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tem RAW novel - Chapter 242
00242 #11 – 광기(狂氣) =========================================================================
#11 – 광기(狂氣)(10)
한 차례의 격전을 마친 직후.
란도멜과 켄이치는 간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지닐 수 있었다.
서로 철야까지 이어지는 업무와 밤낮을 가리지 않는 맹훈련을 거듭해왔기에 오히려 평상시보다도 지금이 삶의 만족도에 있어서는 월등히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영원히 시간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동감이다. 마검 녀석의 성추행에 당하는 건 질색이야.”
“뭐? 마검이 성추행을 한다고?”
켄이치의 반문에 란도멜은 미간을 찌푸렸다.
괴로운 기억이 잔뜩 떠올랐던 탓이다.
“절박함을 부여한답시고 멋대로 이상한 포즈를 취하게 만들었지. 덕분에 기대 이상으로 신속하게 몸을 다루고 무술을 접목시킬 수 있었지만, 두 번 겪고 싶은 경험은 아니다.”
“보기에는 유쾌할 것 같은데.”
“넌 철야로 지친 네 모습을 보며 좋은 구경거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무슨 심정이 들지?”
“쳐죽이고 싶은 심정.”
“마음이 통했군. 그게 지금 내 심정이다.”
바쁜 일상 탓에 얼굴을 마주한 것은 상당히 오래간만이었지만, 두 사람은 그런 시간의 간극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서로를 편하게 대했다.
전장의 긴박감.
그런 것에 위축되기에는 서로가 지닌 경지도, 겪어온 경험도, 쌓아온 유대도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었고 말이다.
“우리.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되지?”
“딱히 퇴각하거나 이동하라는 명령은 없었다. 특공대가 한 번만 오리라는 보장도 없으니 전쟁이 끝날 때까진 줄곧 대기해야겠지.”
“그거 참 곤란하군.”
켄이치가 난처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록 셀레나의 조언(이라 착각한 켄이치 개인의 지략)에 의해 제국군 특공대를 전멸시킬 수는 있었지만, 적의 공세가 워낙에 치열했던 탓에 두 사람을 제외한 병사들은 모조리 전사했기 때문이다.
지상과 공중을 넘나드는 치열한 격전이었으니 둘이나마 목숨을 부지한 것도 용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지팡이가 결혼을 한다더군.”
무료함을 견디다 못한 란도멜이 말문을 열었다.
“알아. 발드 마이저 그 여자도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야. 구 마왕군 중간간부라고 사방 천지에 광고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지만 아이템하고 결혼할 생각을 다 하다니.”
“뭐야. 알고 있었나? 용케도 그런 소문을 들었군.”
“발드 마이저가 예식장의 수배나 결혼비용에 대해 문의를 해왔던지라. 알려주지 않으면 일하지 않겠다고 떼를 쓰길래 그 자리에서 화환 가격까지 직접 알아봤었지.”
“지팡이의 반려라더니, 녀석 못지않게 미쳤군.”
“결혼. 하고 싶어?”
켄이치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란도멜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숨 막히는 정적.
의표를 찔렸음을 미처 감추지 못한 란도멜이 씁쓸하니 답했다.
“이런 몸으로 가당찮은 소리를. 성별전환의 포션을 구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가. 딱히 상관없을 것 같은데.”
“무슨 의미냐, 그건.”
“결혼을 이성끼리 하라는 법은 없잖아.”
“…진심이냐?”
기대하지도 않았던 결혼이었다.
남자에서 여자가 된 몸으로 어찌 켄이치와의 관계가 진전되겠는가.
그렇다고 새삼 남자를 구해서 결혼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결혼 자체를 생각하지도 않았던 몸이었지.
발드 마이저와 지팡이의 약혼 소식을 듣지만 않았다면 애초에 머릿속에서 떠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여자가 되고 나니 묘하게 감수성이 풍부해졌다.
최근 들어서는 부쩍 장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러던 찰나에 켄이치의 입에서 대놓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발언을 듣다니. 이래서야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다.
“아. 물론 결혼하지는 않을 거지만.”
“쳇. 놀리기는.”
“지팡이가 그러더군. 전쟁을 앞두거나 전쟁터에서 결혼이나 고향, 사업, 우정,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사망플래그라고. 죽고 싶을 때가 아니면 가급적 참으라고 했던가.”
“녀석 다운 말이군. 그놈의 사망플래그가 대체 뭐라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너도 제법 대단하다고 생각해. 이런 때에 이런 장소에서 결혼에 대한 화제를 입에 담다니. 미신 따위는 상관없어졌을 정도로 조급해진 건가?”
란도멜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양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한 번 물어봤을 뿐이다.”
어차피 이뤄질 수 없는 관계라면, 단념해야겠지.
물론 잊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무뚝뚝한 자신이라도 몸과 마음이 통한 상대는 처음이었으니까.
지팡이의 엉터리 같은 마법 때문에 시작된 교류였다고는 해도 켄이치와는 많은 역경을 함께 헤쳐 나왔다. 적어도 단순한 동업자 관계였던 사르갈 연합국 시절보다는 즐거웠지.
이렇게 고통스레 단념하게 될 줄 알았다면 시작조차도 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누가 무인 아니랄까봐 표정이 아주 가관이군. 의절이라도 할 작정이냐?”
“시끄럽다.”
“란도멜. 넌 언제나 생각이 많은 게 탈이다.”
성큼성큼 다가온 켄이치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뜬 란도멜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일 때보다는 조금 더 귀여워졌군.
그래도 평상시의 진지한 모습과의 괴리감이라거나, 아닌 척 하면서 은근히 신경 쓰는 태도는 자신이 좋아하는 란도멜의 특징 그 자체였다.
“마검의 선택이 옳았어.”
“그게 무슨…”
란도멜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단숨에 멱살을 움켜쥔 켄이치가 그녀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진한 입맞춤의 직후, 켄이치는 눈에 불을 켜며 말했다.
“네 성격이라면 확실히 말보다는 몸으로 교육해야겠지.”
“으으.”
“허튼 생각 따윈 하지도 마. 넌 그냥 나만 믿고 따라오면 되는 거야.”
개복치나 갤러리들이 봤다면 당장이라도 휘파람을 불며 환호성을 내질렀을 광경이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진한 관계를 목격한 것은 정복왕이 먼저였다.
“당찬 여장부로군.”
“!!”
“웬 놈이냐.”
켄이치의 앞으로 나선 란도멜이 눈매를 좁히며 싸늘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위기의 순간에는 연인을 지키고자 앞서는가. 실로 좋은 자세다. 간만에 여자를 상대로 정복욕이 솟구치는군.”
정복왕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히자, 두 사람은 자신들도 모르게 세 걸음을 내리 물러섰다.
온몸에 이는 오한.
정복왕이 갈무리한 무시무시한 기세가 잠시나마 두 눈에서 아른거리는 것을 목격한 결과였다.
“실력도 제법이군. 더욱 마음에 들었다. 특별히 선심을 써서 사지 멀쩡하게 붙잡아주지.”
교전에 돌입하면 반드시 필패한다!
란도멜은 내심 혀를 찼다.
켄이치의 말마따나 괜한 소리를 내뱉은 덕분에 사망플래그가 서버린 모양이다.
하필이면 이쪽으로 정복왕이 나타나다니.
저 정도의 초고수를 상대로 무사히 물러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고백을 들었다. 이승에서 하직하는 작별선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군.”
“란도멜, 너 설마…!”
“도망쳐라. 정복왕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한다. 마검의 힘이라면 네가 공간이동을 펼칠 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란도멜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용기를 쥐어짜낸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켄이치는 스태프를 움켜쥐며 즉각 임전태세를 취했다.
“말했을 텐데? 넌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다고. 정복왕은 우리가 마음에 든 모양이니 여기서 싸운다고 죽지는 않을 거다. 최대한의 기량으로 맞서 싸워라.”
“마법사 주제에 번번이 무인을 수치스럽게 하는군. 좋다. 그게 네가 바라는 바라면. 기꺼이 최후의 전투를 함께 하도록 하겠다.”
두 사람이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며 씨익 웃었다.
“대단한 각오로구나. 초월자를 상대로 맞설 용기를 내다니. 그 각오를 높이 쳐서라도 전력을 다해 너희들을 격파해주겠다.”
“…이럴 땐 전력의 10%만 발휘해주는 게 예의 아닌가?”
“무슨 소리를. 사자는 토끼를 사냥할 때에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아무리 미약한 생물체라도 확고한 의지를 지닌 자들은 대등한 개체로서 존중해야 마땅하지.”
정복왕의 자비 아닌 자비에 쓴웃음을 지으며 접전을 벌이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대뜸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평상복을 입은 사내들이 나타났다.
점술사의 점괘에 홀려 해안가 지대로 직행한 자들.
다름 아닌 전 제국군 소속 스파이 조직의 단장과 수하들이었다.
“어느 쪽이 제국군이냐!”
“…피아구분도 못하는 농민들인가. 괜한 개죽음을 당하기 전에 여길 벗어나라.”
“사나이가 되어서 어찌 여인들의 위기를 가벼이 넘길 수 있겠는가!”
정복왕은 불청객의 출현에 무척이나 심기가 뒤틀렸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여인들과 결투를 빙자한 희롱을 하고자 마음먹었거늘, 지저분한 사내 녀석들이 한 무더기나 나타나서 훼방을 놓으려 들고 있다.
이런 괘씸한 녀석들을 살려둘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어지는 단장의 말만 없었더라면 말이다.
“우리는 공국군의 초고수의 부탁을 받고 지원을 위해 도착한 몸이다.”
“!!”
초고수의 부탁.
가벼이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꺼림칙한 말이다.
‘여기서 흔적을 남겼다간 공국군의 포위망에 갇히게 된다. 그렇다고 순순히 저 여자들을 놓아주거나 죽일 마음도 없다.’
한번 정복하고자 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정복한다.
정복왕은 일생에 걸쳐 지켜온 철학을 이런 자리에서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하면 그가 취할 수 있는 방안은 하나뿐이었다.
“과인이 바로 그대들을 기다리던 공국군이다.”
“음. 투르비쳬 공국인들은 하나같이 터프한 인간들이었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저쪽의 미녀 둘이 우리들의 적인 게 틀림없군.”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너는 공국의 주요인사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지원을 하러 왔는가!”
“으음… 미녀의 간청이니 믿고는 싶은데. 확실히 저 남자보다는 이쪽이 더 약해보이기도 하고.”
“멍청한 것들! 적의 현혹에 그리 쉽게 넘어가지 마라!”
대뜸 정복왕이 기만전술을 발휘하자 단장과 수하들은 혼란에 빠졌다.
스파이라고는 해도 그들이 정복왕의 얼굴을 볼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차피 적국에 포로로 붙잡혔다간 지닌 정보를 모두 누설하게 될지도 모르는 몸. 정복왕의 신상에 대해서는 자백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도록 어떠한 정보도 지니지 못하게 제국에서 조치를 취해두었다.
동시에 스파이 활동도 설렁설렁하며 제국으로부터 오는 지원금만 타먹던 그들이 켄이치나 란도멜을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떨떠름한 우연으로 인해 지금의 혼란을 초래하고 말았다.
“아니, 서로가 공국군이라고 하면 대체 어쩌란 말이냐.”
설마 이런 기가 막히는 상황이 닥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피아식별이 불가능한 난처한 상황.
단장의 머릿속으로 불현 듯 어째서 초고수의 경지에 달한 점술가가 자신들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떠올렸다.
그건 어쩌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대비한 게 아닐까.
모종의 이유로 피아식별이 불가능한 상황이 닥칠 때, 누구보다도 관찰력이 뛰어난 스파이들의 안목을 믿는 것이다.
사실 그 논리라면 그냥 초고수가 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상황이지만 뭐든 점술가의 점괘에 끼워 맞춰서 해석하는 입장에서는 떠올릴 수도 없는 발상이었다.
“어쩔 수 없군. 그럼 양측 중 어느 쪽이 공국군인지 우리가 판단을 해주겠다. 무엇이든 좋다. 신원을 증명할 증거나 단서, 발언을 제시하라!”
대뜸 이런 처지에 처하니 황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랬지만 켄이치나 란도멜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대외적인 노출은 거의 없던 두 사람이었다.
공국 내에서는 상당한 중임을 맡고 있을 지라도 업무관계자나 궁궐에 거주하다시피 하는 자들이라도 태반은 두 사람의 얼굴을 직접 마주한 적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시하라고 해도 말이지. 대뜸 도대체 뭘 제시하라는 거냐. 우리들 얼굴도 몰라보는 처지에 증거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판별할 수는 있는가?”
켄이치의 단도직입적인 태클에 단장은 말문이 막혔다.
증거의 진위유무?
그런 걸 한 눈에 감별할 수 있으면 감별사로 전직을 했지, 왜 여기서 힘들게 이런 개고생을 하고 있겠는가.
“솔직히 모른다!”
단장의 당당한 시인에 켄이치는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어쩌자는 건데?”
“우릴 즐겁게 해봐라. 좀 더 매력적인 쪽을 골라 함께해주지!”
켄이치는 확신했다.
이 녀석들은 정신병자가 틀림없다고.
============================ 작품 후기 ============================
상당히 이른 시간에 2참을 끝냈습니다만, 꿀잼회로가 과부화로 타버려서 작동하질 않는군요. 시간이 넘쳐도 글을 쓸 수 없는 몸이 되다니 ㅠㅠ
간만에 주인공 이외의 시점으로 한 화를 모두 채워봤습니다만, 재미가 여전할지는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