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80)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80화(8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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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Ⅱ
신노아
2
내우외환이란 말이 있다.
보통은 식중독도 걸렸는데 발바닥까지 레고를 밟아 버려 살갗의 안팎으로 시달리는 극강의 고통을 의미하지만, 사실 이 고사성어의 참된 뜻은 다른 데 있다.
바로 내부의 근심 따위야 외부의 적을 지목하면 간단히 해결된다는 지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이 진리는 내가 101마리의 요정시안을 잡아들인 뒤, 해당 장면을 촬영하여 SG넷에 올림으로써 다시금 증명됐다.
-익명: 장의사 그는 신인가? 장의사 그는 신인가? 장의사 그는 신인가?
-고려장: 요정 새끼들 조져지는 거 보니까 속이 다 후련하네ㅋㅋㅋ
-익명: 엄마, 저는 커서 장의사가 될래요! 엄마, 저는 커서 장의사가 될래요!
-문학소녀: 아니 왜 이런 개꿀잼 몰카를 우린 영상으로만 봐야 함? 현장 티켓도 좀 팔아 주면 안 됨??
└익명: 건물 보니까 어딘지 알 거 같은데 현장응원 레이드 파티 모집합니다.
-[국도]사관: 그야말로 인과응보. 세상에 아직 정의가 살아서 숨 쉰다는 증거. 세기말이라며 날뛰는 사람들은 이런 영상을 보며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
-dolLHoUse: 우려.
-[율도국]검후: 실로 영상미가 훌륭하구려!
“음.”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시글에 찍힌 추천수만 봐도 89회차의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압도적인 숫자!
우리 각성자들은 저마다 성향도 성격도 천차만별이었으나 모두 요정을 좆 같아 하는 마음만큼은 똑같지 아니하던가!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아무리 외부의 적을 훌륭하게 조진다 해서 내부의 문제가 사라지진 않는 법. 그저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하나니.
나의 내우, 암덩어리 그 자체가 옆에서 화사한 향기를 풍겼다.
“화아아……. 전국에서 튜토리얼의 요정들을 전부 포획해서 한곳에 몰아두시다니. 어떻게 이런 발상을 떠올리셨나요, 길드장님? 대단하세요.”
깜짝 퀴즈.
방금 나한테 화사하게 방-긋 웃으면서 감탄한 사람은 누구일까?
힌트1. 이 사람은 나를 ‘길드장님’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호칭을 쓰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힌트2. 이 사람은 흔치 않게 분홍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다.
힌트3. 지금은 89회차다.
“역시, 길드장님은 상당히 특이하신 분인 것 같아요. 새삼 부산역에서 길드장님이 가입을 권유했을 적에 따라가자고 결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답. 고요리!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정답을 들은 순간부터 ‘꺄아아아악! 이야이야! 크툴루 파탄!’ 하고 외치며 도망쳐야 마땅하겠지.
하지만 나는 정상적인 인간에서 거리가 멀었거니와 애당초 이 시점의 나는 89회차가 몰살 엔딩으로 끝나리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당연히 고요리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세뇌최면빔의 윤겔라(포켓몬)란 사실도 짐작하지 못했다.
“뭘. 네가 가입해 준 덕분에 나야말로 길드 운영이 이렇게 쉬워졌는데. 가끔 보면 길드원 애들이 나보다 널 더 좋아하는 것 같더라니까?”
“아하하. 길드장님도 참. 저야 길드 관리에 책임질 일도 명령할 일도 없으니 그런 것뿐이랍니다.”
고로 89회차의 나는 핑크색 이로치가이 윤겔라의 웃음을 들으면서도 그것참 듣기 좋은 목소리구나- 라는 감상밖에 품지 못했다. 이런 머저리 같으니. 도망쳐.
“그리고 사실 이번 건은 운도 좀 따른 것 같다.”
“운, 말씀인가요?”
“그래. 내가 한반도에 생존해 있는 요정들의 패턴을 싹 다 꿰뚫고 있긴 하다마는 그래도 요정들이 너무 반항 없이 잡혀 왔거든.”
“…….”
고요리가 방긋 웃었다.
“진인사대천명인걸요. 결국에 사람의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은 천운이니, 거꾸로 뒤집어서 보면 요정들은 운이 나빴던 것. 길드장님은 기뻐하시면 된다고 생각해요.”
“음. 네 말이 맞다.”
안 돼! 장의사. 안 돼!
당장 도망쳐. 당장 도망치라고!
…하지만 나 혼자서 아무리 인터스텔라를 촬영해 본들 89회차의 나에게 목소리가 닿을 리 만무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하나 뽑으라면, 고요리의 세뇌최면빔이 딱히 종족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비단 호모 사피엔스뿐만 아니라 요정들에게도 고요리의 권능은 통용됐다. 덕분에 101마리의 요정들은 감옥에서도 별로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호에엑……. 여, 여기는?”
“낯선 천장이라는 거예요.”
수감 위치는 청송교도소.
아포칼립스가 터진 이래 담벼락도 같이 터져 버리는 바람에 지속적인 인구 유출을 겪었던 청송교도소는 실로 오랜만에 신입들로 북적거렸다.
“납치? 설마 납치인가요?”
“클리셰를 위해 창조된 존재인 우리들이 클리셰의 장난감이 되어 버린 것?”
“그 또한 클리셰일 수밖에 없다예요.”
“호에……. 50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전 세계의 문학을 제패했을 텐데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에요…….”
“중세엔 콜라도 감자칩도 컵라면도 없는데 제패해 본들 무쓸모인 것이?”
“500년 후에 태어나는 모든 문학도들한테 500년만 일찍 태어날 걸 그랬다고 후회를 안겨 줄 수 있는 거예요.”
“히엑, 무시무시한 천재……!”
웅성웅성-
혼자 놔둬도 시끄러운 요정들을 자그마치 101마리나 모아뒀더니 과연 노량진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이제 슬슬 본격적인 쇼를 진행해야겠지.
그러자 고요리가 미리 준비해 놨다는 듯 빙긋 웃으면서 마이크를 건네주었다(소름이 끼친다). 나는 단상 위에 올라섰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안녕하십니까, 요정 여러분. 반갑습니다.”
“호엑. 당신은……?”
“저는 여러분의 가이드입니다. 갑자기 이런 곳에 납치당하느라 많이 놀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부터는 본 교관이 여러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안내하겠습니다.”
강당에 널브러진 요정들이 눈을 깜빡깜빡거리면서 서로 속닥거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레퍼토리인 것이?”
“왠지 모르게 무척 익숙한 대사인 거예요.”
“이 밧줄, 뭘로 만들었는지 너무 단단해서 풀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부산역 각성자!”
빼애액! 강당 한복판에서 어느 요정이 소리를 질렀다.
“자료화면으로 본 적 있다예요! 저거, 저 인간, 264번이 담당했던 악몽급 던전 부산역을 고작 20분도 안 되어서 클리어해 버린 인간이에요! 틀림없는 거예요!”
“히에엑?”
“20분? 선배님들이 그토록 경고하던 주인공 유형의 각성자라는 것!”
웅성웅성웅성!
요정들이 단번에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자신이 정의롭다고 믿는 연사는 한낱 무대 바깥의 소란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링컨 기념관에 나온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꿋꿋하게 연설을 이어 나갔다.
“진정하고 제 말씀을 들어주십쇼, 요정 여러분. 이 세상에서 악이란 언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까?”
“호에?”
“저는 악이란 다름 아니라 상대방의 위치와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거나, 일부러 헤아리지 않을 때 비롯한다 믿습니다. 보지 않으려 들고 알지 않으려 드는 것. 그런 의미에서 무지야말로 악의 근원이라는 저 소크라테스의 오래된 명제는 실로 올바르다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저 인간 뭔 개소리냐는 거예요?”
“전혀 모르겠단 거예요…….”
“아, 아. 본 교관은 여러분들을 악의 구렁텅이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간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까닭은 그저 단순히 직접 장난감이 되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정들의 쬐끄마한 머리통 위로 일제히 물음표가 띄워졌다.
한결 조용해진 강당에 내 목소리가 정의로운 함성처럼 고고하게 울려 퍼졌다.
“대충 알아들었습니까?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
구부정한 물음표가 망치에 얻어터져 느낌표로 펴지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요정 전용 튜토리얼 던전, 스타트.
“히에에에엑! 요정 살려!”
“갸악! 돌! 돌이 굴러오는 거예요! 갸아아악! 히에에엑!”
온갖 악의가 넘치는 함정들, 한정된 물자, 의심암귀에 사로잡히도록 설계한 스테이지 디자인 등등등.
자고로 모든 창작은 모방으로부터 탄생하기 마련이라던가.
나 역시 청송교도소 던전을 건축할 적에 전적으로 이 분야의 위대한 선배님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 선배님들은 지금 기쁜 마음으로 후학이 설계해 놓은 건축물에서 뛰놀고 계셨다.
“어,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당신에겐 정녕 사람의 마음이 없냐는 거예요!”
“없고요. 대신 요정의 마음을 장착했습니다. 호에- 호에에엥-”
“…….”
“왜요. 뭘 꼬라봅니까, 76번. 영월에서 인간들이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할 때 76번은 부탁을 들어줬습니까?”
“히엑! 저, 저희는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인 거예요!”
“그렇습니까. 본 교관도 비슷합니다. 저는 오롯이 저 자신의 주인이어서 지금 저 자신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서로 비슷한 처지인 만큼 요정 여러분들께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미친 인간……. 미친 인간이에요…….”
요정들이 부르르 떨었다.
아. 참고로 이 모든 과정은 고요리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 의해 빈틈없이 녹화되었다.
“아. 길드장님. 죄송한데 화면에 안 잡혀서요.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와 주세요.”
“이렇게?”
“네에.”
청송교도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 이틀, 사흘, 계속해서 흐를수록 고요리의 미소는 ‘방긋’에서 ‘빵-긋’으로 진화해 갔다.
정신조작의 달인답게 고요리는 영상편집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감독·각본 장의사, 촬영·편집 고요리, 주연·조연 요정들.
우리의 힘이 합쳐진 결과, 감동실화 다큐멘터리 주말연속극 [튜토리얼 역전세계]는 SG넷에 업로드될 때마다 시청률 100%를 찍는 데 성공했다.
“길드장님은 정말, 흥미로운 분이네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아무리 내우외환의 지혜에 따랐다곤 하나 또라이들이 넘쳐나는 SG넷에서 이토록 일관된 반응을 이끌어 내기란 어려웠다.
어쩌면 고요리가 ‘편집’한 영상에는 이미 그 자체로 인식 조작이 깃들어 있지 않았을까. 심아련이나 검후가 봐도 만족스러운 영상으로 비출 만큼.
바로 이 시점부터 고요리는 나한테 본격적으로 흥미 및 집착을 가져 버린 게 틀림없었다.
3
물론 내가 요정 전용 교도소를 설립한 목적은, 그동안 쌓이고 쌓인 종족적 원한을 앙갚음하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그건 이유의 고작 50%에 불과했다)
나는 실시간으로 줄다리기에 패배하여 60미터 아래의 지하로 떨어지는 요정들을 내려다보았다.
‘한반도에 남은 요정들을 죄다 잡아와서 일개 광대로 만들고 있다. 이래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 속셈이냐.’
요정군주.
그렇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 ‘튜토리얼 던전’과 ‘요정’을 관리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특급 괴이.
후일 정립될 도서관학회 분류법에 의거하자면 최초로 레벨 5, 에일리어네이션, 소외신(疏外神)급 판정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는 거악.
‘이렇게까지 요정들 포획에 심혈을 기울였어. 이번 회차에선 최대한 그놈에 대한 정보를 끌어모아야만 한다.’
히에에에엑-! 하고 요정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놀랍게도, 여기까지 와서도 나는 여전히 요정군주의 정체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무려 89회차의 시간에 이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유의미한 정보를 못 얻었으니까.
바로 그 점이 내 경각심을 자극했다.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빌런인 주제에 자기 정체를 은근슬쩍 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여타 창작물 속 관심종자들과 달리, 요정들의 보스는 진정한 흑막이었다.
내 수중에 놓인 정보라고는 ‘요정군주’라는 네 음절짜리 글자뿐.
“어이. 학살마.”
“호에엑…….”
나는 바닥에 엎어진 요정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웬만하면 슬슬 너희 보스에 대해 말해 보시지? 내가 한반도에서만 깽판 치고 끝낼 거 같아? 중국, 일본, 인도… 는 좀 무리고. 아무튼 웬만한 동네에선 아주 요정들 씨를 말려 버릴 수가 있어.”
“히엑, 마,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왜? 입이 하나라서? 두 개나 세 개로 만들어 주면 우리 좀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할까?”
“히에에에엑!”
뚜벅, 하고 발소리가 들렸다. 뒤를 힐끗 돌아보니 고요리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심문 중이신가요, 길드장님?”
“그래. 뭐,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니까 촬영하진 마렴.”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니라뇨. 무척 보기 좋은 장면이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훔쳐보지 못하게 아껴야지요.”
고요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으음. 혹시 요정들이 대답을 안 해서 곤란을 겪고 계신가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도와드리고 싶은데.”
“음? 도와줄 수 있다면야 물론 좋겠지만 이놈들 이거 입이 보통 단단한 게 아니야. 그냥 마음만 고맙게 받으마.”
“…….”
싱긋. 고요리가 웃었다.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지금 어떤 걸 묻고 계셨는데요?”
“아, 요정군주의 진짜 이름이 뭐냐는 질문을 하고 있던 참…….”
“――요정군주는 요정군주인 거예요.”
중얼.
나는 요정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보름 내내 심문해도 모르쇠로 일관하던 요정의 입술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군주의 참된 의미에 대해 착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착각? 무슨 착각?”
“너희가 생각하는 군주란 군주(君主). 아랫사람들이 모시고 충성하는 윗사람을 뜻하는 거예요. 하지만 저희의 요정군주는 달라요. 저희의 군주는 군주(群主). 요정이란 하나의 ‘군체’를 이루는 주인.”
요정이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하나. 하나는 우리. 그렇기에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요정군주’라고 말하는 것이니, 거역은 곧 자신에 대한 배신일 뿐. 저희들은――.”
퍼어어엉!
요정의 입술이 울렁거리더니 그 안쪽에서부터 폭발이 터졌다. 요정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섬광. 나는 순간적으로 오러를 일으켜서 요정과 우리들 사이에 막을 쳤다. 새빨간 액체가 유리창 같은 방어막에 프더더덕! 쏟아졌다.
한차례 폭발음이 잦아들고 나자 본래 요정이 앉아 있던 자리엔 육편 쪼가리들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아, 비밀 유지를 위한 폭탄 같은 게 심어져 있었나 봐요.”
옆에서 고요리가 중얼거렸다.
“으음.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만……. 그래도, 길드장님이 크게 곤란해질 일은 없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냐?”
“아직 요정은 100마리가 남았잖아요.”
고요리가 양손을 모았다.
“질문도 100번은 더 할 수 있는걸요.”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