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nfinite Regressor, But I’ve Got Stories to Tell RAW novel - Chapter (96)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96화(9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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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파자 Ⅹ
신노아
19
천요화의 귀신몬 수집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엔 도감 수집률이 벌써 80%에 육박했다.
승리는 이미 확정되었다.
다만 귀신이 한 마리씩 모래시계(몬스터볼 대용)에 투옥될 때마다 세계가 살짝 맛탱이가 가 버린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넹? 세계가 좁아지고 있다고요?”
“그래. 직접 보는 편이 빠를 거다.”
나는 비행정에 천요화를 태우고 날아올랐다.
사보이아 S-21, 뒷좌석 개조판. 붉은돼지가 탔던 수상기를 개조한 비행기 되시겠다. 원래 일본에 돌아다니는 괴이인데 내가 심심할 때마다 끌고 왔다.
“와아, 날개가 두 겹! 완전 멋져!”
“네가 뭘 좀 아는구나.”
“헤헤. 넹! 옛날에 엄마가 뭔가 되게 별로인 물건을 상대방이 엄청 뿌듯하게 소개하는 거 같으면 무조건 마구마구 칭찬하라고 알려 줬거든요!”
“……?”
비행정이 날아올라 제주도를 넘어 동중국해에 다다랐다. 한창 떠들썩하게 꺄꺄- 거리던 천요화가 “엑” 하고 수평선을 가리켰다.
“아저씨! 저게 뭐예요?”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거대한 안개의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영화 미스트에나 등장해야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짙은 안개. 그것이 수평선을 따라 바다와 하늘의 저편을 모조리 뒤덮었다.
“세계의 경계선이란다.”
“겨, 경계선?”
“나도 깨달은 지 얼마 안 됐어. 아마도 추측하건대, 네가 무간한테서 귀신의 통솔권을 탈취해올 때마다 세계의 크기 자체가 조금씩 좁아지는 것 같다.”
“히에에에엑…….”
“가까이 가 보마.”
트르르릉! 엔진이 딸꾹질했다.
내 비행정이 ‘안개벽’에 가까워졌다.
“와. 진짜 아무것도 안 보여…….”
“이미 시험해 봤다만 저 안개 속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더구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야. 며칠 전엔 좀 더 멀리까지 갈 수 있었는데, 네가 귀신을 1마리 더 봉인하니 여기까지 범위가 졸아들었다.”
“으와. 그런데 이러면 무역 같은 건 어떻게 이뤄져요? 아저씨 해외배송도 자주 시키고 그러던데 뉴스에선 조용했잖아요.”
“그게 흥미로운 부분이지. 봐라.”
스르륵-
안개 너머에서 거대한 뱃머리가 출현했다. 컨테이너 화물선이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안개벽 너머의 항로에서 미끄러져 나오고 있었다.
“에에에엑?”
“봤지? 우리 둘을 제외한 이 세상의 나머지 모든 사물, 생명은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다. 단지 ‘안개벽 안쪽’의 세상에서만 형성될 뿐이야.”
“어어, 조오금 혼란스러운데요……. 그러니까, 사실은 안개벽 안쪽의 세상만 존재하는데, 꼭 안개벽 바깥도 멀쩡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되어 있다… 는 건가요?”
“아마도.”
비행정이 안개벽에 스치듯 비행했다.
“이 세계는 무간이 자아낸 환상과 비슷하니 말이다.”
천요화가 봉인하고 있는 백화(百話)의 귀신들은 단순히 낱낱으로 떨어져 존재하는 괴이들이 아니었다. 다 무간의 편린이었다.
그것들을 무간으로부터 약탈한다는 것은 ‘존재의 일부’를 가져오는 행위.
“인간으로 따지면 기억을 빼앗아오고 컴퓨터로 따지면 데이터를 뺏어오는 셈이나 다름없지. 이 세계, 이 환상을 만들어 내야 하는 무간의 리소스가 점점 더 부족해지고 있다는 것이 내 해석이야. 이제 세계는 한반도 주변밖에 안 남았다.”
“그렇구나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저 존재를 따라 하고 흉내 낼 뿐인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기도 해.”
“…….”
급격하게 천요화의 말수가 적어졌다. 하긴 이만한 괴이 현상을 보면 사람들은 압도되기 마련이었다.
“…슬슬 돌아가요, 아저씨. 추워요.”
“잠깐만 기다려 봐라. 보여 줄 게 아직 하나 더 남았어. 이거 안 보면 후회할걸.”
“……?”
“지금.”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태양이 사몰하고 있었다. 서편으로 넘어가던 태양, 아마도 정말로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을 터이고 이 좁은 세상에서 보일 뿐인 환상의 구체. 그 거짓된 태양이 안개벽을 넘어서려는 순간―― 하늘과 바다를 가로막은 안개구름이 일순, 노을빛에 물들어 온통 붉어졌다.
뒷좌석에 짧은 헛숨이 흘렀다.
“…예쁘다.”
하늘에 몇 점 흘러가지 않는 구름 대신 세상의 경계선을 통째로 자기 거울로 삼아 버린 석양은 장렬했다. 태양이 죽어가며 흘리는 피를 안개벽은 게걸스레 다 받아마셨다.
세계의 서쪽은 온통 노을이었다.
그리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태양은 완전히 안개벽 너머로 침몰했다. 노을 또한 사라졌다.
해의 조용한 투신자살을 목격한 자들의 여운이 비행운처럼 길게 남았다.
“…왜 저런 노을이 생겼을까요? 안개벽은 진짜 안개가 아니라 그냥 오브젝트일 텐데.”
“글쎄. 나도 모르겠다. 모조리 환상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조차 저 안개벽의 노을은 특히나 환상이지. 그래도 아름답지?”
“…네, 무척이나.”
“한 번의 환상은 미몽에 불과하단다. 그렇지만 환상 속의 환상을 꿈꾸는 것은 아름답다고, 어째선지 우리 인간들은 느끼게 되어 있어.”
“…….”
엔진이 울었다. 백화여고로 돌아오는 내내 천요화는 내 말에 머무르는 듯 조용했다.
그저 기숙사로 돌아갈 적에 한마디 내뱉었을 뿐.
“…고마워요. 아저씨. 저, 어떤 귀신을 마지막으로 잡아야 하는지 알게 된 것 같아요.”
여름이었다.
나무마다 매미들이 떨어져 죽었다. 땅바닥에 뒹구는 사체를 익명의 새와 벌레가 주워 먹었다. 늦여름이 더디게 죽음을 외는 계절, 세계는 통째가 밀실살해의 현장이었다.
가을이었다.
여름에 죽은 사체들 위로, 단풍나무들이 발개진 손바닥을 잘라다가 덮어 주었다. 세상 곳곳이 장엄한 순장(殉葬)이었다. 우리는 저 붉은 공동묘지를 가을이라 부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배달입니다-”
나는 백화여고의 교문에까지 나가서 배달 음식 비닐봉다리를 받았다.
스스로 일당(日當), 오늘 하루의 가격을 책정해 놨을 배달원은 하늘색 헬멧을 고쳐 쓴 뒤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부르르르-
엔진이 울면서 오토바이는 교문 바깥의 차도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안개벽 너머로.
“…….”
이제 세상은 학교 담벼락의 크기.
어디를 둘러봐도 하늘은 흰 안개구름에 감싸여 있었다. 아침이 되면 선생들이 모는 자동차가 안개벽에서 스륵스륵 빠져나왔고, 저녁이 되면 똑같은 차들이 안개벽 저편으로 실종되었다.
하루가 더 지나자 이편에서 저편, 차안에서 피안으로의 거리는 학교 운동장만 했다.
공간의 끝. 시간의 숨죽임. 저기 저거, 아무것도 없어야 할 텐데. 삼라만상이 소리 없이 출몰했다가 침몰하는 수면(水面)에서 존재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잠깐, 어린아이의 손장난에 튀어 오른 물방울이 곧 존재의 무게였다. 물보라 하나하나에 세계의 노을이 깃들었다.
나는 한동안 학생회실 창밖에 우두커니 서서, 나와 피안을 가로막은 하얀 유리막을 바라보았다.
“이제 몇 마리 남았니?”
“두 마리요.”
겨울이었다.
눈이 처음으로 내렸다. 이 세계는 여름에 지어졌기에 그 눈은 첫눈이었다.
툭, 눈발이 유리창에 닿았다. 가장 조용한 노크. 창밖을 내다보면 어느덧 코앞이 싸그리 하얀 눈안개였다.
세계의 면적은 10평 남짓 원룸.
우주의 크기는 두 사람이 겨우 숨을 쉬는 학생회실로 졸아들었다.
-…….
-고옹… 고옹… 고옹…….
-오오, 오, 오, 오, 오.
달그락. 달그락. 이따금 귀신들이 몸부림치는 소리가 선반에서 자그맣게 울렸다. 안개가 뒤덮어 사라진 세계의 나머지 면적은 98개의 모래시계 유리벽이 가둬 두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1마리의 귀신.
그것을 천요화가 가만히 노려보았다.
“너는 나에게 복종해야 해.”
-미안하지만 그런 세뇌는 나한테 통하지 않아.
천요화와 똑같은 목소리.
목소리는 맞은편의 전신 거울에서 흘러나왔다. 거울엔 천요화와 같은 헤어스타일에 같은 교복을 입은 존재가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알잖아. 네가 아무리 나를 세뇌하려 해 봤자, 결국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되어 버리는걸?
도플갱어.
누군가의 그림자로서밖에 살아갈 수 없는 괴이. 그것이 천요화가 최후에 남겨 놓은 무간의 편린이었다.
“내가 왜 너야? 넌 거울에 갇힌 귀신이잖아. 나는 바깥에 있고. 넌 돌아다닐 수 없지만 난 자유로워.”
-아하. 요즘 사람들은 10평의 세상에서 옴짝달싹거리는 걸 자유라고 부르는구나? 미안. 멍청해서. 지구에서 교도소가 제일 자유로운 장소인 줄 내가 미처 몰랐어.
“바보야? 교도소에 10평짜리 방이 있으면 초호화 호텔이지.”
-아, 그래. 5성급 호텔에 머물러서 좋겠네. 정말 부럽다아.
“나 너 싫어.”
-나도 너 싫어. 역시 똑같네.
천요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끼어들 타이밍인가.
“커피라도 마시면서 쉬엄쉬엄하렴.”
“앗! 네, 아저씨… 는 배달시키신 게 아니라 직접 타 주신 거예요? 흐와. 고마워요.”
“뭘. 내 작은 취미란다.”
내게 취미는 많고도 많았으나 그중에서 제일은 바리스타.
상대의 입맛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카페인을 폭격하는 일보다 보람찬 일은 없을 터.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천요화의 혓바닥은 ‘커피는 쓴맛이지’파와 ‘커피는 단맛이지’파 사이에서 탕평책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에스프레소? 이게 커피야? 한약이잖아. 마키아토? 설탕물인데.
천요화는 좌파와 우파의 대통합을 외치면서 신당을 창설했다.
당연히 양측 모두한테서 비난을 받게 될 운명이었으나 늘 제3당을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천요화도 근거 없는 자신감에 넘쳤다. 당명은 ‘더블 에스프레소 크림라떼’였다.
크림은 섞지 않고 아이스크림처럼. 초콜릿을 얇게 썰어다가 살짝 얹혀 준다. 초콜릿은 카카오 70% 이상 90% 미만. 스스로 마셔 가면서 조금씩 크림을 섞어 가므로 빨대나 스푼도 곁들여서. 자, 완성.
“맛있어어어…….”
천요화가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커피가 잘 타면 이렇게나 충실한 느낌이 드는구나……. 아저씨, 이거 매일 아침마다 타 주시면 안 돼요? 요즘엔 아저씨가 타 준 커피가 없으면 점심쯤부터 막 머리가 멍해져요.”
“극찬 고맙다. 그런데 해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아도 쉽지 않아.”
“왜요?”
“여긴 문명이 멀쩡해서 원두랑 크림, 초콜릿 구하는 게 워낙 쉬웠거든. 이제 현실로 돌아가면 가끔씩밖에 못 타 줘.”
“히잉. 현실로 돌아가기 싫은 이유가 하나 더 늘어 버렸잖아요…….”
-헤에. 얼마나 맛있길래 그래? 나도 한 잔 주면 안 될까, 아저씨?
“닥쳐.”
천요화가 뇌까렸다.
방 안의 온도가 한 칸 내렸다.
“진짜로 죽여 버리기 전에.”
-…….
달그락달그락달그락.
선반 위에 놓인 98개의 모래시계들이 작게 흔들렸다. 탁자 한복판에선 스텐 전기포트가 물을 끓이며 들썩거렸다.
후우우. 천요화가 커피로 달구어진 입김을 불어 방의 온도를 조용히 되돌렸다.
“고마워요, 아저씨.”
“음? 커피는 내 취미니…….”
“커피뿐만 아니라요. 그냥, 전부요.”
“…….”
“아저씨가 비밀이 많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요. 저희 학교가 어떻게 되든 간에 분명히 아저씨는 무시하고 내버려 둘 수 있었어요.”
눈보라가 쳤다.
“가끔 아저씨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해요.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니까. 이런저런 망상을 자주 하거든요.”
“그렇구나.”
“저는 어릴 때부터 귀신이 무서웠어요.”
하얀 안개에서 하얀 눈이 출몰하여 하얀 창문을 때렸다. 때리고 난 뒤의 눈발들은 바람에 쓸려 다시 안개 저편으로 사라졌다. 하얘서 있어졌고 하얘서 없어졌다.
존재의 백화(白化).
“아버지가 사이비 교단의 교주 비슷하거든요. 으응, 그냥, 교주 그 자체였죠.”
“…….”
“그거 아세요? 저희 집 되게 커요. 지하에 막 교회 비슷한 시설까지 지어져 있어요. 매달마다 거기서 수백 명이 모이는데 막 이상한 주문 외우고……. 음. 저희 집안이 영양 천(千) 씨예요. 그런데 아버지가 저보곤 성을 반드시 하늘 천(天)으로 쓰라는 거예요.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꼭 그러라고. 아하하, 이상하죠?”
“…….”
“아저씨. 저희 학교에 이상한 부적들 붙어 있던 거 보셨죠?”
“그래. 봤다.”
“여기 학교도 저희 집안에서 운영해요. 이사장이야 뭐 친척 데려와서 앉혀 놨지만 사실 아버지 거나 다름없죠. 여기 다니는 애들 중 대부분은 교단 가족들이에요.”
“…….”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새빨개지고- 귀신들이 나타났을 때 저는, 그냥, 어딘지 모르게 받아들였어요. 아- 역시, 천벌이구나.”
창문에 눈발이 묻었다. 눈꽃이 피었다가 저물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존재는 백화(白花)였다.
“그치만, 아이들이 죽도록 놔둘 수는 없잖아요.”
“…….”
“아마도 이건 저희 가문의 잘못이고.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반쯤 가출해 버린 저로선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학생회장이니까. 교단에서 맨날 아가씨라고 불렸으니까. 제가 책임져야 하니까.”
흰 꽃의 향기에 감싸인 10평의 방에서 천요화의 이야기가 흘렀다.
무한 회귀자인데 썰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