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56)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56화(5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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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 Ⅲ
신노아
4
그래서 이토록 긴 시간과 많은 공을 들여 만들어 낸 대마법을 갖고서 대마녀 당서린 각하께서는 무엇을 하셨느냐 묻는다면―― 딱히 아무것도 안 했다.
“장의사, 당신 고통에 강해?”
“강한 편이라고 생각한다만. 그건 왜 물어보나?”
“설령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더라도 용인하고 넘어가 줄 아량도 당신에겐 존재하겠지?”
“…….”
왠지 불길해졌다.
“무슨 속셈이냐?”
“일단 대답부터 해 주렴. 존재해, 안 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좋았어. 장의사. 내가 엄청 신기한 거 보여 줄게.”
라고 말한 직후 당서린은 만년필을 꺼내서 내 오른손을 콱! 찔렀다.
나는 톰과 제리에 나오는 톰처럼 끼에엑 비명을 질러 댔다. 아니, 이게 미쳤나?
“잠깐! 오러 멈춰! 기다려 봐! 나도 할 거야!”
“뭣?”
꽉, 하고 당서린은 자기 스스로 왼손의 손바닥을 찔렀다. 촉이 날카롭게 벼려진 펜 끝으로 핏방울이 줄줄 흘렀다. 아니, 이게 진짜로 미쳤나?
당혹스러운 눈길로 보고 있자니 당서린은 조금 더 미친 짓거리를 시전했다. 우리 둘 모두 피를 흘리는 와중에 돌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
스르륵.
허공에서 새파란 색깔의 ‘천칭’이 마치 홀로그램처럼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오른손에서 상처가 아물었다. 정말로 순식간에. 대신 나의 왼손에서 새롭게 상처가 생겨나는 것 아니겠는가?
정확히 똑같은 현상이 당서린에게는 정반대로 발생했다. 즉, 왼손의 상처가 오른손으로 이삿짐을 꾸렸다.
직후에 천칭의 좌우에 핏방울들이 실렸다. 그리고 천칭은 허공에서 스륵,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건……?”
“아아, 이것은 등가교환이란 것이다―.”
당서린이 오타쿠 스마일을 지었다.
좀 재수 없었다.
“당신의 상처와 나의 상처. 나의 고통과 당신의 고통을 맞바꾸었단다.”
“대단하군!”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여전히 우리의 손은 상처 위치가 바뀌었을 뿐 여전히 핏물을 콸콸 쏟아내는 수도꼭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나, 여하간 대단한 마법임에는 틀림없었다.
“무슨 원리지?”
“말했잖아. 등가교환이라고. 내가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교환을 마법으로 이루어 낸 거야.”
“세상에. 그럼 혹시 내가 상처를 잔뜩 입은 다음에 십족한테 전이시켜 버리는 것도 가능한가?”
만일 그렇다면 이건 괴이들을 상대하는 방법에 있어서 가히 혁명적인 전환점이 되어 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서린은 특유의 열받는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차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농농- 안타깝지만 그런 활용법은 거의 불가능하단다. 이 마법이 발동하려면 반드시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하거든.”
“아…….”
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아까 나한테 이상한 질문들을 던졌던 거로군.
“…잠깐, 그럼 이걸 도대체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 거지? 고통과 고통을 교환하거나 쾌락과 쾌락을 교환하거나, 아무튼 총량은 여전히 유지되는 것 아닌가. 혹시 에너지를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나?”
“오- 멋진 아이디어지만, 그것도 불가능해. 말했다시피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한데 에너지나 물질한테 동의를 구할 순 없잖아? 뇌가 없는걸. 아, 식물이나 동물한테도 당연히 안 돼.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럼 정말로 쓰잘데기 없는 마법이잖나!”
“마법은 쓸데없지 않아!”
당서린의 발작 버튼이 눌렸다. 그리고 당서린은 버튼이 눌리면 곧바로 공격 마법부터 쏟아내는 또라이였다.
당연하게도 우리 둘의 전투는 내 승리로 끝났다. 만에 하나라도 당서린이 나를 이기려거든 미리미리 30분 전부터 주가영창들을 깔아 놔야만 했다. 이게 바로 정정당당한 전사와 비열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 간의 상성이었다.
그런 사소한 다툼이 있고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물론 나에겐 [완전 기억 능력]이 장착되어 있으므로 ‘얼마나’라고 퉁치는 대신 정확히 398일이 흐른 다음이었노라고 언급할 수도 있다. 그저 문학적인 표현에 불과하지. 내가 서번트 증후군처럼 일일이 시간을 세어 봤자 딱히 아무도 관심이 없을 것 아닌가.
그리하여 398일 16시간 38분 뒤, 나는 오랜만에 삼천세계 본부를 찾아갔다. 그런데 열차에는 당서린이 없었다.
“아, 대마녀 각하 말씀입니까? 오늘이 재판날이어서 잠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내 얼굴을 외우고 있는 길드원이 말해 주었다. 은빛 머리가 예쁘게 찰랑거렸다.
얘 이름은 유지원이라고, 5회차부터 발탁되어 삼천세계의 간부로 활동하는 인재였다. 능력이야 제법 쏠쏠했지만 인성에 좀 하자가 많은 싸이코패스였다.
사족을 하나 더 달아두자면 라틴어 전공자이기도 했다.
“재판날? 그게 뭐냐? 그리고 작전부장이나 되는 애가 왜 카운터를 맡아 보고 있어? 네 따까리들은?”
“다른 길드원들은 거의 다 광장으로 나가서 말입니다. 저야 거기 가서 할 일도 별로 없으니 집이나 지키고 있지요.”
“흐음. 그래서 재판날이 뭔데?”
“얼마 전부터 저희 부산에선 매월 마지막 날을 재판일로 지정했습니다.”
은빛머리 싸이코패스가 안경을 척 들어 올렸다.
“사람을 살해했거나 크게 상처 입힌 범죄자들을 대마녀 각하께서 직접 판결하시는 것이지요. 시민분들의 호응이 아주 좋습니다.”
아, 참고로 ‘대마녀’란 당서린의 공식 칭호였다. 특히 삼천세계에 소속된 길드원들은 무조건 이 호칭을 따라야만 했다.
대충 검후 노인네를 반드시 검후라고 불러야 하는 것과 비슷했다.
오로지 5회차쯤에 부길드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나만이 당서린한테 ‘길드장님’이란 호칭을 특별히 쓸 수 있었다. 왜냐면 그게 내가 당서린한테 등용될 때 내세웠던 이적 조건이었거든.
“아마 지금쯤이면 거의 마지막 재판에 들어가셨을 겁니다. 그래도 1시간 정도는 걸릴 텐데……. 그동안 응접실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기차권 끊어 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너희랑 있어 봤자 괜히 비싼 과자만 축내지. 재판이 어디서 열린다고?”
“요 앞 광장에서 열립니다. 각하.”
나는 안내받은 곳으로 걸어갔다.
길을 찾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당서린이 예의 그 ‘몬스터 해체쇼’를 벌이는 바로 그 광장, 이른바 처형 광장이었기에.
아포칼립스임에도 비교적 관리가 잘된 광장에선 이미 한창 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재판은 성대했다. 얼핏 둘러봐도 육백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여기저기 좌판을 깔고 앉아서 재판을 방청하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조용! 정숙해 주세요!”
삼천세계 길드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마도 ‘확성’ 마법이 적용되었겠지.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침묵’ 마법까지 깃들여졌을 테고.
‘재생 반복 마법이 기본적으로 들어간 걸 고려하면 최소한 3개의 영창이 걸려 있는 건가? 흐음. 당서린치곤 꽤나 신경을 많이 쓴 자리인걸.’
나는 시선을 돌렸다.
광장 한복판엔 피고처럼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재판관을 담당한 당서린은 테이블에 나긋하게 턱을 괴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또 처음이로군.’
회귀 인생에서 당서린이 이렇게 시민들 앞에서 공개적인 재판을 열어 판결을 진행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흥미가 돋아 멀찍이서 재판을 지켜보았다. 광장이 좀 잠잠해지자 길드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정숙해 주세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인은 삼천세계에 입단한 지 6개월째 되는 마녀로서 전투조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벌어졌던 원정에서 괴이들과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죄인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맞서 싸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도망쳐서 전열을 붕괴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사망자가 발생하진 않았으나 부상자 2명이 발생했고, 자칫 잘못하다간 전투조원들 전원이 큰 위험에 빠질 뻔했습니다.”
“우우우!”
“겁쟁이 새끼!”
시민들 몇 명이 돌멩이 따위를 던졌다. 그러나 이미 방어막이 둘러쳐졌는지 돌멩이는 재판석에 도달하지 못하고서 툭툭 튕겨 나갔다.
“정숙, 정수욱! 이제 대마녀 당서린 님께서 판결을 내리시겠습니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조금 전까지 돌팔매질을 하거나 병나발을 부는 등, 마치 축제에 참여한 것처럼 떠들썩했던 수백 명의 시민들이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느냐가 예술가의 자질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침묵시킬 수 있느냐는 통치자의 척도겠지. 한반도의 부산에서 당서린이란 길드장이 어떤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이 죄인은 탈주병이야.”
확성 마법에 당서린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머리카락이 아찔해질 정도의 미성(美聲).
나긋나긋하고, 느릿느릿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의외로 들어보면 말들이 빨리 흘러가서, 복잡한 단어와 문장도 듣는 사람의 귀에 하나하나씩 때려박는 리듬.
말소리가 아니라 차라리 숨소리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은 목소리가 광장의 대기에 흘러들었다.
그런 당서린을 바라보는 삼천세계 길드원들의 눈엔 어딘지 몽롱한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뭐, 오글거리는 면이 없잖아 있었으나 나 또한 왕년에 당서린의 오른팔이었던 몸으로서 저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쟤 목소리가 조금 개사기이긴 하지.
“탈주병은 즉결 처형으로 다룬다는 게 보통의 법도지. 하지만 이번 경우엔 사망자가 아무도 없었고, 전장에서 도망친 탈주병 본인이 하룻밤이 지나자마자 자수해 왔다는 점을 참작해야겠어.”
“…….”
“죄지은 탈주병아. 네가 도망친 탓에 동료들이 목숨을 잃을 뻔했단다. 그 잘못을 뉘우치고 있니?”
“네, 네.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내게 약속해 줄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대마녀님. 당연히…….”
그 순간이었다.
당서린의 머리 위로 파란빛 ‘천칭’이 떠올랐다.
네온사인처럼 천박한 푸른색과는 느낌이 달랐다. 밤하늘의 별빛이 드문거릴 때의 푸르스름한 빛이 천칭의 윤곽을 따라 어른거렸다.
“그럼, 너는 용서받을 수 있어. 나와 삼천세계의 마녀들. 그리고 너로 인해 전열을 틀어막아야만 했던 너의 전투조원들은 이제부터 절대로 [네가 지난주 탈주했던 사건을 너에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야.”
스르륵.
당서린과 길드원들의 가슴팍에서, 그리고 저 멀리 삼천세계의 본부가 위치한 기차역 방향에서, 새까만 색깔의 연기구름들이―― 실처럼 가느다랗고 뱀처럼 꾸물거리는 그림자들이 기어 왔다.
검은색 실무리들은 천칭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촤륵, 하고 균형이 깨지고 천칭이 한쪽으로 격하게 기울어졌다.
“그 대가로.”
당서린이 검지를 휘저었다.
“너는 앞으로 [어떤 전장에서도 먼저 후퇴할 수 없고, 설령 피치 못하게 후퇴해야만 한다 해도 다른 동료들이 모두 퇴각한 다음에 물러날 수 있어].”
“아…….”
“동료들뿐만이 아니야. 너의 전장엔 시민들도 포함돼. 너는 일반인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전까지도 결코 물러설 수 없어. 달리 말해, [너는 언제나 항상 마지막으로 후퇴하는 사람]이 될 거란다.”
“…….”
“동의하니?”
피고는 표정이 창백했다.
그야, 괴이와의 전투는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차라리 윙슈트를 장착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편이 생존 확률적으로는 훨씬 양호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피고의 낯빛엔 창백함뿐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안도의 기색 또한 서려 있었다. 마치 비로소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고 안도한 사람처럼.
“…네. 대마녀님. 동의, 합니다.”
“그래.”
사르륵-
피고의 몸통에서 하얀색으로 어물거리는 실뱀이 빠져나왔다. 그것은 겨울 공기의 입김을 닮았다. 단지 입구멍이 아니라 온몸으로 내쉬는 숨결.
피고는 자기 몸에서 빠져나가는 숨소리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흰색 뱀꼬리는 꼬물거리며 하늘로 올라가서― 천칭의 오른쪽에 똬리를 틀었다.
촤륵, 하고 천칭의 좌우가 평행을 맞추었다.
“이것으로 균형은 이루어졌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응. 이제부터 동료들을 위해, 무엇보다 시민들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우려므나.”
오오, 하고 방청객들 중 일부가 소리를 흘렸다. 그것에 호응하듯 수백의 시민들이 박수 세례를 퍼부었다.
“…….”
그 풍경은 내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등가교환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대마법이, 어느새 부산의 법정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것이 먼 미래의 회차에서도,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부산만큼은 AI 판사를 거부했던 이유.
당서린의 ‘마녀재판’이었다.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