세레머니에 심판에게 경고까지 받았지만 선수들도 관중들도, 김주철 본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옆에서 김시은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엄마……?”
축구선수와 입을 맞춘 여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김시은은 알아보는 듯했다. 그는 벌어진 입을 차마 닫지 못했다.
“말도 안 돼. 그럼 정말로…….”
김시은의 자그마한 중얼거림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서포터들의 응원가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김주철! 우리의 철벽!
-아무도 김주철을 뚫지 못한다네!
-김주철! 우리의 철벽!
어린아이를 껴안은 김주철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자기 아버지의 품 안에 안긴 아이 역시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
절대로 되찾을 수 없는 영광.
“…….”
“저게 네 아버지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러를 펼쳐서 우리 둘과 주위 사이에 차단막을 만들었다. 관중들의 환호성은 아련한 메아리처럼 멀어졌다. 소리가 옅어지자, 눈앞의 풍경은 꿈처럼 어른거렸다.
“그리고 영원히 반복하고 있는 순간이지.”
“이, 이상하잖아요.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도대체 왜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지워 버린 거예요? 네? 왜 가족들을 내버려 두고 이런 꿈속에 갇힌 거냐고요.”
“…….”
왜냐하면 얼마 가지 않아 김주철의 왼발이 완전히 부서지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술과 도박에 빠졌기 때문이었고, 가족들을 버리고 마카오나 강원도에서 주저앉았기 때문이었으며, 홀로 아들을 돌보던 아내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한테 가서 직접 들어볼래?”
“…….”
김시은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네.”
이곳은 이미 김주철의 영역이 되어 버린 세계였으나 나 역시 시전자로서 어느 정도 간섭할 힘을 가졌다.
경기가 종료되자 김주철은 MOM 인터뷰를 끝마치고 라커룸으로 향했다. 나는 김시은의 손을 붙잡은 채 그 뒤를 따라갔다. 아무도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어?”
유일하게 김주철만이 나를 인식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깡충깡충 뛰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환하게 웃는 낯빛으로.
“누구시지? 우리 팬이신가? 여기까지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
“접니다. 김주철 씨.”
“예? 누구신데요?”
“장의사. 당신을 이 시간에 가둔 장본인입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겠습니까?”
“…….”
김주철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그것과 동시에 이 세상을 물들던 색채들도 모조리 회색 빛깔로 변했다. 라커룸에서 응원가를 연호하던 선수들도, 막 들어오려던 감독과 코치진도, 어떤 선수가 터트린 샴페인도 허공에서 멈추었다.
“아…….”
단지 김주철의 탄식이 조용하게 흘렀다.
“그래. 그랬지. 맞아. 꿈이었지.”
“…….”
“이건 꿈이었어. 그래, 전부 꿈이었어…….”
김주철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다양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자신의 동료였던 사람들을 한 명씩 쳐다봤다. 그리고 후우, 한숨을 쉬었다.
“이젠 자각몽이 되었군요. 오히려 잘됐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내랑 아들 얼굴이나 한 번 더 보러 가야지. 이 지긋지긋한 놈들이랑 라커룸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음?”
“어차피 이 순간이 지나가면 김주철 씨는 모든 걸 잊어버리게 됩니다. 지금 저와 만났던 기억도, 저와 나누었던 대화도. 세상의 사람들이 김주철 씨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듯 김주철 씨 역시 더 이상은 세상에 대해 어떤 기억도 쌓아 가지 못합니다.”
“아이고. 그래요? 거 빡세구만…….”
김주철이 벤치에 털썩 앉았다. 온몸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 내며 그가 말했다.
“그럼 장의사 선생은 왜 나를 찾아온 겁니까? 혹시 이 만남도 내가 모를 뿐이지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연례행사입니까? 내 개쩌는 매드무비를 직관하러 오셨나?”
“김주철 씨에겐 의미가 없더라도 김주철 씨의 가족에겐 의미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으응?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랑 같이 온 이 청년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뭐?”
김주철은 그제야 내 옆의 동행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비로소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한 것처럼.
김주철이 눈을 껌뻑거렸다.
“시은이?”
“…….”
“시은이야? 정말 시은이니? 와, 뭐가 이렇게 컸대!”
김주철이 벌떡 일어나서 김시은에게 달려들었다. 김시은은 움찔거리면서도 김주철의 포옹을 거부하진 않았다.
“세상에! 남자가 다 됐네! 와,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애기, 진짜 갓난아기였는데! 지금 몇 살이야? 중학생? 고등학생?”
“…20살인데요.”
“뭐? 20살? 아니, 애가 왜 이렇게 쬐끄만해! 평소에 뭘 먹고 다녔길래 키가 그 모양이야! 내 유전자가 어떤 유전자인데!”
장신의 수비수는 아들의 키에 충격을 먹은 듯했다.
“저……. 아버지?”
“응?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야. 괜히 쑥스럽게. 그냥 평소처럼 아빠라고…….”
김주철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는 김시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다음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수심이 피어올랐다.
“…잠깐만. 미안한데 내 와이프… 너희 엄마가 언제 돌아가셨니?”
“…7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
주위가 적막해졌다.
한참이 지나서 “아”, 하고 김주철이 중얼거렸다.
“이래서.”
그의 시선이 얼핏 나를 향했다.
“이래서 나한테 경고했던 거군요. 이래서……. 이래서.”
나는 그에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작게 끄덕여 주었다.
가장 소중했던 존재에게 자기 자신이 잊혀지고 말았다는 감상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나 역시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었던 반면, 김주철에겐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없었다.
영원히.
“…….”
“…시은아.”
아버지가 아들의 어깨를, 김주철이 김시은의 어깨를 잡았다. 결코 악력이 들어간 손짓은 아니었다. 차라리 수양버들의 이파리처럼 가녀린 압력에 가까웠다.
“미안하다.”
“…….”
“아버지가… 네 아빠가, 많이 약한 사람이야. 정말로 약한 사람이었어. 세상이 이렇게 됐는데 네가 살아남을 줄 몰랐고, 아니.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도……. 술이나 마시고, 도박이나 하러 다니고. 아주 못된 놈이었어. 너희 엄마가 전화를 걸어도 무시하고, 화만 내고. 정말로…….”
김주철의 사죄를 김시은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들었다. 김시은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 김주철이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 불과했으므로.
아들의 얼굴을 보고서, 김주철은 다시 한번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이게, 지옥이었구나.”
“…….”
“미안하다. 미안하다, 시은아. 아빠가 미안해.”
자신의 전성기에 갇힌 축구선수는 꼭 고장난 오르골처럼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6
이 이야기의 후일담에 관해선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왜 [시간 봉인]이라는 능력을 그리도 싫어하는지는 이제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솔직히 [시간 봉인]에 대해선 영원히 다루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흑역사였으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금 와서라도 여러분한테 내 능력을 털어놓게 되어서 속이 시원하긴 하다.
그래. 나는 김주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봉인했다.
그때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 되돌이켜보면, 그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나 또한 너무나도 일찍, 너무나도 섣불리 세상을 포기했던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일대기를 ‘실패담’이라고 명명하게 된 이유에는 [시간 봉인]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아무리 회귀를 반복해도 이제는 결코 또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네요.”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는 인연으로 살림을 꾸려 갈 수밖에 없다.
경기장에서 나온 김시은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외벽이 파괴당해서 자신의 속살을 드러낸 스타디움이 저 멀리 위태롭게 서 있었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드냐?”
“엑. 아뇨!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그냥, 제가 기억도 못 하는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떠올릴 수 없으니까. 음. 이상한 기분이에요.”
김시은이 읏차, 하고 배낭을 고쳐 맸다.
“그냥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는 지팡이로 땅을 디딘 채 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형님! 덕분에 이번 여행에서 어머니 고향도 찾고 아버지도 뵙게 됐네요. 기분이야 싱숭생숭하지만 의미가 있었어요.”
“이젠 어디로 가려고?”
“어떻게든 배편을 구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보려고요! 이만하면 국내는 전부 돌아다녀 봤고.”
“일본이라.”
사실 요즘 시대에 일본은 가벼운 여행지로 추천하긴 어려웠다.
누군가가 나한테 한반도를 제외하고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지역을 딱 두 군데만 꼽아 보라고 물어본다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일본 열도와 인도 아대륙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면 그쪽 동네에서 ‘신’으로 취급받았던 존재들이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직접 보살펴 주기로 결심했거든. 참고로 그쪽 신들이 제일 선호하는 장르는 #감금 #조교 #고어였다.
세계 어디나 위험하긴 똑같았지만 저 두 동네는 다른 의미에서 위험천만했다. 장르로 따지면 아포칼립스물과 호러물의 차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이건 몇 년 뒤의 얘기. 아직 일본 열도는 비교적 안전했다.
나는 젊은 배낭여행객의 혈기를 막아세우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조언했다.
“혹시 길 가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거나 이상한 물건이 보이거나 아무튼 이상한 감각이 느껴진다면 그걸 알아볼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합장해서 인사만 한 다음 모르는 척 길을 떠나렴. 특히 터널은 절대로 들어가지 마라.”
“……?”
“아마 후쿠오카에 들르게 될 텐데 임시정부 사람들이랑은 웬만해선 어울리지 말고……. 뭐, 아무튼 기억해 두면 써먹을 날이 올 거야.”
“음. 네! 알겠어요!”
김시은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어떤 결말에 다다랐을지는 나도 몰랐다. 아마 높은 확률로 끔찍한 꼴을 당했겠지.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회귀자인 내 시점에서 볼 때, 인생은 90분이 지나면 휘슬이 불리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잠깐 정거장에 들렸다가 다시 레일을 밟고 나아가는 여행에 가까웠다.
아버지와 달리 그에겐 아직 또 다른 곳을 향해 여행할 기회가 남아 있으리라.
“다음에 또 봬요! 형님!”
참고로 나는 김주철의 진심을 신뢰했다.
세상에서 사라지던 순간에도 ‘우리 아들’을 중얼거린 사람의 저의까지 구태여 왜곡하고 싶진 않았다. 과연 그 마음을 끝까지 지켜 낼 만큼 강한 인물이었는가 하는 의문은 잠깐 제쳐두고 말이다.
그가 진정으로 아들을 위해 사과한 것이었다면, 지금 김시은이 과거에 짓눌려지지 않고 새로운 여행지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도 틀림없이 기뻐하지 않았을까?
축복해 주지 않았을까.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면, 외벽이 무너져내린 경기장이 보였다.
-고오오오올! 골! 골!
-김주철! 김주철! 김주철!
그곳에서 이젠 세상에서 잊혀진 어느 무명의 축구선수가 언제나 경기를 뛰고 있었다. 멀쩡한 왼다리로. 관중들의 함성을 받으면서.
그리고 영원히 가족을 향해 세레모니를 하러 달려가고 있을 것이었다.
– 부자. 結.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