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77)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77화(7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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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자 Ⅰ
신노아
1
소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나는 소원을 비는 쪽보다 소원을 받는 쪽에 가깝다.
[시간 봉인].나만의 고유한 각성 능력이자 내 이명이 장의사로 굳어진 이유. 상대방으로 하여금 ‘가장 행복했던 하루’에 갇혀서 영원토록 그날 하루를 반복하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
-장의사님, 너무 힘듭니다. 이제는 제 손에서 삶을 놓아주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장의사 씨.
-가족이 보고 싶어요. 아직 세계가 멀쩡했던 시절에 가족이랑……. 제발요.
-현실에서 아무도 저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고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이딴 거. 이런 현실.
영원히 하루를 반복한다지만 [시간 봉인]을 당한 당사자들은 정작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예전 에피소드에 등장한 축구선수 김주철처럼 설령 어쩌다 깨닫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또 금방 까먹어 버리거든.
사람들은 그저 나 장의사가 준비해 놓은 꿈속 놀이동산에서 프리패스 티켓을 끊은 채 하루 종일 놀면 된다.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버린 세기말의 인류에게 나 장의사란, 요컨대 합법적으로 허락된 최후의 수면제(마약성분 함유)라 할 수 있겠다.
당연하지만 이 놀이동산에 자유이용권을 끊으려고 대기 타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오늘은 그 대기줄에 선 사람들 가운데 제일 정신 나간 싸이코패스를 소개해 줄까 싶다.
2
“부길드장님.”
“음?”
“저 인생이 너무 괴롭습니다.”
사르륵.
술자리 맞은편에서 은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이 머리카락이 참 예뻤다. 회색이라 하기엔 너무 하얬으며 백색이라기엔 너무 윤기가 잘 흘렀다. 그러니 은빛이라 표현할 수밖에.
원래 각성자가 능력을 일깨우면 랜덤으로 머리 색깔이 저절로 염색된다. 눈앞의 사람은 단차 가챠에서 SR급이 떠 버린 케이스였다.(참고로 난 노멀 등급 검은색이다)
“솔직히 더 이상 맨정신으로 버티긴 힘듭니다. 그만, 모든 걸 내려놓고 끝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
유지원(劉地圓).
그런 인물이 있다.
사실 유지원이라는 이름은 내 썰에서 이미 여러 차례 등장했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만, 첫 등장은 바로 이때였다.
-부길드장님. 혹시 지금 시간 되십니까? 부길드장님 보러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누군데?
-예, 이름이……. 에밉……. 쇼펜하워? 독일인 같다는데요?
내가 쇼 노인과 최초로 만난 날.
이처럼 역사적인 순간에 어느 독일인 꼰대가 내방했노라고 제일 먼저 알려 준 사람이 다름 아니라 SSS급 모발미인 유지원. 나의 비서 겸 부관이었다.
그렇다. 비서 겸 부관. 오래전, 아직 내가 삼천세계에서 당서린 시다바리 노릇을 하고 있을 적에 유지원은 나의 시다바리였다. 최고존엄 길드장의 시다바리-시다바리였던 셈이니 얘도 제법 계급이 높았다.
이 녀석이 권력의 핵심층, 우리들의 이너써클에 단번에 편입하게 된 비결을 소개해 줄까 싶다.
때는 5회차 시절. 유지원이 문득 나한테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부길드장님, 혹시 삼국지 좋아하십니까?”
“뭣? 설마 너도?”
“예. 저는 어릴 때 요코야마의 전략 삼국지 60권짜리로 입덕했지 말입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근본을 보았나.
은빛 머리의 무표정한 쿨시크 각성자는 입술만 움직여서 따박따박 읊조렸다.
“이후로 고우영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이문열 삼국지, 장정일 삼국지를 둘러보았고 잠깐 삼국지 해제라는 마공서에 빠져 흑역사를 보냈다가, 아무래도 소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서 삼국전투기를 거쳐 정사 삼국지까지 본격 입문했습니다.”
“이럴 수가.”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약과도 같은 혼미함이었다.
무림의 장로가 앞날이 창창한 후기지수를 보았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정녕 이 아이가 내 유지를 이어 줄 후배인가’를 테스트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코에이……? 아니면, 삼탈워……?”
“음.”
선문답을 주고받는 사람이 흔히 그러듯 유지원은 턱을 짚고 고민했다.
마침내 유지원이 안경을 척- 들어 올렸다.
“제 냉철한 두뇌는 삼탈워를 부릅니다만 저의 어린 심장은 코에이를 외치는군요. 그리고 저는 두뇌보다 심장에 영혼이 서린다고 믿습니다.”
“…애호하는 시리즈는?”
“삼국지3, 삼국지5, 삼국지11.”
“허억……!”
나는 후인의 고절한 무결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부터 유지원은 즉시 내 측근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물론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얼씨구. 지랄한다, 얘들아.”
삼천세계는 전 지구적으로 유행이 끝나 버린 민주정 대신 전제군주정을 표방하고 있었다. 마땅히 인사권 또한 길드장의 고유한 권한에 속했다.
우리의 최고존엄 대마녀 당서린 각하께서 코웃음을 치시며 나와 유지원을 번갈아 꼬라 보셨다.
“삼국지 오타쿠라서 대뜸 부길드장 부관으로 채용하면 길드 꼬라지 참 자알 돌아가겠다.”
“마녀 오타쿠에 철덕이 그런 말씀을 하셔도…….”
“응? 방금 뭐라 그랬니? 부길드장?”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길드장 마음에 든 건 알겠는데 그렇게 절차와 법도 없이 길드원을 마구 승진시키려 들면 안 돼. 정말, 다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이렇게 출세해 봤자 유지원이 마음은 편하겠어? 으휴, 동기들 눈살에 등가죽 다 헐겠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대마녀 각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유지원이 말했다.
몇 번 묘사했다시피 유지원은 사시사철 무표정한 얼굴 가죽을 뒤집어썼으며 말투도 따박따박 절도를 갖췄다. 어떤 개소리를 지껄여도 얘의 혓바닥을 거쳐 입술 바깥으로 사출되면 그럴싸하게 들리게 되는 재주를 가진 것이었다.
“응? 뭐니?”
“저는 단순히 삼국지에 관해 지식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부길드장의 부관직으로 추천받은 것이 아닙니다. 대마녀 각하. 저에겐 그 이외에도 다양한 쓸모가 있습니다.”
“뭐, 네 각성 능력? 미니맵 같은 거? 그거야 알지. 나도 너를 높이 평가하고 있단다. 하지만 누누이 말하는데 조직엔 절차와 법도라는 게…….”
“저 라틴어 전공자고 라틴어로 글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압니다. 당연히 노래 가사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승진.”
유지원, 간부 임명!
3
유지원이 이너써클로 승급하게 된 이유는 물론 삼국지 지식과 라틴어 실력 덕분이었으나, 그렇다고 유지원이 각성자로서 무능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유능한 편에 속했다.
“지원아.”
“네, 부길드장님.”
“슬슬 작전 시작해야 될 거 같은데. 미니맵 좀 켜 봐라.”
“알겠습니다.”
미니맵(Minimap).
이것이 유지원의 각성 능력. 한때 스타크래프트라는 민속놀이에 영혼을 팔았던 한국인이라면 이 간단한 3음절짜리 이름만 봐도 ‘미니맵’이 어떤 능력인지 저절로 깨달으리라.
촤악-
작전 테이블에 유지원이 지도를 펼쳤다. 축척은 1:50,000. 단순히 종이로 인쇄되었을 뿐인 그 지도 위에 유지원이 미리 준비해 온 체스말들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체스말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길드장님. 적군은 예상대로 동구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동구에 잠복해 있다가 보트를 이용해서 우리의 뒤를 노리려는 작전으로 읽혀집니다.”
“음.”
언뜻 평범해 보이는 체스말에는 ‘김성우’ ‘박현모’ 등등 글자가 적힌 빨간색 견출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전부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적군 수뇌부의 이름이었다.
체스말들은 적들이 위치한 장소, 움직이는 행선지까지 모조리 모방하면서 지도에다 나타내고 있었다. 적뿐만이 아니었다.
♝ ♛
유지원 당서린
‘유지원’의 이름표가 붙은 비숍과 ‘당서린’이 적힌 퀸 역시 지도에서 정확한 위치를 표시했다.
당서린이 감탄했다.
“진짜 미니맵 켜고 싸우는 느낌이네. 완전 사기 능력 아냐? 지원이가 우리 삼천세계에 합류한 이후부터 길드전이 너무 쉬워졌어.”
“과찬이십니다. 대마녀 각하.”
꾸벅. 사회생활 만렙인 유지원이 완벽한 각도로, 너무 과장되지도 않고 너무 건방져 보이지도 않은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제 능력에도 한계가 분명합니다. 대마녀 각하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어찌 저의 능력인들 쓸모가 있었겠습니까?”
“에이. 너무 갔다, 얘. 적당히 하렴. 아가리 꿰매서 죽여 버리고 싶어지기 전에.”
“옙.”
유지원은 알랑방귀를 뀌는 김에 겸손함까지 흉내 내 본 것에 불과하겠지만 실제로도 ‘미니맵’엔 허점들이 좀 있었다.
1. 오직 유지원이 직접 만난 적 있고 이름을 알고 있는 대상만 미니맵에 표시할 수 있다.
예컨대 유지원은 ‘성녀’의 위치를 표시할 수 없다. 성녀를 만난 적도 없을뿐더러 성녀의 이름도 모르니까.
2. 오직 유지원이 직접 ‘밟아 본 도시’에만 미니맵이 적용된다.
예컨대 5회차의 유지원은 평생 경주 땅을 가 본 적이 없었다. 자전거 국토종주가 취미라서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일본까지 원정을 떠난 동호인이면서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미니맵]을 펼쳐 봐도 상대방이 경주로 도망치면 추적하지 못했다.
저런 경우엔 체스말이 도중까지 움직이다가 지도의 경계 범위를 벗어나면 맥없이 픽- 하고 쓰러지더라.
‘도시를 밟아 본다’라는 표현이 좀 애매할 수 있겠는데 의외로 굉장히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었다. 그 도시의 편의점 밟기.
신기하게도 해당 도시의 편의점에 들러서 물건을 사든지 1분 이상 머무르든지 하면 그 도시를 ‘밟아 본 곳’으로 취급하더라.
그래서 편의점들이 아예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도시들은 절대로 ‘밟지’ 못한다. 가령 대양급 괴이가 강림해 버려서 쑥대밭이 되어 버린 뉴욕에선 편의점을 찾을 길이 없었다.
즉?
“길드장님. 제가 지원이 데리고 이런저런 길드장 모임에도 꾸준히 참석하고 전국 좀 돌아다니겠습니다.”
“응. 부탁해.”
나는 유지원을 비서란 명목으로 전국각지로 끌고 다녔으며 부지런히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나를 통해 유지원이 이룩해 낸 ‘거대한 인맥’은 고스란히 한반도 전국 지도에 투영되었다.
“멋지군.”
나는 초대형 지도를 내려다보며 맥주병 뚜껑을 깠다.
각 도시의 유력한 길드장들, 길드장급은 아니더라도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 한반도의 권력 행방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자들.
모든 유력 인사들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부 부길드장님 덕분입니다.”
“뭘. 네가 스킬을 잘 타고난 거지. 그리고 전공을 잘 선택했던 거고.”
“사실 제 라틴어 전공이 설마 세상이 멸망한 이후에 더 빛을 발할 줄은 몰랐습니다. 문명이 멀쩡할 때는 밥 굶을 걱정부터 했는데 말입니다.”
“새옹지마 아니겠냐?”
깍듯하게 팔을 내민 유지원에게 천천히 맥주를 따라 주었다. 우리는 ‘전국 지도’가 완성된 걸 자축하며 잔을 치켜들었다.
“건배.”
“건배.”
짜앙- 유리잔이 예쁘게도 울었다.
당서린의 리더십, 나의 보좌 능력, 유지원의 압도적인 정보력을 바탕으로 삼천세계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무적의 삼각편대는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고 크레딧이 올라가면 좋겠다만,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 이야기는 해피 엔딩과는 거리가 좀 멀다.
한반도의 권좌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전황은 점점 더 암울해졌다.
노도하가 없는 회차에서 도시들은 각각 분리되어서 자멸했고, 검후가 없는 회차에서 식량은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으며, 서규가 없는 회차에서 각성자들은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연결망 자체를 상실했고, 쇼 노인이 없는 회차에서 우리는 괴이들의 물량공세를 뚫고 지나갈 힘이 없었다.
삼천세계의 간부진인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더 열악한 측면도 있었다.
당서린은 전제군주정 체제의 조직에서 전설 포켓몬보다 더 보기 힘들다는 희귀종, 이른바 ‘선한 군주’였다.
간부진은 무조건 최전선에 가서 모범을 보여야 했으며, 단 한 명의 길드원이라도 굶는다면 간부들도 굶어야 했다.
당서린은 참았다. 나도 잘 참았다.
유지원은 참기 어려워했다.
은빛머리 무표정 쿨시크라는 캐릭터성을 가진 주제에 심장엔 ‘권력’ ‘출세’ 네 글자가 궁서체로 적혀 있는 유지원으로서는 참혹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더 잔인한 진실은 삼천세계가 그나마 한반도에선 제일 형편이 낫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위치에서건 권력을 휘어잡아 출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본성과 그러한 본성을 절대 충족시켜 줄 생각이 없는 시대의 환경 사이에서 유지원은 고민했고, 번민했으며, 좌절했다.
만일 당서린을 배신 때리고 딴 길드로 가서 출세할 보장만 있었더라면 유지원은 능히 대조선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모범 사례를 본받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유지원에겐 선조의 유지를 이어 볼 생각이 가득했다.
“부길드장님.”
“응?”
“혹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배편 좀 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왜, 일본으로 도망치게? 부길드장 직속 부관이나 되는 양반이 쪽팔리지도 않냐?’라고 굳이 타이르지 않았다.
대신 커피를 홀짝였다. 이 무렵에 이르렀을 때는 나도 콩깍지가 슬슬 벗겨져서 유지원이란 인간의 본질에 어느 정도 통달했거든.
“구하려면 구할 수야 있겠다만. 편도 티켓만 끊을 수 있을걸.”
“무슨 말씀입니까?”
“얼마 전까진 그래도 간간이 부산으로 건너오는 일본 배들 있었잖냐. 3달 전부터 싹 사라졌다. 이게 뭘 의미하겠냐?”
“…….”
우리는 길드 연맹을 창설하여 전국 곳곳에서 괴이들과 혈투를 벌였다. 인류의 생존을 건 멸망전에 유지원은 내 직속 부하로서 언제나 함께 따라다녔다.
“부길드장님, 중국은…….”
“지난번에 성좌가 들려주는 얘기 종합해 보니까 일단 산둥반도는 나가리던데?”
“…….”
“게다가 너 한국이랑 일본은 자전거로 돌아다닌 적 많아서 [미니맵]이 먹히지만 중국은 한 번도 안 가 봤다매. 네 스킬이 봉인되는 거나 다름없는데 괜찮겠냐?”
“…….”
그렇다. 배신을 하려 해도 받아 줄 곳이 있어야 하고, 탈출을 하고 싶어도 도망칠 낙원이 있어야 하는 법.
시대가 그녀를 만고의 충신으로 만들고 있었다.
가챠를 잘못 돌린 바람에 엉뚱한 시대에 태어나 버린 인재들이 종종 그렇듯, 마침내 유지원 역시 자신의 욕망이 영원토록 충족되지 않을 것임을 인정했다.
그녀에겐 갈 곳이 없었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세상이 전부 쫄딱 망해 버렸는데.
아니.
사실 마지막으로 도망칠 곳이 딱 한 군데 남아 있긴 했다.
“부길드장님.”
“아, 진짜. 야! 유 부관! 네 뭐 쫄리나? 그냥 같이 죽자, 인마. 응? 인생 별거 있어? 어차피 우리 얼마 못 가서 전부 다 뒤질 운명인 거…….”
“저 좀 죽여 주십시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직속 부관이 그곳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 장례를 치러 주십시오. 부길드장님의 능력으로. 부탁드립니다.”
“…….”
나는 침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나에게 장례……. 즉, ‘시간 봉인’을 부탁해 온 인간은 많고도 많았다.
그래. 그중엔 내 개인적으로 소중한 사람 또한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나는 프로페셔널한 장의사였다. 유지원처럼 사적으로 친밀한 상대를 영원토록 관짝에 처넣는 경험 따윈 이미 여러 차례 겪어 봤다.
그리고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직관한 사이에서 장례식 요청을 받았을 때는 평상시보다 조금 더 디테일한 고객 상담이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상담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사실 나 회귀자고 시간의 수레바퀴가 다음 회차로 굴러가면 세상이 좀 더 멀쩡해지는데 그래도 진짜 관짝에 처박히고 싶음?
내 비밀을 듣고서 유지원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유지원의 정신적 충격은 정확히 6시간 지속되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내 은빛 머리 직속 부관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부길드장 각하. 이번 회차가 5번째 회차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
내가 회귀자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나에 대한 칭호 뒤에 ‘각하’라는 글자가 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이 새끼 진짜로 만만찮은 새끼였다.
“그랬지.”
“예. 그럼 평범하게 생각해서 1회차보다는 2회차가, 4회차보다는 5회차가, 그리고 5회차보다는 6회차보다 이 세상에 조금 더 희망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은빛 머리 또라이가 한없이 진중한 얼굴로다가 턱을 끄덕였다.
그리고 내 회귀자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대사를 읊어 대기 시작하는 것 아니겠는가.
“각하. 그럼 제가 볼 때 시간 봉인을 당하더라도 지금 5회차에 당하는 건 매우 손해가 막심하다고 판단됩니다.”
?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