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tem RAW novel - Chapter 336
00336 #14 – 잿더미 위의 꿈 =========================================================================
#14 – 잿더미 위의 꿈(20)
우스운 변명과 달리, 난쟁이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여기서 멈춰라.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다.」
「그럴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잖아?」
「큭…!」
착실하게 시간을 들이면 그녀를 설득할 논리를 발견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것은 멈출 수 없는 신앙의식, [분신사바]이기 때문이다.
드드득
가까스로 제동이 걸렸던 지팡이가, 서서히 [O]를 향해 끌려가기 시작한다.
죽음의 악신, 데스.
그의 부름을 받는 검은 손들이 지팡이를 붙들고 가혹한 진실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의식을 중단해라.’
「소용없어.」
‘정말로 그 답을 알아야만 하나? 알지 못해도 넌 행복했잖아.’
나름대로의 해답을 도출해내고, 그걸로 만족하고.
그대로.
원하는 형태의 결말을 간직한다.
거기에 고통은 필요 없다.
그저 작은 행복을, 막연한 상상과 함께 품에 안으면.
그것만으로도 리페일은 고통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녀가 그토록 원해왔던,
남동생의 죽음에 대한 속죄의 결실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리페일은, 그런 형태의 결말을 원치 않았다.
「지금 보인 모습만으로도, 답은 이미 정해졌잖아?」
‘그렇다면 더욱 확인할 필요는…!’
「쉿.」
리페일은 입가에 검지를 대며 작게 웃었다.
「그런 모습. 리페일적으로 점수 높지 않다고?」
‘…….’
「이건 내 선택이고, 내 결정이야. 누구도 방해할 수는 없어.」
그녀의 단호한 말에 난쟁이도 버티기를 포기하였다.
하얗게 질린 손아귀.
그것만 봐도 죽음의 신이 사역하는 검은 손들의 악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근력과 내공운용술로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난쟁이가 저렇게까지 버거워하다니.
분명 진심으로 버티고자 해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으리라.
예정된 답이 나왔고, 계시 페이즈는 끝나버렸다.
리페일은 원하던 답을 얻은 이후로 침묵했고.
나는 의외의 평화로운 침묵에 의아해졌다.
‘뭐지……?’
있을 리가 없다고, 가정조차 하지 않았던 상황.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너.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조금 놀라고, 조금 감동받은 것 같군.」
‘너도 모르는 시간대에, 너도 모르는 사이에 몇 백 번이나 죽음을 맞이했다고. 제대로 이해하고는 있는 건가?’
리페일은 침묵했다.
마치 답은 내가 알고 있지 않느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물론, 그 답을 내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일찍이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도 나는 물었다.
게이머의 가혹한 숙명을, 게이머와 함께 하는 자가 맞이하게 될 더욱 가혹한 최후를.
그녀는 능히 감당할 수 있겠노라 대답했다.
그리고도 실제로 몇 백 번의 죽음을 덤덤하게 맞이했다.
아니, 때로는 웃으면서.
자신이 그토록 맞이하던 최후를 찾았노라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만족해하며, 거듭 내 앞에서 죽었다.
‘그런가…’
그녀는 단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다.
무너진 쪽이 있다면.
그건 리페일이 아닌,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랬었는가.’
리페일은 게슴츠레 나를 흘겨보았다.
「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니, 설마, 회차 반복을!?’
「루드비히 엘드리고. 그녀는 그대를 파멸시킬 이야기라면 뭐든 아낌없이 알려주더군.」
악다물 이빨이 없다는 사실이 지금처럼 한탄스러울 때가 없었다.
루드비히.
그 개자식은 리페일의 인격이 망가지든 말든 개의치 않고, 치명적인 진실을 모조리 전해버린 모양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녀가 알려준 정보가 비단 [회차 반복] 정도로 그칠 리가 없다.
‘그 년이 한 말이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
「NPC와 게이머. 하이퍼 넷과 갤러리. 다이스 게임과 현실세계. 그밖에 더 알아야 할 게 있나?」
‘…없는데?’
아니 이건 무슨.
루드비히 녀석, 대체 어디까지 얘기를 해버린 거야.
이걸 듣고도 안 미치나 두고 보자, 하는 것처럼 온갖 비밀을 적나라하게 폭로해버린 것 같잖아.
「루드비히. 재밌는 사람이었지.」
리페일은 어째서인지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내가 놀라지 않으니까 도리어 자신이 놀랐지. 이런 멘탈이 있을 리가 없다나. 자신이 가상의 데이터라는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으냐고 소리치는 게 제법 귀여웠어.」
난 대체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졌었던 거냐.
-낭자아이 : 오우야;
-츳키 : 강철의 멘탈 ㅁㅊ;
-묵제 : 나 같으면 파란 약 먹고 다 잊게 해달라고 하겠다.
-어썸 : 리페일이 너 같은 새낀줄 아냐 ㅂㅅ아
-묵제 : 뭐 임마. 여장이나 하는 변태 주제에 시비거냐
이런 상황에서도 자연스레 키보드 배틀에 돌입하는 갤러리들은, 어떤 의미로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나라면 어떠했을까.
현실의 모든 것이 거짓이고 나는 고작 NPC에 불과한 존재였다는 얘기를 들을 때, 지금까지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너는, 정말로 강하구나.’
「그 여자가 멍청했을 뿐이야. 세계의 진실이 어떠하든, 무엇 하나 달라지는 건 없어. 다이스 게임은 여전히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니까.」
‘그런가.’
리페일의 늠름한 자태에 채팅방의 로그가 빗발치듯이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알파고 : 인격 프로그램에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알파고 : 데이터 갱신 중
-알파고 : 더 많은 충격요소가 필요합니다. 어서 알파고에게 충격적인 세상의 진실을 알려주십시오.
……얜 또 뭘 하고 있는 거야?
-낭자아이 : 사실 낭자아이는 여자야!
-쓰레기 : 덤으로 난 쓰레기지.
-라인하르트 : 우리의 의무는 화물을 옮기는 걸세.
-로드롤러 : 화물이 아니다! 로드롤러다!!!
-알파고 : 정보 수집을 완료했습니다.
그런 것들까지 수집하지 마!
반 정도가 뻥이잖아!
정보의 신뢰도가 50%라고!
-퐁삽 : 야. 뻥이 절반이나 섞여 있잖아
-알파고 : 그렇습니까?
-퐁삽 : 쓰레기가 쓰레기인거랑, 우리의 의무가 로드롤러를 옮기는 것만 빼고는 다 걸러들어
-알파고 : 알겠습니다.
도대체 뭘 어떻게 이해하면 저거에 납득할 수 있는 거냐.
하아.
알파고가 지닌 정보는 언제 한 번 제대로 검열해봐야겠다.
리페일이 롤 모델이니 본받는 건 이해한다고 치자.
암만 그래도 갤러리들한테도 너무 쉽게 휘둘리는 건 이상하잖아.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일까.’
리페일의 정신력이 조금이라도 약했다면, 지금쯤 이런 만담이나 듣고 어이없어 할 여력도 없었겠지.
고장?
그런 가벼운 표현으로는 끝나지 않을 자살소동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삶의 가치를 폄하하고, 성향이 뒤틀리며, 제멋대로 폭주하다가 죽는 게 보통이겠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수많은 NPC들이 게이머의 부주의함 내지는 강렬한 악의에 의해 미쳐버렸듯이 말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잊지 않을 생각이다. 나를 향한 그대의 진실한 사랑과 우정을.」
‘무슨 섭섭한 소리야? 꼭 마지막인 것처럼. 앞으로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거 아냐.’
「그런가.」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네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얼마나 많은데.’
「아쉽지만,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구나.」
리페일은 힘없이 웃어보였다.
어째서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거지?
이제 우리 사이에 걸림돌은 없을 텐데.
지금 그녀의 눈은,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것만 같은 불길함을 내비치고 있다.
그 대목에 이르러서야.
죽음에 민감한 나의 감각이 맹렬하게 경종을 울렸다.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어째서 방심하고 있었던 걸까.
‘난쟁이. 사실대로 말해라. 계시 페이즈의 패널티는 존재했던 거지?’
「물론이다.」
‘그건, 설마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수준이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눈에 띄는 단서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야 인내심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몸이니 견뎌냈었지. 허나 기껏해야 검주 수준에 불과한 저 여자의 인내심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견뎌내고 있더군.」
‘젠장! 대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 거냐.’
「알고 싶지 않을 텐데.」
그 말의 부질없음은 이미 난쟁이와 리페일이 몸소 보여주었다.
알면 반드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추구했던 것은, 비겁하게 진실을 외면하며 얻는 안식 따위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표면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안쪽은 다르지. 살점이 안에서부터 뜯겨지고, 근육이 망가지며, 혈관이 터지고,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느껴진다.」
‘……!!’
「간단히 말하자면, 마기(魔氣)와 유사한 사기(死氣)가 체내에 스며들며 신체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거다.」
마기중독.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일찍이 해저에서 란도멜이 몸소 보여주었다.
사기중독 또한 그와 다를 바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그 결과로 인해 마인이 되는지, 죽음에 이르는지가 있을 뿐.
결과는 틀림없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아무런 소리도 흔적도 없이, 자신의 몸이 내부로부터 망가져가는 감각.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오는 죽음.
그러한 고통에 맞서서, 그러한 공포에 맞서서.
리페일과 난쟁이는.
내색조차 하지 않고 버텨냈다.
아니, 난쟁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리페일은 그렇게까지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줄곧 매도 내지는 경멸, 쓴웃음이라 생각했던 표정.
그것들은 전부 고통을 참아내기 위한 시도였다.
견디기 벅찬 고통이 새어나온 모습이었다.
…
…
…
웃기지 마라.
뭐가 진상을 숨길 수 없다는 거냐.
너희야 말로, 제대로 나를 속여 왔던 거잖아!
‘제길, 이렇게 된 이상 치료버프를─’
「소용없다.」
‘네가 뭘 안다고 만류하는 거냐!’
난쟁이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다른 악신도 아닌 서열 2위의 죽음의 악신, 데스가 주도하는 의식이다. 그리 간단하게 패널티를 파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무덤덤한 어조.
거기에서 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체념을 읽었다.
‘뭐가 문제냐. 그런 거, 의식을 중단하면 되는 거잖아.’
「정말로 모르는 건가? 신생마왕군 최고의 참모보다 앞서나가는 순간이 다 오다니. 나도 마냥 헛살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대답해!!’
위대한 검주는 입가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말했다.
「이 의식. 중지하는 절차라면 이미 몇 번이고 개시했다. 한참 전부터 말이지. 」
‘헌데 어째서 끝나지 않는 거냐!’
「이유야 뻔하지. 악신이 이대로 의식이 멈추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뭐……!?’
「검사 리페일. 혹은 위대한 검주 난쟁이. 둘 중 한 명이 [금기]를 범하여 [패널티]를 받기 전까지. 혹은 악신이 만족할 때까지. 이 의식은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거다.」
그게 뭐야.
이미 네 입에선 썩은 피가 나올 정도라고.
그래서는, 절대로, 절대로…….
「의식을 멈추고자 한다면 둘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제야 리페일이 말했던 [분신사바]의 위험성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분신사바라는 건 어떻게 치러야하는 건가?] [모르고 꺼낸 말이었냐!?] [당연히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던전에서 모험가 여덟이 모여서 그 의식을 치르면 운이 좋아야 생존자가 한 명 발견될까 말까라는데, 어찌 의식을 치를 엄두가 나겠는가.]그녀는 헛된 소문 따위를 입에 담았던 게 아니다.
다이스 게임에서의 분신사바란.
죽음의 악신, 데스가 주도하는 신앙의식이란.
진정으로 죽음을 각오해야만 한다.
악신의 힘을 빌리는 의식 따위가 그 정도의 패널티도 지니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안녕이다.」
‘멈춰, 리페일!!’
「음?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죽기 전에 아직 못 다한 말이라도 있냐고 묻기에는,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째서 네가 죽겠다는 거냐!’
「누가 죽어야할지는 너무나도 자명한 상황이 아닌가. 위대한 검주와 이제 막 검주의 위에 접어들었을 뿐인 몸. 전력으로 보아도 죽음을 택해야 할 건 나임이 틀림없다.」
‘네겐 죽어야 할 이유가 없어!’
「수백 번이나 죽음을 경험했다더니, 벌써 잊어버렸는가? 내가 바라는 것은 지키기 위한 죽음이라고. 다행히도, 이토록 강해진 그대에게도 아직 나는 도움을 줄 수 있겠구나.」
‘닥쳐! 그런 건, 이제 질렸다!!’
동요를 금치 못하는 리페일.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그녀를 향하여, 나는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아무리 미련한 나일지라도, 수백 번이나 실수를 범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더 이상, 네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어째서… 내 신념을 무시한단 말인가.」
‘그런 건 널 좋아하기 때문인 게 당연하잖아! 이 멍청아!’
리페일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초월지경에 접어든 위대한 검의 주인을 대신해서, 나를 선택하겠다고?」
‘그렇다! 한 번 깨달은 실수는 절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그게 나, 개복치 게이머가 목숨을 걸고 반드시 지닌 신조이다!’
「그건… 제법 감동적이었다만.」
리페일은 난쟁이를 향해 물었다.
「정말로 죽어주실 겁니까?」
「아니.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니들 잘되는 꼴 보니까 배알이 뒤틀려서 못하겠어.」
「…….」
신파극이고 뭐고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 들었다.
휘오오.
루드비히의 바람결에 들리는 희미한 비명이, 마치 실시간으로 금이 가는 내 정신에서 새어나오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 작품 후기 ============================
[주사위 판정 결과(Ver 2.0)]
개복치 행운판정 D100굴림(성공확률 50%, 굴림값 보정치 0%)
ROLL : 78(실패)
결과 : 행운에 의한 상황돌파 없음
리페일 정신력판정 D100굴림(성공확률 60%, 굴림값 보정치 -10%)
ROLL : 24, 39, 18, 14, 35, 42 <- 보정치 적용 결과(성공, 성공, 성공, 대성공, 성공, 성공)
결과 : 6회 연속 정신붕괴 플래그(NPC와 게이머. 하이퍼 넷과 갤러리. 다이스 게임과 현실세계) 돌파. [칭호 : 강철의 멘탈술사] 습득
…
…
…
하나 쯤 걸리라고 여섯 번이나 굴렸는데, 이걸 다 돌파하다니!?
역시나 알파고 마마.
가히 압도적인 회피실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