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tem RAW novel - Chapter 267
00267 #12 – 미래의 가격 =========================================================================
#12 – 미래의 가격(12)
도주하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다.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지면 그만이지.
지금도 사망플래그를 앞두고 촉이 울부짖고 있다.
싸우면 백전백패.
반드시 전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랜덤마법?
그거 좋기야 하지.
란도멜?
나름 강하기야 하지.
근데 적의 전력은 무려 란도멜과 호각인 녀석이 둘, 아니 이제는 미노스가 진화 비슷한 걸 해버려서 호각이 셋이다.
마음 같아선 냅다 랜덤마법부터 시작하고 심력으로 제압하고 싶지만, 정신붕괴를 유도하는 내 비장의 심리전은 이성을 지닌 인간에게 유효하지, 몬스터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애초에 몬스터의 정신은 인간처럼 그리 복잡하고 섬세한 유리 같은 것이 아니다.
포식, 살육, 강간.
온갖 종류의 강욕이 덩어리 진 몬스터의 정신은 상대가 강하건 약하건 간에 개체로서의 자신을 확고히 움켜쥐고 있다. 부수는 건 어찌 가능하다고 쳐도, 문제는 [역류]이다.
몬스터에 의한 정신오염.
전력을 다해 부순 사념이 도리어 내게 흘러들어온다면 나는 어떤 방향으로든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작게는 폭식증에 걸리는 수준으로 끝나겠지만, 크게는 현실에서도 살육에 눈을 뜨거나 몬스터의 본능에 잠식당할지도 모른다.
‘이런 젠장할… 완전히 외통수에 몰렸네.’
이것이 정신계열 능력을 구사하는 자들이 지니는 리스크.
[정신오염]의 말로이다.
일찍이 한 흑마법사가 엘더리치의 심령을 장악하려다가 역으로 장악당한 결과, 현실에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며 폭주했던 사건도 있다.
[정신역류]는 적을 이기고도 반강제로 발생하는 정신오염이기에 막아낼 방도도 없지.
재수가 좋으면 아무 일도 없지만, 운이 없으면 무조건 걸리는 거다.
가급적 이번만큼은 랜덤마법의 시전을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쓰레기 : 이대로 교전 시작하면 절체절명의 위기 아님?
-츳키 : 슬슬 도망쳐야 할 것 같은데.
-묵제 : 레이널드가 괜찮은 녀석이기는 한데, 그건 염세주의자가 된 다음 얘기잖아. 걍 버리면 안 되나?
갤러리들은 냉혹한 결단을 요구했다.
레이널드는 아직 제 가치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전에 없던 대규모 몬스터 웨이브를 맞이하며 요새가 함락될 위기에서 무수한 아군들이 죽어나가는 광경도.
원군을 요청한다며 적진을 뚫고 필사적으로 탈출한 숙부가 그대로 도주해버린 일도.
몬스터의 독에 중독되어 고통 받는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고통 없이 죽게 만든 기억조차도 없다.
‘확실히, 우리가 기억하는 레이널드라는 인재는 온갖 역경을 모두 겪은 뒤에야 완성되는 인재이지.’
지금의 레이널드에게는 성숙한 인격도, 노련한 지혜도, 원숙한 기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빽빽거릴 줄만 아는 이상주의자에 불과할 뿐.
자신의 패배조차 인정할 줄 모르는 그를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의리는 없다.
‘그렇기는 한데.’
유감이지만,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러설 때는 아니야.’
나의 단호한 전음에 갤러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프랑 : 아니, 이 상황에서 승산을 점쳤다고…!?
-츳키 : 개복치는 지는 싸움은 절대로 안하지.
-람보르기니 : 내 눈엔 곧 생길 시체들밖에 안 보이는데?
근래 들어서 유입된 갤러리들은 내 도전이 무모하다고, 기어이 닉값을 한다며 탄식을 했다.
하지만 12년간 내 플레이를 지켜봤던 애청자 갤러리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내가 싸우는 것을 결정하는 건, 죽음보다 더한 무언가를 지켜야만 할 때이거나 죽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 두 가지 경우뿐이다.
지금의 레이널드에게 그만한 가치는 없지.
즉, 나는 진심으로 이 전장에서 승산을 보고 있다는 거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러는 너도 입매가 웃고 있다고?’
몬스터들의 행군에 산이 울리고 모래가 요동쳐도 겁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이길 것을 확신하기에 여기에 선 것이 아닌가.
적이 강하다고, 수에서 밀린다고 지레 겁을 먹는 건 실로 나약하고도 어리석은 짓이다.
“당신들은.. 두렵지도 않습니까?”
‘아무래도 적의 숫자에 압도당해서 새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인데. 넌 지금 마왕군 결전병기랑 신생마왕군 사천왕을 앞에 두고 있다.’
“레이널드 도령. 여기는 당신이 싸울 전장이 아닙니다. 물러서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공포를 앞둔 레이널드의 눈과 달리, 페이젠은 압도적인 병력차에도 오연한 실력자들을 인정하는 기색이었다.
싸울 수 있는가, 없는가.
이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반응은 이토록 극명하게 갈라질 수 있다. 하물며 이보다 더한 초연을 지닌다면, 이천 번이 넘는 죽음으로 단련된 게이머의 시각은 어떻겠는가.
“교전을 벌일 생각인가?”
‘물론. 아니다.’
“역시 그렇… 뭐?”
당당하게 마왕군 결전병기에게 반말도 찍찍 내뱉던 페이젠은, 정작 교전을 벌이지 않는다는 말에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이거, 엄청나게 노려보기 시작하네.
똥폼만 실컷 잡고 왜 싸우러 안가냐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진다.
“교전을 벌이지 않으면 어떻게 토벌을 마치겠단 말이냐.”
‘그럼 슬슬 알려줄 때도 된 것 같군.’
나는 적진을 가리키려다 손이 없음을 깨닫고는 머쓱하니 레이첼에게 특정 방향을 가리키도록 지시했다.
“지팡이님께서 저길 보래요.”
“저건… 으음. 구름과 안개를 몰고 다니는 고산정령인가. 옆의 녀석은 심상치 않은 보구를 거머쥔 리자드맨. 다음은 미노타우루스로군. 한 눈에 보기에도 골치가 아픈 걸.”
‘그게 아니다. 네가 봐야할 건 저 녀석들의 머리다.’
특급 관찰스킬을 지닌 나와 달리, 안력이 낮은 페이젠은 한참을 미간을 찌푸리며 고산정령을 빤히 쳐다보았다.
적의 군세와의 거리가 대략 500m에 이르는 순간.
마력을 두 눈에 끌어올려 안력을 강화한 페이젠이 입을 쩍 벌렸다.
“대..머리? 설마…”
‘그렇다. 본인의 목적은 유능한 대머리 인재를 영입하는 것. 그건 상대가 몬스터라도 예외는 되지 않는다.’
“소름 끼칠 정도의 집념이군. 적의 대장 셋을 모조리 휘하로 끌어들이겠다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떠한 방식이라도 유용한 책략은 모두 구사한다. 이것이 마왕군의 방식인가!”
겨우 이 정도로 호들갑을 떨기는.
지금까지 해온 일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뇌리에서는 목숨이 위태롭다며 연거푸 경종이 울리고 있지만…
이 정도 강도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다.
나를 죽일 수 없는 사망플래그는 날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뿐이니까.
‘군단이여! 나, 마왕군 결전병기의 악명으로 명하노라.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내 앞에 복종하라!!’
쿠구궁..
전력을 다한 전음의 발산은 끝을 모르는 나의 대마력과 얽히며 폭발적인 사념을 분출해내었다.
어찌나 많은 마력이 담겼는지 몬스터들의 행군을 압도적으로 상회하는 가공스러운 위력에 멀리서 절벽이 무너지며 산사태가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재주를 숨겨왔었다니. 지난 전쟁에서는 잘도 쓰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왔었군.”
란도멜은 정복전쟁에서 전음스킬을 최대위력으로 방출한다는 발상을 사용하지 않은 걸 분해하였다.
하지만 이건 쓰지 않은 게 아니라 쓸 수 없었던 거다.
정복왕 같은 미친 재능충에게 일격에 죽일 수도 없는 기술을 썼다간 밑천이 전부 털려버리지 않겠는가.
가뜩이나 초월자인 녀석이 상대의 뇌리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음공(音攻)을 익혔다간 검과 소리를 결합시킨 세상에 다시없을 천고의 절학을 창조해낼지도 모른다.
물론 정복왕에 비하면 애송이들인 지금의 적들을 상대로는 아낌없이 쓸 수 있는 기술이다.
『대단한 업적! 단 한 번의 전음으로..』
이딴 사탕발림 따위, 더는 성에 차지도 않는다.
방해만 된다고.
진정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이따위 자잘한 포인트나 업적 따위가 아니다.
‘복종하라!’
우르릉..
꽈과과과광─
흡사 벽력에도 비견될 굉음이 뇌리에서 울려 퍼지자 격 낮은 몬스터들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구멍이란 구멍에서 잔뜩 피와 뇌수를 게워내었다.
살인적인 출력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망가져버린 것이다.
전음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대기 그 자체를 격하는 음공이었기에, 전음의 대상이 되지 않은 아군 병사들마저 일부는 비틀거리며 주저앉거나 피를 게워내기도 했다.
“그만!! 우리는 저항하지 않겠다!”
몬스터 군단의 꼴은 이미 말도 아니었다.
몬스터 군단(위험도 ★★★★★)
총병력 8900/53000
사기 30/100
칼받이나 화살받이로 쓸 하급 몬스터들은 죄다 죽어버렸으며, 초수 교환조차도 없이 일어난 집단 돌연사에 힘 있는 몬스터들도 단단히 기가 질렸다.
압도적인 살상력은 대적할 방도가 없으니.
야생의 폭력과 원초적인 힘을 숭상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내 존재는 공포의 화신마냥 새겨졌으리라.
“마왕군 결전병기. 들어본 적 있다.”
이대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전멸당할 가능성이 뚜렷해보였던 걸까.
적진이 좌우로 갈라지며 대장이 앞으로 나선다.
상대는 몬스터 군단의 야전지휘관, 칠색으로 빛나는 창을 든 엘더 리자드맨, 하지였다.
“마왕군 결전병기여. 그대는 어째서 우리가 아닌 인간의 편을 드는가.”
역시나 발상이 실로 오만하기 짝이 없다.
‘틀렸다.’
나는 녀석의 착각을 올바르게 교정해주었다.
‘인간들이 나를 따르고, 너희가 나를 따르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은 약하다. 우리 강하다.”
‘강한 병사는 필요 없다. 내가 최강이니까. 내게 필요한 건 충성스러운 병사이다.’
몬스터의 어설픈 설득 따위에 넘어갈 바보가 있을까보냐.
…….
…….
…….
적어도 최근 500회 이내에서는 넘어가지 않았다!
“강자는 따른다. 허나 약자는 따르지 않는다.”
하지는 딜레마에 빠진 모양이었다.
내 권위와 힘은 존중하겠다.
그러나 나약한 인간들과 함께 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모양이다.
‘이런 변방에서 생을 마감할 거라면 관계하지 않겠다. 하지만 보다 커다란 전장에서 높은 경지에 올라서기를 원하거든 나를 따르라. 마왕의 존엄을 뵈러 가는 건 소수의 강자와 인재들뿐이다.’
“알겠다.”
하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보신주의 좋아한다. 변방의 왕이 되겠다.”
‘!?’
보신주의 스위치를 켜다니!
이런 비겁한 녀석.
몬스터 주제에 뭐 이리 황당한 경우가 다 있어!
-프랑 : 현실주의적인 몬스터ㅋㅋㅋㅋ
-람보르기니 : 얘 방송 뭔가 이상해ㅋㅋㅋㅋ
-낭자아이 : 누가 리자드맨 아니랄까봐 용의 꼬리대신 뱀의 머리를 선택함ㅋㅋㅋ
이런. 리자드는 도마뱀이었지.
그 논리라면 납득할 수밖에 없겠군…
아니, 뭘 자연스레 설득당할 뻔한 거냐 나는!
‘날 따르면 이런 변방에서 왕으로 지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
“연봉은?”
‘두당 3만 골드. 상시 인센티브 지급 및 매년마다 연봉협상 가능함. 이직 희망 시 1년 의무계약 이후에 개인정보 제공 및 위치정보 제공, 비밀엄수를 한다는 조건 하에 보내줌.’
계약조건을 들은 레이첼이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그런 후한 조건으로 두 당 계약이라니, 대체 몇 명이나 뽑으려고요?”
‘셋 다.’
“…켄이치님한테 혼나도 전 모르는 일이에요.”
즉석에서 레이첼이 작성한 계약서를 앞두고 하지와 빙정, 미노스가 고민에 빠졌다.
“강자의 나라, 좋은 연봉, 복지시설 최강. 솔직히 끌린다.”
“북반구는 대체로 지반이 높으니까 고산정령이라도 문제는 없지. 저 지팡이에게는 왠지 친숙한 기분도 들고.”
“추운 곳! 밥 없다! 싫다!”
거저먹는 인재를 놓칠 것 같으냐!
‘일년내내 실내온도가 2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후끈한 외양간을 지어주지. 덤으로 여물도 잔뜩 넣어주겠다.’
“아니, 미노타우루스가 소도 아니고 그런 걸로 설득 될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 여물 싫다!”
레이첼의 훈수에 미노스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날마다 돼지 한 마리를 먹게 해주지. 전투에 참여하면 처치기여도 75% 이상의 시체는 네 몫으로 잡아먹어도 된다.’
“좋다!”
‘그럼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라!’
절대자들을 구속할 계약서이니만큼 법적인 실효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건 질서의 신이 손수 만들어낸 신의 하사품.
맹약에 따라 계약서에 기재된 사항을 위배할 경우, 위반자는 무조건 질서의 신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파멸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덤으로 이 계약서는 사기 계약서이다.
뒷면에 적은 글씨는 자동적으로 투명해져서 보이지도 않지!
‘하하하! 얼간이들, 제대로 속았구나! 죽을 때까지 불교에 귀의하게 해주지!’
“근데 얘들은 왜 고용한 거예요?”
‘왜냐니. 대머리니까 뽑았잖아.’
리자드맨에 고산정령, 미노타우루스라고.
아까도 말했잖아.
딱 봐도 머리카락 없을 것 같은 대머리라서 영입한다고.
“도마뱀이랑 유령, 소 생각하고 없다고 한 거죠?”
‘어… 맞는데.’
“도마뱀은 머리카락 없는데 쟨 리자드맨(Lizard Man). 도마뱀‘인간’이잖아요.”
미친.
그런 걸 납득할 것 같으냐.
‘내 눈엔 민둥머리밖에 안 보이는데! 빼애액!’
“아. 체온관리가 성가셔서 0.3mm 스킨헤드 스타일로 밀었다.”
‘뭐? 머리가 자라나는 대머리라고…!?’
이 녀석은 사도다!
“유령이나 정령이나 투명해서 가끔 헷갈릴 수 있는데, 저 고산정령도 제대로 머리카락 있어요.”
‘뭐…라고!?’
“전 치렁치렁한 게 거슬려서 마력으로 감추고 있었죠. 고산은 바람이 많이 부니까.”
이번에는 가짜 대머리라니!
“소는 원래 머리가 자라요. 제대로 털이 있는 걸요.”
‘이 녀석은 대체 무슨 비밀을 지니고 있는 거냐…!’
미노스의 큼지막한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미노스 탈모 걸렸다. 만년 대머리다.”
“…….”
‘…….’
미노스도 울고 멜도바도 울고 샵치도 울었다.
아니, 샵치는 왜…?
저 갤러리, 설마 대머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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