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52)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52화(5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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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자 Ⅱ
신노아
“세상에.”
나는 반쯤 어이가 없어서, 하지만 나머지 절반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을 실어서 물어봤다.
“정말 좀비들이 재판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어허, 좀비가 아니라 NPC입니다. 두 번 다신 틀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성공 여부는…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겠죠……?”
노도하 역시 입으로는 저렇게 말했지만 그 음흉한 눈빛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반짝거렸다.
우리 두 사람은 선생님들 몰래 장난을 치는 꼬맹이들처럼 좀비의 방, 그러니까 끊임없이 법전들의 텍스트 내용이 읊어지고 있는 창고를 쳐다보았다.
재판관!
이 멸망한 세계에서 어떻게든 ‘법원’의 기능을 되살려 보겠다는 것은 노도하와 나의 실로 오래된 숙원이었다.
국도관리대는 갈기갈기 찢겨 버린 국토를 가느다란 거미줄로 잇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전국적인 법원 체계를 돌리기란 불가능했다.
‘굵직굵직한 사건이야 내가 임시로 판관 역할을 자처하거나, 유력 길드장들끼리 모여 배심원 제도처럼 처리할 수 있다만.’
나도 길드장들도 한가한 몸이 아니었다.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하루에도 수십 건씩 벌어지는 사건들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결국 현재로선 각 도시를 점령한 길드들이 자체적으로 ‘법원 비스무리한 체계’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깡패들한테 법봉을 들려 준 셈이었다. 제대로 돌아갈 턱이 있나.
당서린처럼 지력 91, 정치력 95를 찍은 태수님이 다스리는 부산이야 태평성대(물론 아포칼립스 기준이다)를 노래하였으나 한반도의 대다수 도시들은 변사또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었다. 자신이 심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아주 불합리한 판결을 받기 일쑤였다. 자기가 심청이여도 좆 같긴 마찬가지였을 테고.
“얘네들, 대가리에다 법전을 전부 입력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까……?”
“아. 으음, 저도 이 정도 분량을 외우라고 시킨 적은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한 달이면 넉넉할 거예요!”
천요화의 말에 노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창고문을 봉인시킨 뒤 일상으로 돌아갔다.
마침내 1개월 뒤.
노도하와 나, 여기에 성녀까지 더하여 이른바 회귀동맹 전원이 집합했다. 천요화도 객원 멤버로 참가했고.
“그럼 열겠습니다아!”
덜컹, 하고 육중한 창고문이 열렸다.
마치 무직 히키코모리의 육수를 3달 정도 방구석에서 우려놓은 듯 꼬릿꼬릿한 냄새가 흘렀다.
그리고 아무도 눈썹조차 찡그리지 않았다. 당연했다. 집 앞에서 시체 냄새가 풍겨도 ‘간밤에 또 누가 뒈졌구나’ 하고 넘어가는 게 요즘 현대인들의 참된 자세였다.
“음.”
창고 한복판에선 좀비… 아니, NPC가 너무나도 멍청해 보이는 표정으로 입을 흐에- 벌리고 있었다.
과연 저것이 법전을 제대로 외울 줄 알까 의문이 들었으나 우리 파티 중에서 사람을 외관으로 판단하는 모지리는 한 명도 없었다.
“졸라 멍청해 보이는군요…….”
노도하 빼곤 없었다.
“아무튼 어서 시험해 봅시다. 바쁘신 분들만 모이지 않았습니까. 자아, 천요화 후배……?”
“앗, 네. 선배님!”
깡총, 천요화가 NPC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NPC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은 재판관이랍니다.”
[…….]“사람들 혹은 조직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어느 쪽이 옳은지 판가름하거나 양쪽을 중재해 주세요!”
스르륵.
‘재판관의 역할’에 대해 속닥거릴수록 거무튀튀한 그림자들이 천요화의 팔뚝으로부터 NPC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꼬리를 살랑살랑거리는 것이 꼭 새까만 실뱀들 같았다.
저것이 천요화의 네크로맨시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흑색의 뱀들이 모조리 NPC의 대가리로 꼬리를 감추었다. 천요화가 “후아” 하고 손사래를 쳤다.
“끝났어요. 저도 상대방한테 이런 식으로 ‘부탁’해 보는 건 처음이라서 잘 적용됐을진 모르겠네요. 어쨌든 아무거나 물어보세요!”
“흐음.”
나는 슬쩍 성녀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무표정이 기본 베이스여서 알아보기 힘들긴 했으나, 성녀 역시 눈앞의 NPC에 다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이 내 숙련된 회귀자 눈깔에는 느껴졌다.
그야 성녀는 악인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싸돌아다녔다는 이유로 107회차에서 흑화해 버린 장본인 아니던가.
노도하 또한 내 시선을 의식하고서 성녀한테 차례를 양보했다.
“먼저 질문해 보시죠……?”
“…….”
끄덕.
성녀가 한 발자국 나아가서 NPC와 마주 보았다.
한반도에서 제일 강력한 능력 혹은 권력을 자랑하는 각성자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NPC는 헤벌레- 입만 벌렸다.
천요화가 활기차게 말했다.
“우선 상황을 설정해 주세요!”
“…중년의 남성이 폐가에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폐가에는 사실 11살짜리 아이가 살고 있었지요. 남성은 폐가에서 쓸만한 물건이 없는지 살펴보던 도중 아이를 발견했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즉시 남성에게 꺼지라고 욕설을 쏟았습니다. 남성은 욕설을 듣자 광분하여 아이에게 달려들었고, 식칼 정도 크기의 단검으로 아이의 목을 찔러서 죽였습니다.”
“호에.”
“남성은 자신에게 아이를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살인자에게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래서 형량에 영향이 있을 것인지 없을 것인지 대답해 보십시오.”
[대답 개시. 살인죄에 있어서의 고의는 반드시 살해의 목적이나 계획적인 살해 의도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뚝.
10도 정도 기울어져 있던 NPC의 목이 돌연 정자세로 바뀌었다.
[살해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충분한 것이며, 이때 ‘살해에 대한 인식’이란 미필적인 것. 즉, 의도치 않은 살해도 포함합니다.]“…….”
[피고인이 피해자의 욕설에 크게 격분하여 단검을 들고 피해자에게 달려들었다는 점, 곧바로 피해자의 경부, 목 위로 치명상이 생기도록 힘껏 내리찔러 그 자리에서 즉시 사망하게 만들었다는 점 등등 범행의 수법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피고인에게 ‘살인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정황에 비추어볼 때, 해당 살인 사건에서 피고인의 범죄 사실을 유죄로 인정하는 조치가 정당합니다.]“…….”
[대답 종료.]투욱.
다시 NPC가 힘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흐음.”
모두가 말을 꺼내지 않는 가운데 노도하가 침음을 뱉었다. 아니, 침음이라기보단 신음에 더 가까웠다.
사람마다 생각에 잠길 때 특유의 버릇이 있었다.
노도하의 경우엔, 항상 쓰고 다니는 검은색 손장갑을 꼼지락거리는 것이었다. 장갑의 검지 끄트머리 부분을 집고 마치 보이지 않는 손톱을 관리하듯 이리저리 잡아당겼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흐으음. 뭐어, 이 정도면……?”
쫘아악-
노도하가 가죽장갑을 팽팽하게, 끊어질 정도로 꽉 잡아당겼다.
흐, 하고 음침한 웃음소리가 허름하기 짝이 없는 창고에 흘렀다.
“당장 현장에서 테스트해 보죠…….”
4
결과부터 말하자면 ‘AI 판사’의 베타 테스트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뭐? AI 판사?”
“그런 게 어디에 쓸모 있다고?”
왜냐하면 각 도시들을 점유한 길드장들이 AI 판사를 굳이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들은 군벌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왜 우리가 사법권을 독립시켜야 한단 말인가? 삼권분립 그거 어차피 옛날 개념이잖아?
하지만 길드장들이 아무리 자기 동네에선 여포짓을 하고 다닌다지만 한계가 있었다. 바꿔 말해, 동네 경계선만 벗어나면 그들은 순식간에 쭈구리가 되었다.
“쟤네 길드가 먼저 우리 나와바리를 침범했어!”
“거기가 왜 너희 나와바리야? 우리 지역이지. 게다가 니들이 먼저 우리 애들 죽였잖아!”
가령 길드와 길드 사이의 분쟁.
이럴 때 보통 길드장들은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아니면 제3자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아, 저분 정도면 그래도 중재를 맡길 수 있지’ 하고 인정받는 인물은 한반도에서 딱 세 명밖에 없었다. 당서린. 노도하. 나.
“국도관리대장님!”
“국도관리대장님, 대장님께서 판단해 주십쇼!”
노도하가 최대한 당신들의 사정에 공감해 주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언제나처럼 성심성의껏, 최대한 불편함이나 원한 같은 게 남지 않도록 중재에 임하겠습니다…….”
“아이고. 잘 부탁드립니다, 관리대장님!”
“예에.”
문제는 우리 세 사람이 아무래도 완벽하게 공정할 수는 없다는 것.
물론 우리는 최대한 공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외부의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러하냐는 건 다른 문제였다.
분쟁에서 양측 모두를 만족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그래서 중재안을 내놓을 때마다 뒤편에선 적잖게 ‘뒷말’들이 오갔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요즘 나온 AI 판사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이게 참 개쩌는 물건인데…….”
“네?”
바로 이 지점을 노려서 노도하는 길드장들에게 AI 판사를 푸쉬했다.
그리고 노도하가 맨날 그러듯이 여기서도 약을 쳤다.
“원래 제가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까진 공무원 노릇 했던 거 아시죠……?”
“아, 넵. 유명한 이야기니까요.”
“사실 그때 이미 정부에선 AI 판사를 도입해야 하는가, 도입하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 권한을 인정해야 하는가 논했습니다. 그냥 판례에 따라 딱딱 판단하기만 하면 될 뿐인, 아주 잡스러운 사건들은 AI 판사한테 맡겨도 되지 않겠느냐……. 그게 또 법조계의 중론이기도 했고요.”
“아……. 네에…….”
“얼마 전에 순찰대들이 정부 건물에서 컴퓨터를 몇 대 뽀려왔는데, 그중 하나에 AI 프로그램이 하나 설치되어 있었지 뭡니까? 그러니까 이건 실전에 사용되던 진짜 AI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번 기회에 한번 시험 삼아서 판결을 들어보는 건……?”
“어.”
“물론 프로그램 따위한테 판결을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냥, [만약 문명이 멀쩡했던 시절이라면 법원에서 어떤 판결이 나왔을까] 하고, 참조 삼아 들어보자는 거죠. 세상이 하도 달라져서 곧이곧대로 판결을 적용할 순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저희들’ 이외의 제3자에게 객관적인 의견을 물어본다는 점에선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어.”
여기까지 국도관리대장이 약팔이를 시전하는데 ‘싫은데’를 시전할 만큼 길드장들이 인정머리가 없진 않았다. 자기들 대신해서 길 닦고 도로 포장해 주는 조직의 우두머리잖나.
무엇보다 노도하 등 뒤에 내가 시립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혼자서 십족 대가리를 깨 버린 각성자의 존재란 군벌들에게 두 번 세 번 숙고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그럼 뭐, 한 번만 뭐라고 하는지 얘기만 들어볼까요……?”
그리고 길드장들은 AI 판사가 그럭저럭 공정하고 의외로 사용하기 편리하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판결. A는 B에게 2억을 배상하시오.]“세상에. 요즘 세상에 2억 원어치 지폐를 어떻게 구해?”
노도하가 음침하게 웃었다.
“어떻습니까? 만족스럽지 않다면 이 프로그램의 의견 따윈 무시하고 처음부터 제가 중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
“…….”
길드장들은 고민에 잠겼다. 그들의 시선을 해석해 보자면 대충 이러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2억 수준의 현물이라면 대충 계산해서 작은 작업장 하나만 쟤들한테 넘기면 되는 수준 아닌가? 분쟁 일어난 거치곤 싼데?’
‘아무튼 내 편을 들어준 건데 여기서 노도하 관리대장한테 중재를 맡겼다가 또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은근슬쩍 넘어가면, 오히려 내 체면이 상하지 않을까?’
길드장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 음. 우선 저희들끼리 합의해 보고 안 되면 관리대장님한테 다시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휴, 얼마든지 괜찮죠. 이 AI가 탑재된 NPC도 여러분한테 두어 명씩 나눠 드릴 테니 요긴하게 사용하십쇼…….”
“어?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흐. 공짜입니다…….”
노도하가 제작해 놓은 판사 NPC들은 한반도의 도시들에 골고루 분배되었다.
길드장들은 각자 도시로 돌아가서 새롭게 생긴 장난감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하나의 길드가 하나의 도시를 관리한다 해도 그 속엔 수많은 파벌들이 존재했다.
“너희 애들이 먼저 우리 나와바리를 침범했어!”
“거기가 왜 너희 나와바리야? 우리 지역이지. 게다가 니들이 먼저 우리 애들 죽였잖아!”
“형님!”
“형님이 판단해 주십쇼!”
“어…….”
파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이를 중재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길드장의 역할.
이럴 때 적절한 판단을 내림으로써 길드장은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매사에 공정하단 평가를 받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길드장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 흥미롭지만 시대에 뒤떨어져서 별로 실용성이 없을 듯한 AI 판사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그런데 얘들아. 혹시 요즘 나온 AI 판사라고 들어봤냐? 이게 참 개쩌는 물건인데…….”
“네?”
AI 판사, 전국 데뷔 확정!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