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85)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85화(8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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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자 Ⅲ
신노아
최후의 결사대에는 비단 각성자뿐 아니라 일반인도 대거 참여했기에, 그들이 쓸려나간 직후의 부산은 유령도시처럼 스산스러웠다.
[영업개시] 팻말을 걸고 길거리를 내다봐도 오가는 행인이 한 명도 없었다. 나와 노도하는 아예 공방 앞 벤치에 앉아서 풍경을 구경했다.“…….”
“…….”
“음. 커피 드시렵니까, 공방주?”
“아. 예에. 조수가 타 준 커피야 뭐 언제든 좋지요…….”
길거리의 적막한 풍경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기말임에도 어떻게든 활기와 평범을 가장한 채 여태껏 달려왔던 나날들이 그동안 이따금씩 낯설었더란다.
인적 끊긴 가로등.
흰색 줄무늬가 다 뜯겨 나간 횡단보도.
활엽의 가로수. 햇빛의 오로라. 아직 멸종되지 않은 매미가 아직 멸종하지 않은 짝을 찾아 퍼트리는 사이렌.
“여름이군요…….”
카페오레를 홀짝이며 중얼거린 노도하의 숨결이 투명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세상은 겨우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평온했다.
오전 9시, 오전 11시, 점심. 메뉴는 내가 직접 요리한 스테이크. 오후 1시, 3시, 5시가 되어서도, 평소엔 늘 붐볐던 노도하의 공방에 손님이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해가 졌다.
밤하늘의 눈꺼풀은 노을색이었다.
이미 먼 옛날에 잠들었어야 할 세계는 지난 8년 동안 부비적거리며 늦잠을 버티다가, 마침내 지그시 눈썹을 감고 있었다.
‘이대로 단둘이서 멸망을 직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걸.’
그때였다.
외로 누운 석양의 와불상(臥佛像)이 조용히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는 가운데 문득, 내 귓가에 발걸음이 들려왔다.
귀가 쫑긋 세워졌다.
“뭐, 이제 슬슬 문 닫아야겠군요. 흐으. 오늘은 아주 장사 망했습니다. 꿀 빨아서 좋으시겠……. 음? 왜 그럽니까, 조수?”
“…사람이 이쪽으로 오는데요?”
“오……?”
뚜벅, 소리가 한층 진해졌다. 그런데 발소리가 이상했다. 뚜벅- 탁- 뚜벅- 탁, 하고 발자국에 뭔가가 겹대어서 들렸다.
지팡이 소리였다.
“아.”
벤치에서 일어나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낯익은 노인이 지팡이로 여름을 짚어 가며 휘어청휘어청 사거리를 돌고 있지 뭔가.
나는 얼른 다가가서 노인을 부축했다.
“아니, 어르신! 오늘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반송동에서 여기까지 걸어오셨어요?”
“아이고, 우리 조수 청년은 아직도 부산에 있네. 응?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으잉? 어이고, 노도하 선생님도 아직 있네. 어쩌려고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있는 거야? 응? 어쩌려고…….”
“…….”
공방까지 노인을 부축하고 들어오자, 노도하가 어느새 작업실 안에서 평소처럼 하얀 의사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외알안경을 고쳐쓰고 진료표를 들어 올렸다.
“반송동 신수빈 환자님 아닙니까. 뭐 때문에 오셨는지……?”
“으으응. 별거 아니야. 그냥, 이, 발목보호대가 지난주부터 자꾸 삐걱거리지 뭐야. 얘가 오래돼서…….”
“흐으. 또 불편하다면서 만지작거리다가 틀어졌네요. 제가 절대로 만지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람 말씀이 우습게 들리시나 봅니다…….”
“아니, 아이고. 그게 아니라-”
“게다가 보호대가 틀어진 거 같으면 얼른 수리받으러 와야지 뭐가 그리 바쁘다고 또 일주일이나 미적거리셨는지……?”
“아휴, 미안해. 선생. 내가 미안해서 어쩌나, 이거. 으응. 어때,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오래 걸리면 그냥 됐어.”
“아뇨. 10분이면 끝납니다…….”
노도하는 연장을 꺼내 보조기기의 엇나간 부품을 두들겨 보고 조여 보며 수리했다. 그리고 환자와 시답잖은 신변잡기를 주거니 받거니 떠들었다.
평소와 똑같이.
까앙-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
슬쩍. 나는 공방 입구로 가서 바깥을 확인해 보았다.
노을이 끌고 내려오는 밤하늘에 기이한 노이즈가 끼어 있었다.
별빛 대신에 붉은 반점이 생채기처럼 반짝거렸고, 은하수 대신에 푸르른 동맥처럼 생긴 혈관이 두근두근 뛰었다.
하늘의 공허화(化). 아니, 하늘을 뛰어넘어 천체의 공허 현상. 세계멸망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별로 좋지 않군.’
노을조차 실시간으로 감염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주홍빛과 노란빛으로 물들었던 석양은, 조금씩 조금씩, 새까만 밤하늘이 흘리는 핏물이라도 된 것처럼 걸쭉한 점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저 하늘이 실험용 비커이고 거기에 붉은색 용액을 떨어트린 느낌이라면 선뜻 이해될까.
허공은 표면으로, 빛은 점액으로, 구름은 칼날로, 땅은 은하수로 변화하고 있었다.
틈틈이 강력한 괴이들을 소탕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면, 자기들끼리 멋대로 교접하고 융합하여서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현상.
밤의 여신인 누트(Nut). 이 시기의 나로서는 도통 원인을 추론하기 어려웠던 괴이이자 공허. 가끔씩 등장하는 세계 종말 시나리오였다.
이 세상의 밤이 성큼성큼,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곧 지표면의 존재들은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되리라. 앞으로 길어도, 10분이 되지 않아서.
“공방주, 이제 슬슬-”
“조수.”
뒤를 돌아봤다. 작업실에서 노도하가 환자와 함께 나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하얀 바다 한복판에 떠오른 한 쌍의 검은 섬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수빈 환자분 댁으로 데려다주십쇼.”
“…….”
짧은 시선이 오갔고 그보다 더 많은 침묵이 전달되었다.
“귀에 철심 박혔습니까? 조수. 환자분을 댁으로 모셔 주고 오시라고요. 씨팔. 안 그래도 길 험한데 갈 때 넘어지면 조수가 책임질 겁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래요…….”
노도하가 희미하게 흐, 웃었다.
“제 조수라면 그러셔야지요…….”
노인이 옆에서 계속 아이고, 난 괜찮다고, 혼자서 갈 수 있다고 계속 말했지만 노도하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노인을 가볍게 안아들고 걸어갔다.
“아휴우, 난 진짜로 괜찮은데. 하여간 노도하 선생은 너무 환자들을 생각해 줘서 탈이… 오오오오오!”
마지막쯤에 노인이 소프라노로 전직한 까닭은 물론, 내가 경공을 펼쳤기 때문이다.
노인이 똥그래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순식간에 거리의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오러를 피워올려 환자의 신체를 보호했다.
툭. 툭. 나는 무너져내린 건물 담벼락이나 신호등 따위를 밟으며 움직였다.
‘환자분을 반송동 자택으로 옮겨드리는 데까지 최대한 빨리 움직이면……. 그러고서 다시 공방으로 되돌아온다면, 아슬아슬하게 5분. 그 정도라면, 운 좋으면, 세계가 종말하기 전까지 아슬아슬하게……. 아니, 그렇지만 공방이 있는 위치까지 언제 공허가 도착할지가 변수로군.’
“청년.”
경공을 써서 움직이고 있는 도중에, 품 안에서 노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네?”
“난 이쯤에서 내려줘.”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노인을 자택에 데려다주려거든 아직 4분은 더 움직여야 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제가 모셔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됐다. 됐어. 집이 중요하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중요하지. 발목보호대도 멀쩡해졌으니까 마지막 정도는 내 발로 걸어가고 싶구만.”
“아.”
“내가 평생을 이 동네에서 살았어. 여기 이쯤에 내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 길이었거든. 수십 년을 그냥 이 길 왔다 갔다 오간 거야. 내가. 오늘도 집 안에서 죽긴 싫어서 걸어 나왔는데 아무도 없지 뭔가. 그런데 노도하 선생님이 공방에 계실 줄은 몰랐지. 정말. 참 생각이 깊으신 분이야.”
“…….”
“고마우이, 청년. 노도하 선생님이 신경 쓰이는 게지? 그럼 이 길은 청년의 길이 아니야. 우리 둘 다 갈 길 가세.”
나는 노인을 고갯길의 내리막길에 내려주었다. 노인이 어이고- 어이고- 소리를 내더니 지팡이로 아스팔트길을 짚었다.
일찍이 노도하가 사비를 들여 부산에 깔았던 1차선 도로였다.
노인은 자기 몸무게의 3할쯤을 지팡이에 얹히면서 손을 휘저었다.
“난 됐으니까 어여 돌아가.”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뭘. 내가 고맙지…….”
어이고- 툭, 어이고- 소리를 그림자처럼 끌면서 노인은 언덕길을 내려갔다.
매미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콘크리트숲의 저 너머에서부터 매미들 울음소리가 한 뼘, 두 뼘, 세 뼘, 계속해서 줄어들어 갔다.
조여오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의 밤이.
“다음에 뵙겠습니다. 어르신.”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노인을 안고 이동할 때보다 더 빠르게 이동했다.
공방의 옥상.
내가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2층짜리 건물에 불과했으나 지난 8년 동안 개축과 개조를 반복하여 5층까지 올라간 ‘도하공방(渡河工房)’의 꼭대기에, 인테리어 감각이라곤 쥐뿔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특유의 초록색 방수 페인트칠이 된 건물 옥상에.
“오…….”
노도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에 와인병과 와인오프너를 든 채.
툭. 옥상에 나비처럼 내려앉은 나를, 노도하는 당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 사람 앞에서 경공을 쓰는 건 처음이었는데도.
“제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군요. 신수빈 환자 제대로 데려다 드리고 온 거 맞습니까……?”
“어르신이 마지막 길은 자기 발로 걸어가고 싶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별수 없어서 내려드렸습니다.”
“아. 흐음. 그건 생각을 못 했네요…….”
뽕-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가 따였다.
노도하는 와인오프너째로 코르크를 옥상 담장 바깥으로 휙 던져 버렸다.
“한 잔……?”
“공방주님 컬렉션이면 주절먹이죠.”
“흐으.”
또르르- 붉은빛 액체가, 작금의 하늘을 물들인 와인빛 노을과 똑같은 점성을 기진 술이 유리를 타고 흘렀다.
“건배. 뭐, 아무튼 뭔가를 위해서…….”
“건배.”
짜안.
유리가 싱그럽게 울렸다. 붉은색 와인이 담긴 유리잔은 꼭 허공에 매달린 금낭화(錦囊花) 꽃망울 같았다.
우리는 나란히 와인잔 너머로 도시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 또한 투명한 유리의 재질로 변했기에 유리-저편의-유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제 멸망까지 5분. 길어야 6분 정도일까.
“조수.”
“예.”
“저 사실, 무기 만들 줄 압니다…….”
노도하를 쳐다봤다. 노도하는 이쪽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네?”
“무기요, 무기. 장비품? 하여간 그거 왜. 아저씨들이 하는 게임에서 캐릭터가 무기 얻으면 강력해지고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조수도 알다시피 제 능력은 [사지를 부품으로 갈아 끼워도 자기 몸처럼 느껴지게 만들어 주는 능력]인데, 흐으. 이게 사실 사지가 아니라 다른 장비들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거든요…….”
“……!”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 인간의 팔다리는 가장 최초의 연장이자 도구였다. 허면, 만일 팔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이나 창 따위를 노도하가 제작한다면?
“신검합일(身劍合一)……!”
“……? 무슨 소립니까, 그게……?”
“아. 음. 아니요……. 그냥 아무튼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서브컬쳐와 전혀 연관이 없는 순수 태생적 자발적 아싸(이 사람 마블 영화도 한 편을 안 봤다)에게 내 경탄을 전달하기란 어려웠다.
“…왜 그런 능력을 숨기고 계셨습니까, 공방주? 그럼 진짜로 타고난 대장장이 아닙니까. 당서린이 눈치 보고 천요화가 구애하며 군벌들이 전전긍긍하는 입지를 구축하셨을 텐데.”
“흐. 방금 이유를 다 말했습니다만……. 개쩌는 무기 제작할 줄 안다는 소문이 퍼지면 안 그대로 좆같이 귀찮게 구는 각성자 새끼들이 한층 더 가열차게 개좆을 비비러 오는 꼬라지가 뻔히 보이지 않으신지……?”
“아.”
“그런데 이렇게 세상이 망할 줄 알았으면 한 명쯤한테는 무기를 만들어 줄 걸 그랬습니다. 딱히 다른 놈들한테 소문 퍼트릴 거 같지도 않고…….”
“…….”
하늘이 물들었다. 빨갛게.
그리고 단두대의 칼날이 내리쳐지듯 새까만 밤이 뒤이어서 흘러내렸다. 온 하늘에 동맥과 정맥이 뻗어서, 은하수를 흉내 낸 그것의 빛깔이 꿈틀꿈틀거렸다.
“…그럼, 다음에 만들어 주십시오.”
“흐으. 그러죠, 뭐. 죽도록 귀찮습니다만. 어차피 죽을 거니까, 그 정도 귀찮음이야 이제 감수할 수 있겠습니다…….”
“꼭입니다.”
“예에. 만들어 주기 싫다면 억지로라도 만들어 달라 떼써 보시기를…….”
까앙-
옥상 저편, 사거리의 신호등 부근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철이 구겨지는 듯한 소음.
다소 장난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소리였으나 결과물은 우습지 않았다. 신호등 건너편의 모든 ‘풍경’이 밤하늘에 잡아먹혔다.
까앙, 까아앙. 까앙-
횡단보도와 건물들이 차례차례 밤의 공허에 잠겼다. 한입 먹혀 버린 사과처럼 건물의 윗부분이 잘려 나갔다.
300미터, 250미터, 180미터, 120미터. 순식간에. 사방에서, 새까만 밤하늘이 공간을 게걸스럽게 먹어 해치우며 엄습해 왔다.
세계의 품은 이제 겨우 우리 두 사람의 숨소리만 받아들일 정도로 좁아져서.
“조수.”
“예.”
“고맙습니――.”
쨍그랑.
마지막으로 들린 소리는, 노도하가 들고 있던 와인잔. 어쩌면 내 와인잔이 밤하늘의 이빨에 베어 먹혀 깨진 소리였다.
유리에 반달이 졌다.
그리고 세계가 눈을 감았다.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