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92)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92화(9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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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파자 Ⅵ
신노아
10
백화여자고등학교.
더 정확히 말해 ‘학교괴담’이 무간의 둥지라는 징조는 꽤 많았다.
우선 학교의 풍경이 결정적 증거였다.
일찍이 89회차 때 내 의식이 잠깐 요정군주에 접촉하여 훔쳐보았던 무간지옥, 그곳의 광경이 이러했으니까.
[학교는 나무로 지어진 폐교였다. 백화百話라는 교명이 울렁거렸다.] [하늘은 새빨갰다. 깨진 유리창, 자작나무들이 하얀 살결을 유리 조각으로 그으면서 창문 안쪽 학교의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다. 학교는 하얀 꼬챙이에 꿰뚫려 온몸이 만신창이였다.]어딜 어떻게 봐도 학교괴담과 똑같았다.
물론 다른 부분도 존재했다.
가령 교명.
본래 백화여고의 백화(白花)는 흰꽃을 의미했다. ‘白’과 ‘百’은 형태야 조금 유사했으나 명백히 한자가 달랐다.
하지만 미리 강조했다시피 언어유희, ‘세상에 말로 장난치는 것’은 주술의 기본이었다.
내 추론은 다음과 같았다.
백화에서 ‘하얗다’에 해당하는 백(白)은 흰살의 나무. 즉, 자작나무들로 구현되었다.
신교사든 구교사든 이곳 학교의 복도를 걸으면 어디에서나 깨진 유리창 너머로 흰 자작나무들이 삐죽빼죽 튀어나왔다.
이들이 ‘하얗다’라는 개념을 고스란히 체현한 것이었다.
자작나무로 변해 이윽고 텅 비어 버린 백(白)의 자리엔 대신, 발음이 똑같은 동음이의어인 백(百)이 기어들었다.
간단한 말장난이지.
그렇다면 백화에서 화(花)는?
이 또한 간단했다. 무려 99개의 괴이를 토벌했음에도 불구하고 백화여고에선 딱 두 가지 사물만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감옥의 철창처럼 솟아오른 자작나무들. 그리고 흐드러지게 사방으로 만개한 피안화들.
바로 이 새빨간 피안화들이 화(花)를 앗아갔다.
현실은 괴이에게 자신의 단어들을 빼앗겼으며, ‘하얀 꽃’은 ‘붉은 꽃’으로 의미가 변질되었고, 세계는 공허에 점령당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수많은 괴이를 토벌하더라도 ‘백화’라는 이름 그 자체… 괴이의 마지막 주술은 건재한 것이었다.
“이게 내 해석이다.”
“흐와아아……. 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다른 건물들은 다 멀쩡히 옛날처럼 돌아오는데 왜 자작나무랑 피안화만 멀쩡한가 싶긴 했는데…….”
뚜벅. 뚜벅.
우리는 아무도 없는 병원을 걷고 있었다. 천장도 기둥도 바닥도 모조리 새하얗게 표백된 공간이 끝없이 이어졌다.
내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아무런 좌표도 고정시킬 수 없어 흐릿해지는 의식의 윤곽을, 나와 천요화는 서로 대화함으로써 붙잡아 두고 있었다.
“계속 걸어 봤자 똑같은 복도만 반복되네요. 출구는 없는 걸까요……?”
“조금만 더 참아 봐.”
이것이 2인조가 중요한 이유였다. 설령 전투력에서 천요화가 나보다 한참 떨어진다 해도 공허에선 혼자인 편보다 둘인 편이 아득히 유리했다.
사람이라는 세계를 이루는 기본 단위는 원자가 아니라 ‘타인과 나’라는 2인이기 때문이었다.
“으으음. 아, 맞다! 아저씨. 그럼 어떻게 해야 자작나무랑 피안화를 없애요? 그냥 다 싹독 잘라 버리면 될까요?”
“해 봤는데, 다시 자라더라.”
“으엑…….”
“저것들은 겉보기로만 나무랑 꽃으로 보일 뿐이지 그 정체는 괴이다. 웬만한 괴이들은 그냥 무력으로 토벌할 수 있지만, 물리력이 안 먹이는 놈들도 많다. 그런 놈들은 허점을 제대로 파고들어야 해.”
“허점…….”
사실, 그래서 희생자들의 장례식을 치러 줄 때 자작나무가 아니라 굳이 학교 책상 따위를 장작으로 쓴 것이기도 했다.
괴이의 몸통을 불태워서 화장하다니. 불길하기 짝이 없잖은가. 차라리 그냥 연기에서 풍기는 유독물질이 훨씬 덜 해로웠다.
“우음. 근데 그렇게 따지면……. ‘백화’라는 괴이의 허점은 오리무중 아닌가요? 다른 귀신들처럼 막 움직이지도 않고, 정체가 뭔지도 모르겠고. 아. 혹시 지하 4층에 허점이 숨겨져 있는 거예요?”
“비슷하지.”
뚜벅. 내 발걸음을 쫓아서 조금 더 가벼운 발소리가 뚜벅, 울렸다.
이곳에 진입했을 때 주의했던 대로 천요화는 정확히 똑같이 내 발소리에 맞추어 움직여 주고 있었다.
“여기서 멈춘다.”
“앗, 넵.”
“앞으로 10걸음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몸이 불편하면 지금 편한 자세를 찾아 둬라. 꼭 10걸음을 채워 두고.”
“……? 어,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요?”
“여기서 10걸음을 더 걸으면 딱 4,444번째 걸음이 되거든.”
“…….”
나는 트렁크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양초들을 하나하나 꺼내어서 주변에 늘어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엔 정확히 100개의 양초들이 꼭 자작나무숲처럼 늘어섰다. 나는 양초 한복판에 앉았고, 천요화를 내 맞은편에 앉혔다.
탁-
손가락을 튕기자 일백의 양초가 일제히 화르륵 촛불을 켰다. 오러의 운용이었다.
“아저씨, 이건…….”
“요화야. 우리는 이제부터 의식을 거행할 거란다.”
“…….”
“열 걸음은 다 채웠고?”
“네.”
“아까 자작나무와 피안화의 허점이 뭐냐고 물었지? 지금부터 우리가 집중할 의식이 바로 허점이 되어 줄 거다. 의식은 간단해. 친구들이랑 여름에 어디 놀러 갔을 때 괴담 같은 거 떠들어 본 적 있어?”
“네, 있어요.”
“그래. 그거랑 똑같아. 여태까지 너랑 내가 제령한 귀신들, 다른 학생들이 물리친 귀신들. 다 더해서 ‘99개’의 괴이들. 그것들에 대해서 너랑 내가 한 번씩 번갈아 가면서 얘기할 거란다.”
“…….”
“그럼 너부터 시작하렴.”
“아, 네. 음. 그러니까, 제가 직접 본 귀신인데요. 얼마 전에 학교 4층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콩콩콩-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희미하게…….”
고요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귀신 이야기가 흘렀다. 깜빡, 깜빡. 백 개의 촛불이 흔들렸고 하얀 병원 복도의 조명이 웅웅거렸다.
지상의 붉은 불과 천장의 하얀 불 사이에서 천요화가 멍하니 내 쪽을 바라보았다.
“…제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에요.”
“좋아.”
탁.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촛불 하나가 픽 꺼져 버렸다. 회색 연기가 가느다랗게 천장을 향해 올라갔다.
“아…….”
“이제 내 차례구나. 내가 직접 본 경험담인데, 백화여고 남자 화장실 3번째 칸에는 하나코 귀신이 살아. 그 변기칸에 들어가서 13번 돌고 나면…….”
하나. 둘. 셋. 넷.
촛불들이 하나씩 꺼져 갔다. 그때마다 작은 연기가 하늘로 공양되었고, 말라비틀어진 촛심이 새까맣게 악취를 풍겼다. 천요화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깜빡-
천요화가 이상 현상을 깨달은 것은 40번째 불꽃이 꺼질 즈음이었다.
“…아저씨, 저기. 복도 불이.”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마.”
병원 복도의 조명이 꺼지고 있었다.
저 멀리. 복도 끄트머리부터, 하나씩. 1미터씩.
지하 4층의 지옥엔 출구도 창문도 없었다.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았던 병원 복도는 불이 꺼지고 나면 칠흑의 어둠이었다.
“계속하자. 네 차례다.”
“…네.”
깜빡.
복도의 어둠이 숨을 쉬며 좁혀오고 있었다. 양쪽에서. 발소리를 쫓는 발소리처럼, 우리가 숨을 쉴 때마다 그것들의 숨소리도 한 뼘씩 가까워졌다.
“제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인데요, 크라슈라고, 몸통은 없고, 머리통에 내장만 달린 귀신이…….”
깜빡. 깜빡. 깜빡. 깜빡-.
우리는 이야기에 속도를 붙였다. 그러자 어둠의 발걸음도 조금 더 빨라졌다. 조명이 나가 버릴 때마다 천요화가 흠칫거렸다.
“제 이야기는… 이렇게 끝, 이에요.”
어느덧 주위가 싸늘해졌다.
의식을 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끊임없이 반복되어서 영원토록 이어지던 병원 복도의 폭은, 이제 겨우 한 폭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
“…….”
깜빡-
복도를 비추는 조명은 단 하나.
촛불 역시, 99개는 어둠에 파먹혀 버린 채 오직 나머지 1개만 버겁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좋아. 이제 내 차례…….”
“아저씨는.”
천요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 학교 경비원 아니시죠?”
“…….”
“약간 이상했어요. 저도 기숙사에서 살면서 쭉 생활했는데, 웬만한 경비원분들 얼굴은 다 아는데. 아저씨 얼굴은 처음 봤으니까요. 처음 만났을 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복도 입고 계시고 손전등도 들고 계시고 그래서, 그냥 최근에 고용되신 경비원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다른 애들한테도 몰래 물어보니까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그렇지만 우리를 계속 도와주시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니야.”
어차피 지하 4층은 학교가 아니었다. 병원의 형상이었지. 더 이상 ‘학교 경비원’의 롤플레잉을 지속할 필요가 없었다.
“역시. 그럼… 왜 저희들을 도와주신 거예요?”
“이곳에 내려앉은 공허. 학교괴담. 무간지옥을 토벌하기 위해서다.”
“무간지옥…….”
“하지만 내 정체에 대해선 내일쯤 얘기해 주마. 지금은 너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괴이를 토벌하는 데 집중하자꾸나. 나를 믿어 주겠니?”
“…….”
천요화의 주황색 포니테일이 촛불처럼 까닥거렸다.
“네. 물론.”
“좋아. 그렇다면 마지막 이야기를 해 볼 차례구나. 이건 일본 쪽 귀신 이야기인데, 혹시 백 가지 이야기라고 들어봤니?”
“백 가지 이야기요?”
100가지 이야기.
일본어로 백물어(百物語), 햐쿠모노가타리(ひゃくものがたり)라고 부르는 공포설화였다.
“이 귀신을 부르는 방법은 간단하단다. 사람들이 모인 다음 촛불을 백 개 켜 놓고 서로 돌아가면서 귀신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불과 연기에 흘리는 거지.”
“…….”
“그래. 지금 우리처럼.”
하나 남은 촛불이 흔들렸다.
“설화에 따르면 100개의 촛불이 전부 꺼져 버리면 마지막 100번째 이야기를 한 화자가 죽어 버린다지.”
“죽는다……”
“혹은 귀신이 출현한다거나. 우리는 이미 지하 4층의 저승에 있다. 저승에 있는 사람이 다시 또 한 번 죽을 수는 없으니, 귀신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
“…….”
“그런데 여기서부터 재밌어진단다. 원래 설화에선 100가지 이야기의 끝에 등장하는 귀신을 아오안돈(靑行燈)이라고 해서, ‘푸른빛 등’을 켜야만 나온다고 하거든.”
깜빡.
나는 손전등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푸른색의 LED 조명이 어둠을 훅- 훑었다.
“하지만 이곳에 강림하게 될 귀신은 아오안돈이 아니란다.”
“그럼요……?”
“여기 학교의 교명은 백화야. 하얀 꽃이란 뜻이지. 그렇지만 아까 말했지? 학교괴담이 도래하면서 백화(白花)의 글자가 강탈당했다고.”
나는 붓펜을 꺼내 들어 복도의 하얀 바닥에 글자를 써 내렸다.
“공허란 빈자리다. 본래 세계가 있던 자리를 강탈하여, 빈틈으로 만들어 낸 다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지. 그렇게 글자가 빼앗겨 버린 자리에 새롭게 들어온 백화의 문자는…….”
百話.
일백 개(百)의 이야기(話).
“…….”
“한자는 나라마다 용법이 미묘하게 다르거든. 일본에서는 ‘이야기’라는 개념을 물어(物語)라는 두 글자 한자로 표현한단다.”
나는 붓펜을 놀렸다.
“가령, 아라비안나이트로 유명한 천일야화를 일본에서는 천야일야‘물어’(千夜一夜物語)라고 번역하지. 반면에 우리나라에선 간단히 천일야‘화’라고 번역하고. 요컨대 일본에서 ‘물어’ 두 글자로 표현하는 개념이 한국에선 ‘화(話)’ 한 글자로 대응하는 거란다.”
“그럼……. ‘100가지 이야기’라는 괴담은 우리나라식 용법으로 표현하면…….”
“백화(百話)지.”
말 그대로.
백화여자고등학교를 잡아먹은 괴이.
여태까지 ‘학교괴담’이라 불러왔던 괴이의 진정한 이름.
과거 내가 무간이라 지칭했던 소외신급 괴이의 또 다른 정체.
“99개의 귀신들을 수하로 거느린 채 웅거하는 백귀야행(百鬼夜行). 99개를 아우르는 두목이자 하나의 전체. 이 학교의 본래 이름을 강탈했고, 그래서 세계의 일부를 잠식한 대공허. 백화(百話)야말로 이 지옥의 마지막 귀신이다.”
탁-
촛불이 죽었다.
조명이 꺼졌다.
어둠이 웃음을 흘렸다. 까마득한 연기 내음은 어둠의 끝없는 아가리에서 흘러나오는 체향이었다.
깜-빡.
어둠 속에서 찰나가 움직였다. 우주는 본디 어둠이었으므로 그것은 본래 시간과 공간이 거행할 적의 색채였다.
백 개의 사그라진 촛불은 한순간에 자라나서 새하얀 숲을 이루었다. 자작나무의 숲이었다.
나무의 흰 살갗에 불이 붙었고 불길은 곧 피안화가 되어 만개했다. 새빨간 불길이 요정의 얼굴로 변하여 백 마리의 요정이 깔깔깔 웃었다. 웃음소리는 이러했다.
화(話)는 화(花)로 피어나매 화(花)는 화(火)로 타오르노라. 타오르라, 타오르라. 세상 만물은 아득히 평등하나니. 그렇다면 백 가지 이야기가 백 송이의 꽃이 되어 백 줄기의 불길이 되지 못하랴…….
좌표가. 시간이. 공간이 형해화되면서 존재가 일그러졌다.
“아저――.”
“괜찮아.”
덥썩, 나는 천요화의 손등을 잡았다.
“내가 있다.”
“…….”
천요화 역시 나의 손을 꾹 잡았다.
이로써 좌표는 고정되었다.
그 순간, 우주의 형형색색한 불길이 멈추고 요정들이 웃음소리를 거두었다. 은하수가 흘렀다. 백 개, 천 개, 만 개, 억 개, 항하사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무간.”
삼라만상이 자지러졌다.
-예상외의 접촉.
-일전에 계산한 적 없는 가능성.
-무간.
-무간지옥.
-올바른 이름입니다.
-그릇된 이름입니다.
-이 또한 하나의 난수.
색채들이 숨을 쉬었다. 별빛들이 원무를 춤추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지나치게 거대한 변수.
-어떻게 우리의 존재를 인식했는지?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파악했는지? 어떻게 우리의 위치를 특정했는지?
이 세계를 단지 거대한 실험실로 여기고, 그렇기에 요정이란 단말기들을 만들어 내 튜토리얼 실험장으로 파견한 소외신이 질문했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괜찮냐, 요화야?”
“…네. 조금 어지럽지만, 생각보다 의외로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천요화가 손깍지를 풀고 허리를 구부렸다. 꽈악- 적흑색 농구화의 신발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컨디션 최고네요. 지금이라면 40분 내내 전력 질주해도 좋을 정도예요. 아무튼 저, 이상한 은하수가 저희 학교 애들을 죽인 흑막이란 거잖아요. 쳐죽여 버리겠어요.”
“멋지군. 그럼 전직 학교 경비원의 전투력을 시연해 주마.”
보스전.
소외신급 위험도.
무간(無間).
전투 개시.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