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82)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82화(8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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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Ⅳ
신노아
5
무한 회귀자에게 세계란 감자칩 봉지에 비유할 수 있다. 무수히 많은 질소 중에서 희귀 자원인 감자칩을 발굴해야 하지.
마찬가지로 회귀자도 계속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가끔씩 예외를 맞닥뜨린다. 89회차의 나처럼.
“아니, 천요화라니…….”
나는 감자칩의 이름을 삼켰다. 백화여고 학생회장. 당서린의 삼천세계와 더불어 한반도에서 최강의 길드를 꼽으라면 반드시 거론되는 네크로맨서. 여기서 그 아이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기적이 일어났는지 이번 과자봉지엔 감자칩 용량이 좀 많았다.
-말씀드렸다시피 괴이의 영향력은 사물과 동식물을 가리지 않습니다.
-괴이를 일종의 방사능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질문자가 토벌한 것으로 추측되는 ‘나비효과’ 역시 본 개체의 사도, 저희들에 의해 피폭당한 개체에 해당합니다.
“잠깐만. 나비효과까지 말이냐?”
-그렇습니다. 진실입니다.
“…….”
내 두뇌는 혼란 상태에 걸렸다.
89회차의 내가 알기로 천요화는 네크로맨서였다. 가끔 심심할 때마다 한반도에 [배드 엔딩: 학원도시 ENDING]을 맛보여 주는 악의 학생회장.
그리고 나비효과는 심심하지 않을 때도 사방으로 토네이도를 흩뿌려 대는 정신불안증 모르포 나비였다.
“…너무 이질적인데. 천요화와 나비효과의 공통점이 뭐길래 네 감염체… 그러니까, 소위 사도라는 거냐?”
-직접 보여 드리는 편이 빠르겠습니다.
“직접? 뭐를?”
요정군주가 손을 내밀었다.
-본 개체를.
“…….”
-질문자의 망설임을 감지했습니다. 두려우십니까? 잡지 않으실 것입니까?
나는 검을 납도했다.
이럴 때면 회귀자가 참 편했다. 이게 괴이의 함정이어서 설령 죽어 버린다 해도 ‘요정군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정보만큼은 건져서 다음 회차로 가져갈 수 있지 않은가.
“좋다. 도발이라면 받아주마. 어디로 데려간다는 건지 모르겠다만 한번 안내해 봐라.”
요정군주의 손을 잡자 액체로 만들어진 신체의 불쾌한 물컹거림이 손바닥에 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다시 멀쩡하게 깨끗해진 교도소 한복판에 서 있었다.
“――뭐?”
하지만 감옥은 청송교도소가 아니었다.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쇠창살과 복도가 시선의 저편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대체…….”
몰캉. 저절로 검손잡이로 향하려는 나의 손을 요정군주가 꽉 붙잡았다.
-절대로 저의 손을 놓지 마십시오.
-잃어버립니다.
잃어버려? 무엇을?
그 말이 발음되기도 전에, 깜빡. 눈꺼풀을 한차례 오므렸다가 펴자, 교도소는 어느새 병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
환자와 의사는 단 한 명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할 정도로 깨끗한 병상 침대가 복도를 따라 늘어졌다. 침상마다 링거의 투명한 줄이 현수교처럼 드리웠다. 복도는 무한(無限)이었다.
정확히 똑같이 생긴 병상이, 똑같이 생긴 링거가, 똑같은 각도로 드리워진 수액줄이, 똑같은 채도의 새하얀 색깔의 복도에 따라 끝없이――.
깜빡. 학교는 나무로 지어진 폐교였다. 백화百話라는 교명이 울렁거렸다. 하늘은 새빨갰다. 깨진 유리창, 자작나무들이 하얀 살결을 유리 조각으로 그으면서 창문 안쪽 학교의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다. 학교는 하얀 꼬챙이에 꿰뚫려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유리 조각이 깨진 각도와 위치는 6미터 간격으로 반복되었다. 반복되는 구간마다 오래된 책상과 나무의자가 널브러졌다. 그 옛된 나무의 살갗, 이끼가 묻어서 흘러내리는 부위, 기울어진 각도 또한 모두 동일하여서.
깜빡. 수영장. 지독한 락스 냄새. 수평선까지 이어진 수영장 레일, 물의 복도.
깜빡. 영화관. 어두웠다. 그러나 이상했다. 평범한 영화관에는 이렇게 폐교 의자처럼 낡은 나무 의자들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투명한 수액의 링거줄이 의자마다 드리우지도 않았다. 영화관에서는 감옥 풍경이 상영되고 있었다. 쇠창살. 복도. 쇠창살. 복도. 아무도 수감되어 있지 않은 감옥. 영화관 스크린에는 차례대로 감옥, 병원, 학교, 수영장이 비추었고 다시 영화관이 비추었는데, 스크린 속의 스크린, 눈 속의 눈이――.
깜-빡.
우주가 움직였다.
별들의 운행에는 법도가 없었다. 색깔에는 보색이 없었다. 별들은 춤을 추었고, 거꾸로 물구나무를 섰으며, 지치는 기색도 없이 웃어 댔고, 조용해졌다.
법칙이 거동하기를 멈췄으므로 시간도 세계에서 손을 놓아 버렸다. 흘러내린 손가락을 색깔들이 잡아챘다. 깍지손. 빨강주홍노랑초록파랑쪽빛보라자색남색청색녹색황색홍색적색. 손깍지. 색깔의 손이 색깔의 손을 잡고 윤무를 추었다. 주홍이 파랑의 발을 밟았고, 빨강이 주홍을 살해했다. 은하수가 빨개졌다.
깜빡.
그리고. 그리하여서, 별들이 생겨났다가 생겨난 즉시 파괴되었고 형상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지자마자 허물어졌다. 거품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거품이었다. 비누 거품은 햇빛을 받았을 때처럼 무지개 기름 빛깔의 보호색을 난발했다. 존재는 거품이었으며 생명은 빛깔이었다.
깜빡.
우주가 눈꺼풀을 한차례 오므렸다가 폈다. 신호등. 빨간색 신호등이 초록색 신호등으로 넘어가려는 그, 시간이 잠깐 숨을 놓친 순간처럼. 찰나의 정지 신호.
별빛의 빛깔이, 행성의 거품이, 빨강에게 살해당한 주홍이, 윤무를 춘 색깔 배열이, 영화관 스크린이, 수영장의 락스 냄새가, 학교의 나무의자가, 복도로 튀어나온 자작나무의 흰 살갗과 유리 조각이, 하얀 병원 복도가, 감옥의 쇠창살이, 흰색과 흑색이 융단처럼 교차하는 횡단보도가.
우주 전체가.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주가 신호등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들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눈’ ‘빡’ ‘깜’ ‘오’ ‘시’.
전혀 연습해 본 적 없는 합창단원처럼. 높낮이도 음색도 일정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어떤 것은 교회의 종소리로, 어떤 것은 화장실 변기에서 물이 내려가는 물소리로, 어떤 것은 벌레가 날개를 파다닥 움직이는 소리로.
그 아가리의 숨소리들이 간신히,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요정군주의 입을 통해 ‘재구성’되었다.
-눈을 깜빡거리지 마십시오.
“…….”
-질문자는 본 개체를 요정군주. 즉, 모든 단말 개체들을 통솔하는 최상위 괴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엄밀히 말해 그 인식은 잘못되었습니다.
귀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아니, 뇌가.
저 우주 전체가 속닥거리는 모든 단어들은 단어마다 다른 발성기관으로 발음되었다. ‘단’ ‘말’ ‘괴’ ‘잘’ ‘체’ ‘군’. 절간의 처마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까마귀가 매에게 죽으면서 내는 비명. 언어를 이루어서는 안 될 소리들과 소음들이 언어를 이루었다.
만일 내가 무수한 시간 동안 자신을 깎아 온 회귀자가 아니었다면―― 그저, 단지 저 우주의 ‘말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뇌가 파괴당할 것이란, 강렬한 직감이 구역질과 함께 솟구쳤다.
인류를 모욕하는 소리조차 아니었다.
세계가 능욕당하고 있었다.
“잘못, 되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아를 유지하다니 예측 범위를 벗어난 사례입니다.
-본 개체, ‘요정군주’는 해석자입니다.
-무녀.
-사제. 교황.
-단말 개체. 통솔 역할. 최고위 사제.
-그러나 신보다는 한없이 낮은.
-말하는 신을 대신하여 침묵시키고, 말하지 않은 신을 대신하여 말하며, 눈먼 신을 대신하여 보는 예언자.
-신에게는 선의도 악의도 없습니다.
-난수(亂數)만이 있을 뿐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존재는 평등합니다.
-꺄아아아아아악!
-한 방울의 거품과 구름 속의 히말라야 사이에 차이는 없습니다. 법칙은 개별자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형상의 사다리에는 높낮이가 없습니다.
-본 개체는 단순히 우연에 의해 탄생했을 뿐인 단말에 불과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있어 불운이 아닌 행운이며, 질문자는 저에게 적의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실험할 뿐입니다. 저희가 만들어진 실험처럼.
“…….”
그러니까.
나는 타들어 갈 것만 같은 눈을 치켜뜨고 우주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저것이 괴이였다.
소외신. 에일리어네이션. 레벨 5.
모든 공허들 가운데 가장 독성이 강한 공허. 모든 괴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괴이인 일곱 소외신 중 일각.
내가… 인류가 죽여야만 하는.
이 세계의 적.
“…이름도 따로 없겠군. 저것.”
-불필요.
-어느 것을 지시하더라도 우리의 신이며, 어느 것을 지시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신.
“무간(無間).”
요정군주가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무간지옥(無間地獄). 저것의 이름은, 이제부터 무간이다.”
나는 피를 토하듯 말했다. 그것이 당장이라도 공허에 짓눌려 찌부러질 것만 같았던 89회차의 내가 발산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시는 불필요합니다.
“아니, 나에게 필요해.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를 허락도 없이 겁탈해 버린 저 눈먼 맹목의 신을 내가 죽여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세상에 사물마다 구별이 있어 자신들의 테두리를 지키는데 너는 모든 것을 뒤섞으니 만물에 간극이 없다. 사물이 무상해지고 존재도 녹아내리니 능히 지옥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 무간(無間)의 지옥이다.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법칙을 너희가 약탈하고, 빼앗고, 난잡하게 겁간하고 있으니 또한 무간(蕪奸)이다.”
요정군주가, 요정들――신호등의 붉은색 깜빡거림과 별과 색깔과 윤무와 영화관 스크린과 학교와 병원과 감옥――이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노자의 도덕경에 적혜요혜(寂兮寥兮)라는 구절이 있었다.
고요할 적. 쓸쓸할 요.
인간들이 만물을 구별하기 전에 세상은 갈라짐 없이 존재했으니, 아무런 소리도 소음도 무의미하여 고요하기 짝이 없는 그 세상을 ‘적요하다’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오부지기명(吾不知其名)이라. 본래 그러한 세상은 공허하므로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그 공허에 나는 이름을 지었다.
사람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간.
-무간지옥.
-올바른 이름입니다.
-그릇된 이름입니다.
-이 또한 하나의 난수.
-분홍색 개체가 특이행동을 보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천만 겹의 웃음소리가 갈라졌다.
일순, 수영장의 락스 냄새가 풍겼다. 그것이 이 우주의 백룸(Backrooms)이 흘린 숨결이었다.
-당신을 실험하겠습니다. 장의사.
툭, 요정군주……. 아니. ‘무간’이 내 손을 놓아 버렸다.
그것과 동시에 신호등의 불빛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초록색도 노란색도 아닌 모르포 나비의 날개와 같은 사파이어 블루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색깔.
무간의 존재가 내 쪽으로 밀려들어 왔다. 새하얗게 도포된 건널목을 지나, 수영장을 건너, 복도를 쿵쾅거리며, 시간을 짓밟고 공간을 찢어발기면서.
그 찰나,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6
“길드장님?”
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길드장님? 정신이 드시나요?”
“음……. 으음, 여긴?”
“청송교도소예요. 더 정확히는 청송교도소‘였던 곳’이겠지만요. 요정들이랑 대화를 나누신다고 하셨잖아요.”
“아.”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건물이 무너져내린 잔해 한복판에서 고요리가 내 머리를 무릎으로 받쳐 주고 있었다.
방긋.
고요리가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대화는 잘 마무리되셨나요?”
“대화……. 글쎄다. 분명히 뭔가를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아아. 과연. 음, 이건 조금 고민되는걸요. 어떻게 한담……?”
고요리가 검지로 턱을 짚은 채 중얼거렸다. 언뜻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머릿속이 몽롱하여 고요리를 올려볼 뿐.
“…그렇네요. 다음번에 부산으로 내려가실 일이 생기면 저랑 같이 움직이기로 약속하신 건, 여전히 기억나시나요?”
“응? 어, 뭐. 기억한다만.”
“하긴. 얌전히 길을 비켜 줬으니 이 정도 양보는 받아도 공평하겠지요.”
“……?”
“잠깐 몸에서 긴장을 풀어 주세요, 길드장님. 심호흡하시고- 네에. 내뱉으시고. 그렇게. 네. 잘하셨어요! 아무래도 폭발에 여러 번 휘말리셨으니까요. 알게 모르게 몸과 정신이 잔뜩 긴장하셨을 거예요.”
쓰다듬.
고요리의 손길이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단순히 머리를 매만지는 행위였을 텐데도 신기하게 정신이 차츰차츰 깨끗해졌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조금 전 관측한 ‘무간’에 대한 기억이 물밀듯이 돌아왔다.
“아…….”
“응. 컨디션이 회복되었나 보네요. 다행이에요.”
“컨디션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이…….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네가 돌봐준 모양이네. 고맙다, 요리야.”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괴이 중 하나에도 이름을 붙인 나였지만, 여전히 진명을 알 수는 없는 눈앞의 존재가 내 손을 잡아서 읏차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방긋 웃었다.
“길드장님. 지금 행복하신가요?”
“어? 응, 뭐. 적어도 불행하진 않지.”
“그럼 저도 행복해요. 길드장님.”
언제나처럼 무척 아름다운 미소였다.
7
아주 짧은 후일담이 있다.
“서규야. 나 사실 회귀자인데 네가 최소한 50번은 넘게 튜토리얼의 요정한테 대가리가 터졌거든. 그런데 내가 지지난번 회차에서 요정들의 두목격에 대항하는 괴이를 발견했거든? 무간이라고, 그냥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사람들은 다 뒈져 버리는 아주 무시무시한 놈이다. 그래도 아무튼 그놈이 네 삼생의 원한… 아니, 대략 오십생의 원한쯤 되는 녀석이다만, 어떻게 하고 싶냐?”
“아니, 그런 개씨발 새끼가 있단 말씀입니까? 형님. 당연히 제 손으로 직접 복수하러 가야죠!”
데려다줬다.
“야, 이 씨발 새끼야! 네가 내 대가리르을끄아아아아아악?”
퍼엉-! 무간의 공허에 발길을 들이자마자 우리 SG남의 대가리가 폭발해 버렸다. 그 왜, 팀 버튼 감독의 [화성침공]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 머리처럼.
“음.”
…아무래도 인류의 원수를 갚기엔 아직 먼 것 같았다.
– 질문자. 結.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