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43)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43화(4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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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자였던 자 Ⅴ
신노아
7
쨍그랑-
사방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금, 내 눈엔 잡히지 않았으나 성녀의 오러가 발동했다는 증거였다.
나를 향해 상어 떼처럼 달려들던 총탄들이 일제히 부서졌다. 손도끼들은 땅바닥에 굴러다녔다. 무려 수천 발의 총알이 가루처럼 으깨져 눈발과 뒤섞여 흩날리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
기적과도 같은 광경을 연출한 장본인, 성녀 혹은 훗날의 내가 ‘집행자’라고 이름 붙이게 될 타락자는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시려는 건가요?”
성녀의 어조는 언뜻 평범하게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무수한 세월을 보냈으며 앞으로도 보낼 예정이었다. 수천 년의 인연이 운명된 상대에게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기란 어려웠다.
성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역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
성녀는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제압을 목표할 뿐.
지금 성녀가 심중에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까진 알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독심술을 터득한 것은 554회차였고 이땐 아직 107회차에 불과했다.
그래도 추측의 단서는 있었다.
“성녀님.”
“네.”
“시간 정지를 사용하는 걸 멈춰 주십시오. 호출한 각성자들도 돌려보내시고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곧바로, 어떠한 유예도 없이 자살하겠습니다.”
“…….”
성녀가 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찰나 동안. 어쩌면 영원히. 또 어쩌면 나의 눈동자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눈동자 속에 눈동자가 맺혔다.
푹.
성녀가 손에서 놓은 도끼가 눈더미에 파묻혔다. 하늘에선 여전히 싸라기눈이 내렸다. 눈바닥 위에 찍힌 수천, 수만 개의 발자국들 위로도 눈발이 내려앉았다.
시간이 흘렀다.
“멈추었어요.”
그것을 성녀는 ‘멈추었다’라고 표현했다.
나는 문득 참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나도 그녀도 비틀린 시간의 유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선 동족이었다.
흔히, 익숙한 공간에서 살아온 자를 동향인이라 부르고 미지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자를 외지인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떠할까?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우리 둘 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이방인 아닐까.
눈이 내렸다. 나는 이곳이 어느 세상으로부터도 격리된 유배지, 세계가 손을 놓아 버린 귀양지라고 생각했다.
우연치 않게도 귀양은 본디 귀향(歸鄕)에서 비롯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언제부턴가 형벌이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빈틈이야말로 우리 두 사람의 고향일 것이었다.
“…좋습니다. 어차피 성녀님은 저의 죽음을 바라지 않고, 저도 성녀님의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동의해요.”
우리 사이의 거리는 6m 남짓이었다.
“그럼 먼저 서로의 요구부터 확정해 둡시다. 저는 성녀님이 저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마찬가지예요. 장의사 씨가 제 집행을 막지 않으셨으면 해요.”
성녀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다시 한번 회귀가 이루어져서 108번째의 세계가 시작되면 장의사 씨는 틀림없이 제가 ‘이렇게’ 되는 것을 막으려 들 거예요.”
“…….”
“제가 살인자가 되길 원하지 않으시겠지요. 언제나 정당하고 책잡힐 일 없는 자리에 저를 놓아 두시길 원할 거예요. 하지만 이건, 죄악을 저지른 자들에게 제 손으로라도 직접 고통을 안겨 주겠다는 건, 저 자신이 스스로 도달한 결론이에요.”
“그래서 저를 제압하시려 한 겁니까?”
“네. 특정한 기억만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장의사 씨를 감금하려고 했어요. 세계는 넓고 각성자는 많으니, 기억을 제어하는 능력도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최악의 경우에는 고요리 씨에게 의지해도 되고요.”
고요리는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아까 고요리를 호출하셨다고 말씀했죠. 설마 그 사람 여기로 오는 중입니까?”
“거짓말이었어요.”
성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각성자들을 성좌의 이름으로 호출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고요. 장의사 씨가 조급해져서 실수를 범하도록 유도한 작전이었어요. 여기엔 저희 둘을 제외하곤 아무도 오지 않아요.”
“…그렇군요.”
세상에. 완전히 블러핑이었다니. 이 사람한테는 정말로 방심할 수 없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검을 칼집에 집어넣고서 말했다.
“성녀님. 저는 성녀님이 악인들을 스스로 처벌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다음 회차에서도, 그다음 회차에서도, 아무리 회귀를 거듭해도 성녀님께 결코 숨기지 않겠습니다.”
“…….”
“약속합니다. 그러니 성녀님도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
“저는 설령 당신이 세상을 불태워 버린다 해도 당신의 편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성녀의 어깨로 눈발이 착륙할 때마다 쩌적- 하고 아주 작게, 유리창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온 세상에 눈이 내리는 소리와 유리가 바스라지는 소리만이 나지막하게 울렸다.
“원통하네요.”
하얗고 투명한 소리들 사이로 성녀의 목소리가 그늘처럼 스며들었다.
“이 기억이, 이 대화를, 다음 회차의 제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16년 동안이나 장의사 씨와 함께한 기억들이 모조리 눈처럼 녹아내린다는 것이.”
“…저는 기억할 겁니다.”
“네.”
성녀가 눈을 살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그래서 더욱 한스러워요.”
“…….”
“송구스러울 따름이에요. 저보다 장의사 씨가 더 슬프겠지요.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모든 일들이, 기억들이, 누군가의 죽음이 지니는 의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게. …그 모든 걸 한 사람의 어깨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 자체도.”
“괜찮습니다. 저는 버틸 만합니다. 성녀님도 있고요.”
눈이 내렸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성녀의 입술이 열렸다.
“각성자의 능력이 극에 달하면 괴이와 다를 바 없어져요.”
이것이 나의 회귀에서 최초로.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타락’이라는 현상이 한 인간의 입을 통해 규명되는 순간이었다.
“예?”
“저는 어느 순간부터 정지된 세계 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요. 저 자신의 목소리만 아니라, 제가 기억하는 모든 소리들을 텔레파시로 재생할 수 있도록 변했고요.”
성녀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녀는 내 이해가 쫓아올 수 있을 만큼 차분한 속도로 말을 조립해 나아갔다.
“처음에는 그저 제 능력이 개화한 거라고 여겼어요. 자연스러운 추론이었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가설, 또 하나의 가능성이 제 머릿속에서 맴돌았어요.”
“어떤 가능성입니까?”
“저 자신이 성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정반대로, 제가 저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가설.”
성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래 텔레파시는 ‘저’의 목소리만 전달했어요. 하지만 만일 제가 저 자신의 육신에서 초탈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점점 더 인간에서 벗어난다면? 그렇다면, 굳이 인간으로서의 육성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리들을 재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 논리적으로는 가능합니다만. 그래도 말씀하신 현상은 단순히 성녀님의 폭이랄까요, 자아의 넓이가 더 확장되었다고 해석해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네. 하지만 둘은 별로 다르지 않아요.”
성녀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란 무척 어려워요. 그렇지만 단순히 심리상의 불안이라고 여기기엔 너무나 뚜렷한 증상들이 있어요.”
“증상이라면?”
“투명한 오러.”
어째서일까. 그 말이 성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순간, 나 역시 모종의 불길함에 사로잡혔다.
보이지 않는 혓바닥이 내 목덜미부터 골반까지 쓱- 척추를 핥아 버린 듯한 감각.
성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각성자가 발현하는 오러들은 모두 제각각의 색을 지녀요. 장의사 씨는, 제 오러에 색깔이 없는 걸 보고 ‘오러가 투명한 색깔을 가졌다’라고 해석했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만일 오러가 아니었다면 어떨까요?”
성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마 정지된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도 수없이 고민했을 문제를.
“마치 오러로 강화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내지만, 오러는 아닌 것. 그런 현상들을 장의사 씨는 분명 수도 없이 목격했을 거예요.”
“괴이……?”
“예. 몬스터지요.”
십족은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태생부터 오러로 강화된 듯한 육신을 가질 뿐.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 박동에 맞추듯이 성녀의 전신에서 쩌적- 쩌적- 하는 소음이 끝없이 울렸다.
“저는 점점 더 공허독에 잠식되고 있어요.”
“…….”
“그뿐만이 아니에요.”
딱.
성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내 시야가 뒤집어졌다.
“……?”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건 뒤집힌 게 아니었다.
내가 마치 유체 이탈을 경험하는 것처럼―― 나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1인칭 시점이 3인칭 시점으로 바뀐 것이었다.
“성녀님?”
내 입술이 움직였다. 내 입술이 움직이는 광경이 보였다.
그건, 너무나도 이상한 감각이었다.
자기 자신의 등이 내려다보였다. 만일 이 상태로 근력 운동을 한다면 더없이 정확하게 중량을 칠 수 있겠지. 하지만 3인칭의 세계는 절대 이점만을 안겨 주지 않았다.
“이게 대체……?”
부유감(浮游感).
사람의 자아란 결국 신체에 들러붙어 있다.
육체는 가장 직접적인 객관이다. 육체가 직접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물들과 ‘나란히’ 놓여 버린다면, 단지 많은 사물들 가운데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리는 순간, 사람의 자아 역시 닻을 잃어버린 채 그저 무량한 바다의 파도 위에서 떠다닐 뿐이다.
“그게, 제가 바라보는 세상이에요. 장의사 씨.”
바스락.
성녀가 눈을 밟으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마치 몸을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갓난아기처럼 어쩌지 못했다.
“예전엔 천리안을 사용할 때만 그런 시야가 펼쳐졌어요. 그런데 점점 익숙해지더니……. 이제는 저 자신의 시야와 3인칭의 시야를 구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어요.”
성녀가 내 손을 쥐었다.
눈발에 차가워진 손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감촉이 어딘지 모르게 ‘멀었다’.
촉감이 색깔처럼 느껴진다고 표현해야 될까? 감촉은 무엇보다 가깝게, 내 살갗 위에서 느껴져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거리감이 느껴졌다.
성녀의 말마따나 도무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기괴했다.
기이했다.
괴이(怪異).
“아마도 저는 이미 존재의 절반가량은 괴이가 되어 버린 거라고 생각해요.”
“…….”
“장의사 씨에게 비밀을 들켰을 때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지금이라도 발각되어서 다행이에요. 아마 조금만 더 시간이 흘렀더라면……. 저는 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까지 잃어버렸을 거예요.”
성녀가 내 코앞에서 속삭였다/저 멀리서 독백했다.
성녀는 자신에게 남은 약간의 체온을 양손으로 끌어모아 내 손을 감싸안았다/집행자는 마치 하늘에 기도를 올리듯 자세를 취했다.
“만일 그 지경까지 갔더라면 저는 장의사 씨의 회귀가 불발되도록 시간을 멈춰세우는 것도 가능하게 됐을지 몰라요. 아니. 만일이 아니라, 확신해요.”
“…….”
“저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시야를 잃어버리고, 형태를 잃어버리고, 시간도 잃어버려서, 단지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바라보기만 할 뿐인 무언가. 그런 괴이.”
성녀의 입에서 수증기가 흘렀다/눈으로 뒤덮인 세상 한복판에서 인간의 여린 체온이 한 줄기 피어올랐다.
“기억해 주세요. 장의사 씨. 이 싸움은, 세상을 구하기 위한 도전은, 결코 시간이 무한대로 주어진 게임이 아니에요. 도전의 기회가 무한할 뿐, 일단 스테이지에 돌입하면 ‘제한 시간’이 주어져요.”
“제한 시간…….”
“그 제한 시간의 기간은 아마도 15년에서 20년. 각성자들이 자신의 능력에 익숙해지는 것을 뛰어넘어, 능력에 자기 자신이 잡아먹힐 정도가 되어 버리면, 저처럼 괴이에 가까워질 거예요. 아시겠나요? 각성자의 능력은 순전한 축복이 아니에요. 양날의 검이에요.”
쩌저적-
어디선가, 눈앞에서, 어쩌면 아주 멀리서, 유리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이제 와서야 그것이 유리가 아니라 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성녀의, 성녀라는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하나의 투명한 막.
“이번엔 장의사 씨가 제 성장에 집중하여서 결과적으로 제가 제일 빨리 이렇게 되어 버렸지만……. 다른 회차들에선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제 느낌상, 강력한 능력을 소유한 각성자일수록 위험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요. 예를 들어……. 삼천세계의 당서린 씨도 예외가 아니겠지요.”
“…….”
“20년. 되도록 15년이 다가오기 전에, 세상을 원래의 형태로 돌려 놓으셔야 해요. 부디 기억해 주세요, 장의사 씨. 제한 시간이…….”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점점 더 뚜렷해졌다.
나는 성녀의 의중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등을 껴안았다. 3인칭 시점에서 몸을 조종하기란 꽤나 어려워서, 약간 힘이 과했을지도 몰랐다.
성녀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저를 죽이실 생각이군요. 이대로 자신이 완전히 변해 버리기 전에 회귀가 이루어지도록. 하지만 그건 자기 혼자서 무게를 짊어지겠다는 욕심입니다.”
작은 숨소리/웃음소리가 들렸다.
“장의사 씨는 정말로 저를 잘 아시네요.”
“같이 가시지요.”
“…….”
“제가 말만 안 했을 뿐이지 사실 멘탈 관리에 도가 텄습니다. 3회차 동안 전국 일주만 다닌 적도 있고 편의점 점주에 취직한 적도 있어요.”
“편의점 점주?”
“예. 성녀님도 조금 내려놓는 방법을 익히실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온몸에서 오러를 끌어올렸다.
쩌적거리면서 갈라지던 유리의 막이 본격적으로 깨지기 시작했다. 쨍그랑- 쨍그랑. 내 오러가 두 사람을 뒤덮을수록 수없이 많은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눈이 내렸다. 유리가 깨졌다. 눈이 내리고 또 내려도 하얀 눈밭 위에 새겨진 두 줄기의 그림자는 파묻히지 않았다.
“…따뜻해.”
성녀가 눈을 닫았다.
“어째서, 사람은. 사람을……. 사람인데.”
쨍그랑.
세계는 조용히 눈을 멈추었다.
그것이 성녀의 유언이었다.
8
후일담이 있다.
이번 후일담은 어떤 특정한 회차에 한정된 장면이 아니다.
109회차, 110회차, 111회차……. 성녀와 혈맹을 맺은 회차에는 어김없이 재현되는 장면이었기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
내 이야기를 전부 듣고서 성녀는 가만히 턱을 짚었다. 깊이 생각에 잠겼는지 이따금 갸우뚱, 갸우뚱, 하고 혼자서 머리를 기울이기도 했다.
“제 이야기인데 저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네요.”
“그렇습니까?”
“예.”
성녀가 내 얼굴을 바라봤다. 몹시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렇게나 열심히 바깥을 돌아다니다니, 저답지 않아요.”
“…….”
그쪽이었나.
성녀는 일어서서 수족관에 모이를 주었다.
세계가 이렇게 되기 전부터 알뜰살뜰하게 모아온 물고기들이 주인의 손짓에 얼른 모여들었다. 빨간색. 하얀색. 노란색. 푸른색. 형형색색의 존재들이 물속을 유영했다.
“아무리 심정적으로 궁지에 몰렸다지만 익명으로 악인들을 처벌한다는 점도 이해하기 어려워요. 자기 자신을 신적인 위치에 올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만들겠다는 전략은 유효하지만, 그건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 자의 발상이에요. 바깥을 돌아다닐 만큼 성실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능력을, 이 세상에 공표하고서 직접 정부를 꾸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음. 그 정도로 성실하지는 못했던 것 아닐까요?”
“그러게요. 어중간해요. 어중간해지기 싫어서 은둔 생활을 자처하는 것인데.”
성녀의 손끝이 물의 표면을 부드럽게 스쳤다.
물고기들에게 있어선 세상의 경계, 이 세계의 막을 이루는 수면이 가볍게 어지럽혀졌다. 성녀는 그 감촉을 즐기는 듯했다.
“무엇보다 107회차의 저는 마치 각성자가 능력을 개화하면 저절로 타락 현상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묘사했어요. 그런데 그건 잘못된 분석이에요. 반증이 뻔히 있는걸요.”
“반증이라면…….”
“장의사 씨요.”
성녀가 말했다.
“장의사 씨는 벌써 무수한 세월을 회귀했고 계속해서 능력을 발달시켰어요. 만일 제 이론이 옳다면 누구보다 먼저 장의사 씨가 타락을 경험해 봐야 해요. 하지만 장의사 씨에겐 그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은 걸 보면, 타락은 어디까지나 한낱 정신적 문제일 가능성이 높아요.”
한낱 정신적 문제라.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성녀였다.
“하지만 마지막 유언만큼은 어떤 의미인지 알겠네요.”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사람인데도 죽인다는 것. 그건 언제나 뼈아픈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그리고?”
“…….”
성녀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수족관에서 집게발을 딱딱거리면서 게눈을 껌뻑거리는 게처럼.
그때 정말로 희귀한 일이 벌어졌다.
성녀가 희미하게 웃은 것이었다.
“비밀이에요.”
– 감시자였던 자. 結.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