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tem RAW novel - Chapter 496
00495 #20 – 킹메이커 =========================================================================
#20 – 킹메이커(15)
미로지구로 가는 길.
우리들은 수많은 몰락한 인생들의 사이를 거슬러 내려갔다.
만연한 패배감은 이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한계의 끝까지 내몰린 부랑자들.
그들에게 주어진 희망이란 아무것도 없이, 그저 다가올 파멸의 날만을 고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추잡한 도시의 끝에서 바라는 게 있다니. 댁들도 어지간히 마니악한 인간이로군.”
‘마니악한건 고용주지, 딱히 얘네들이 아니라고.’
“그건 당신도 마니악한 인간이라는 거겠지?”
묘한데서 예리하기는.
‘누가 도적 아니랄까봐 감이 살아있어.’
“당신은 거짓말을 못하는 타입의 인간이고.”
‘내가? 설마. 원한다면 나라 하나쯤은 가뿐이 속일 수 있는 몸이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적을 속여 왔지.’
“암만 그래봤자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겠고.”
‘…….’
정말로 쓸데없을 정도로 예리한 여자이다.
그렇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다.
그만큼 넬이 인간의 선함을 외면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이 도시라고 예전부터 이 모양이었던 건 아니야. 여러 가지 의미로 회생불가의 인간들이 모인 쓰레기통이기는 해도, 적어도 최후의 발버둥 정도는 하려는 놈들이 있었거든.”
‘지금은 왜 이렇게 변했지?’
“굳이 계기를 찾아보자면… 미로지구의 몬스터들의 출현빈도와 수준이 높아진 거겠지. 보물찾기로 값진 물건을 팔아넘길 기회도, 생존을 위해 벌여야 할 싸움의 수준도 올랐으니.”
그런가.
구 마왕군의 영향력이 강해졌다면 당연한 일이다.
부랑자들에게는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단 하나뿐인 삶을 영위할 수단이 사라졌다.
꿈도 희망도 무참히 짓밟힌 채로 폐인으로 전락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조금도 당연하지 않지만.
그런 게 당연하게 변하는 것이 구 마왕군이 만들어나가는, 파멸시켜가는 세상의 모습이다.
“그럼 저는 이쯤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부디 무운이 함께 하기를.”
주둔군의 [귀]는 골목지구의 말미에서 군례를 마치며 갈라섰다.
위험한 임무의 끝까지 함께 할 의리는 없다.
아무리 도시의 위험을 목격하더라도 말단 정보원이 취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충고 하나 해주지. 군부를 함부로 믿지 마라. 모시는 주인에 따라서는 악행에도 손을 거들 수 있는 자들이다.’
“풋. 그 정도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음?’
“알아. 저 녀석이 주둔군의 귀라는 것 정도는.”
‘…!’
자신의 목을 조일지도 모르는 사망플래그를 알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알면서도 그들을 이용하려 했던 건가?’
“좋은 녀석들이니까. 적어도 양심의 끝자락까지 썩어빠진 부패귀족들과는 달라. 적어도 이런 폐허도시에서까지 거래대상으로 남을 수 있는 인간은 대체로 그런 편이거든.”
‘무슨 의미지?’
“남의 면전에 칼을 박거나 등에 비수를 꽂지만 않아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라는 거야. 댁들도 제법 괜찮은 친구가 될 수 있는 편이고.”
‘…….’
고작 그 정도로 친구인가.
새삼 입맛이 씁쓸해졌다.
“당신 정도의 역량이라면 이 도시에서 벗어나서 한 몫 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터인데. 어째서 이곳에서의 삶에 집착하는 거지?”
“뿔만 귀여운 줄 알았더니 우리 악마 친구도 제법 예리한 소리를 할 줄 아네.”
“!”
“아하하, 깜짝 놀란 표정. 걱정 말라고. 말했잖아? 면상이나 등짝에 칼만 안 박으면 친구라고. 악마라고 딱히 댁들에게 나쁜 인상은 없어. 악마보다 더한 인간도 많이 봤거든.”
“질문에의 대답이 되지는 않네만.”
“굳이 말하자면, 뭐…”
넬의 입가에 새겨진 영업용 미소가 흐릿해졌다.
“이런 꼴이어도 일단은 내 고향이니까. 등지고 돌아설 만큼 매정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거겠지.”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강렬한 투지가 아른거렸다.
한없이 본심에 가까운 토로.
말을 내뱉고도 멋쩍었는지 이내 어물쩡넘기는 미소가 맺힌다.
‘숨길 필요는 없다. 조금도 부끄러운 마음이 아니니까.’
“초대면의 고용주들에게 어디까지 솔직해지게 만드는 건지, 원. 댁들 심리치료사야? 구슬리는 솜씨가 도적 뺨치게 장난 아니네.”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는 타입의 인간들은, 대체로 잘 맞물리는 편이니까. [전사]의 눈을 지닌 전사끼리 마음이 통하는 게 이상할 것도 없지.’
“…댁들하고는 정말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동감이다.’
오래 전, 아득한 과거에 이 여자에게서 같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지.
그때의 감동이 그녀에게도 전해졌을까.
적어도 내가 받은 구원이 절반만이라도 전해지기를 바랐다.
“잡담은 여기까지야. 이제부터는 언데드들의 감시망이 급격히 상승하는 구역이니까.”
미로지구의 언데드 밀도는 이전과 비해서 월등히 상승했다.
통상의 루트로는 저들의 이목을 피해 이동하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급도적은 길이 아닌 곳에서도 길을 개척해내는 몸. 패스파인더(Path Finder)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이행하고도 남는다.
“그우우어어..”
“그아..아..아..”
짓눌린 성대로 괴로운 신음을 토해내는 좀비들.
조우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꺼림칙한 소리가 들려와도 귀를 닫을 수 없다.
적을 피하기 위해서는 적의 모든 것을 감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바르게 직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피할 수 없다.
어설픈 외면은 충돌을 불러올 뿐이다.
넬의 단기속성 교육에서 습득한 중대한 교훈이다.
‘정지.’
넬의 수신호를 포착하자마자 파티원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벅 저벅
무너진 건물 사이를 지나치는 스켈레톤 군단병.
조직적인 움직임만 보아도 이전과는 명백히 달랐다.
구 마왕군의 영향력이 결코 적지 않다는 증거이다.
‘이동.’
정면으로 돌파를 시도했다면 수백 번도 더 결전을 치러야만 했을 길을 넘어섰다.
지금의 우리들이라면 저 정도의 하급 언데드들을 상대하는 건 딱히 어렵지도 않다.
허나 저들은 침입자의 말살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감지를 목적으로 하는 경비이다. 눈에 띄어서 득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충돌 없이 지나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이 앞으로는 저 괴물 녀석을 해치워야만 해.”
중갑옷에 클레이모어를 든 스켈레톤 나이트.
한 때, 몰락 직전의 폐허도시에서 언데드들의 내침으로부터 도시를 구하고자 죽음을 각오했을 기사의 말로이다.
또한 한 번은 나의 목숨을 앗아갔던 강적의 등장이기도 했다.
‘리페일. 란도멜.’
“내가 나서지.”
란도멜은 마검 카오스에 손을 얹고는 숨을 내쉬었다.
흐우우.
갈 곳 잃은 숨결이 정처 없이 퍼져나가기를 잠시.
퍼석.
스켈레톤 나이트의 두개골이 단숨에 가루로 화했다.
원념의 중추가 박살난 해골은 단번에 힘없이 쓰러졌다.
망령으로 화한 얼굴 없는 기사가 언뜻 [마안 : 죽음을 직시하는 눈]에 포착되었다.
혼령은 시체 위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작게 목례를 마치고는 어디론가 흐릿하게 사라졌다.
원념의 중추가 존재하는 한 억겁동안 언데드로 살아가야 할 운명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것에 고마워하는 것이리라.
-퐁삽 : 뭔가 심사가 복잡하네.
-쓰레기 : 예전에는 그렇게나 고전했던 강적이 격하의 존재가 되다니. 솔직하게 좋아하기만은 힘드네.
-낭자아이 : 현실에서만 12년. 다이스 게임에서는 수천 년이 지났으니까.
갤러리들의 말 대로였다.
그만큼 오랜 도전이었다.
언제까지고 이 정도의 적에게 정체되어서는 곤란하다.
“대단한 실력이군.”
“이 정도로 놀라기는 이르다.”
“뭐, 좋아. 근방의 언데드들은 모조리 몰려들기 시작할 테니 서두르지.”
언데드 한 구가 소멸한 이상, 적이 침입했음이 네크로멘서에게 알려질 것이다.
하지만 다른 언데드들의 이목에 포착되기도 전에 은신에 성공한다면 잠입은 속행 가능하다.
일생을 디스트무라에서 보내온 상급도적 넬의 경험과 파티원들의 고강한 전투력이 있다면 그 정도는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히트 앤 런.
히트맨 식 전진은 언데드를 상대로 제법 상성이 좋았다.
원념의 중추가 박살나지 않는 한 반 영구적인 불사에 가까운 몸을 지닌 대신, 생물체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오감이 극도로 감퇴했다.
감각적인 날카로움을 발휘해야 할 색적이 힘들다는 거다.
이를 대체하기 위한 방법이 물량공세지만 애석하게도 현장특화형 전문도적의 전문지식을 넘어서기에는 부족했다.
헤비 좀비(Heavy Zombie).
프레쉬 매스(Flesh Mass).
리틀 어보미네이터(Little Abominator).
전진을 거듭할수록 조우하는 상급 언데드도 다양해졌다.
그러나 파티원들의 경험치는 보다 압도적이다.
이 정도의 적을 상대로 일수에 결판을 내는 건 어렵지 않다.
란도멜의 쾌검.
리페일의 암검.
셀레나의 탄지공.
켄이치의 파괴마법.
일순간에 적을 소멸시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당신들… 정말로 대단하네. 특급용병이라는 건 전부 그래?”
“설마. 세상 용병들이 전부 우리들과 같았다면 나라 몇 개는 진즉에 전복되었을 거다.”
“고수 중에서도 고수라. 훗. 대단한 친구들을 사귀게 되어서 영광인걸.”
미로지구의 말미.
우리들은 마지막 은신처에서 정비시간을 가졌다.
이 앞으로는 단 한 순간도 멈추지 못하고 심층지구의 중추, 데스 필드의 중심부까지 정면돌파를 해야 한다.
언데드들의 감시가 아닌 네크로멘서의 범위감지범위 내.
이목을 속이는 것에도 마침내 한계가 왔다는 거다.
‘도움은 여기까지 만으로도 충분하다. 약속한 보수는 지금이라도 지불해주지.’
“뭐? 댁들은 어쩌려고.”
‘여기서부터는 우리들의 몫이다. 교전을 최소화하며 힘 낭비를 줄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이야.’
넬은 미간을 찌푸렸다.
“섭섭하게 왜이러실까. 친구들의 실력이 뛰어난 건 알겠지만 난전 중에 중심부로 향하는 방향은 잡을 수 있고?”
‘충분하다. 도적의 균형감각과 맵퍼의 부동심은 갖췄으니까.’
“그래도 안 돼.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수를 위해서 죽을 각오조차도 감내했던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발언이다.
“내가 사랑했던 도시이고. 내가 사랑했던 나라의 일이야. 어떤 형태로 결판이 나더라도 거기에 내가 관여되어 있지 않다면 평생토록 납득할 수 없어.”
‘죽을 수도 있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일생을 후회만 거듭하며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어?”
알다마다.
게이머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살아가는 이유를 잃어버리고 원하던 풍경은 결코 볼 수 없는 삶. 지독한 허무 속에서 영혼마저 썩어 문드러지는 감각. 그런 거라면 질리도록 겪어보았다.’
“……!”
‘어둠은 깊고 절망은 헤아릴 수 없다. 되돌리는 일 따위,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가능할 리도 없지. 한 번 일어난 비극은 결코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으니까.’
나조차도 한 번은 모든 희망을 내려놓은 시절이 있었다.
리페일과의 도전이.
일왕자와의 도전이.
모든 도전이 무의미함을 깨달았을 때.
사실상 세계멸망 플래그의 공략을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우스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자학적인 플레이에 전념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웃음에도 진실성은 존재한다.
가식적인 웃음 따위로는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지 못한다.
타인의 실수를, 사회의 통념에 반하는.
소위 말하는 ‘현명하지 못함’을 비웃는 웃음도 있다.
냉소, 조소, 비소, 독소.
그러한 방어적인 웃음은 짓는 사람과 보는 사람을 모두 병들게 한다.
아마 그랬기 때문이리라.
나의 게이머로서의 인지도가 최하위권에 머물렀던 이유는.
초심을 잃어버리고 몰락해버린 웃음에서 갤러리들은 내 방송을 계속해서 보아올 이유를 잃어버린 것이리라.
‘그래도 너와 동행하고 싶지는 않다. 이 앞으로 나아간다면 틀림없이 구 마왕군 사천왕과 조우한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참혹한 광경과 마주할 수도 있다.’
“…….”
‘너는, 지옥을 볼 자신이 있는가?’
쇠락한 도시의 주민.
상급도적 넬.
그녀는 한 치의 주저함조차도 없이 즉답했다.
“물론. 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들은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심층지구로의 진입을 개시하였다.
지옥보다 더욱 지옥 같은 공간.
구 마왕군의 아성으로 향하는 도전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설정1> 구 마왕군의 영역은 지옥보다도 더욱 지옥스럽습니다.
설정2> 현실파트의 대부분의 영역 또한 마찬가지로 지옥보다 더한 생지옥입니다.