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53)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53화(5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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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자 Ⅲ
신노아
5
문명이 멸망하기 전에 사람들은 반쯤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휴, 저어 저. 저게 무슨 판결이래?”
“그냥 차라리 전부 AI한테 맡겨도 지금보단 낫겠다!”
물론 이 말의 나머지 절반에는, 여러 이해관계에 얽매이기 일쑤인 호모 사피엔스보다야 강철과 코드로 이루어진 인공지능이 차라리 더 공명정대하시겠다는 진담이 담겨 있으리라.
이제 바야흐로 AI 재판관이 전국적으로 데뷔했으니 ‘와! 절대로 편파 판정을 내릴 리 없는 법의 시대!’ 하고 좋아할 수 있겠는데…….
당연하게도 세상만사, 그리 쉽게 돌아갈 리 만무했다.
[판결. 피고인을 무기징역에 처합니다.]“뭐?”
“사람을 죽였는데 사형이 아니라고?”
“대체 왜 죄인을 죽이면 안 되는 거지?”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했다.
문명이 멸망한 이후 업데이트 패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니, AI 판사의 판결들이란 아무래도 아포칼립스에 적응해 버린 현생 인류의 입맛엔 영 슴슴했던 것.
[판결. 피고인을 징역 3개월에 처합니다.]“뭐?”
“감히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댔는데도 사형이 아니라고?”
“대체 왜 죄인을 죽이면 안 되는 거지?”
애당초 AI 판사가 선고하는 ‘징역형’이란 것부터가 시대에 뒤떨어진 골동품이었다.
감옥? 그딴 게 어디 있어?
웬만해선 무너지지 않을 담벼락을 쌓아올리고, 쇠창살을 설치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수들을 먹고 재우고 살리라고? 뭐 간수 월급은 하늘에서 공짜로 떨어지나?
그렇다. AI 판사는 공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의 공정함과 비슷했다. 현실에 강림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뜻이었다.
“잠깐. 징역 3개월 정도면 새끼손가락 하나와 비슷하지 않겠냐?”
“오…….”
따라서 필연적으로 ‘신의 말씀’을 ‘해석’해 주는 전문 직업군이 필요했다.
고대에는 무녀들이, 중세엔 사제들이 하던 역할을 이어받은 것은 각 길드의 길드장들. 혹은 그들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들이었다.
도시 하나를 차지할 만큼 업적을 세운 길드장이라면 응당 그 도시 안에선 제일 신에게 가까운 인간이라 평가할 수 있었다.
“역시 길드장님임다. 그럼 징역 6개월은요?”
“음, 검지를 자르는 거지. 물론 피해자가 원한다면 발가락을 잘라도 되고.”
“징역 1년은 어떻게 할까요, 길드장님?”
“그때부터는 손모가지나 발모가지를 하나 날려 버려도 되지 않을까? 아! 근데 괜히 그랬다가 노동력이 상하면 안 되니까 50대50……. 가령 가해자의 손가락 3개, 가해자 가족들의 손가락 2개, 이렇게 합쳐서 손가락 5개 형벌이란 방식으로 가자.”
“오…….”
“역시 길드장님임다.”
감옥이 골동품이라면 연좌제는 요즘 잘나가는 길드들은 다 갖고 싶어 하는 잇템이었다.
“그러다 손가락 발가락이 다 잘리면요?”
“그럼 죽여야지. 씨발. 목숨 포인트가 20개나 주어졌는데도 게임을 못하면 그건 그냥 게임이랑 안 맞는 거잖아.”
“맞는 말씀이네요.”
“그럼. 게다가 범죄 저지른 애를 대신해서 손가락 하나 잃어 줄 친구나 친지도 없으면, 어차피 죽여 봤자 아무도 슬퍼할 일 없을 거잖아? 다 죽여.”
“아…….”
이상, 위 대화는 인천에서 어떤 길드장이 발언했던 내용을 읽기 편하도록 짜깁기한 편집본 되시겠다.
도시마다 ‘무녀’들의 해석은 천차만별이었다. 인천시처럼 깔끔하게 모든 목숨 스탯을 손가락 및 발가락으로 환원시키는 도시가 있는가 하면, 징역 6개월형=노예 6개월형으로 해석하여 그만큼 가해자가 피해자의 노예로 전락하는 도시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길드장들은 AI 판사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이거 나쁘지 않네.”
당서린이 툭, AI 판사의 대가리를 건드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혼자서 판결했다는 것보다는, 이미 공명정대한 누군가가 판단했고 자신은 거기에 해석을 덧붙였을 뿐이라는 쪽이―― 길드장 입장에선 훨씬 더 편해.”
“흐음.”
“판결은 잘못되지 않았어. 단지 현실에 적용하는 부분. 즉, 해석에 있어서 미진한 부분이 있을 뿐. 그럼 설령 약간의 실수가 생기더라도 비교적 길드장의 체면도 덜 상할 수 있지. 아. 어쩌면 고대의 권력자들이 사제이기도 했던 이유엔 이런 원리도 있었으려나.”
한반도에서 제일 잘나가는 도시를 다스리는 길드장답게 발언의 무게가 남달랐다.
정작 당서린 본인은 AI 판사를 일반 시민들한테 던져 줬을 뿐, 자신이 판결을 내리는 데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건 비단 당서린이 ‘굳이 짊어지지 않아도 될 책임까지 짊어지는 것’을 지도자의 징표로 여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서린은 대마녀를 자칭하는 마법사였으며 부산을 다스리는 방법 역시 독특… 음. 굳이 표현하라면 굉장히 ‘마녀적’이었다. 그녀가 통치하는 부산에선 일명 ‘마녀재판’이란 시스템이 따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단 오늘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당 씨가 아니니까 다음에 언급하도록 하고.
사실, 나는 AI 판사의 도입에 그닥 적극적이지도 진지하지도 않았다. 노도하의 톡톡 튀는 발상에 놀랐을 따름이지.
이미 위에서 지적했다시피 AI 판사의 판결들은 현실과 너무 거리가 떨어진 공자왈 맹자왈 소리에 불과했다.
나 장의사에겐 야망이 있었다. 언젠가 아포칼립스에도 제대로 걸맞은 법률 체계를 새로 만들어 내 보이겠다는 야망 말이다. 내 입장에서 AI 판사는 단지 기발한 발명품이었으며, 회귀자의 눈높이에 한참 미달하는 불량품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 즉, ‘현실과 너무 거리가 떨어졌다는 단점’이 길드장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오히려 먹혀들었다.
“왜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거야?”
[대답 개시. 현대 법학 및 법철학에서 사형에 대한 논의는 여러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주효한 논리는, 정부가 결코 시민들의 생명권에 관해선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사회계약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일정 부분 정부에 양도합니다만, 생명의 존엄성과 관련해선 여전히 오직 시민 자신만이 독점적인 권리를 유지합니다. 정부는 자연적 인격체가 아니라 인위적 합의체이며, 프로그램에 가깝고, 따라서 자신에게 입력되지 않은 사안에 관해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음……. 즉?”
[설명의 지적 레벨을 2단계 하락시킵니다. 대답 변경. 정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무능한 재판관, 악의적인 증거 조작 혹은 정치적으로 사법살인을 꾀하려는 세력에 의해 정부 또한 언제든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수를 되돌이킬 수 없도록 만드는’ 생명 자체의 말살은 일단 원천적으로 차단해 두는 편이 현명합니다.]“오……. 즉?”
[설명의 지적 레벨을 6단계 하락시킵니다. 대답 변경. 그냥 생명을 소중하게 여깁시다.]과연 AI 판사는 자기가 공언한 대로 도무지 사형을 실행하려 들지 않았다.
“2살짜리 어린아이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난도질해서 죽인 연쇄살인마.”
[사형을 선도할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집행하지 않습니다.]“간첩에 테러리스트여서 공공시설에다 폭탄을 터트렸고 그걸로 삼천 명이 사망했다!”
[사형을 선도할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집행하지 않습니다.]“히틀러!”
[사형을 선도할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집행하지 않습니다.]“씨발, 이래도 안 죽여? 이래도?”
사태가 이렇게 흐르자 부산 시민들(당서린이 일반인들보고 가지고 놀라며 광장 한복판에다 판사 NPC를 배치해 뒀다)에게선 어이가 실종되었다. 아니,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사형을 내릴 건데?
“…진짜 말도 안 되네. 거 그냥 목에다가 칼빵 놓으면 간단히 죽는 걸, 뭐 이렇게 유난을 떨면서 안 죽이려 드는 거래?”
“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나기 전엔 이런 느낌이긴 했어. 죽일 놈들도 안 죽고 다 깜빵에서 콩밥이나 축냈잖아.”
“그래. 그랬었지. 옛날에는.”
“어쩌다 이렇게 바뀌었지?”
“…….”
“…….”
아포칼립스의 사람들은 모두 과거를 그리워했다.
도저히 뒤를 돌아볼 틈이 없어 무작정 달려왔고 그렇기에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AI 판사의 판결을 들으며 자신들이 얼마나 멀리 도망쳐 왔는지 실감했다.
그렇다. 세상은 변했다. 자신들도 변해 버렸다.
지금 잠깐 숨을 놓았을 뿐, 인간들이 다시 공허를 완전히 토벌하여 문명을 재건할 가능성은 요원해 보였다. 자신들이 그저 임종을 눈앞에 둔 인류의 노년기임을 이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
그래서 이 시대 사람들이 여가 시간(그런 여유가 기적적으로 생길 때가 있다)을 보내는 방식이란, 길드 건물 따위에 모여서 ‘이전 시대의 영화’ 등을 대형 TV로 시청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재미없는 영화여도 상관없었다.
“와, 아스팔트 길이 깨끗해!”
“자동차가 돌아다녀!”
“미친. 커피를 그냥 물처럼 마시네.”
“왜 어깨빵을 당했는데 사람을 안 죽이지?”
사람들에게 옛날 시대의 영상이란 인류 문명의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잠시간 떠올리게 해 주는 수단.
이건 TV를 바라보는 자세에서부터 티가 났다. 가지런히 정자세로 나란히들 앉아서 화면을 시청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자기들끼리 오순도순 모여 땅콩껍데기나 까면서 휙휙 곁눈질로 훔쳐보며, ‘영상 속의 진귀한 물건들’에 관해 큰 소리로 떠들었거든.
“따뜻한 물이 집에서 바로 나와? 생수도 그냥 버튼만 누르면 되고? 와…….”
“그런데 대체 왜 뭐 저렇게 불만들이 많은 표정이래? 완전 천국이 따로 없구먼.”
“하여간 다들 배때지가 불렀어. 저것들 다 몬스터한테 대가리 가죽이 벗겨져 봐야 뇌가 좀 익지. 야, 이거 잘 안 까진다. 망치 좀 건네봐라.”
대충 이것이 현대의 자화상이었다.
그렇기에 AI 판사의 ‘현실성 떨어지는 판결들’ 역시 처음에야 일종의 장난감처럼 취급당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다른 색깔을 품게 되었다.
[판결. 피고 B는 원고 A에게 100만 원을 배상하십시오.]“그래? 잠깐 기다려 봐. 일주일 안에 마련해 올 테니까.”
“응?”
일부 사람들이 AI의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돈은 화폐라기보단 부적에 가까웠다. 아직 자신이 문명사회의 일원이었던 시절을 기억하게 해 주는 부적.
그런 부적을 ‘100만 원’ 어치나 사 모으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하지만 어떤 시민은 끝끝내 5만 원권, 1만 원권, 5천 원권, 1천 원권 지폐들을 되는 대로 긁어모아서 정말 피고에게 100만 원을 건네주었다.
“이제 됐지?”
“어, 어어…….”
“그래. 네 영업 방해해서 미안하게 됐다. 이걸로 우리 사이는 정리된 거다.”
어느 시민의 사죄는 놀랍게도 받아들여졌다.
더 이상 부적 이외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다른 물건들과 교환할 수도 없는. 즉, 돈으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돈이 잘못의 대가로써 인정받은 것이었다.
이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점차 더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AI의 판결에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정말로 상처를 입거나 목숨에 지장이 간 사건들에서까지 시민들이 AI 판사에 의지하진 않았다.
하지만 가벼운 사건들, 서로 죽일 것까진 없는 일들에 한정해서 사람들은 기꺼이 ‘오래된 과거의 판결’―― 아직 세계가 멀쩡하던 시절의 정의에 복종했다.
“여기 300만 원 있수다.”
“앞으로는 잘 지냅시다. 좀.”
아무리 최신에 발행된 화폐여도 이미 찍은 지 10년이 넘어가는 지폐 쪼가리들, 그래서 손때가 잔뜩 묻어 꼬깃꼬깃한 종이들을, 사람들은 대단히 애지중지해 가며 주고받았다.
그것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으면 법의 집행이라기보단 꼭 어떤 종교적 의식에 가까웠다.
한때 자신들이 이미 멸망해 버린 어느 세계의 소속원이었다는 사실을 구태여 입증하고 서로 인증해 주는 제례(祭禮).
우리 모두 똑같은 사회에 소속해 있었다는 공동체의 증명 절차.
뭐라고 해야 할까. 보통 아포칼립스가 도래하면 화폐들이 순식간에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되던데, 그런 작품들의 내용과는 현실이 제법 달랐다.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는걸.”
나는 약간 심리적으로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썩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리 세상이 망가져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향수병을 앓은 채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109회차 이후로도 나는 쭉 ‘AI 판사’들을 유지했다.
사법적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되더라도,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약간이나마 ‘인간성’을 떠올리게 해 준다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판사야.”
[예.]“어떤 무한 회귀자가 있는데 자기 혼자서 부인이랑 꽁냥거리겠다고 동료를 내버려 두고 계속해서 직무를 유기하는 노인네다. 덕분에 혼자 남은 동료만 어떻게든 세상을 구해 보겠다며 뼈 빠지게 일하고 있지. 이렇게 괘씸한 회귀자에겐 어떤 판결이 어울리겠냐?”
[판결. 무죄입니다.]“…….”
인간성은 개뿔.
역시 AI는 인간의 마음을 몰랐다.
– 재판자. 結.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