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39)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39화(3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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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자였던 자 Ⅰ
신노아
1
지난번 에피소드에서 김시은이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는 부분을 접하고서 어떤 독자들은 의문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내가 해외에 대해 다소 언급을 꺼렸던 것 아니냐고 말이다.
물론 여기에도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일단 너무 당연한 얘기이긴 한데, 내가 주로 활동하는 거점이 한반도라서 그렇다.
이따금 주변에 원정을 떠날 때도 있긴 했지만 난 기본적으로 해외 원정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유? 거기엔 성녀가 없잖아.
농담이 아니다. 언제나 내 서포터로 뛰어 주는 성녀의 존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이게, 역체감이 상당하다. 3인칭 탑뷰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이 갑자기 1인칭 소울라이크 액션 게임으로 변한다니까?
내가 괜히 나비효과를 토벌하러 중국에 갔을 때 성녀를 데리고 간 게 아니다.
나의 회귀자 인생에서 성녀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거대하다.
어느 러시아 출신 롤리타 콤플렉스 작가처럼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 나의 죄, 나의 영혼, 성-녀’라고 용비어천가를 부를 생각까진 없다. 본인도 싫어할 테고.
하지만 내가 용사파티를 짜야 한다면 일단 무조건 성녀부터 섭외하고 그다음 전략을 생각할 거다. 모르면 외워라. 서포터-성녀는 고정픽.
“장의사 씨.”
“네?”
“왜 만족 길드의 고요리 씨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천리안으로 관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요?”
“음…….”
이토록 중요한 인재인 만큼 당연히 내 머릿속 폴더엔 [성녀 사용 설명서]라는 공략본이 첨부되어 있었다.
딱히 성녀에게만 특혜를 베푸는 게 아니라, 내가 파티원으로 생각하는 멤버들에겐 전부 공략본을 따로 작성했다.
대부분의 각성자들은 내 ‘공략본’을 좀 꺼림칙한 무언가로 취급했다.
이해할 만했다. 나한테야 전부 피와 땀을 투자해서 얻어 낸 지식이었지만, 다른 사람들 입장에선 갑자기 생뚱맞은 놈이 튀어나와서 ‘당신의 능력은 사실 사람들한테 어그로를 끌수록 강력해집니다!’ 하고 소리치는 셈이었으니.
솔직히 나여도 믿기 어려웠을 거다.
“고요리는 정신오염 능력을 패시브로 달고 있습니다. 최상급이에요. 아무리 정신력이 뛰어난 사람이어도 고요리와 접촉하면 무조건 세뇌를 당합니다.”
“아……. 그렇군요.”
성녀는 내 공략본에 단 한 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나와 기억을 공유할 순 없었으나 기록은 공유했다. 내가 제기하는 한낱 주장들을 성녀는 거리낌 없이 진실로 받아들였으며, 그 진실 위에서 전략을 구상했다.
타닥타닥-
성녀는 키보드로 정보들을 정리해 가며 나와 얘기했다.
“혹시 일전의 제가 고요리 씨를 천리안으로 관찰하다가 봉변을 당한 적이 있나요?”
“예. 89회차였죠.”
“어떤 식으로 사건이 진행되었어요?”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자세한 내막은 알기 어렵습니다만, 그 당시 고요리는 우리 파티의 일원이었습니다. 아마도 서규가 먼저 세뇌를 당했을 겁니다. 그런데 서규는 성녀님의 능력이 뭔지, 집주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해당 정보를 갖고 고요리가 성녀님한테 접근했을 거예요. 제가 뒤늦게 달려가 보니까 성녀님이 수건걸이에 목을 매고 죽어 계시더군요.”
“자살인가요?”
“아마도. 더 정확히는 자살하도록 유도당한 것이겠지요.”
“…….”
성녀가 턱을 짚었다.
“서규 씨. 그러게요. 서규 씨를 항상 확실한 아군으로 만들어 두는 게 중요하겠어요. 그것과 별개로 저로서는 이번 회차를 버릴 각오로 고요리 씨의 정체에 관해 끝까지 파고들어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지만…….”
성녀는 내 안색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까진 없겠네요. 그럼, 제가 또 조심해야 될 부분들을 알려 주세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들을 제외하면 없습니다.”
그건 진실이었으며 또한 거짓말이었다.
“남은 위험 요소들은 모두 제가 해결할 겁니다.”
타자 소리가 멈추었다. 성녀는 고개를 기울인 채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의사 씨.”
“예.”
“위험 요소들을 내버려 두면 저는 어찌 되나요?”
잠시 침묵했다.
내가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사항들이 몇 가지 있었다. 시간 봉인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러했거니와 해외에 대한 언급 또한 이에 해당했다. 그것들에 대해 썰을 풀려거든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아주 드물지만 각성자들이 ‘타락’하면 괴물로 변해 버린다는 얘기 역시, 나는 여태까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말하겠다.
성녀가 타락할 때 벌어지는 이야기―― 소위 ‘집행자 루트’에 관하여.
2
우리가 어느 강변의 편의점에서 만나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이래, 어느 회차에서건 나는 성녀를 신뢰했고 성녀는 나를 신뢰했다.
쇼 노인을 잃어버린 내겐 협력자가 절실했다. 성녀 역시 자신의 부족한 무력을 대신 채워 줄 전사가 필요했다. 우리의 동맹은 필연이었다.
[십족 토벌, 고생하셨습니다. 장의사 씨. 이로써 한강 이남에 존재하는 위협 요소는 대부분 제거되었어요.]처음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우담바라……. 토벌 완료. 장의사 씨가 말씀하신 게 사실이라면 저 모자의 시체에서 피어난 꽃이 전 세계를 뒤덮었겠네요. 무척이나 슬픈 일이라고 생각해요. 고생하셨습니다.]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성녀는 발군의 정신력과 생존력을 자랑했다.
그녀는 언제나 세계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살아남았다. 타인과 교류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성녀의 심장은 강했다.
[유성우, 토벌 완료. …이제 수많은 각성자들과 민간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하룻밤 사이 절멸해 버리는 사태는 다시 일어나지 않겠지요. 장의사 씨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유성우가 확정적으로 출현하는 7년 차의 고비까지 우리는 무사히 넘겼다.
변화는 12년 차부터 감지되었다.
[장의사 씨.]“음? 무슨 일입니까?”
[북한 지역, 남포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어요.]성녀의 천리안은 한반도 대부분에 닿았다. 한반도에 한정해서 우리는 무제한적인 시야를 손에 넣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 민간인 학살이요? 정확히 어디입니까? 제가 가 보겠습니다.”
[…아니요. 저도 이제 알았어요. 이미 학살은 거의 끝났습니다. 학살은 7월 11일 오전부터 7월 13일 현재까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어요.]하지만 성녀의 천리안은 어디까지나 ‘각성자’들에게만 통용되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성녀가 관찰할 수는 없었다.
말인즉슨, 민간인이 민간인을 죽이는 경우에 한하여 성녀는 한없이 무력했다.
살해. 학살. 어떤 범죄든 민간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녀는 언제나 한 발짝 뒤늦게 ‘이미 사건이 끝난 현장’만을 관측했다.
[장의사 씨.] [아무래도 저의 능력이 조금씩 강화되는 것 같아요.]사태는 조금 더 악화되었다.
“아, 정말요? 원래 각성자에 따라 능력이 더 성장하기도 하고 아예 처음부터 정체하기도 하는데, 성녀님 능력은 전자였던 모양이로군요. 이제 천리안이 어디까지 닿습니까?”
“이야. 대단하네요.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드려요.]“그보다 슬슬 저한테 무술을 배워 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성녀님도 운동은 하셔야죠. 꼭 무력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라도 단련은 필수입니다.”
[생각해 볼게요. …고마워요.]본래 성녀의 능력은 발전이 더뎠다.
십족에 의해 한반도가 쓸려버릴 때, 우담바라에 의해 세상이 끝장날 때, 유성우에 의해 세계가 무너져내릴 때, 성녀는 죽음을 맞이했다.
미처 능력이 성장하기 전에 사망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회차가 진행되자 성녀의 수명도 점점 연장됐다.
5년, 7년, 12년, 15년. 그녀의 시간이 길게 이어질수록 그녀가 관측할 수 있는 세계의 넓이 또한 한 뼘씩 늘어났다.
무엇보다 이 당시의 나는 더 이상 내게는 쓸모없어진 영약들을 거의 성녀에게 몰아주고 있었다. 가장 믿음직스러운 아군이었으니까.
[…….]그 결과, 성녀가 감당해야 할 비극 역시 조금 더 많아졌다.
지역을 한국으로만 한정했을 때는 괜찮았다.
설령 우리가 모든 사람을 보살필 순 없을지언정 국도관리대라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좌들의 존재로 인해 각성자들이 심각한 일탈을 벌이는 경우가 드물었고, 만약 벌인다 해도 [천리안]으로 인해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당서린의 삼천세계 등, 한국의 대형 길드들 또한 우리에게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바다 바깥은 얘기가 달랐다.
거기까지는 신경 쓸 여력이 안 됐다. 자원이 모자랐다. 물자와 인력의 부족을 논하기 이전에, 단순히 회귀자인 나의 시간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예컨대 중국 톈진까지 내가 갔다 오는 시간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일주일이 걸렸다. 즉 일주일 동안 한반도엔 내가 부재하게 되며, 내가 대응해야만 해결되는 사태들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성녀는 현명했다. 모든 선(善)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명제에 그녀는 깊이 공감했다.
오히려 성녀는 나를 배려했다.
딱 한 번, 북한의 남포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해 언급했던 이후로 성녀는 국도관리대의 영역에서 벗어난 비극에 관하여 단 한차례도 거론하지 않았다. 그것이 괜히 내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 염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침묵한들 살인이 멈추진 않았다.
[…….]우리가 은하수를 토벌한 덕분에 국내 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살아남은 목숨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각자에게 주어진 일이어서, 그 삶으로 다른 삶을 빼앗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외면하면 되었으리라.
끊어 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성녀는 ‘관측’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외면한 만큼 세상이 줄어든다면 모를까. 그런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세상이 그곳에 존재하는 이상, 그리고 누군가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 버린 이상, 최소한 자신만이라도 그 죽음을 기억하길 성녀는 원했다.
독(毒).
독이 한 방울씩 심장에 쌓여 갔다.
[…….]성녀의 심장은 강했다.
그 심장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의 용량은 16년이었다.
3
쨍그랑-
낡은 놀이터에서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퍼졌다.
과거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 놓였던 놀이터. 이제 아파트 건물들은 허물어져 먼 옛날의 집값을 그리워할 뿐이었지만, 반파된 잔해들만으로도 메아리는 충분히 잘 울렸다.
실제로는 유리 깨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철과 철이 맞부딪친 소리, 더 정확히는 오러와 오러가 충돌한 소음이었다.
“이야.”
나는 성녀가 던진 손도끼를 검으로 튕겨 낸 뒤 감탄했다.
“대단하시네요. 오러는 물론이고 무예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감사해요. 아직 부족함이 많은걸요.”
“아뇨, 아뇨. 저에 비해선 거의 천무지체인데요. 저도 오러 수련에야 도가 텄지만 무재가 없어서. 만약 제가 성녀님만 한 무재가 있었다면 벌써 세계를 구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아주 빈말은 아니었다.
사실 난 무예에 대한 재능이 빵점에 가까웠다. 무협에 비유하자면 그저 내공을 계속해서 쌓아서 강기로 우악스럽게 때려잡는 스타일. 심지어 이것조차 10회차부터 내 실력이 회귀를 해도 보존되었기에 간신히 이루어 낸 경지였다.
“오러도 투명한 색이라서 신기하고요. 아니, 진짜로 어떻게 투명색 오러가 있지?”
“…….”
무엇보다 성녀의 오러는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색무취. 투명하게 맑은 오러.
맞부딪치면 쨍그랑- 짜아앙- 하고 꼭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음이 울리는 걸 보아서 아마도 성녀의 심상은 ‘거울’인 것 같았다. 정말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오러의 형태였다.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장의사 씨.”
“1년 만에 이 정도 성취를 이루어 내셨다면 뭐 3년, 5년만 지나도 저 대신 전장을 뛰어다니셔도 되겠습니다. 하면 이렇게 잘하시는 분이 왜 그동안 수련을 마다하셨습니까?”
“몸을 움직이는 건 취미가 아니어서요.”
“이제 취미가 바뀌신 건가요?”
“…네.”
나는 내심 뿌듯했다.
‘만년 히키코모리인 성녀님도 바뀌려면 바뀌는구나.’
비록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무려 16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 내 회귀 인생을 통틀어서 성녀가 이렇게 무술을 배운 건 최초였다.
나는 성녀에게 수건을 건네면서 말했다.
“성녀님, 오늘 따로 일정 있으십니까?”
“…….”
“성녀님? 성녀님.”
“…아.”
성녀가 눈을 깜빡였다.
최근 들어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원래 성녀는 세상에서 한 걸음 뒤떨어져 만사를 관찰하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요즘 그 공기가 조금 더 짙어졌다고 해야 되나? 지금처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갑자기 멍- 하게 허공을 올려다보는 경우가 잦았다.
“괜찮으십니까?”
저런 멍한 표정도 성녀한테 묘하게 잘 어울려서 미학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었지만, 혹시 건강에 탈이라도 난 건가 싶어서 걱정스러웠다.
만약 성녀가 몸져누우면 당장 노도하가 내 주리를 틀어 버리려 들 것이다. 국도관리대를 운영하는 데 성녀의 천리안은 너무 중요하거든.
“네, 괜찮아요…….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혹시 오늘 어디 따로 나가시거나 그럴 일 있습니까?”
“아니요.”
성녀가 즉답했다.
“없어요.”
“다행이네요. 요즘 좀 치안이 나빠지지 않았습니까? 성녀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부디 조심해 주십시오. 가끔 무리하실 때가 있으니까요, 성녀님은.”
“…장의사 씨는 저를 잘 아시는군요.”
“그럼요. 몇 년을 봐 왔는데요.”
성녀가 내게서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이때는 그저 땀을 닦느라 고개를 숙였다고만 생각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어쩌면 수건을 이용해서 자연스럽게 내 시선을 피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항상 고마워요. 장의사 씨.”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