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tem RAW novel - Chapter 205
00205 #외전 04. 루세트의 휴가 =========================================================================
#외전 04. 루세트의 휴가
개복치에게 패배하고 가신이 된 이후, 루세트는 상인랭킹 1위의 능력을 인정받아 재정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앀발. 게이머 놈들 머리 쓰는 거 싫어해서 할 일 엄청 쌓여있을 텐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는 거지.’
모처럼의 판타지 세계에서 공돌이마냥 일만 하다가 갈리는 걸 즐기는 게이머가 있을 리가 없다.
분명 적당한 NPC한테 던져주고 일은 개판으로 진행되고 있겠지.
그런 우려와 달리, 투르비쳬 공국은 의외로 건실하게 행정업무와 재정업무가 진행되고 있었다.
‘독한 년.’
내무부 장관 켄이치가 초토화된 행정인력을 복구하고, 그 전까지의 업무공백을 혼자서 500인분이 넘도록 채워왔기 때문이다.
켄이치는 자타가 공인하는 초 하드 워커홀릭(Worker Holic, 일 중독자)이다.
처음에는 개복치가 온갖 업무를 전부 다 떠넘긴 탓에 우울증으로 죽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수많은 인재를 확충하고 새로운 행정인력을 충원하고 나니 나름 일하는 맛에 재미를 들렸다나 뭐라나.
“장관님. 저희 집에 언제가요?”
22시간에 걸친 철야를 마친 뒤의 물음에 켄이치는 집무실 캐비닛을 가리켰다.
“열어.”
캐비닛 안에는 간단한 세면도구와 담요가 있었다.
“이게 뭐죠.”
“씻어. 남는 시간동안 담요 덮고 자.”
“……몇 시간을 잘 수 있는 거죠?”
“두 시간. 씻는 시간 포함.”
“아 앀발.”
일전의 내기로 전 재산을 털린 뒤, 루세트는 생계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와트를 개복치에게 제공받고 있다.
덤으로 그녀의 인사평가는 켄이치가 도맡는다.
켄이치의 명령에 불복할 경우, 지시불이행으로 인사평가에 마이너스가 생기고 지급되는 와트가 적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타호구. 날 여기서 꺼내줘…….”
샤워기의 물줄기를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악독한 워커홀릭인 켄이치의 페이스를 따라가는 건 게임 내 육체의 능력치로 어떻게든 견딜 수 있다고 쳐도, 뇌에 걸리는 부하만큼은 하루 한 두 시간 남짓한 휴식시간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 할 일을 엄청나게 빨리 끝내면 되는 거야.’
여기가 무슨 정해진 시간동안 월급 루팡 짓을 해야 하는 사무소도 아니고, 주어진 일만 모두 마친다면 어떻게든 수면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루세트는 일생동안 일해 왔던 그 어느 때보다도 필사적으로 전투적인 업무처리에 임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일을 해도 업무량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나기만 했다.
‘앀발. 저 요망한 년이 수작을 부리고 있어!’
루세트가 일을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켄이치가 자신의 일을 떠넘겼기 때문이다.
명분이라도 없으면 몰라.
켄이치는 재정관련 업무를 그녀에게 전적으로 떠넘기며 공국 내에서 재상의 위를 부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치 않은 승진을 위해서 인수인계를 받고 있는 것이다.
까라면 까야하는 군대식 행정체계 속에서 저항은 무의미했다.
오죽했으면 수도에 불타는 베이컨 공습이 들이닥쳐도 안도감부터 들었겠는가.
“아흐흑. 너무 좋아. 제발 좀 더 싸워줘. 쉬고 싶어.”
“너 미쳤니?”
“말리지 마. 지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피난을 위해 대피하는 동안에는 일을 하지 않고도 쉴 수 있다.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켄이치는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다가와 어깨를 두들겼다.
“가엾은 년.”
피도 눈물도 없는 워커홀릭이 위로를 다 하다니.
그만큼 열심히 일을 했던 걸까.
감정이 복받친 탓인지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철컥.
“어…?”
“행복회로를 돌려도 넌 행복해질 수 없어.”
“이게 모죠? 왜 발목이 의자랑 족쇄에 묶인 거죠?”
“넌 자유의 몸이 아니야.”
“설마…”
공포에 부르르 몸을 떠는 그녀를 향해, 켄이치는 매정하게 선언했다.
“일 해.”
수도가 불타는 베이컨에 뒤덮이는 와중에도 루세트는 엉엉 울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혹한 업무를 거쳤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루세트는 무려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자유로운 휴식시간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난 행복해. 행복하다구.”
다크써클이 눈가에 진득이 베인 그녀가 궁궐 복도를 돌아다니자 지나가던 직원들이 히익 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초점 없는 시선.
미증유의 혼돈.
업무지옥의 폐해.
어느 것 하나도 엮이고 싶지 않은 흔적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잠을 자고 싶은데. 잘 수가 없어.’
신체의 한계를 약물도핑으로 넘어선 결과, 루세트는 도무지 하루에 1시간 50분 이상을 잠들 수가 없었다.
그래.
모처럼의 휴가, 차라리 이참에 그토록 염원했던 집무실 바깥의 공간을 좀 돌아다니며 정신을 돌보는 거다.
‘행정구역은 싫어.’
나름 공국의 재상 직을 떠맡았으니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지나가는 직원들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켄이치의 집무실 구석에서 미친 듯이 일만 하고 살아왔으니, 집무실에 드나드는 상급인재들조차 서류더미에 가려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괜스레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켄이치에게 잡혀가는 것도 두려웠던 만큼 루세트는 필사적으로 행정구역에서 멀어졌다.
‘연무장…?’
정처 없이 배회하던 걸음이 육중한 강철문을 앞두고 멈췄다.
연무장이라면 분명 수련하는 특급인재들이 있겠지.
다이스 게임의 실력외모 비례법칙에 의거하여 출중한 외모를 지닌 자들이 즐비할 테고, 무인 계열은 직업적인 특징 탓에 남자가 많이 있을 거다.
그것도 근육질의 나이스바디한 잘생기고 멋진 남자들이!
멘탈 케어에 이보다 좋은 눈요깃거리는 없었다.
‘뭐지. 되게 조용한데.’
근육미남들의 열혈을 기대했건만 정작 연무장 안은 굉장히 조용했다.
단체로 수련이라도 나간 건가.
어리둥절해서 수련장 안을 힐끔힐끔 엿보며 돌아다니자니, 저만치 안쪽에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가전기기가 내는 생활소음 비스무레한 소리.
대체 정체가 뭘까.
가까이 다가가서 엿보니 한 눈에 보기에도 엄청나게 불길한 마검이 한 자루 보였다.
덤으로 굉장한 건강미가 느껴지는 미소녀도.
왠지 모르게 눈매에 다크써클이 어려 있고, 피로에 지친 모습이 가슴이 짠할 정도로 루세트 자신과 판박이었다.
“누구냐.”
“어… 안녕하세요. 내무장관 켄이치님의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재상 루세트에요.”
“재상? 아아. 잘도 이 단기간에 거기까지 승진했군.”
다행히도 상대는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눈치였다.
특급 인재.
그것도 개복치의 총애를 받는 핵심 NPC 중 한 명이겠지.
어느 틈에 이런 대단한 미소녀를 확보한 걸까.
이런 절세미색을 지닌 여자도 지팡이에 깔린 채 앙앙거리며 H한 이벤트를 겪었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본관의 이름은 란도멜. 이 예의를 모르는 마검은 카오스라고 한다.”
루세트는 떡하니 입을 벌리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자 아니셨어요?”
“사연이 길다. 느닷없이 얘기하고 싶은 화제는 아니군.”
“아, 네…”
“그래서. 본관의 연무실에는 어인 일로 방문을?”
“어, 그게, 모처럼의 휴식이라 미남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아, 아 방금 건 못들은 걸로 해요! 아니, 잊어라!”
란도멜은 이걸 웃어야할지 인상을 찌푸려야할지 모르겠다는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빈말이라고는 해도 제법 즐겁군. 미녀에게 듣는 찬사는 싫어하지 않는다.”
“저, 정말로?”
“비록 몸은 여인이 되었을지라도 마음만큼은 사내의 웅지를 품고 있으니. 어찌 미녀의 감언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루세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보 같은! 상대는 여자라고. 여자이기는 하지만…’
한 때는 대단한 미남자였다는 점을 자각하고 나니, 지금의 미모 또한 묘하게 중성적인 느낌이 들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남자의 표본 같은 언행을 보고 있자면, 절로 여자의 연심을 자극하는 면모가 있다.
“본관의 얼굴에 뭔가 묻었는가? 수련을 하던 도중이라 조금 지저분할 수도 있겠군.”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래, 손수건으로 닦아드리죠.”
“음. 고맙군.”
가까이 다가가 뺨에 묻은 흙을 닦아주자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섬섬옥수 같은 고운 피부에 부드러운 피부, 달콤한 과일향과 비슷한 땀 냄새까지.
땀에 젖은 옷으로 부각되는 가슴은 편안한 움직임을 위해 속옷도 차고 있지 않아, 살색과 꼭지가 훤히 비추고 있다.
‘와… 어쩜 좋아.’
여자에게 이런 친절을 받는 다는 것이 부끄러운지 란도멜은 조금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두근!
그 모습을 보며 루세트는 한층 더 가슴에 불이 붙는 게 느껴졌다.
상인 특유의 독점욕구.
이 남자-내지는 여자-만큼은 결코 공공재로 만들지 않고, 자신의 사적재산으로 취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는 것이다.
긴밀한 거리, 미묘한 침묵.
왠지 모르게 썸을 타는 분위기가 깊어지던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두 사람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안타깝게도 좋은 분위기는 마검의 진동소리에 깨져버렸다.
“젠장. 또 시작이군.”
“저 검, 원래 저렇게 자주 울려요?”
“밤낮 없이 울어댄다. 저주 때문에 손에서 떼지도 못하니 아주 고역이나 다름없지.”
그러자 마검으로부터 우수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풍취를 모르는 미개한 연놈들 같으니. 건들지 마라. 난 지금 사색에 잠겨있다.
“하. 마검 주제에 풍취를 논하다니. 그거 참 얼마나 대단한 감수성인지 부디 들어보고 싶군.”
-그럼 들려주지.
란도멜의 비꼼에 마검 카오스는 세 차례에 걸쳐서 우우우웅 거렸다.
딜도로서의 가치는 충분해보이는데.
역시 감수성은 모르겠다.
“그냥 진동했을 뿐이 아닌가.”
-훗. 그게 너와 나의 눈높이라는 거다. 미천한 지혜를 고려하여 친히 시를 해석해주지.
마검 카오스는 자신의 진동에 대해 해석을 해주었다.
憂虞牛熊(우우우웅)
: 근심하고 걱정함이 소나 곰과 같고,
優遇雨熊(우우우웅)
: 후하게 대접함이 세차게 흩어지는 비와 같도다.
迂遇又雄(우우우웅)
: 어리석고 우둔함이 마치 수컷의 오른손과 같구나.
루세트와 란도멜은 황당함에 한참을 말문을 열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검 따위가 시를…”
-어떤가. 지존의 아득한 심득이 담긴 시를 들은 소감은.
“음…”
란도멜은 두 눈을 감고는 시의 내용을 곱씹어보았다.
“내 욕이군.”
-그것만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네가 용광로에 담겨질 이유는 충분해.”
마검 카오스는 마지못해 시를 보다 상세하게 풀어주었다.
-너는 어긋난 마력회로와 성별 탓에 기존의 관념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다. 그러면서도 달라진 신체의 법칙에 적응할 생각은 않고 미련한 고민과 사치스러운 행동을 일삼지.
“난 사치를 누린 적이 없다. 매끼 식사도 단백질 바로 해결한단 말이다.”
“네!? 안돼요!”
“…루세트양? 어째서 단백질 바를 먹으면 안 된다는 거지? 가만. 분명 단백질 바의 보급은 장관의 제의로 시작되었다고 했었지. 그럼 이걸 만든 것도 그대로군.”
쓸데없이 비상한 기억력에 루세트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단백질 바는 바X벌레를 갈아 만든 식품으로 공국 빈민층들의 식량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긴급 투입한 것이었다.
설마 이런 열악한 식품을 란도멜이 먹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마검 씨의 설명을 제대로 들으세요. 에고 아이템이 지닌 경험은 결코 헛된 게 아니니까요.”
결국 루세트는 불리한 화제를 벗어나고자 마검 카오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아가씨가 뭘 좀 아는군. 잡념을 떨치고 올바른 의식을 유지하며 움직임에 집중해라. 반복적인 움직임 밖에 할 줄 모르는 수컷의 오른손보다 다양한 움직임에 신경 쓰고.
“…내키지는 않지만, 루세트 양의 조언도 있었으니 일단은 기억해두지.”
-꼴통 무인도 드디어 귀가 좀 열리는군.
란도멜이 새로운 수련법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루세트는 다시금 화제가 꺼내질 까봐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급한 일이 있다며 재빨리 도망쳤다.
일 같은 건 정말로 싫어하지만.
모처럼 마음에 든 상대가 자신이 고안한 음식에 고통 받는 모습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인간의 마음을 무시한 오로지 경제적인 원칙에 입거한 루세트의 정책활동에 최초로 변화가 발생한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란도멜과 루세트의 짧은 만남은 각자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켰으니, 투르비쳬 공국의 부흥에 있어서는 실로 긍정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음? 자발적으로 집무실에 돌아오다니. 너도 어지간한 워커홀릭이군.”
“아.”
“좋다. 그 의지를 높이 사서 48시간 연속근무로 주말을 불태우도록 하지.”
경솔하게 남은 휴가시간도 고려하지 않고 집무실로 향해버린 결과, 루세트는 귀중한 휴가를 잃어버렸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
제가 짓는 시는 물론 약기운이 충만합니다.
정상적인 시일 리가 없잖아요!?
[우우우웅]의 영감은 명작시 [호애애애]에서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