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tem RAW novel - Chapter 287
00287 #12 – 미래의 가격 =========================================================================
#12 – 미래의 가격(32)
공작원의 배신.
뒤늦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눈치 챈 해적왕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어디서 감히 개수작을!!”
격노한 해적왕이 테이블 하나를 걷어차며 공작원을 향해 날려 보냈다. 극도의 분노를 가장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분명히 보았다.
해적왕의 눈동자는 대단히 깊고 차가웠다.
그가 냉정하게 증인을 격살하려는 심산임을 드러내는 반증이었다.
콰아앙!
둔중한 폭음과 함께 나무파편이 식장 사방으로 비산했다. 마치 수류탄이 터진 것만 같은 파괴력과 후폭풍이다. 그만큼 테이블에 실어 보낸 공력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제기랄. 지독하게도 힘을 때려 박았군.”
그러나 늦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
쥐 죽은 듯이 잠든 줄만 알았던 란도멜이 제 앞의 테이블을 걷어차며 공력 대 공력의 힘겨루기로 파편의 확산을 막아낸 것이다.
무에 업을 둔 실력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순간적으로 란도멜이 선보였던 한 수가 상당한 무학(武學)의 이치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후발선제(後發先制)!
늦게 출수해서 먼저 제압하는 고등한 기술을 지근거리도 아닌, 공력을 담아 걷어찬 테이블로 발휘해 내다니.
이는 순간적으로 선보인 반응속도와 기용한 공력, 찰나에 계산해낸 힘의 작용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응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현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었다.
“으음. 내 열이 지나치게 오르고 말았군. 방금의 무례에 대해서는 사과하겠다.”
한 번 뿐인 기회를 놓친 이상, 해적왕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란도멜을 향한 시선은 특별히 사납지는 않았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란도멜은 낯빛을 굳히며 반걸음을 물러섰다.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라도 하고 있겠지.
괜히 란도멜이 내상이라도 입어서 운신이 힘들어지면 공국의 운영만 까다로워진다. 나는 신속하게 해적왕에 대한 판결을 촉구했다.
‘브륜하스텔 군도연맹은 이번 사건과 관계된 정황이 뚜렷하다! 해적왕. 그대는 이 사태에 대한 충분한 사죄와 배상을 해야만 할 것이다.’
“으음…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생각은 없다. 이 건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 정식외교 채널로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 썩 좋은 생각은 아닐 거다. 가벼이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해적왕은 혀를 차며 대동한 호위들과 함께 식장을 벗어났다. 망신살을 단단히 뻗친 이상,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다.
이걸로 시름 하나는 덜어냈지만…
모든 사태가 수습되었다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신성. 가장 큰 골칫거리가 남아있지.’
아니나 다를까.
된통 깨지기만 했던 선신교단의 무리들 사이에서 적색 장포를 두른 노인네가 전면으로 나섰다.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몇 안 되는 인물임과 동시에 선신교단 연합에서 상당한 세를 지니고 있는 흑막 격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선신교단의 연합 또한 이 사건에 일정부분 연루되었음은 부정하지 않겠다. 관계가 있는 자는 엄중히 처벌을 받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겠지.”
‘좋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용건은 그게 전부인가?’
그럴 리가 없지.
노인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의 눈에서 일렁거리는 불꽃을 보았다.
고령의 나이에도 조금도 퇴색됨이 없는 투지.
저만한 눈을 지닐 수 있는 자는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결코 녹록치 않은 상대임이 틀림없다.
정복왕이나 해적왕과는 다른 의미로 성가신 강적에 가깝지. 이 상대는 절대로 물러남이 없이 악착같이 덤벼들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생각은 이윽고 노인의 정체를 알게 되며 확신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것만이 용건의 전부는 아닐세. 불의 교단 소속 적염의 기사단 단장 바크 노덤. 그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골치 아픈 양반이었지. 일주일 간 수도를 초토화를 시킬 기세로 덤벼들었으니까.’
“본인은 바크 노덤의 대부이자 불의 교단의 여섯 주교 중 성염의 좌를 거느린 주교. 아이헨바우어 브륀헬이다.”
아이헨바우어 브륀헬!
그 이름은 해적왕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덜한 악명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불의 교단의 주교인 이 노인네는 다이스 게임에 모두가 몰입하기 시작한지 5년차 까지만 해도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간과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각국의 수뇌부를 증오하며 온갖 모략을 총동원해 맞서는 자. 미친 광신도라는 이명은 붙어있어도 관계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다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 그와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필수 이벤트나 다름없게 되었다.
게이머가 어느 국가의 어떤 파벌로부터 시작하든, 국제적인 수준의 외교채널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는 것을 기점으로 아이헨바우어와의 충돌이 시작된다.
노련한 사냥꾼이자 미친 광신도인 노인네는 그야말로 존재 자체를 불사를 기세로 게이머와 주변인들의 약점을 파헤치며 덤벼들기 때문이다.
‘비엔나소시지가 따로 없군. 보기 싫은 얼굴들은 아주 줄줄이 엮여서 다 튀어나오네.’
저 영감탱이의 지능은 무려 94. 노년이라고 나름 패널티를 받아서 감소한 지능수치가 저 정도이다.
대륙을 좌시하는 주류 12선신의 교단 중 말석이나마 차지하고 있는 교단이니만큼, 그런 교단의 중대사를 책임지는 여섯 주교 중 일인인 영감이 녹록할 리가 없다.
특히나 90을 넘어서는 지능 수치는 정해진 행동양식을 넘어서 언제 어디서 돌발행동을 일으킬지 가늠할 수 없어지기 때문에 움직이는 사망플래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냥 움직이기만 하면 차라리 다행이지.’
저 영감탱이는 언제 어디서든지 유도미사일처럼 쫓아오는 추적형 사망플래그이다. 떨치고 싶어도 떨쳐낼 방법도 없다. 국가라는 힘을 다루는 이상, 무조건 충돌해야만 한다.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정면으로 승부를 벌여, 실력으로 압살해버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두 번 다시 대결에 임할 마음조차 들지 않게 해야만 저 소름끼치는 눈을 보는 걸 마지막으로 만들 수 있다.
‘불귀신 바크 노덤의 원수를 갚기라도 할 생각인가?’
“패자의 넋을 기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대부로서의 책임만큼은 져야겠지. 그 뻣뻣한 몸뚱이를 공손하게 90도로 접는 걸로 말이다.”
‘…그게 원수를 갚는다는 거잖아. 게다가 지팡이를 90도로 접으면 부러진다고.’
시뻘건 눈동자에서 흉광이 터져 나왔다.
“갈!”
‘으악!’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괄괄한 성격 아니랄까봐 무례하게 소리부터 빽 지르는 것 봐라.
“나잇값도 못하는 얼간이들은 네놈의 악명에 쩔쩔 맸던 모양이지만, 불의 교단의 주교마저도 그리 호락호락할 거라 여기지는 마라. 내게는 이 전황을 역전시킬 결정적인─”
‘까놓고 말해서. 신성을 증명하라, 이거잖아?’
“…그렇다.”
왠지 모르게 영감님의 상태가 침울해 보이는데.
하지만 상관없다.
이 노인네를 상대로라면 노인공경 대신 노인공격을 해도 모자랄 테니까!
‘레이널드! 신성력을 증명할 차례가 도래했다! 이 노친네가 노망이 나버리기 전에 곧바로 도와주자고!’
“알겠습니다.”
레이널드가 적당히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럴싸한 경전을 암송하는 사이, 후요는 두 손을 모으며 공손하게 기도했다.
“달님. 칭찬해주세요!”
『후요가 2단계 권능 [칭찬해주세요]를 발동했습니다.』
권능이 발동하는 전조효과로 대기에 소리가 멎었다.
마치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만 같은 기묘한 정적.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던 모두가 사색이 되어 제각각 무기를 꺼내들었다.
치직.
기묘한 잡음과 함께 동심원처럼 번져나가는 불길한 마력.
그 중심부에 위치한 공간은 맥동하는 심장처럼 세차게 흔들리며 점차 원형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치지직.
갈라진 공간의 틈에서 세찬 어둠이 뿜어져 나오자 근거리에 위치한 기사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마법사들은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고, 검사들은 검을 높이 치켜들며, 사제들은 두 손을 높이 치켜들어 저마다의 힘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중 어떠한 힘도 찢겨진 공간의 너머로부터 새어나오는 어둠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치지지지직─
기세는 갈수록 더욱 막강해지며 기어이 식장 전체가 어둠 속에 휘어 감기고 말았다.
강렬한 빛을 폭사하던 백색마탑주도, 당혹스러워하며 마검 카오스를 휘두르던 란도멜도, 성염의 불꽃을 사방에 흩뿌리던 아이헨바우어 브륀헬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나는, 불길함으로는 이루 형언할 수가 없는 이펙트 효과와 달리, 일련의 현상이 내게 유해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뭔 수호신의 등장이 이리 험악해. 얘도 알고 보면 악신 아니야?’
그런 의구심과는 별개로 어둠은 착실하게 공간을 점거하고, 나아가 어둠보다 더욱 짙은 무언가가 문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것이 개방되는 순간.
커다란, 수도 없이 많은 손바닥이 폭발적인 기세로 장내에 날아들었다.
쩌저정!
어찌나 격렬한 저항이 벌어졌는지, 백색의 빛과 적색의 불꽃이 어둠을 몰아내며 단절되었던 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어어!!”
“괴, 괴, 괴물이다!! 누가 좀 막아봐!!”
“검기가 박히지 않아!! 으아악!!”
식장은 이미 전쟁터나 다름없는 아비규환으로 가득 찼다.
몇이나 되는 생이 겁에 질려 삶을 갈구하는가.
얼마나 많은 자들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다가 처절한 비명만을 남긴 채 기척이 끊겨버리는가.
식장은 이미 혼란의 극치에 달했다.
무력한 시녀도, 충실한 기사도, 고절한 실력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째서,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가!!”
필사적으로 휘두르는 검이 거인의 손에 낚아 채이고, 빠르게 방출한 대마력은 손바닥에 닿는 즉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실되고 만다.
모든 인과를 무시하는 극도의 불합리함.
가공스러운 폭력의 앞에서는 백색마탑주조차도 전율하며 대적하기를 포기했다.
“어서 탈출을─”
스크롤을 찢으며 자리를 벗어나려던 순간, 백색마탑주의 동공이 급격히 떨렸다. 자신의 주변 위상을 감싼 마나가 일그러지며, 실현되려던 마법이 강제로 파훼되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안 돼.
단발마에도 미치지 못할 외마디 중얼거림과 함께 백색마탑주의 신형이 커다란 손바닥에 뒤덮였다.
“이놈들!! 처음부터 함정을 팠었구나!!”
아이헨바우어는 전신이 불길에 뒤덮인 채 막대한 열강장기를 쉼 없이 뿜어내었다.
일수 일수에 불의 신 마그니소스의 신성력이 가득히 담겨져 있었기에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던 손바닥을 상대로도 그 공격은 유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손바닥들의 무리는 도저히 한 사람의 힘으로 당해낼 수 있는 물량이 아니었다.
“혼자는 죽지 않겠다!! 하다못해 네놈만이라도 길동무로 삼아주마!!!”
고오오오오
노인네의 온 몸을 아우르는 신성력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손바닥들의 접근을 불허하는 불덩어리 그 자체가 되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도 없는 초고열의 화염이다.
네 걸음, 세 걸음.
간격이 좁혀질수록 지팡이의 내구도가 급속히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논하자면, 노인네는 너무나도 황당하게 자멸을 향해 가까워질 뿐이다.
‘이 정도의 내구도 감소 속도는 손쉽게 따라잡을 수 있지.’
두 걸음.
아이헨바우어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진 순간.
그의 눈가에 격렬한 동요가 일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좋은 걸 알려주지.’
녹아내림과 동시에 재생을 반복하는 육신을 바라보며, 나는 싱겁다는 어조로 말했다.
‘너 DPS(Damage Per Second, 초당 피해량) 딸림.’
마지막 한 걸음.
불과 단 한 걸음을 앞두고, 노익장의 신형이 무너진다.
온갖 패시브 스킬로 떡칠을 한 날 쓰러뜨리기에는 아이헨바우어의 준비가 미흡했던 것이다. 한 순간의 분노 따위에 무너지기에는 그간의 내 대비가 그리 미흡하지는 않았다.
어디 그 뿐이랴.
애초에 이건 공격을 위한 권능도 아니었다.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는 아이헨바우어의 자리 위로 손바닥들이 잠시 머무르던 이후, 마침내 내게도 그 커다란 족적을 드리운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손바닥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슥슥
부드럽게 지팡이 끝을 쓰다듬어주고는 암흑문의 저편으로 우르르 사라져버릴 뿐이었다.
쾅.
이윽고 문이 닫히며 어둠이 사라지자, 장내는 기묘한 침묵만이 이어졌다. 아까와 같은 불가사의한 초자연적인 침묵이 아닌,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기에 이어지는 침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대부분이 커다란 손바닥에 휘어 감기는 순간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까무러쳤는걸.
“….이게 대체, 무슨 권능이라고 하셨소?”
망연자실한 표정의 백색마탑주를 향해 레이널드가 멍청하니 대답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요.”
다이스 게임 안팎을 넘나들며 전설로 회자될 명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