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9)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9화(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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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론자 Ⅱ
신노아
4
과거 회차에서도 중국은 여러 번 다녀왔다. 가깝기도 했고, 무협에 미친 어떤 영감탱이 때문에 화산(華山) 갈 일도 있었고.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북경은 속된 말로 내 나와바리에서 살짝 벗어난 곳.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무한 회귀자에게 불가능이란 얼마 없다.
82회차부터 85회차까지 총 4회차에 걸쳐 면밀한 현장답사 끝에 비로소 ‘베이징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완성했다.
“먼저 인천에서 배를 구해다가 톈진항까지 갑니다.”
“저기, 장의사 씨, 저, 배를 타 보는 건 처음이라서, 속이, 조금, 앗, 위험, 아-”
우선 청량한 인천 앞바다의 파도소리를 ASMR로 틀어 둔 뒤 (중간중간 노이즈가 좀 있었다) 그대로 황해를 건너갔다.
“다음, 이대로 지상으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괴이들이 너무 많더군요. 뚫으려면 뚫을 수 있지만 그럼 너무 이목을 끌어 버리니 지하로 이동하는 편이 좋습니다.”
“잠깐만요. 지하요……?”
“네. 중국 각성자들이 베이징 지하철에 아지트를 차려 놨거든요. 뭐 하십니까? 어서 이쪽으로 오시지 않고.”
“저기, 저, 사실 폐소공포증이 약간 있는데, 장의사 씨, 아, 음, 앗, 위험-”
괴이들에 의해 초토화되어 버린 베이징을 아직 탈출하지 않은 각성자들은 이른바 ‘북경해방돌격대’를 결성하였다.
그들이 장악한 역사들 가운데 내가 눈여겨본 츠취역(次渠站).
이곳의 역장 겸 돌격대 17대장을 맡은 사람은 참 말이 잘 통하는 인격자였다.
츠취역 역장은 베이징 방언을 이토록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외국인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품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나에 대한 호칭은 ‘이 새끼’에서 ‘당신’으로 승격했다.
한동안 그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괴이가 내 칼질 한 방에 계란말이처럼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자, 호칭은 ‘선생님’으로 한 단계 더 레벨업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선물용으로 가져온 최고급 보이차를 선물했을 때, 역장은 비로소 우리들이 설령 국적은 다를지언정 먼 옛날 함께 공맹의 도를 모시던 신앙의 형제임을 기억해 냈다.
“장 형!”
“아우!”
돌격대 17대장이 나한테 발부해 준 신분증은 프리패스 여권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곧바로 베이징에 진입했다.
“…그냥 뇌물 아닌가요?”
“어허.”
뇌물이라니. 형제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물을 누가 뇌물이라 부른단 말인가?
나는 그저 선의로 조그마한 찻잎을 선물했을 뿐이요, 상대방은 마땅히 선심으로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혹자는 중국의 꽌시 문화를 그들만의 리그라며 불평하지만 이는 전부 동아시아의 좋은 전통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회귀자 짬밥을 많이도 처먹은 나에겐 비단 다도(茶道) 이외에도 수많은 덕목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먼저 동아시아의 전통 놀이인 바둑을 빼놓을 수 없었다. 하루 삼시세끼보다 바둑이 더 좋은 해방돌격대 10대장은 나와 한 판을 뜬 뒤에 ‘동방에서 국수가 찾아왔음을 내 이제야 알겠습니다!’ 하고 덥석 악수를 잡았다.
다음은 서예. 무릇 사람의 인격은 손글씨에서 다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철학을 가진 1대장은 내가 화선지에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라고 휘갈겨 쓴 필체를 보고 그 자리에서 공수례를 올렸다.
“이 웅혼하면서도 단정한 해서를 보라! 실로 안진경의 환생이구나!”
물론 나는 사람의 도리를 아는 놈이었다. 이만한 극찬을 받았는데 어찌 교만하게 굴겠는가?
이런 이벤트마다 우리는 소소하게 보이차(빙도노채冰島老寨, 첫물차)를 마시며 훈훈하게 덕담을 주고받았다.
북경에 도착하고 나서 정확히 48시간 뒤, 나는 해방돌격대가 지닌 정보망에 자유로이 접속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직관한 성녀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장의사 씨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누구든 10분 안에 친해지는 재주를 가지셨군요.”
그녀는 ‘이게 인싸의 삶?’이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허, 처음이라뇨. 무려 4회차 동안 탐색해서 만들어 낸 최단 공략 루트입니다.”
“과연. 그럼 이것도 엄밀히 말해서 저의 첫 번째 해외여행이 아니겠네요. 이전 회차들 중에서 장의사 씨와 함께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을 테니까요.”
“아니요? 처음인데요?”
“네?”
“성녀님 혼자서 북한 지역 넘어갔던 적은 있었는데 바다 건너 여행하러 오신 건 처음일 겁니다. 제가 왜 4회차씩이나 투자해서 최단 루트를 찾아냈겠습니까. 처음이신 여행 최대한 편안하게 모셔 드리려고 한 거지요.”
“…….”
“뭐, 세상이 이런 꼬라지라서 최대한 편해 봤자 이 정도입니다만. 그래서, 성녀님. 어떻습니까? 저희가 찾는 괴이가 좀 보입니까?”
“…잠시만요.”
후우. 성녀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 그녀에게 맡겨진 역할은 단 하나였다. 레이더.
아무리 돌격대들이 베이징의 지하로 숨어들었다지만 지상을 감시하는 인력은 도처에 깔려 있었다.
17대장은 1대장-10대장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으며 10대장은 6대장-8대장-9대장과, 1대장은 2대장-4대장-5대장과 친분이 깊었다.
그들의 ‘선심’과 나의 ‘선의’가 합체하여 지금 이 순간, 평소에는 돌격대원들이 게을리하던 지상 관찰 임무가 고도의 중요성을 가지고 실행되었다.
그리고 성녀의 이능은 [천리안].
지금부터 정확히 10분 동안, 성녀는 북경 시내 전역을 빈틈없이 관찰할 수 있는 전지적 관찰 시점을 획득하였다.
“…….”
1분.
“…….”
2분.
“…….”
3분.
“찾았어요.”
성녀가 눈을 떴다.
10분조차 필요없었다. 남은 7분의 여유는 우리 콤비의 유능함을 시간이라는 척도로 표시해 놓은 수치였다.
“어디입니까?”
“천단공원(天壇公园).”
운까지 좋았다. 가까웠다.
“알겠습니다. 그럼 성녀님은 여기 지하에 대기하면서 저한테 메시지를 계속 쏴 주십시오. 제가 얼른 끝장내고 돌아…….”
“저도 데려가 주세요.”
꾹, 성녀가 내 팔뚝을 잡았다.
“장의사 씨가 싸우는 모습을 천리안이 아니라 직접 제 눈으로도 보고 싶어요.”
“…음. 위험하실 텐데.”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최단 루트라고 하셨잖아요. 믿을게요. 그리고.”
성녀가 희미하게 숨을 흘렸다. 그것이 그녀가 미소를 짓는 방법이었다.
“기껏 생애 첫 번째 해외여행을 왔는데 눈으로 본 게 바닷물이랑 지하가 전부라면, 지금의 저뿐만 아니라 나중 회차들의 저도 조금 억울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안 그런가요?”
거절할 수 없는 명분이었다.
5
천단동문역 계단을 밟고 뛰어오르자, 지상에선 뇌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소음이 귀를 때렸다.
뇌우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베이징 전역에 회오리가 불었다.
“환영 인사치고는 좀 과격하군요. 성녀님, 꽉 잡으십시오.”
[네.]사방에서 폭풍우 때문에 시끄러운 탓일까. 성녀는 육성이 아니라 텔레파시를 써서 얘기했다.
나는 성녀를 안은 채 천단공원을 향해 달려갔다. 내 목에 그네처럼 매달린 성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세상은 먹구름이었다.
한때 반듯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을 공원의 중앙대로는 양옆의 숲에서 녹빛 송백나무, 회화나무, 은행나무가 스며들었다. 마치 오래된 철검에 녹이 슬어 버린 듯이.
나는 칼날의 정중앙을 질주했다.
-크҉르҈͎̙̟̰̔̽̚҉҉르҉?҉ ҈͎̙̟̰̔̽̚그҉҉르҉҉҉?
-가҉҉҉륵҉르҉҉르҉҉?
나무만큼이나 많은 것이 괴이였다.
번개가 쳤다. 숲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제 지구에선 저들이 만물의 영장.
그것들은 나무뿌리를 밟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우듬지에서 똬리를 틀어, 자신들이 재패하고 있는 지상의 영역으로 겁도 없이 뛰어든 구시대의 종족을 내려봤다.
그 시선의 각도가 오래 유지되진 못했다.
“조금 흔들릴 겁니다.”
[네.]일섬. 거추장스러운 나무들을 단번에 베어 냈다.
나를 상징하는 묵빛 오러가 대로를 따라 해일처럼 스치었다. 나무에 기생하던 괴이들이 단번에 지면으로 내려왔다.
과연 인류 유수의 대도시 중 하나를 점거한 괴이들답게 착지하면서 균형을 잃진 않았으나, 별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일격. 눈높이가 엇비슷해진 괴이들의 목을 일제히 갈랐다.
인류의 대로가 다시금 길이 되기까지엔 두 번의 칼질로 충분했다.
[…굉장해.]성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천리안으로 훔쳐보던 것과 전혀 달라요. 대단하시네요.]“과찬이십니다. 이래 봬도 무술에는 재능이 없다고 타박을 많이 들었는걸요.”
[말도 안 돼요. 장의사 씨가요? 농담이시지요?]나는 슬며시 웃었다.
“정말입니다.”
실제로도 나에겐 무재가 없었다.
내게 없는 재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보이차와 녹차가 색깔을 빼면 뭐 그리 다른지 몰랐으며, 바둑의 포석을 몰랐고, 먹을 갈아 붓을 잡는 필법을 몰랐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것이 부족했다. 나에겐 다른 사람들의 시야를 빌려 쓰는 재주 따윈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내게 언제나 동료가 필요한 이유였다.
동료가 나에게 속삭였다.
[아, 저기서 왼쪽으로-] [오른쪽이요. 네, 더 오른쪽으로.] [네. 이대로 직진하시면, 되어요.]성녀의 인도에 따라 숲길과 괴이를 베어 도착한 곳은, 천단 북쪽에 우뚝 솟은 탑, 기년단이었다.
벼락이 쏟아져 건물은 이미 거진 무너졌다. 그러나 기둥들만은 위태롭게 서서, 기도를 올리는 손처럼 하늘을 향했다.
그 정중앙에서 용오름이 솟구치고 있었다.
[저곳이에요, 장의사 씨. 지금 도시를 뒤덮은 다른 토네이도들은 전부 저 토네이도에서 비롯하고 있어요.]“예. 그런 것 같군요.”
천단은 영어로 천상의 사원(Temple of Heaven)이라 번역된다.
오래전부터 인류는 하늘에 누가 제사와 기도를 올리느냐로 자신의 권력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저곳에서 천상을 향해 솟구치고 있는 토네이도는 괴이들의 승전보나 다름없으리라.
나는 오러로 시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폭풍의 정중앙에서 감지되는 존재를 바라본 뒤,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왜 웃으시나요?]“아니요. 그냥, 괴이들이 참 괴이들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토네이도 한복판에는… 자그마한 사파이어색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푸른 날개. 모르포 나비.
저것이야말로 용오름의 정체.
현시대의 천자를 참칭하는 괴이였다.
아마도 이렇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저 ‘나비’로부터 비롯한 토네이도 중 몇몇이 베이징을 넘어서서 지구 반대편까지 향했겠지.
‘…문자 그대로 나비효과군.’
나는 지팡이칼을 쥐었다.
평소에는 지팡이로 쓰고 다니다가 여차하면 손잡이를 돌려 칼날을 뽑아내는 검으로, 내가 애용하는 무기였다.
어쩌다 이런 특이한 검을 쓰게 되었는지는 언젠가 얘기할 기회가 따로 오겠지.
지금은 그저 이 검이 베고 있는 대상에 관해서만 간단히 말할까 싶다.
내 존재를 감지했는지 나비가 갸웃, 날개를 흔들었다.
-한҉대҉҈҉기҉을҉҉징҉҉҉҉마҉의҉҉짓҉҉구҈҈҈҈҈҉편҉이҉҉도҈҉҉҉킬҉҉수҉?
바람이 휘몰아쳤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천둥소리가 아연히 울리는 와중에 묵빛의 검격이 한 줄기, 아무런 소리 없이 세상을 스쳤다.
칼날은 지구에서 새로운 영장을 자처하는 한 마리의 나비를 찢어발겼다.
-비҉҉҉하҉네҉҈를҉҉까҉베҉여҉҉҉҉있҉҉҉지҉토҉반҉҉҉҈생҉서҉҉҉리҉҉!
비명이 울렸다.
아마 인간어로 번역해 보자면 ‘이건 반칙이지, 회귀자 새끼야’ 정도 아니려나.
하지만 천자를 참칭하는 이상 역성혁명의 쓴맛을 보는 것 또한 역사의 순리. 나는 지구에 어서 오라며 환영해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폭풍과 뇌우, 용오름이 울부짖더니 어느 한순간 거짓말처럼 세상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아.]먹구름이 잦아들면서 마지막 소나기가 와락, 쏟아졌다. 빗방울들에 햇빛이 투명한 그림자처럼 깃들었다.
[…예쁘네요.]사방으로 퍼트려 놓은 내 기감에는 여전히 무수히 많은 괴이들의 기척이 잡혔다. 아마, 자신들의 보스가 죽었다는 걸 깨닫고 이곳으로 떼거지로 몰려들겠지.
하지만 그것들이 햇빛보단 빠르진 못했다.
우리에게 잠시 주어진 휴식 기간 동안, 성녀는 내 품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행 떠나길 잘했어요.”
성녀의 신발 아래로 물소리가 찰랑거렸다. 그건 꼭 작은 물고기가 어항에서 나와 시냇물로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는 소리랑도 닮았다.
성녀가 뒤를 돌아보고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 말없이――오직 나에게만 들리는 말소리로――말했다.
[구국의 성녀가 당신의 위업을 칭송합니다.]나는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그만 크게 웃어 버렸다.
놀랍게도, 그것이 86회차에 달하는 시간까지 오는 동안 내가 처음으로 들어본 성녀의 농담이었던 것이다.
5
후일담이 있다.
결정론자로서의 내 철학적 신념에 의거할 때 나비효과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괴이였다.
그러나 나 역시 인간. 이따금 매번 반복되는 인생에 질릴 때도 간혹 있었다.
이럴 때면 인과의 흐름을 비틀어서까지 마구잡이로 변수를 만들어 내는 나비효과도 썩 나쁘지 않았다.
아무렴 괴이도 써먹기 나름 아니겠는가.
나는 어느 회차에서든 되도록 빨리, 나비효과가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는 6개월 시점 이내에 북경의 괴이를 토벌했으나, 또 가끔씩은 그냥 일부러 내버려 두기도 했다.
…나의 이런 안이한 태도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은 173회차였다.
[장의사 씨.]“예.”
[어쩌면 저는 지금까지 성좌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활동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조금 더 친숙하고 친절한 방향으로 성좌의 이미지를 쇄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아, 네. 원하시는 대로 하시죠.”
[어젯밤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무척 좋은 아이디어겠군요.”
생전 처음 들어본 제안이었으나 나는 성녀에게 기본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 별다른 생각 없이 허락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안녕안녕! 한반도의 각성자 여러분 모두 안녕! 반갑다묭!] [나는 이제부터 여러분을 위해 항- 상 감시하고 있을 성좌, 구국의 성녀다묭!] [묘오옹! 앞으로 잘 부탁한다묭!]“……….”
오. 신이시여.
나는 그만 커피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역시 괴이와 인류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존재가 맞다.
– 결정론자. 結.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