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72)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72화(7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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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 Ⅱ
신노아
4
‘하와이에 본부가 있다고 했지? 그럼 가볍게 하와이나 놀러 가 보실까.’
라는 발상을 떠올리기엔 46회차 시절의 나는 너무 허접이었다.
다른 평범한 웹소설에선 회귀자가 46회차까지 굴렀다고 하면 ‘오, 완전 고인물이겠네? 그런데 그 회차 되도록 세계를 못 구한 거 보니까 좀 무능한 듯?’이라는 반응이 나오겠지만, 내 썰에서 46회차는 파릇파릇한 것이 비타민을 풀 충전해 줄 것 같은 뉴비에 불과했거든.
어쨌든 46회차의 나는 외국으로 여행을 가 봤다고 말하는 대한민국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기껏해야 일본이나 중국 등을 들러 본 게 전부였다.
인도? 미국? 유럽? 그냥 들려오는 소문으로 정보를 파악했을 뿐, 직접 내 신발에다 그쪽 동네의 흙을 맥여 본 경험은 전무했다.
아, 쇼 노인이 언제 한번 자기 고향 구경시켜 주겠다며 이빨을 털긴 했는데 남자들 사이에 맺어진 약속의 유통기한이 아무리 길어 봤자 1000년을 넘길 것 같진 않더라고. 개 같은 노인네.
-여기는 제7구역, 치҉지҈҉҉҉직҉҉. 본인은 마틴 러셀 본부장이다. 지҉҉҉직҉, 벙커에 저장된 식료품이 천천히 고갈되어 가고 있다.
-재단에서 세계 멸망을 대비해서 마련해 놓은 일련의 프로젝트들은 가동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이미 가동되었고 이곳은 그저 남겨진 세계의 잔류물에 불과한가.
-어느 쪽이든… 치҉직҉҉, 내 음성 파일이 언젠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채 계속해서 기록을 해 나가겠다. 마틴 러셀 본부장. 생존 677일차.
방송은 계속되었다.
나는 해당 현상을 ‘정체불명의 재단 라디오 방송’, 짧게 줄여서 ‘재단 방송’이란 이름의 괴이로 명명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들여서 ‘재단 방송’의 특징들을 꽤 상세하게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1. 라디오 주변에 나 말고 다른 청취자가 있을 경우엔 절대로 방송이 진행되지 않는다.
제법 신기한 일이라서 심아련이랑 서규를 불러다가 앉혀 놨더니 라디오는 묵묵부답.
결국 두 사람은 ‘으휴, 길드장님/형님이 또 괴이 갖고 장난을 치시는구나…….’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신뢰가 없었나? 대체 왜? 어째서?
시험 삼아서 성녀님한테 천리안을 써서 나랑 같이 들어보자고 권유했는데 그것마저 ‘청취자’로 계산되었는지 라디오는 여전히 먹통이었다.
-저기……. 장의사 씨, 아무리 심심하셔도 괴이를 소재로 삼아 장난을 걸어오시는 건 솔직히 조금 곤란합니다. 자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난 억울했다.
2. 회차가 달라져도 ‘재단 방송’은 이루어졌으며, ‘노인’은 언제나 하와이 몰로카이섬의 제7구역 벙커에서 방송했다.
단, 이 괴이는 오직 내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골동품인 Zenith K731 라디오에서만 출현했다. 다른 라디오들은 절대로 ‘재단 방송’을 잡아내지 못했다.
왜 이런지는 나도 몰?루.
괴이들 생태가 워낙에 수수께끼여야지.
-여기는 마틴 러셀. 어, 음. 탈출 개체들은 여전히 북미 지역에 절대 다수 집중된 것으로 관측 중……. 빌어먹을. 벌써 1203일차야. 인류가 살아남긴 한 건가? 정말로 내가 마지막 생존자인가?
방송 시간은 뒤죽박죽이지만 대체로 오전 1시~오후 7시. 만일 방송 진행자의 주장대로 그가 하와이에 위치해 있다면 하와이 기준으로는 오전 6시~오후 12시.
딱 사람이 깨어 있을 만한 시간대였다.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데…….
3. 회차가 달라질 때마다 미묘하게 방송 내용이 바뀐다.
46회차엔 분명히 제7구역에서 ‘악룡’이라 불리는 개체가 등장해서 재단을 멸망시켰다고 말했는데 가령 49회차에는.
-신이시여! 달빛이! 아아, 파르메니데스의 여신이, 마침내 미쳐 버리고 말았다! 긴급하게 전파한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달빛에 접촉하지 마라! 촛농처럼 녹아 버리기 싫다면 말이야!
-전멸? 정말로 재단의 모든 조직들이 전멸해 버렸단 말인가? 백업은? 오, 세상에. 세상에, 어째서. 왜 하필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가…….
라고 울부짖으며 소위 ‘달빛’이 인류를 절멸시켰다는 식으로 방송했다.
회차가 이동하면 그때마다 세계가 멸망하는 방법 역시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카페오레를 마시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북미는 그야말로 인도 아대륙급의 인외마경이겠군.”
아마도 거짓말이겠거니, 라고 당시의 나는 추측했지만 말이다.
딱히 ‘재단 방송’을 토벌할 생각은 없었다. 내게 라디오를 속삭여 주는 것 이외에 딱히 인류에 해를 끼치는 일이 없지 않은가?
오히려 심심풀이로 적당히 라디오를 듣고 싶을 때 ‘재단 방송’은 훌륭한 BGM이 되어 주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대엔 유흥거리로 삼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그런데 매번 방송 내용이 달라지는 라디오 채널이 있다? 개꿀이지.
한 발짝 더 나아가, 매 회차마다 노인이 은근슬쩍 발설하는 ‘재단’의 설정들은 내게 많은 영감을 안겨 줬다. 여러모로 배웠다고나 할까.
어떤 부분을 배웠느냐면…….
5
“바로 정보의 규격화지.”
다시 562회차로 돌아와서.
눈앞의 오독서가 얼빵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테이블 옆에 놓인 라디오에선 한가롭게 모차르트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보……. 규격, 뭐?”
“일명 ‘재단’에서는 개체들에게 굉장히 상세하게 등급과 규칙을 정해 뒀거든. 흐음. 예를 들어 그렘린이 있다고 해 보자.”
그렘린은 모든 전자기기에 들러붙어서 기이하게 망가트리는 괴이다.
한때 경상남도에서는 그렘린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만 감염되고, 핸드폰은 멀쩡하다는 속설이 돌았다.
반면 경상북도에선 오히려 핸드폰이 가장 위험하다는 경고가 돌아다녔다.
심지어 경기도에선 CCTV를 제외한 전자기기는 전부 안전하다는 믿음이 공공연하게 퍼졌다. 믿어지는가?
모두 인류 사회의 정보 전달력이 궤멸해 버린 폐해였다.
“이러면 한반도 내에서조차 정보 공유가 쉽지 않아. 문명이 멀쩡하던 시절에야 뭐, 동영상으로든 뭐로든 시각 자료 등등을 공유할 수 있었겠다만…….”
작금에 매스 미디어라곤 라디오 빼고 전부 전멸해 버린 상황. 그나마 SG넷이 정보 공유의 장소가 되어 주곤 있는데 이 또한 완벽하진 못했다.
“괴이들 성질이 중구난방인 거야 양반이지. 이 괴이가 그래서 대체 얼마나 강력한지는 무슨 수로 표현할 거냐?”
“어…….”
“S급? A급? S급 괴이와 A급 괴이의 차이는 얼마나 되고 어느 정도로 위험한데? 전투력 1000? 2000? 뭐, 가령 1200의 전투력을 가졌다고 해봐. 그 수치가 무엇을 뜻하는지 직관적으로 와닿나?”
“…아니.”
그렇다.
따라서 나는 라디오 방송 속의 ‘재단’에 영감을 받아 ‘도서관학회’라는 가상의 조직을 출범시켰다.
설정은 단순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괴이들을 연구해 왔으며 그러기에 ‘전문적인 분류 방법’, 소위 말하여 ‘표준’을 제정한 비밀 집단.
하지만 그 실상은 회귀자인 나 장의사의 경험과 지식이 고스란히 녹아든 데이터베이스.
여러 차례 회귀를 겪으면서, 직접 수많은 괴이들과 싸우면서 나의 피와 땀으로 빚어 낸 아카식 레코드였다.
도서관학회에서 규정한 ‘표준’, 요컨대 괴이들의 위험등급은 다음과 같았다.
Lv.1: 빌리지(Village). 마을급.
말 그대로 마을 하나 정도를 궤멸시킬 수 있는 괴이들한테 부여되는 위험등급.
“사실상 ‘위험한 괴이’로 취급받으려거든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라는 마지노선에 가깝지. 자잘한 괴이들을 걸러내는 역할도 해 주고.”
슥슥. 나는 공책에 예시들을 적어서 보여 주었다.
그래도 문학소녀답게 이 ‘설정집’에 관심이 가는 것일까. 오독서는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눈동자로 용케 내 필서를 쫓아왔다.
“고블린 한 마리는 위험등급을 부여할 가치도 없어. 그렇지만 고블린 30마리? 40마리? 이건 충분히 마을급으로 분류할 만하지.”
“아하……?”
“달리 말해, 가장 낮은 등급일지언정 마을급이 부여되었다면 이미 그 순간부터 ‘매우 위험하다’라는 판정이 내려진 셈이나 다름없다. 일반인들은 무조건 도망쳐야 하고, 각성자도 전투 전문이 아닌 이상에야 웬만해선 피하는 편이 좋아. 그래. 오독서 너를 말하는 거다, 너.”
“…….”
실제로도 대부분의 각성자들은 마을급 괴이와 일대일로 싸우다가 모가지를 헌납해 버린다.
‘인형사’ 이하율도 어떤 회차에선 근자감에 넘쳐 마을급 괴이와 싸웠다가 한쪽 팔이 날아갔다.
내가 보았을 때, ‘재단’이 사용하는 위험등급 이름들은 멋있긴 했으되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이 들었을 땐 ‘그래서 그게 정확히 얼마나 위험한 건데?’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용어들을 선별하는 데 있어 직관성을 우선시했다. ‘마을을 전멸시킬 정도로 위험하니까 = 마을급’.
“어떠냐. 간단하지?”
“…그러게. 간단해.”
“이다음 위험등급부터는 단순히 개인의 생명이 위협받는 수준을 뛰어넘어.”
Lv.2: 폴리스(Polis). 도시급.
여기에 속한 괴이들은 일단 출현했다 싶으면 도시 하나는 기본으로 초토화시키는 놈들. 아주 무지막지한 새끼들이다.
“십족이 대표적인 경우지.”
중국 화산으로 여행 갔을 때 언급한 ‘혼돈’과 ‘탐’이란 괴이들 역시 도시급.
걔네 둘이서 갈아 버린 인명 피해의 숫자가 자그마치 천만에 가깝다. 어디까지나 추산치에 불과하지만.
십족도 지금 와서야 우습게 보이는 거지, 회귀 초반부엔 혼자서 한반도를 궤멸시켰다. 도시급만 되어도 각성자들 입장에선 그냥 통곡의 벽이라니까?
현대 국가들의 시계침을 철기시대로 회귀시킨 주범들은 대부분 도시급에 해당한다.
“일반인이든 각성자든, 미리 전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꽁지 빠지라 도망쳐야 한다. 물론 도망치지 못할 확률이 훨씬 높고.”
“으와……. 아저씨가 원턴킬로 끝내 버리는 광경을 봐서 그런지 별로 와닿지 않는데…….”
“쯔쯧.”
이래서 내가 십족 토벌전에서 되도록 원맨쇼를 자제하고 다른 각성자들한테 맡기는 거다.
“아무튼 다음.”
Lv.3: 컨티넨트(Continent). 대륙급.
도시급 괴이가 인간의 절망이라면 대륙급 괴이는 인류의 절망이다.
“이때부터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보존 자체가 진지하게 위협받기 시작하지.”
“…….”
영생불멸을 미끼로 삼아 동아시아 전역에 좀비 바이러스를 퍼트린 세계수 ‘우담바라’.
7년 동안 낙천을 거듭하여 결국 전 세계를 잿빛 영토로 만들어 버린 ‘유성우’.
현생 인류의 입에서 ‘아니 이건 억까잖아요, 시발!’ 하는 소리를 절로 튀어나오게 하는 장본인들 되시겠다.
“아저씨, 기다려 봐.”
“음?”
“유성우가 고작 레벨3에 불과하다면, 설마 그다음 레벨도 존재하는 거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오독서의 [예언]으로 들여다본 작품의 연재분은 약 40화……. 그러니까 내 기준으론 아직 20회차도 안 된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그럼 모를 만하지.
나는 볼펜을 슥, 놀렸다.
“그래. 당연히 존재한다.”
Lv.4: 파이브 오션스(Five Oceans). 대양급.
“대양급…….”
내 노트를 보고 오독서가 중얼거렸다.
“…내가 본 소설에서 아저씨가 놓여 있었던 상황이랑 좀, 괴리감이 있어서 얼떨떨하네. 분명히 아저씨는 십족이랑 완전 혈투를 벌이는 열혈 남캐였는데…….”
“아- 그립네. 그때가 참 좋았지. 아무리 길어도 30회차 안엔 세상을 구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대양급엔 어떤 괴이들이 있어?”
“묘사는 해 주겠는데 아마 들어도 감이 잘 안 올 거다. 심아련이 그려 놓은 일러스트도 아직 없어서.”
일본열도에 강림하게 될 ‘팔백만(八百万)’. 인도 아대륙을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공허로 만들어 버릴 ‘아수라’, ‘아스트라’, ‘항하사(恒河沙)’.
내가 농담 삼아서 맨날 한반도의 입지 조건이 불반도니 지옥반도니 그러지만 사실 저 동네들이랑 비교하면 선녀다.
다시 한번 당부하겠지만, 요즘 시대에 해외여행은 절대로 가지 마라.
내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오독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런 괴이들이랑 싸워야 하는 거야? 나도?”
“너무 무서워하지 마라. 561회차의 너도, 560회차의 너도, 559회차의 너도, 557회차의 너도 잘 견뎠다.”
“…….”
“이번 회차의 너 또한 잘 견딜 거다.”
“…잠깐만. 중간에 558회차의 나는 왜 빼먹었어? 그때 난 어떻게 됐는데?”
“…….”
“왜 빼먹었냐고!”
나는 시선을 돌렸다.
“아니……. 아악! 아저씨! 애당초 난 [예언] 능력밖에 없잖아! 비전투 요원을 왜 전장에 데리고 다녀!”
“워워, 진정해라. 진정해. 아무렴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널 끌고 다니겠냐? 독서 너도 사실은 다중능력 각성자다. 네가 두 번째 능력만 각성하면 어떤 싸움터로 끌려가도 문제가 없어요.”
“…정말로?”
“어휴, 진짜지. 무조건, 완전 100% 확률로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니까? 너는 그냥 수차례의 회차에서 검증된 오독서 맞춤형 훈련 커리큘럼만 이수하면 돼. 나만 믿어라.”
“…나 정말 아저씨만 믿는다?”
“그럼.”
대신 훈련 커리큘럼이 죽을 만큼 빡세고 실제로 558회차의 오독서는 훈련 도중 요단강을 건너 버렸으나 그건 불운과 불행이 겹친 사고였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아암.
“으으. 내가 어쩌다 이런 미친 아저씨랑 엮여 가지고……. 애당초 그 웹소설을 읽으면 안 됐었는데…….”
“괴이들이라고 해서 다 무지막지한 물리력만 가진 것도 아니야. ‘트롤리 딜레마’나 ‘용사 증후군’처럼 쉽고 재미난 괴이들부터 시작할 테니 걱정하지 말렴.”
“괴이가 어떻게 쉽고 재미나? 아저씨 역시 뭔가 감성이 이상하다니까……. 참. 그럼 아저씨가 지금까지 상대해 봤던 괴이들 중에서 제일 특이했던 애는 누군데?”
“그런 나중에 얘기해 주마.”
절망에 빠진 오독서를 내버려 두고 나는 카페오레를 홀짝였다. 썰 푸는 동안 커피가 다 식어 버렸지만 여전히 혀에 감겨 오는 볼륨감은 일품이었다.
――얘 표정을 보아하니, 괴이들의 위험등급이 레벨4에서 끝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얘기한 적 없다는 사실은 숨겨 둬야겠군.
Lv.5: 에일리어네이션(Alienation). 소외신(疏外神)급.
최종 레벨. 이들이야말로 회귀자인 나의 주적. 나로 하여금 영원에 가까운 회차를 반복하도록 강요한 주범들이었다.
뭐, 한꺼번에 조급하게 오독서한테 모든 걸 설명해 줄 필요는 없으리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충분히 많았으므로.
“아.”
오독서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미안, 나 잠깐 화장실 좀.”
“그런 건 말 안 하고 다녀와도 된다.”
“으. 아저씨랑 있다 보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다니까…….”
오독서가 투덜투덜거리며 자리를 떠나자.
그때까지 얌전히 모차르트 교향곡을 연주하던 단풍나무 원목 소재의 빈티지 라디오, Zenith K731에서 지지직- 거리는 잡음이 올라왔다.
-치҉지҈҉҉직҉, 여기는 제7구역 본부장 마틴 러셀이다. 젠장. 좀비 바이러스가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것이 관측기기로 확인되었다. 핵탄두는……. 뭐야? 대체 재단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왜 미사일 방향이……. 맙소사! 안 돼! 그만! 오! 신이시여, 인류에게 부디 자비를…….
“…….”
이번 회차에서도 어김없이 새로운 멸망을 맞이하게 된 북미 지역의 인류를 위해 마음속으로 묵념했다.
6
후일담이 있다.
일견 여기서 에피소드가 끝날 것처럼 보일 테고 실제로도 562회차에서 오독서와 나눈 이야기는 저기서 마무리됐다.
하지만 ‘도서관학회’와 관련해선 여전히 미스터리가 남아 있었다.
나는 여러분께 언제나 최대한 솔직해지기로 했으므로, 이 수수께끼 관련해서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할 수밖에 없다.
때는 924회차. 그러니까 한참, 정말로 한참 나중의 회차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어, 형님.”
“응?”
“여기 이쪽으로 와셔서 확인해 봐야 하실 것 같은데요.”
우리의 SG남, 서규의 부름을 받고 나는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서규는 한창 커뮤니티를 관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 왜. 얼마 전에 형님께서 도서관 게시판? 인가, 그거 만들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거기 트래픽이 급격하게… 진짜로 급격하게 늘었거든요. 혹시 형님께서 작업하고 계시는 건가 여쭤봐야 할 것 같아서요.”
“음. 그거 아마도 아련이가 했을 거야.”
“심아련이? 걔가요?”
“그래. 도서관학회 게시판 관리는 그냥 아련이한테 전담시켰거든.”
내 해답을 듣고도 서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심아련이 아무리 커뮤니티 지박령 날백수라 해도 이렇게……?”
“걔가 보통 망령이냐.”
“물론 그렇지만요. 하지만, 아니. 그래도 말이 안 되는데? 이거 보세요, 형님.”
서규가 컴퓨터 화면을 내게 자세히 보여 주었다. 마우스 스크롤을 쓰윽- 올리자 게시글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야말로 폭우처럼.
“오늘만 해도 게시글이 400개 올라왔어요. 어, 방금. 또. 보셨지요?”
“…….”
“그냥 뻘글도 아니에요. 대부분 비밀글이긴 한데, 이렇게 관리자 권한으로 들어가서 봐 보면……. 보세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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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학회 괴이사전]‘삽화가’
이명: 일러스트레이터, 팬아트
위험등급: 없음
오염등급: 불명
서식지: SG넷(인터넷 커뮤니티)
해독: 도서관학회의 정보는, 불가피하게 유실된 문서를 제외하고, 전부 SG넷 도서관학회 괴이사전 게시판으로 안전하게 이전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을 시점으로 하여 해당 문서들에 ‘첨부 파일’이 생겨나기 시작. 첨부 파일은 모두 ‘일러스트’. 즉, 이미지 파일이다.
일러스트는 괴이의 형상을 담고 있으며, 해당 형상은 여러 사서들의 교차 검증을 통해 ‘매우 정확하다’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괴이는 실체뿐만 아니라 모방품. 즉, 사진이나 영상으로 촬영한 사본에까지 공허독을 퍼트린다. 해당 일러스트는 극도로 위험하다.
분서부에서 총 501회에 거쳐 분서를 시도했으나 최종적으로 일러스트를 삭제하는 일에 실패. 도서관학회의 모든 문서가 ‘삽화가’에 의해 오염되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하에 도서관학회 분서부 사서의 조언 및 금서관리부 사서의 명령을 첨언한다.
[화형가 V]모든 문서의 일러스트에 [열기/숨기기] 기능을 덧붙이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일러스트가 부착된 문서들은 모두 비밀 잠금이 해금되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것 역시 확인되었습니다.
사서들은 함부로 일러스트를 열어서 관람하지 마십시오. 확인이 필요한 경우 분서부에 정식으로 요청하여 승인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천해각 M]금서관리부에서 알려 드립니다. 모든 사서들의 활동 이력은 기록에 남으며 일러스트의 열람 여부 또한 저장됩니다.
분서부 지침을 위반하여 일러스트를 무단으로 41회 열람한 예언부 소속 ‘서화가 자작’에게 개인 신상정보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커뮤니티 활동 이력을 일반인에게 공개합니다.
해당 이력에는 사서의 이명으로 활동한 내용과 익명으로 활동한 내용이 전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개 범위는 접속 시간, 게시글 내용, 덧글 내용입니다.
아울러 서화가 자작에게는 향후 분서부 소속의 사서와 공동으로 생활할 것을 명령합니다. 서화가 자작에게는 LSO 절차가 중단됩니다.
――――――――――
“…….”
이전에 목격해 본 적 없는 내용의 게시글이 버젓이 올라와 있었다.
‘화형가? V? 이건 또 뭔데?’
도서관학회는 틀림없이 수백 회차 전의 내가 만든 설정 놀이에 불과했다.
천해각이니 흑서전이니 하는 건 모조리 내 가면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당연히 나는 이런 글을 남기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 설정집에 ‘화형가’ 같은 등장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V는… 혹시 Viscount? 자작 작위를 뜻하는 것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설정집이… 자가증식하고 있다?’
옆에선 서규가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그쵸? 전부 제대로 작성된 게시글이잖아요. 형님. 아무리 심아련이 미친 망령이래도 어떻게 이런 속도로 글을 작성합니까?”
나는 침묵했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였기도 했지만 그보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기에.
‘…이런 현상은 처음이야.’
다시 말하지만 이때가 924회차였다.
정말로, 진짜로, 더 이상 내 인생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벤트란 갠지스강 강변에서 다이아몬드 조각 찾는 것만큼이나 희귀해진 상태였다는 말이다.
“게다가 언어 번역 기능까지 달려 있어요. 형님. [언어 선택] 버튼, 이거 보이시죠? 그냥 세계 모든 나라 언어로 번역해 놓은 거 같은데요?”
“…AI인가 뭔가, 그런 걸로 계속 게시글 작성을 돌려 둔 것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요? 각성자 아니면 SG넷엔 접속할 수도 없잖아요. ‘AI 활용’이나 ‘게시글 자동작성’ 같은 스킬을 각성한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그냥 이러는 건 불가능해요.”
“…네 말이 맞다.”
“게다가 관리자 권한으로 IP를 확인해 봤는데, 이 IP들도 전부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서 SG넷에 가입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만일 각성자가 한 짓이면 [SG넷 아이디 생성]이라는 능력까지 있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요?”
“…[인터넷 커뮤니티 분탕]이라는 스킬이 있어서 그 모든 능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각성했다면 가능하지.”
“아.”
“하지만 이상 현상인 건 확실하다. 성녀님께 지금 상황 보고해서 위치 추적 가능하신지 여쭤 보마. 서규 너도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어. 나한테 잘 말했다.”
“넵, 형님.”
얼마 지나지 않아 성녀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위치 추적이 불가능해요.]“예?”
[제 천리안으로는 해당 IP의 각성자를 확인할 수 없어요. 장의사 씨. 정말로 이들이 실존하는 사람들인가요?]“…….”
참으로 오랜만에 등줄기에서 서늘한 소름이 뻗어왔다.
수많은 가설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성녀의 천리안을 무력화시키는 스킬의 가능성, SG넷에 다른 세계선이 교차되고 있다는 괴이의 가능성, 아예 괴이들마저 SG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가능성…….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새로고침을 누를 때마다 게시판에서는 실시간으로 문서들이 새끼를 깠다.
“그렇다면… 만일 현실에 실존하는 인간들이 아니라면, 지금 저 인터넷 사이트에서 실시간으로 수백, 수천, 수만, 어쩌면 수십만 개의 게시글을 올리고 있는 작성자들은…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씀입니까?”
[…….]성녀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전히 이 세계엔 내가 모르는 미지의 수수께끼가 많은 모양이었다.
– 설계자. 結.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