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71)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71화(7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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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 Ⅰ
신노아
1
그나저나 지금까지 ‘도서관학회’라는 집단이 벌써 여러 차례 언급되었는데 정작 여러분들한테는 제대로 설명할 기회가 없었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느냐면 562회차 때 오독서가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저씨, 아저씨. 도서관학회엔 어떻게 가입하는 거야?”
“음? 도서관학회는 왜?”
“왜냐니… 그야, 멋있잖아.”
오독서는 가끔 이렇게 뜬금없이 뭔가에 꽂힐 때가 있었다.
래퍼들이나 쓸 법한 캡모자에 점퍼 패션, 당장이라도 촛농처럼 흘러내릴 것만 같은 청바지(구멍 3개 포함), 입으로 질겅질겅 풍선껌(가짜)을 씹고 있는 비주얼만 봐도 일목요연하겠지만 오독서는 중2병. 그것도 심각한 말기 환자였다.
자칭 문학소녀임을 자랑하는 중2병들이 공통적으로 앓는 증상을 오독서 또한 보유했다. 즉, ‘도서관’, ‘학회’, ‘사서’라는 명사들에 기이할 정도로 황홀경을 느껴 버리는 정신적이고도 변태적인 질병에 걸린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신의학회 논문에 따르면 해당 질병은 안타깝게도 불치병이며, 유일한 치료법은 환자가 실제로 대학교 문헌학과에 진학하는 것뿐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아저씨는 수백 회차를 구른 회귀자니까 당연히 도서관학회의 핵심 간부들이랑도 아는 사이지? 그렇지?”
“음…….”
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알고 있긴 하다마는…….”
“그럼 소개 좀 시켜 주라! 아니, 그 전에 도서관학회가 어떤 곳인지 알려 줘. SG넷에 괴이사전을 올리긴 하는데 그거 제외하면 전부 미궁에 감싸인 비밀조직이잖아.”
“…정말로 알려 주길 원하나?”
“응? 뭐야, 갑자기. 쩨쩨하게 굴지 말고 알려 줄 수 있는 부분은 전부 알려 줘 봐.”
“아마도 후회할 텐데……. 뭐, 알았다.”
그렇게 원하신다면 알려 드려야지.
-치҈҉직҉, 오늘 여러분께 들려드릴 음악은 모차르트…….
우리가 앉은 테이블 옆에선 원목 빈티지 라디오가 음악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카페오레를 홀짝여서 새빨간 혓바닥에다 엔진 연료를 주입했다.
그리고 눈앞의 자그마한 예언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2
도서관학회.
이명은 대도서관(The Great Library).
언제 설립되었는진 몰라도 상당히 오래된 조직, 그것도 비밀결사다.
당연히 일반인들에겐 철저히 그 존재가 숨겨졌다. 설령 어쩌다 실수로 조직명이 노출되더라도 ‘응? 현실에 진짜로 있을 법한 단체잖아?’ 하고 무심코 무시당하기 쉽단 점에서,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처럼 입으로만 비밀 비밀 거리지 실제로는 노출증에 걸린 허접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 역시 비밀조직.”
오독서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사시사철 시큰둥한 눈초리로 만사에 시니컬하게 구는 것이 뉴런 세포의 디폴트 값으로 고정된 오독서에게도 낭만이란 게 존재했나 보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건 큰일이구먼――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설명했다.
학회 본부의 정확한 위치는 불명. 다만 북미에 있다는 소문 정도까진 들려온다.
학회의 지부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한국지부의 아지트는 철원 어딘가에 숨어 있다.
“철원? 왜 하필 철원이래?”
“정확히는 철원 근남면에 있는데 그 근처에 주민이 적거든. 비밀결사답게 되도록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려는 거지.”
“오…….”
‘도서관학회’는 이미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어쩌면 수백, 수천 년 전부터 괴이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괴이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공략법과 매뉴얼을 작성했으며 비밀리에 ‘사서’들을 육성해 왔다.
사서들은 모두 대(對) 괴이전의 스페셜리스트들. 인의와 도덕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괴이를 섬멸하거나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전문가들이다.
사서들은 철저히 계급에 따라 상명하복을 지킨다.
계급 체계는 [기사] [남작] [자작] [백작] [후작] [공작] 순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공작은 단 한 명. 모든 사서들의 정점에 위치한 도서관 공작, 이른바 ‘흑서전(黑書殿)’의 정체에 관해선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인간인지 아닌지조차 불확실하다던가.
“잠깐. 그럼 사서들을 직위랑 같이 부를 땐 어떻게 불러? [남작급 사서] 이렇게?”
“뭐, 대충 그렇지. 백작급부터는 이명도 따로 만들어져서, 가령 위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백작이면 ‘위서루(僞書樓)’ 백작이라던가. 그런 식으로 부른다.”
“멋지잖아……?”
“참고로 계급별로 이명의 맨 뒤에 붙는 단어도 달라져. 남작이면 관(關), 자작이면 가(家), 백작이면 루(樓), 후작이면 각(閣). 가령 금서관리부를 총괄하는 후작은 ‘천해각’이라는 인물이지.”
“완전 멋진데……?”
오독서의 눈빛이 점점 더 몽롱해졌다.
일설에 따르자면… 대도서관 본부의 가장 깊은 심연에는 ‘흑색공책(黑色空冊)’이라 불리는 일종의 예언서가 잠들어 있다고 한다.
흑색공책에는 앞으로 인류에게 불어닥칠 재앙들, 세계를 멸망시킬 괴이들에 관한 예언이 매우 기이한 언어와 문자로 적혀 있다.
언젠가 찾아올 종말의 그날을 막기 위해,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역사를 이어나가기 위해, 도서관학회의 사서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암약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구라지.”
깜빡.
오독서는 내가 타 준 에스프레소를 한 손으로 쥔 채 눈을 깜빡거렸다.
“어?”
음. 제법 맛있는 반응이로군.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야. 도서관학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단다. 뭐, 비슷한 이름을 가진 단체야 뒤져 보면 수두룩하게 나오겠다만 적어도 괴이들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수천 년 전부터 인류의 그림자에서 활약해 온 집단 따윈 없어.”
“어? 어어? 왜? 어째서……?”
“왜냐면.”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 장의사가 바로 대도서관의 주인, 도서관학회의 설립자, 유일무이한 공작, 흑서전 공작이기 때문이다.”
“…….”
왜. 뭘 놀래.
나는 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리는 중2병 풍선껌 소녀를 향해 여관의 베테랑 도적과 같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가 천 년이 넘도록 구르면서 만들어 댄 가짜 조직들이 어디 한두 군데일 것 같은가.
흑막 놀이는 언제나 새롭고 짜릿한 법. 나는 무슨 사건이 터져도 ‘아아, 그건 내가 계획했다’ ‘그것도 나다’ ‘그것 역시 나다’라는 대답을 돌려줄 준비가 되어 있는 SSS급 회귀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회귀자라고 해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낼 순 없었다. 그건 이미 기원전 500년에 파르메니데스란 악마가 증명해 놓은 사실이었다.
나 또한 도서관학회를 설립하는 데 있어 영감을 받은… 아니, 차라리 ‘강제로 자극받았다’라고 표현해도 좋을 소스가 있었다.
오리지널은 따로 있다는 소리지.
그 자극점은 46회차, 북아메리카 대륙의 천조국 USA에서부터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어느 라디오 방송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문명이 멸망한 이래, 한창 동영상 시대를 구가하던 인류의 문화 수준은 라디오 시대로 회귀했다.
그리고 나는 회귀 초반부터 라디오를 다루는 일에 아주 익숙했다. 당서린의 아이돌 활동을 돕기 위해 직접 방송국을 설치해 본 경험마저 있었으니까.
잠깐 자랑 좀 해 보자면… ‘님프칼립스’나 ‘래번클로 부산지부’ 등, 한반도는 물론이거니와 현해탄 너머 일본열도까지 수많은 애청자들을 보유한 저 전설적인 라디오 채널들은 모두 나 장의사의 도움 없이는 첫 삽을 뜨기도 어려웠다.
이건 단순히 자기 자랑이 아니라 객관적 팩트였다. 당장 채널 진행자들만 봐도 심심찮게 이런 발언을 흘렸다.
-아아, 은인님 말씀인가요? 이야. 저희 채널이 생기고 유지되는 데 은인님의 도움이 진짜진짜로 컸죠! 저 5년 전까지만 해도 채널 운영은 하는 방법도 몰랐거든요!
-은공(恩公) 말인가? 음. 이미 방송에서 몇 차례 언급했네만 정말 고마우신 분일세. 이따금 채널을 유지하려면 희귀한 자재나 도구 따위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은공께 부탁드리면 귀신처럼 구해 주시거든.
여기서 말하는 ‘은인’ ‘은공’이 전부 나를 가리켰다. 아포칼립스 이후 동아시아의 문화 수준을 유지하는 데 있어 내가 적잖게 공헌하셨다 이 말씀.
1년에 하루, 크리스마스 때 유명 라디오 채널들을 규합하여 24시간 연속 릴레이 방송을 이어 나가는 행사―― 이른바 ‘라디오 축제’도 내가 기획한 것이었다.
항상 나에게 감사하십시오, 극동아시아의 문화 시민 여러분.
그런 연유로 내 아지트의 벽면 한쪽엔 항상 라디오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라인업도 화려했다. 대한민국 최초 진공관 라디오인 금성 A-501 라디오부터 시작해서 쏘니의 CF-580, CF-3800, 독일 Grundig의 파티-보이 210 라디오, 중국 TECSUN의 PL-680 등등…….
그중엔 Zenith 회사에서 만든 K731라는 라디오가 있었다.
이게 무슨 제품인지 알 필요는 전혀 없다. 그저 제조일이 1950년대인 골동품이며, 단풍나무 원목으로 만들어진 빈티지 제품이란 것만 알면 된다.
왜, 옛날 어르신들 집에 가면 나무 옷장 있잖아? 그거처럼 이 원목 라디오도 반들반들한 질감이 일품이다.
-지҉직҉҉, 여기는… CP 재단. 현재 상황은… 치҈҉҉지҉직҉.
바로 그 골동품이 어느 겨울날 아침 은근슬쩍, 영어로 된 귓속말을 흘렸다.
“음?”
당시의 나는 여느 아침과 똑같이 카페오레를 타서 한 잔의 낭만을 섭취하고 있었다. 아직 새벽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서 멍한 눈초리로 라디오를 쳐다봤다.
‘내가 어젯밤에……. 라디오를 틀어 놓고 잤던가?’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내가 호러 영화의 주인공으로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난 완전기억능력의 소유자이며 ‘에이, 기분 탓이겠지?’ ‘음- 기억이 애매모호한데’ 하고 대충 넘어감으로써 관람객들에게 발암을 선사하는 일이 절대로 없거든.
‘…안 틀어놨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곧바로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특유의 잡음이 확 올라왔다.
-지҉҉지҈҈҉지҉҉҉직҉҉, 제7구역이 함락되었다. 반복한다. 제7구역이 함락되었다. 프로토콜에 따라 핵탄두를 사용했으나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핵탄두?
어떻게든 잡음을 가라앉히고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마도 상대방은 노인인 듯했다. 전형적인 캘리포니아식 영어를 쓰는 미국인.
-오, 악룡이……. 악룡이 풀려났어. 이제 전부 끝이야. 치҉҉҉직҉. 보이는가? 버섯구름 너머로 악룡의 거대한, 지҈҉직҉҉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망했어. 재단은 멸망이야. 세계도 멸망이고.
나는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러나 주파수가 움직일 때마다 지지직거리는 소음이 울릴 뿐, 노인의 목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자작거렸다.
결론은 명백했다.
“…이거, 괴이가 되어 버렸군.”
나는 혀를 찼다.
오염(汚染).
세상이 망가지기 시작한 다음부터 각종 전자기기들이 괴이에 의해 잠식당하는 건 늘상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오염’ 혹은 ‘감염’이라고 명명했다.
특히 CCTV나 전화기, 핸드폰(구형일수록 위험), 컴퓨터, GPS 내비게이션, 레이더, 텔레비전 같은 기기들이 위험했다. 이들은 상당히 높은 확률로 맛이 가 버렸다.
사실상 인류 문명에 가장 치명적인 막타를 날린 건 십족 같은 물리적인 위협이라기보단 이런 ‘오염’ 현상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초창기 때 핵폭탄으로 괴이들에 대응하려 했던 각국 수뇌부들은 ‘어어? 왜 미사일이 목적지가 아니라 이쪽으로 날아오냐?’라는 의문을 품은 채 전능하신 버섯구름과 합체했다.
라디오도 오염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순 없는 법.
다만 내가 수집한 라디오들은 제령 작업을 빡세게 돌려서 비교적 안전할 거라고 안심했는데…….
-여기는 제7구역. 본인은 제7구역 총책임자인 마틴 러셀 본부장이다. 제7구역의 최종 격벽 프로토콜이 실패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24벙커로 이동, 현재 외부로 통신을 시도하고 있다.
“흠.”
-벙커에선 구역 내부와 외부를 CCTV로 확인할 수 있으나 다수가 고장나 있다. 남은 카메라들도 오래 버티진 못할 것으로 판단. 만일 구조대가 편성된다면 내부에서 조응할 수 있도록 신속히 파견해 주길 바란다. 현재 CCTV에서 확인 가능한 구역 내의 생존자는 나를 포함해서 3명, 4명, 5명……. 6명이다. 24벙커에는 나 혼자뿐이며 남은 5명도 각각 떨어져 있다.
-레이더로 살펴본 결과, 격리에서 탈출한 개체들은 전 세계 각지로 흩어지는 대신 북미 지역으로 집중해서 이동하고 있다. 뭐지? 대체 뭐가 원인이지?
그나저나 라디오 내용이 제법 이상했다.
보통 괴이에게 오염된 라디오가 방송하는 내용이래 봤자 ‘히이이이이’ 하고 귀신 소리를 흉내 내거나 뭔가 말도 안 되는 정신공격을 감행할 따름이었다.
-재단 관계자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제7구역은 하와이 몰로카이섬에 위치한다.
-그럴 리는 없겠으나 만에 하나라도 민간인이 이 통신을 듣게 된다면 전부 무시하도록. 그리고 최대한 멀리, 아무튼 북미로부터 멀리 도망치시오. 아니면 그냥 가족들과 최후의 만찬을 즐기든가.
하지만 해당 괴이… 본인 말에 따르자면 어느 ‘재단’에 소속되었다는 오염체는 꽤 본격적으로 사람을 흉내 내고 있었다.
정말로 라디오 너머에서 인간이 방송하고 있는 것처럼.
정말로 어딘가에 유폐되어서 필사적으로, 절박하게 전파를 보내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기에 46회차의 나는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개체들이 재단의 구역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치҉҈지҉҉직҉. 오, 신이시여! 부디 인류에게 자비가 베풀어지기를…….
만일 이게 정말이라면.
노인이 정말로 24구역인지 뭔지에 있고, ‘재단’이란 단체도 존재하며, 격리에서 풀려 났다는 개체들도 실존한다면.
지금 북미 지역에선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