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57)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57화(5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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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 Ⅳ
신노아
5
재판이 끝나고 우리는 함께 순대정식을 먹으러 나갔다.
왠지 다시 길드 건물로 돌아가긴 싫은 기분이었을뿐더러, 나와 당서린의 관계는 더 이상 ‘길드장-부길드장’이 아니라 ‘맛집 친구’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모듬순대가 나오기도 전에 도저히 질문을 참을 수 없었다.
“당서린. 아까 그건 뭐였냐?”
“응? 뭐?”
당서린이 얼핏 띨빵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종지그릇에다 막장을 덜어서 넘겨주었다.
“여기. 재판 말이다, 재판. 대체 언제부터 등가교환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판결했던 거야? 지난번에 왔을 때만 해도 그런 거 없었더만.”
“그야 댁이 부산에 하도 얼굴을 안 비치니까 몰랐던 거겠지. 우린 벌써 반년 가까이 이러고 있는걸? 자, 여기.”
당서린이 종지그릇에 소금과 고춧가루, 후추를 황금비율로 섞은 다음 나한테 건넸다.
“시민들 되게 좋아해. 이거 요새 괴이들 해체하는 쇼랑 더불어서 부산 3대 명물로 손꼽히고 있다?”
“아니, 그게 뭔……. 조금 자세히 말해 봐라. 사장님, 여기 동동주 먼저 주십쇼.”
“예이-”
나는 동동주 주전자를 받아다가 대뜸 얼음 동동 띄운 냉수를 반 컵 섞었다. 이게 당서린이 제일 좋아하는 비율이거든. 자그마치 수백 년 동안 뒷바라지를 해 온 친구의 위엄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뭐 길게 설명할 게 있겠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법전을 고스란히 적용한 것에 불과하지.”
“흐음.”
“나라가 멀쩡할 때야 눈에도 감옥, 이에도 감옥을 때릴 수 있었지만. 이제 감옥은 없잖아? 그렇다고 무작정 손가락 자르거나 모가지를 조여 버리면 괜히 노동력이 아깝고……. 그러니까 ‘모두가 납득할 만한 복수’를, 내가 대행해 주는 것뿐이야.”
“…원수를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니, 내가 대신하여 갚아주리라.”
“응?”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 참. 잠깐만 눈을 떼어도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는구나, 너란 인간은.”
“뭐야? 지금 시비 터는 거야?”
“털린 건 내 정신이다. 정말로 어이가 없군.”
모듬순대에 순대국, 동동주, 잘 익은 김치가 우리 두 사람의 젓가락질과 입질 너머로 사라졌다. 입맛이 싹 돌았다. 요즘 시대엔 부산에서나 맛볼 수 있는 정찬이었다.
“난 오히려 뭐든지 감옥에 가두는 걸로 퉁치려던 옛날 사회가 이상하다고 봐.”
당서린이 젓가락을 치켜들었다.
“생각해 봐. 도둑질이랑 살인이 어떻게 똑같은 형벌을 받을 수 있어? 다른 사람한테 내 물건이 털렸을 때의 기분이랑 칼빵을 선물받았을 때의 기분은 아주 다르다구. 질적인 차이, 요컨대 퀄리티의 차이가 있어.”
“흠.”
“도둑질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 달라. 오늘 일용할 양식을 털렸을 때의 기분, 다른 생존자들한테 끝까지 비밀로 숨겨 오던 라디오를 털렸을 때의 기분, 콩팥을 털렸을 때의 기분…….”
“맨 마지막도 도둑질에 해당하나?”
“당연하지. 아무튼 형벌이란 건 그때그때 심각성과 상황에 따라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성에 따라서, 저마다 전부 다르게 판단해야만 돼. 가령 예수님이라면 한쪽 뺨을 맞았을 때 다른 쪽 뺨을 내어 주겠지만, 장의사 당신은 상대방의 뺨은 물론이거니와 어금니 하나 정도는 가져와야 좀 ‘공평한 거래’라고 생각할 거잖아. 안 그래?”
“어떤 의미인진 알겠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역사상 최고의 대마녀, 공전절후하고도 전무후무하신 당서린 님께선 누구에게나 공평한 거래를 마련할 수 있으시다 이 말씀이지.”
그때 식당에서 꼬맹이가 수줍게 다가와서 “대마녀님!” 하고 고깔모자를 내밀었다. 당서린이 환하게 웃어 주고 모자깃에 사인을 새겨 주었다.
팬 서비스가 끝나자마자 당서린의 표정은 다시 뜨거운 물 먹은 수세미처럼 푹 퍼졌다. 우리 부산의 아이돌님께서 어딜 가시나 항상 벌어지는 일이었다.
“아휴, 귀여워.”
“하지만 그 공평함이란 것도 ‘네가 생각하기에 공평한 것’이잖나. 사람은 언제나 잘못 판단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동의가 없으면 ‘등가교환’은 발동하지 않는걸. 만일 내가 제시한 거래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처음부터 동의를 안 하면 그만이야.”
“어느 누가 감히 부산의 지배자가 내린 판결을 거부한다고?”
“야, 이런 세상에 재판씩이나 열어 주는 걸 감지덕지로 여겨야지. 내가 판결 내리지 않으면 어차피 마녀사냥으로 다 죽어. 어떤 죄를 저질렀든 간에 기승전사망으로 끝난다고. 죽는 것보단 낫잖아?”
“음.”
“그렇게 불안하시면 다음 달에도 재판 방청하러 와 보시든가.”
당서린이 궁시렁거렸다.
“하여간, 요새 뭐 하고 다니길래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드니?”
“…….”
…사실 이 무렵의 나는 좀 방황하고 있었다.
기억력이 비상한 독자라면 이미 파악했을지 모르겠지만, 26회차는 바로 쇼 노인이 본격적으로 ‘휴가’를 선언해 버린 바로 그 회차였다.
당연히 일평생 함께 세계멸망이라는 이름의 이 좆 같은 게임을 헤쳐 나갈 거라고 믿었던 팀원이 공식적으로 은퇴해 버리자, 내 멘탈은 마치 리오넬 메시가 이적한 직후의 바르셀로나였다.
이때 진짜 회귀자로서 오랜만에 꼴사나운 모습을 여러 번 보였는데……. 흑역사는 스킵하도록 하고.
“알겠다. 한 달 뒤에 또 오지.”
“그래. 올 때 멜로나.”
정확히 한 달이 지나서 나는 멜론을 갈아다가 직접 만든 수제 아이스크림을 들고 부산의 ‘처형 광장’에 찾아왔다.
“옛다. 여기 있다.”
“아, 땡큐……. 헉. 뭐야? 진짜 완전 멜로나처럼 생겼어!”
당서린이 내 다재다능함에 감탄했다.
참고로 나는 문명이 멀쩡하던 시절의 컵라면, 봉지라면, 과자들을 거의 모조리 92% 이상 유사한 맛으로 재현해 낼 줄 알았다. 과자 회사들 본사에 직접 쳐들어가서 입수한 레시피들이니 믿어도 좋다.
뭐? 왜? 그럼 무한 회귀자 넘쳐나는 시간 동안 뭘 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게 그나마 제일 생산적인 취미 활동이야.
“저기 저쪽에 자리 맡아 놨어.”
지난번과 달리 이번엔 목 좋은 방청석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쭉 재판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내가 멜로나를 빨면서――저편의 재판석에 앉은 당서린 역시 무심한 듯 시크하게 멜로나를 씹어먹고 있었다――지켜본 결과, 놀랍게도……. 부산의 마녀재판은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다른 사람의 다리를 잘랐으니, 죄인은 일평생 피해자의 수발을 들도록. [본래 두 다리가 수행해야만 했던 모든 작업들에 관해서 피해자는 죄인에게 지시할 수 있단다]. 죄인은 결코 피해자의 허락 없이는 자의로 떨어질 수 없어. 동의하니?”
“부산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신문에서 펜대를 잘못 놀리어 평범한 시민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웠고, 시민은 자살했지. 비록 유족이 없어 죄인에게 복수를 천명한 사람은 없다만, 잘못을 범한 사람 한 명으로 인해 신문사가 겪어야 했던 명예의 실추는 회복시켜 줘야겠지. 이제부터 죄인이 저지른 모든 일들은 반드시 신문의 한 칸에 기록되어서 발행되어야 할 것이야. [과거에 당신이 저질렀던 잘못들, 앞으로 저지르게 될 과오들을, 모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기사로 싣도록]. 그리하여 당신이 어떤 잘못들로 이루어진 인간인지 부산의 시민들 모두가 알게 될 거란다. 동의하니?”
“사람이 일을 했는데도 이전에 약속했던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어. 노동이란 시간의 투자야. [피해자가 그동안 노동했던 시간과 정확히 똑같은 시간만큼, 죄인은 피해자의 명령을 듣도록 하렴]. 물론 자살하라거나, 심히 비합리적인 명령은 불가능해. 죄인은 일찍이 피해자에게 제공했던 것과 똑같은 식사를 먹고, 똑같은 잠자리에서 자고,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똑같은 시간에 쉴 거야. 동의하니?”
만일 문명이 건재한 현대였다면 상상도 못 할 판결들.
아니, 애당초 당서린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실현되지 못했을 거래들.
당서린이 내리는 판결들은 잔인하고 가혹했으며―― 그리고 동시에, 기이하게도, 드넓은 광장에 모여든 수백의 사람들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설득력을 지녔다.
판결이 이루어질 때마다 허공의 푸른색 천칭이 반짝거렸다.
내가 가장 크게 인상을 받은 재판은, 상대방을 죽인 피고에 대한 것. 즉, 살인죄에 대응하는 판결이었다.
“…….”
당서린은 이미 다 빨아 버린 아이스크림의 막대기를 들고 질겅질겅 씹었다.
한편에는 살인범으로 기소된 피고가, 다른 한편엔 유족들이 서 있었다. 당서린의 검푸른 눈동자가 그들을 한차례 훑었다.
“죄인, 살인을 뉘우치니?”
“…예.”
“진심으로 유족들한테 미안해?”
“네……. 죄송합니다…….”
“그럼, [유족들이 당신한테 무슨 짓을 가하든 당신은 절대로 유족들한테 반항할 수 없어]. 누구에게 하소연하거나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할 수도 없고. 그저, 받아들이기만 해야 된단다.”
“…….”
“어때? 동의하니?”
“…….”
침묵이 제법 길게 흘렀다. 그 긴 시간에 비하여 피고가 턱을 끄덕거린 순간은 무척, 조금 지나치다 싶을 만큼 짧았다.
“예. 동의합니다. 그렇게… 그렇게 해 주십시오. 대마녀님.”
천칭이 빛났다.
“이 개새끼야!”
그것과 동시에, 유족 중 한 명이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곧바로 피고한테 달려들었다. 퍽! 주먹이 뼈를 으스러트리는 소리가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우리 아이를! 결혼까지 약속했다면서, 어떻게! 개자식! 씹어죽일, 이, 개 같은 새끼!”
보통 상황이었다면 누군가 말리려 들었을 테고, 문명이 망하지 않은 시절이었다면 하다못해 법원 경비들이 제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형 광장에선 아무도, 어느 누구도 유족을 막아세우지 않았다. 뒤이어서 뛰어든 유족들 또한 피고를 쓰러트린 채 발길질을 쏟아부었다.
고층 건물들은 거의 다 무너져서 시야가 탁 트인 부산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바다에 한 번 비추었다가 도시로 되튕겨지는 붉은색 노을이었다.
석양에 물든 처형 광장에서 피고의 핏방울이 툭, 툭, 주변으로 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숨소리가 끊겼다.
“…….”
그리고 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당서린의 마음을 단지 외부로 옮겨 놓은 풍경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강렬하게 사로잡혔다.
모든 방청객들이 유족의 처벌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오직 나만은 그때 고개를 돌려서 당서린을 쳐다보았다.
당서린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노을은 붉게 물들었다.
6
후일담.
나는 나 자신에게 세상만사를 판단할 권리 따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서린의 ‘마녀재판’ 또한 말리지 않았다. 그녀에겐 그녀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고 공평함이 있었다.
또한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저 합리성과 공평함은 아포칼립스에서 최선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도시들? 길드장의 개인적인 이득에 따라 사적 제재나 이루어지는 판국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그나마 AI 판사가 도입되는 것도 한창 나중의 일 아니었던가.
26회차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쭉, 내가 ‘등가교환’ 마법의 완성본을 알려 주는 회차들마다 당서린은 어김없이 마녀재판을 열었다.
“그래서… 어땠어?”
“어땠냐니.”
“알잖아. 재판.”
우리는 그날 삼천세계의 열차로 돌아와서 술을 마셨다.
보통 바깥의 가게에서 순례하는 게 우리가 우정을 지켜 나가는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당서린이 “오늘은 열차에서 술 마실래?”라고 말한다면, 그건 오늘 밤은 만취하고 싶다는 뜻.
부산의 지배자이자 한반도 길드연합의 맹주이며 주가영창의 시조인 대마녀가 길거리에서 만취하여 휘청거리는 모습을 내보일 수는 없으니까. 하물며, 길드원들 앞에서조차 그럴 수는 없었다.
십족을 물리친 검. 서울 한강 이남을 수복한 각성자. SG넷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나 장의사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당서린이 같이 돌아다녔을 때 어떠한 권위도 실추되지 않는 것이었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떤 부분이 괜찮은데?”
“지금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괜찮냐고 물어보는 지점에서, 전부 괜찮다고 생각한다.”
“픕.”
당서린이 웃었다.
“뭐야, 그게. 바보 같아.”
하지만 당서린의 표정은 확연히 편안해졌다.
그 후로 한동안 친구의 술주정을 받아주던 도중, 당서린이 문득 등가교환 마법을 발동했다.
“장의사. 한 번 당신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천칭에 올려 봐 줘.”
“아니, 어린아이도 아니고……. 무슨 애한테 엄마가 더 좋냐 아빠가 더 좋냐 물어보는 부모냐?”
“아, 씨. 됐고. 어서 올려 보라고요, 아저씨. 동의해?”
나는 한숨을 쉬며 “그래”라고 말했다.
그러자 내 가슴팍에서 새까맣고 환한, 그림자와 빛이 절반씩 뒤섞인 뱀꼬리가 흘러나왔다.
당서린이 손가락을 휘저었다. 뒤따라서 당서린의 심장 어림께에서도 새하얀 빛깔의 실뱀이 기어올라, 천칭의 반대편에 똬리를 틀었다.
끼이익-
물리적으로는 존재할 리 없는 소음이 울린 것과 동시에 양쪽의 천칭이 서서히 균형을 찾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한 평형을 이루었다.
당서린이 입꼬리를 고양이처럼 말았다.
“흐응.”
“그건 또 뭐냐?”
한밤. 열차의 안에선 당서린이 만들어낸 천칭이 별빛처럼 연하게 빛났고, 창문 너머에선 은하수가 내리고 있었다.
유성우였다.
밤하늘의 빗물을 배경으로 삼아 당서린이 환하게 웃었다.
“비밀.”
그건 참 마녀다운 대답이었다.
– 통치자. 結.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